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16 전쟁에서 죽는 이유

★은하수★ 2008. 4. 1. 17:27
 

D-16 전쟁에서 죽는 이유


호원과 가지가지를 얘기하느라 늦게 잤는데도 그 전에 너무 많이 자서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었다. 성수계가 평화기일 때면 황룡의 본성에 가서 조회에 참여하겠지만 분란기이고 왕이 인간계에 있어서 성수계의 대부분의 조직 체계가 무용지물이 되었다. 덕분에 아침이 바쁘지 않지만 역시 이런 분란기의 아침은 씁쓸하다.

“읍.”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꼭 평화기랑 분란기에 모두 살아본 성수처럼. ……그렇구나. 이건 아빠랑 엄마가 아침이면 가끔씩 하던 말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나 같은 꼬맹이가 이런 주책없는 말을 할 수 있는 건 죄다 아빠, 엄마의 영향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현무 정님. 청룡 지님께서 조반을 같이 들겠다며 오셨습니다.”

“응, 들어오시라고 해.”

아빠의 기운이 스멀스멀 느껴지는 게 뭔가 했더니 내 기억 속에서의 아빠가 아니라 진짜로 아빠가 온 거였구나. 아침 밥 같이 먹자고 딸이 있는 성에 찾아올 줄이야, 아빠답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아닌데 아침부터 고생이다. 이익. 대체 언제 일어나서 온 거야? 뭐 15년 인생 쭉 생각해 본 거지만 아빠의 사고 구조를 좀 알고 싶다. 그래도 백호와 쌍벽을 이루는 암렵자 청룡인데 생각하는 건 왜 이렇게 대책 없는 꼬마 애인 거냐고.

평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섰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중에 달콤한 꿀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자가 지나간 자리에선 늘 꿀 냄새가 난다. 수호령 중에는 주처럼 분위기가 강한 수호령도 있고 자처럼 향기가 있는 수호령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이다. 꼭 ‘나 여기 있었어요’를 일부러 알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뭐 그래도 딱딱할 것만 같은 수호령에게 유일하다 싶은 개성이니까 없는 것 보다는 낫다.

“어제 딸내미가 침대 위에서 구르고만 있어서 많이 걱정했겠다.”

식탁엔 조식이 벌써 차려져 있고 아빤 자리 잡고 앉아있다. 이번에도 벌떡 일어나서 달려오겠지. 역시.

“정아. 상쾌한 아침이지?”

힘 있는 대로 세게 끌어안는 걸 보니까 무지 걱정했구나. 그랬을 거다. 워낙 딸 사랑이 지나치다시피 지독한 아빠니까. 엄마에게 쏟아 붓지 못하는 애정과, 엄마가 내게 주지 못하는 애정까지 한꺼번에 퍼주다 보니까 날 너무 챙겨주는 거다. 그런데도 육아원칙은 ‘방임’이라는 게 좀 모순적이지만 나름 잘 어울린다.

  “응. 좋은 아침이야. 아빠, 어제 호원 진 만났었지? 어젯밤에 성에 왔었는데 아무래도 아빠랑 중요한 이야길 한 것 같더라고.”

흐응. 그렇게 배실배실 웃으면서 넘어가려고 해도 택도 없다네. 호원이 괜히 기와 황룡의 이야길 꺼낸 게 아니었단 말이야. 내가,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그런 얘길 아주 자연스럽게 꺼낸 거라고. 아빠랑 문하고는 이미 얘길 끝내고 나서 말이지.

내 몸은 어느 샌가 아빠에게서 빠져나와 아빠와 마주보고 앉아있다. 아빠의 방글방글한 표정에 비해 난 무관심한 척 조금은 어두운 표정일 거다. 아무래도 내 기분을 숨기는 건 날아 어울리지 않는다. 다 표시 나도 괜찮다. …정말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고 말았다.

“아빤 찬성이고 문은 반대야.”

“그럴 줄 알았어.”

이제 곧 세상에서 사라질 성수로서 영예로운 임무를 하는 데 위험도는 둘째, 셋째로 미뤄두고 아빠가 냅다 동의할 것 같았다. 역시 동의했어. 그게 바른 판단일 거다. 어차피 정당하게 성수를 죽일 수 있는 성수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반대해 봤자 내 본 사명을 꺾을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거다. 그래서 나도, 어제 호원에게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거 누구 솜씨지? 맛있는 걸.”

아빠의 칭찬에 주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도 많이 먹고 영력도 강한, 여장부 같은 주가 수줍어 할 때는 다른 성수들 앞에 서있을 때뿐이다. 쉽게 말해서 낯가림이다. 아빤 전대 현무인 엄마의 남편이니까 낯을 그만 가릴 법 한데도 타고난 성격이라 별 수 없나 보다.

