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17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이유

★은하수★ 2008. 3. 25. 16:47

D-17 죽는 게 두렵지 않은 이유

 

얼마 안 되는 격한 운동을 하고 이 밤까지 꼼짝없이 침대 위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주술을 이요해서 좀 사방팔방 날아다니고 검 몇 번 휘두른 게 고작인데 이 저주받은 몸뚱아리는 만 하루가 지났는데도 정상적으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밥은 자가 먹여줘서 겨우 먹었다. 볼일 보러 가는 것도 부축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고생고생 하다가 이제 좀 살 것 같다. 혼자 천천히 걸어 다닐 수 있는 정도가 되니까 살아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감사함을 느낀다.

성 안은 정말 고요하다. 주와 자는 지금 (내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중이라면) 각자 방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제 2성이 해무사를 중심으로 산에 숨겨져 있다지만 공간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산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성에서 들을 수 없다. 그저 성의 고요함 속에서 조용히 명상을 하는 것이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성 안에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다.

24시간 넘게 침대 위에만 있는 건 내취미가 못 된다. 서문으로 나가면 일반 등산로와 가까운 숲으로 나갈 수 있다. 지금의 나는 감히 어느 누가 함부로 해코지 할 수 없는(스스로 지킬 수 있는) 몸이기 때문에 혼자 나가도 크게 문제될 건 없을 거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수호령들에게 전령을 보내고 나서 유유히 서문으로 나갔다.

“화상첨로.”

나무 사이로 내리쬐는 옅은 달빛은 아주 어두운 방 안에서 손바닥으로 살짝 가린 손전등으로 앞을 비추는 것 같이 가늘고 약했다. 만월이 아니라서 빛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다니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았으면 한다.

산이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데 적격이다. 산 고유의 산 향기와 말로 잘 표현할 수 없는 포근함이 산 위와 그 아래에 살고 있는 것들에게 안락함을 느끼게 해준다. 정신을 다잡을 수 있게 해주며 마음을 고르고 바르게 정리할 수 있게 해준다. 산이 높고 웅장하든 낮고 앙증맞은 변함없이 가지고 있는 산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야, 빨리 묻어.”

저쪽에서 수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밤에 사람이 산에 오는 경우는 범죄와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아주, 매우 높다. 요즘에 야간 산악회라는 것이 있다고 하지만 산악회가 산에 와서 ‘묻어’라는 말을 감히 쓰지 않을 것이다.

“어쩌다가 죽어 가지고는…….”

“잔말 말고 빨리 해. 형님이 아시면 큰일 난다고.”

대화가 너무 심상치 않다. 걸어서 가면 발소리가 들려서 들킬 테니 주술을 써서 공중부양을 한 채 가까이 가야겠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은신술도 같이 써야지.

대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니 언뜻 사람으로 보이는 형상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게 두 눈에 잡힌다. 사람은 두 명이고 각각 삽을 들고 구덩이를 메우는 중이다. 그들이 지금 묻고 있는 건 사람일게 뻔하다. 혹시 아까부터 계속 구덩이 앞에 서서 두 사람을 응시하고 있는 귀신이 시신의 혼일까? 호기심에 구덩이 가까이에 가서 구덩이 속을 내려다 봤다. 이제 눈이 어둠에 익숙해져서 웬만큼 조금씩 보이지만 구덩이 속의 시신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 저 귀신과 이 시신이 닮았는지 알 수가 없다. 아주 유감이다.

귀신은 20대 중반의 건장한 청년의 모습이다. 귀신도 지금 내 모습은 볼 수 없으니까 바로 앞까지 가서 표정을 봐야겠다. 표정을 보면 시신의 혼인지 아닌지 대충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아주 분한 표정이잖아. 자기 시신을 보고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겠지만 아주 가까운 사이의 시신을 보고 짓는 표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옷차림을 보아하니 시신의 혼이 맞다. 기분이 아주 많이 애매하고 속사정에 따라 아주 분할 거다.

“야, 가자.”

삽질을 마친 두 사람은 주변을 몇 번 두리번거리고 나서 부산한 걸음으로 산을 내려간다.

[뿌득]

“이를 약하게 가네요. 칼 찔려 죽은 거에 비하면.”

은신술을 풀고 땅 위로 차분히 내려왔다.

“누, 누구냐?”

놀랄 만하지. 평범하게 생겨 먹은 여자애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까. 그래도 지금 자신이 귀신이라는 걸 감안한다면 놀라는 정도가 약간 심하지 않나? 뭐, 죽은 지 얼마 안됐으니까 아직은 살아 있을 적 습관이 진하게 배어 있겠지.

“상식적으로 죽은 영혼 앞에 나타날 만한 이가 누가 있겠어요?”

“저승사자? 뭐야…… 너 같은 여자 애가?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험상궂은 인상의 아저씨가 아니라?”

