D-15 고양이가 고양이인 이유
기는 나랑 헤어지고 나서 계속 이 공터에서 살았나? 어제 여기 있길래 혹시나 해서 다시 와봤더니 오늘도 여기에 있다. 내 눈을 피해 숨어 있는데 어디 있는지 훤히 보인다. 숨었어도 날 감시하는 것 마냥 슬쩍슬쩍 보고 있으니 들통 나는 게 당연하지. 후훗. 조그만 새가 몸을 움츠리며 꼭꼭 숨어 있는 모습이 왜 이렇게 귀엽냐. 나랑 같이 지낼 땐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었는데.
바람이 좀 차긴 하지만 일광욕을 하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다. 오늘도 어제처럼 앉아만 있다가 가야 하나? 기를 설득하는 것도 내 일이지만 기를 수천파에게 떼 놓는 것도 내 일이니까 이러고 있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지나가는 귀신하고 얘기도 해보고 너무 오래 있다 싶은 녀석을 성불시키기도 하고, 아직 목덜미의 붉은 줄이 사라지지 않은 유령과 농담 따먹기도 하고, …성에서 가져온 책을 읽기도 하고 이런저런 거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마디로 전혀 심심하지 않다.
어제 성에 돌아간 후 진종일 서고에 있었다. 천, 주, 자의 도움을 받아 봉황족의 계보가 나와 있는 책을 찾았는데 그 흔적은커녕 봉황족과 관련된 자료 자체가 없었다. 봉황족이 황룡의 수호 바로 아래에 있는 허영심 많은 종족이라 자기네 정보는 제대로 은닉해 온 모양이다. 그래서 성수계 전체의 역사를 여의주에 기록해 오는 백룡이라면 봉황족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 아빠를 통해 밤늦은 시간에 백룡 강(剛)과 만났다. 정말, 아주 유감스럽게도 백룡이 가지고 있는 역사는 그저 평범한 시간의 흐름이라 내가 알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기는 알고 있을까? 설마. 자기 종족에게서 버림받았는데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지. 자기가 어떤 성수인 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걸. 에, 그러고 보니까 엄마가 이런 얘기를 해 준 적이 있었지. 현무의 이름을 갖기 전이라 ‘지희’라고 부르면서.
“지희야. 이런 생각해볼래? 지희는 왜 지희일까?”
“응? 아빠랑 엄마가 그렇게 부르고 있잖아.”
“그래도 지희가 아니라 다르게 부르면 안돼?”
“지희라고 정했으면 지희잖아.”
“그러면 하늘이 하늘이고, 산이 산이고, 바다가 바다고, 사과가 사과고, 고양이가 고양이이고, 물이 물인 것도 다?”
“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불러야지. 응…… 희금이 희금인 것도 그렇잖아.”
“다르게 부르면 안 되는 것들이 많구나.”
“왜?”
“왜라니?”
“왜 그런 걸 생각해?”
“한 번 생각해 봐. 왜 정해진 대로 불러야 할까 라고. 세상엔 원래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들도 있어. 뭔가를 숨기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 아니면 뭔가를 꾸미고 있을 때는 스스로를 다르게 부르고, 그를 깔볼 때, 멀리하고 싶을 때는 그를 다르게 부르지. 그렇다면 정해진 대로 부르고, 불리는 건 그를 존중한다는 뜻이 아닐까?”
“흐응. 어렵다.”
“엄마 말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나중에 잘 생각해 봐.”
“응.”
뭔가를 숨기고 싶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 아니면 뭔가를 꾸미고 있을 때는 스스로를 다르게 부르고, 그를 깔볼 때, 멀리하고 싶을 때는 그를 다르게 부른다. 그렇다면 정해진 대로 부르고, 불리는 건 그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이 말이 갑자기 떠오르는 건 왜일까? 엄마가 땅꼬맹이 시절의 나에게 일찌감치 철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나 스스로 생각하게 하면서 후계자 수업을 자연스럽게 했었는데 이도 그 중 일부다. 왜 떠오르는지 물어볼 것도 없다. 당연히 기 때문이다.
기는 빙황으로 태어났지만 ‘황’의 여아가 아니라 ‘봉’의 남아로 태어나는 바람에 봉황족 내에서 빙황이라 불리지 못했다고 한다. 여성숭상정신이 뿌리 박혀있는 봉황족에게 빙황은 신성 그 자체다. 그런데 빙황이 남아라니, 역대 없었던 일이다. 그들은 그 이단아를 철저하게 배격했다. 지금도, 왕에게서 일찍이 등 돌린 봉황족은 기를 자신들과 동족이라 절대 여기지 않고 있다. 부끄러워, 수치스러워 하고 있는 것이다.
“기……. 지금 내 뒤에 있지? 그냥, 그냥 들어.”
내 얘길 귀담아 들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귓등으로 스쳐버리더라도 조금은 기의 귀에 닿았으면 한다.
“한번은 엄마가 나한테 고양이가 왜 고양인지 말해준 적이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그건 고양이를 존중하기 때문이래. …난, 기가 빙황이라 생각해. 남성이라도 빙황으로 태어났으면 빙황인 거야. 어엿한 성수고. ……. 그러니까, 난 널 해칠 생각이 없어. 내 검은 절대로 네 목을 치지 않아.”
뜬금없이 말도 안 되는 말들을 주저리 풀어놔서 당황했을까?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을까? 다 괜찮다. 그냥 마지막 말만은 들었길 바란다. 휴. 혼자 벤치에 앉아서 궁시렁 거리고 있으니까 내 자신이 불쌍해 보인다. 이제 그만 돌아가야겠다.
“너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봐.”
맙소사. 가장 기피하고 싶은 친구로 찍힌 유린양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
“이제 보여?”
유린의 이마에 있는 게 혹시 성수의 인장? 이제 보이냐니, 그러면 그동안 죽 인장이 이마에 찍혀 있었던… 이름을 받은 제자란 거야?
“성수 대 제자로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한때는 희금. 지금은 채강입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다. 유린이 성수의 제자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뒤로 젖히더라도 이름이… 그 이름이…… 희금, 채강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희금이라면 엄마의 제자였던 희금? 아니야. 그녀 나이가 몇인데. 좀 닮은 것 같지만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고. 게다가 채강에서 그 ‘채’는 황룡 채라는 거잖아. 결과만 따지자면 지금은 황룡의 제자라는 이야기겠지.
“제가 왜 이런 모습에 이런 이름을 가졌는지 궁금하신가요?”
“있지…….”
“현무께서 알고 계시는 ‘희금’. 제가 맞습니다. 또, 눈치 채셨겠지만, 채강이란 이름을 주신 분은 황룡이십니다.”
이게 무슨 수작이야? 누굴 지금 갖고 노나. …………. 설마 그런 건가? 좀 말도 안 돼는 생각이지만 그럴 수도 있다. 그래서 황룡이 기를 보호하고 있는 거라면 역시 맞아 떨어진다.
“채강이랬지? 황룡은 어디 계시지? 날 왕에게 데려다 줘. 지금 당장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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