주가 만든 음식이 맛있긴 하지. 확실히 맛있다. 하지만 내 기분이 엉켜있어서 오늘 아침밥은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한 먹을거리같이 보인다. 개천파 중에서 황룡과 빙황과 그나마 가깝고, 성수처형관이라는 적절한 임무를 쥐고 있는 성수는 ‘현무’밖에 없다. 작위도 높고……. 그래서 다른 성수는 다른 성수끼리 싸우게 놔두고 난 그저 황룡을 죽이고 빙황을 옥좌에 앉혀야 한다. 내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을 (새삼스런 감상이지만)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해야 한다. 뭐, 원래 현무는 그런 성수니까. 진짜 새삼스런 감상이다.

“정아. 오늘 아빠랑 플스 한 판 뜰까?”

이 아저씨가 채신머리없게.

“이번 달에 아빠랑 같이 논 적이 없잖아.”

그렇구나. 말로는 ‘야근’이 많아서 (성수의 활동이야 원래 눈에 띄지만 그나마 밤에 해야 덜 눈에 띄니까) 그 몇 주 동안 집에 제대로 있어본 적이 없다.

“오늘은 아빠에게 봉사해 주는 거지?”

진짜 어린애 같다니까.

“플스도 하고 플라잉 디스크도 갖고 놀자. 공중전이면 몸에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거야.”

아빠니까 나한테 이렇게까지 신경 써 줄 수 있는 거겠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휘말려서 정신없는 날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빠니까…….

“너무 그러지마. 내가 봉인이 풀리면서 성수계 전체가 바빠진 거 알고 있어. 아빤 황룡 다음에 가장 센 용이니까 어- 엄청 바쁘잖아. 안 그러면 문이 이렇게 맹렬한 속도로 알아올 리가 없지.”

아빠가 할 일을 땡땡이 치고 왔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휴. 주작이 가속해서 날아오는 게 이렇게 오싹한 거였구나.

“주, 가서 주작 문을 모시고 와.”

밖으로 나가는 주를 보다가 아빠 쪽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좌절에 가까운 우울 상태다. 역시, 문의 눈을 피해 도망 온 거였어. 아무튼 이 아버지의 정신세계를 알고 싶다니까. 400살 거뜬히 넘기 연세에 정신은 어찌 성장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청룡 지! 흑룡하고 백룡을 데려오기로 했잖아!”

붉은 눈을 번뜩이니까 아주아주 무섭다. 그런데도 아빠는 전혀 꿇림 없이 어느 샌가 천진한 표정으로 밥을 먹고 있다. 둘 다 강적이다.

“그 두 용은 소수의 중립 아닌가요?”

“아, 정. 들어오자마자 미안하군. 흥, 그 중립이던 두 용이 네 아버지에게 설득 되서 우리 편으로 들어왔거든. 흥, 그것도 어제 딱 하루의, 딱 한 번의 설득에 말이야.”

하. 하. 아빠가 완전 대어를 낚았잖아. 자기 신념이 확고한 용족을 한 번에 설득해 내다니 역시 ‘청룡’이라고 해야 하나? 뭐, 나름 맡은 일은 잘 하니까.

“굳이 데려와서 맹세 같은 거 안 해도 돼.”

“그런 말이 아니잖아! 흥, 그 둘이 해야 할 일이 생겼다고!”

이야. 화가 날 대로 난 문과 여유롭게 웃고 있는 아빠는 확실히 상극이다. 덕분에 고요한 성이 시끄러워졌다. 생기 있어서 좋긴 한데 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골이 다 울린다. 그리고 문이 여기 왔으면 가장 불편해 할 건 지니까 얼른 둘 다 내보내야겠다.

“자. 자. 저도 일해야 하니까 손님들께선 돌아가 주셔요.”

내가 먼저 일어서니까 아빠도 일어섰다.

“응. 밥 잘 얻어먹었어. 가자.”

“흥. 너 때문에 내가 주름이 늘어. 흥, 나중에 보자.”

“조심해서 가세요.”

내가 잘못 본 거일지도 모르지만 아빠가 쓸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빠가 아니라 내가 쓸쓸한 건지도 모른다. 평범한 학생 생활에 익숙해 있다가 이렇게 됐으니 당연한 걸까? 조금은 더 아빠랑 같이 있고 싶고, 아빠에게 투정이나 응석부려보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런 나약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 해야지 일. 나만 할 수 있는 일이 배당되었으니까 죽기 전에 끝내야지. 야…… 얼른 이 쓸데없는 싸움이 끝나야 하는데 말이야. 요즘 이 싸움 때문에 귀신들이 설치고 다니고 드문드문 요력을 가진 혼의 수가 늘고 있어서 나중엔 손대기 더 어렵게 될 거다. 직무 유기에 대한 대가라고 할 수 있겠는데 좀 많이 힘들지도.