아주 비꼬는 투로 말하는데 생전에 좀 놀았나 보다. 놀란 건 벌써 진정돼 보인다. 재기 능력이 상당히 탁월하다고 말할 수밖에.

“굳이 말하자면 저승사자틱 한 거죠. 당신을 성불시킬 거니깐.”

표정이 참 다양한 사람이네…… 아니, 귀신이네. 분함이 가득한 표정에서 놀란 표정, 곧바로 아니꼽다는 듯한 표정 그리고 슬픈 표정. 따라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리거나 화를 내지 않는 걸 보면 순순히 성불할 것 같은데 어딘가 미련이 남는 곳이 있나 보다. 뭐, 새삼스레…… 미련 없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다고 저 표정에 내가 동요하는 거야? 지극히 당연한 일이잖아.

“너 말고도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겠지?”

아니, 뜬금없이 이건 또 뭐야? 그런 걸 물어봐서… 그냥 대답해 주자. 궁금하다는데 어쩌겠어.

“많다면 많을 수도 있고, 적다면 적을 수도 있는데 저 혼자는 아니에요.”

차마 귀신을 성불하는 이들이 사람이 아니라 성수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다. 곧 영토로 갈 혼에게 성수가 어쩌고 말해 줘 봤자 양쪽 다 득 될게 없기 때문이다.

“난 이미 죽었으니까 분해도 어쩔 수 없지만……. 하나만 부탁해도 될까? 별 거 아니야. 그냥 네 일이랑 관련된 거야.”

그렇게 슬픔을 숨기고 있는 강한 표정을 짓고 말하면 안 들어줄 수가 없잖아. 가뜩이나 내가 남의 푸탁에 약한 성격인데.

“들어보고 결정하죠.”

“정말 별 거 아니야. 내 남동생이 위암 말기로 오늘 내일 하고 있어. 가족이라곤 나 하나였던 아이야. 뒤를 봐 줄 사람이 없어. 네가 나 대신에 그 아이의 마지막을 지켜봐주지 않을래? 그리고 그… 성불이란 것 까지.”

“죄송하지만 전 사람의 수명을 볼 수 없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 옆에 계속 있을 수 없다는 거에요.”

성수에게 여러 가지 능력이 있고 한 건 다 좋은데 성수가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죽는 날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의 수명도 상대방의 수명도 알 지 못한다. 수명이란 어디까지나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천수’이므로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죽은 지 한참된 귀신이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도 성수가 미리미리 귀신을 성불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수가 그저 지금 눈에 보이는 귀신을 성불하고 잡아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문안 정도는 가끔 갈 수 있겠죠.”

“부탁할게.”

고개 숙여서 인사할 것 까진 없는데 말이지. 뭐, 냅두자. 얼른 성불이나 하자.

귀신의 가슴에 손을 가까이 가져간 뒤에 바로 영토로 보냈다. 귀신 중에 한 90% 정도가 그 귀신처럼 성불하기 매우 쉬운 평이한 귀신이다. 성수들이 좀 골치 썩는 귀신이 나머지 10%의 독특하거나 강하거나 속수무책인 귀신이다. 그런데 죽고 바로 성불되는 귀신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한다. 확실하게 미련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금 그 귀신이 운 좋은 귀신이라고 해도 될 거다.

“하. 이런. 중요한 걸 안 물어봤네.”

동생이 어느 병원 몇 호실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약속은 어이없게 물 건너갔군. 어쩔 수 없지. 어차피 나도 멀쩡한 몸이 아니라 거기에 잘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되니까.

“아무리 산이 좋다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 산에 밤중에 오시다니 실망입니다. 호원 진.”

실은 성 안에 있을 때 호원의 기를 읽을 수 있었다. 나보고 알아차리라고 일부러 열심히 기를 흘려보낸 것이었다. 그래도 진자 오랜만에 만나는 거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호원은, 나이는 지금 황룡과 맞먹을 만큼 많고, 신분은 낮은 편이지만 ‘고품의 자태’를 갖고 있어서 다른 성수들이 함부로 못하는, 내게 할아버지뻘 되는 성수다. 내가 엄마랑 같이 살적엔(그러니까 내가 철없는 꼬마였을 적에) 호원이 가끔 찾아와서 날 많이 귀여워해줬었다. 진자 할아버지처럼 말이다.

“그게 마중나온 아이가 할 말이더냐.”

호원은 문처럼 령이기 때문에 소수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온통 흰 털로 덮여 있는 침팬지. 본체는 이보다 10배 정도 되니까 지금이 소수형이 맞긴 한데 ‘소’수형이라 하기엔 좀 덩치가 크다. 뭐, 덩치가 큰 ‘소’수형이지만 몸이 아주 날렵하니까 됐지.

“정문인 해무사로 들어오지 않으시니까 하는 말이에요.”

“녀석 말 하는 꼴 하고는 네 어미랑 꼭 닮았구나. 누가 현무 아니랄까봐 하고 싶은 말 안 가리고 다 하는군.”

음. 음. 저 말 나올 줄 알았다. 엄마도 호원에게 끊임없이 들었던 말이다. 아무래도 상대불문하고 속마음 거르지 않고 다 말하는 건 유전인가 보다. 엄마 이전의 현무인 표님도 그랬다는데.(예- 전에 호원이 가르쳐 준 사실이다.)

“저 살아있나 보러 오신 거에요?”

“오냐. 하루라도 빨리 얼굴 한 번 봐두려고 지금 왔다.”

“네. 어서 오세요.”

아무튼 호원은 못 이기겠다. 아무리 현무가 막말의 대가고 말발 일품이라 해도 노장의 말은 이길 수 없다. ‘이 나이 어린 것이!’라는 포스가 말에 섞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일 것이다.

성으로 들어와서 응접실에서 호원과 마주보며 앉았다. 자에게 간단한 다과를 내오라고 미리 일러뒀기 때문에 호원이 차를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이 노장은 차가 앞에 없으면 절대 앉은 채 이야길 하지 않아서(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아서) 시간을 줄이고 싶으면 얼른 차를 내와야 한다. 좋게 말하면 호원만의 규칙이다.

“계승식이 끝나자마자 정신머리 없는 것들이 찬물 뿌렸다고 들었다. 그래, 빙황을 다시 본 소감이 어떻더냐.”

다시 봤다고 해도 한 달, 일 년이 아니라 겨우 삼일 만인걸 뭐 다른 감이 있을라고. 호원의 말뜻을 모르는 건 아니다. 기억이 없을 때와 봉인이 풀린 후의 차이를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거 또 가슴이 울렁거리네.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는데 꼭 가슴 한켠에서 켕긴단 말이야. 아주 잠깐 알고 지낸 것 가지고 정들어 버리다니 나도 참 한심스럽다. 이렇게 잔정이 쓸데없이 많아서 앞으로 어떡할지 걱정이다.

“보아하니 복잡한가 보구나. 그러면 바꿔서 말하마. 다음 대 왕으로서 자질이 있어 보이더냐?”

“제가 아무리 왕 바로 아래의 현무라지만 왕의 자질을 운운하기엔 턱 없이 어린 아니지 않습니까.”

기가 남아로 태어난 빙황으로 이단아지만 빙황인 이상 다음 대 성수들의 왕이 되어야 한다. 원래 빙황이 태어나면 그녀가 일정 나이가 됐을 때 황룡이 옥좌를 물려줘야 한다. 왕위는 종신제가 아니니까 황룡이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지금 황룡은 미쳤다. 예전에 미쳐서 지금은 도저히 왕이라고 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기는 이단아고, 다음 대 황룡은 태어나지 않았다. 성수계의 전쟁은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이단아라고 해도 빙황은 왕이 될 수 있는 성수야. 다음 대 황룡이 없는 이상 그가 왕이 되야 하는데 그 자신이 자각을 못해서야 원.”

우리 쪽 개천파는 황룡을 강제 폐위하고 기를 새 왕으로 추대하자는 입장이고 백호의 수천파는 기가 300살이 못 되었으니 그 때까지 황룡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수천파의 속뜻은 그게 아니다. 이단아를 절대 왕으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 중에서 새 왕, 다른 성수를 왕으로 추대할 생각인 것이다. 이렇게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 바보 같은 기는, 아니 완전 바보인 기는 수천파 쪽에서 싸우고 있다. 이단아로 태어난 탓에 같은 봉황족 내에서마저 배척당해 빙황이 어떤 존재인지 배우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이단아라고 스스로 족쇄를 차고 있어서 더 곤란하다.

“어제 ‘이단아’라고 부르면서 떠봤더니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더라고요.”

“쯧쯧. 이단아면 뭐 어때서. 건강하게 이 세상 살면 그만인걸. 그런 정신머리니 수천파한테 휘둘리기나 하지.”

에긍, 호원도 은근히 말이 걸 하단 말이지. 아직 아니라고 해도 왕으로 추대하려는 성수에게 ‘정신머리’라는 표현을 쓸 줄이야. 그런 망발은 현무 담당으로 알고 있는데. 뭐, 어때. 노장께서 맘껏 떠드시겠다는 데 햇병아리가 토 달아서 어디다 써.

“호원, 아무리 그래도 빙황에게 접근하지 마세요.”

“무슨 말이냐? 빙황이 지상계에 있을 때 접촉하는 게 가장 안전하거늘.”

“호원이 노부 격의 성수긴 해도 신분이 한참 낮다는 걸 자각하고 계셔야 해요. 원래 빙황인 귀신 성불 임무를 맡는다는 것 자체가 웃긴 일이고, 지상계에 있다는 사실은 전대미문이지요. 그건 원래 빙황을 알현할 수 있는 자가 극도로 제한되어 있다는 거잖아요. 빙황을 왕으로 모시려면 예의를 지켜야죠. 뭐, 이건 비상시니까 뒤로 무를 수 있다 쳐도 지금 빙황의 주변은 탄탄하면서 위험해요. 미쳤어도 여전히 그 힘을 발휘하고 있는 황룡이 아주 가까이 붙어 있어서 빙황에게 먼저 함부로 접근했다간 거사 치를 거에요.”

호원은 내 말을 듣고 수긍하는 눈치다. 황룡이 주책없이 지상계에 있는 건 이미 오래된 일이라 모든 성수들이 알고 있다. 그런데 그가 기를 확실하게 서포트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이가 드물 거다. 아마 수천파 내에서도 그럴 거다. 아무래도 미친 왕과 기 사이에 비밀 약속이 오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네가 죽기 전에 이 싸움이 끝날 수 있을 지 걱정이구나.”

물론 죽기 전에 평화로운 성수계를 보면 좋겠지만 그건 좀 힘들 것 같다. 점점 싸움이 격해지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라 내가 죽기 전에 새 왕이 앉을 거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고 있지 않다.

“그보다 저는 다음 현무가 걱정이에요. 제가 역사상 가장 짧은 현무가 될 거잖아요.”

“현무의 자질을 가진 령이 언제 어디서 태어날 지 아무도 알 수 없지 않느냐. 어디 보자…… 현무검이 새 현무를 찾을 때 걸린 시간 중 가장 길었던 게 500년 정도였다는데 아마 성수 중에서 최장 시간이었을 게다.”

아무튼 대가 끊기면 후임자를 데려오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가장 현실적인 예로 청조는 약 240년 째, 공작과 흑호는 약 370년 째 자리가 비어있다. 다른 성수도 100년 넘게 빈자리가 몇 있는데 일상적인 일이다. 그런데 나 같은 고위층 성수가 오랫동안 자리가 비어 있으면 난감한 게 당연하다. 현무가 가장 자주, 오랫동안 자리가 비는 성수라는데 이번에도 그러게 생겼다.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더 살거라. 자룡의 저주만큼 강하고 독한 저주는 없다만 현무의 독기도 만만찮으니 한 번 버텨 보거라.”

아니, 무슨 그렇게 부담되는 말씀을.

“죽을 때가 되면 죽어야죠. 다만 미친 왕을 제 손으로 처형하지 못할 걸 생각하니 좀 분할 뿐이에요.”

성수처형관으로서의 일을 못해보고 죽는 건 역시 울컥할 만큼 분하다.

“그래서 더 살아보라는 거다.”

맘 같아서는 나도 호원처럼 장수하면서 노장소리 들으며 살고 싶단 말이지. 왜 내가 저주의 대상이 되었는지 한탄하고 싶지만 그건 옛날에 지나간 일이니까 신경 쓰지 않을란다. 그저 시간 가는대로 내 일 하며 살다가 죽을 때만큼은 조용히 편안하게 죽고 싶다. 싸움에 져서 죽은 꼴은 싫다.

“음…… 성수는 영토에 못가는 령이라는 게 좀 아깝네요. 윤회의 기회가 없으니까.”

호원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 죽음에 임박한 건 다 늙은 호원도 마찬가지니까 남의 얘기로 들리지 않을 거다.

“그래도 윤회보다 아주 사라지는 게 나을지도 몰라요. 같은 삶을 살면서 같은 실수를 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럴 듯하구나.”

살아 있는 시점에 ‘죽고 나서’를 생각하는 건 무의미하다. 그저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느냐 고통을 느끼며 죽느냐가 살아 있는 자의 입장에서 중요한 한가지일 뿐이다. 남겨진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그런데 아까 그 귀신이 제가 약속 못 지킨 것에 대해서 원망하면 어쩌죠?”

딴에 걱정돼서 말하는 건데 그런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은 뭡니까?

“뭐… 아직 어리니까 모를 수도 있겠지.”

그 어리다는 건 절 이르시는 것 같은데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죠. 전 ‘약속’에 아주 예민하단 말입니다.

“평범한 혼은 말이야 영토로 넘어갈 때, 환생할 때 각각 전 기억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별로 걱정할 거 없단다. 지금이면 벌써 네 기억을 싹 잊었을 게다.”

호오. 그런 편리한 시스템이란 말이야? 하긴,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 전생을 모르는 거겠지. 덕분에 최면술사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돈 벌어 살아 먹고 있는 거고. 흠. 그래도 전생에 연이 있던 사람들이 기억도 없으면서 그 연을 계속 유지하는 게 신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