“아. 아. 내 일이나 생각해야지. 그럼…… 할머니를 뵈러 갈까, 차대 왕님을 뵈러 갈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맘속에는 벌써 행로가 정해졌다. 그러니 고민할 필요 없이 단방에 해무사를 통해서 밖으로 나왔지. 이거 말이지, 아무리 왕이 미쳤다지만 기력하나는 끝내주는 구만. 절대로 빵빵하게 내뿜는 게 아니다. 드라이아이스의 증기가 바닥에 깔린 채 주위로 퍼져나가듯이 제 영역 표시하는 것처럼 기력이 확산돼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왕’ 소리 듣는 거겠지만 뭐, 선천적으로 기력을 만방에 퍼뜨린다 해도 지금은 무얼 경계하고 있는 것 같다. 개천파 전체? 아니면 가장 측근이었고 가장 권력이 센 현무? 양쪽 다 라고 대답하신다면 할말 없다. 하지만 이미 자기 판단 능력이 없는 미친 왕이 지금 성수계가 두 파로 나뉘어져 있다는 사실은 알까? 황룡도 그저 수천파에게 이용당하는 도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 참……. 황룡이 기를 뒤에서 받쳐주고 있다는 걸 깜빡했다. 잘은 모르지만 황룡이 이성은 없어도 ‘빙황’에게 잘 해줘야 한다는 본능(?) 덕에 기에겐 과분한 호의를 여러모로 베풀어주고 있다. 지금처럼 자신의 기(氣)로 기(綺)를 숨겨주는 것같이 말이지. 추적자 흑호라도 있으면 기를 찾을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텐데 장기간 공석 중이니…. 쳇, 성에게 먼저 가보는 수밖에. 성의 기는 황룡이 보호해주지 않고 있으니까. …차별하나? 황룡 맘이지 뭐.

“성을 찾을 필요가 없어졌네~.”

손류등. 이름도 못 받은 제자가 스승과 떨어져서 다니면 월척감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당당하게 혼자 임무 수행 중이시군. 백호의 주 임무가 암렵이었지? 류등은 양․음․공혈이 열려있어서 아직은 만만한 녀석밖에 잡지 못할 거다. 셋 중 하나라도 ‘활성화’가 돼야 이름을 받을 수 있겠지. 호-. 백호 제 1주술인 ‘주박’도 쓸 줄 알아? 하긴, 암렵꾼이라면 공통적으로 할 줄 아는 주술들 중 가장 기초적인 거니까 그 정도는 해야지. 이런 이런. 귀신의 힘이 더 세서 주박을 금방 풀어버리는 군. 그러고 보니까 현무 제 1주술도 주박이잖아. 내가 쓰면 저 정도 귀신이야 한 방에 끝날 텐데. 뭐, 이게 성수와 제자의 차이라는 거지.

“주박.”

류등이 쫓고 있는 귀신의 앞에 당당히 서서 그 이마에 내 오른손을 갖다 대며 주술을 썼다. 그리고 주저 없이 영옥(靈獄)으로 보냈다.

“간만에 보지?”

하? 사람이 인사하는데 받지는 않고 왜 그렇게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야? …겁먹었구나.

“걱정 마. 너 보러 온 거 아니니까. 지나가다가 보이 길래 들른 것뿐이야. …있지, 한 때 친구였다 해도 지금은 그렇게 얼굴을 막 볼 수 있는 사이가 아니지 않아?”

“아, 현무…님. …안녕, 하십니까?”

이 녀석, 답지 않게 긴장하잖아. 전에 문한테는 바락바락 기어올랐으면서. 성과 같이 날 속여 왔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지, 얼마 전에 성이 문한테 왕창 깨진 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내 앞에 서 있는 걸 너무 힘들어하고 있다. 이런 반응은 별로 재미없는데 말이지.

“성은 그저께의 상처로 아직 누워있겠지? 문이 아주 제대로 갈궜거든. 하지만 기는 내가 그다지 손보지 못해서 멀쩡할 거야. 안 그래?”

류등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그 기는 지금 어디 있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어도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이면 날 피한다는 게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잖아.

“너도 판단이란 걸 할 수 있다면, 지금 수천파인 게 부끄럽지 않아? 혹여, 이 분쟁의 실 내막을 모르고 있다면 얼른 손떼고 그저 고마 제자로 암렵이나 해. 주제넘게 굴지 말고.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빙황 기의 거처를 알려주는 것뿐이라는 것도 명심하고.”

위협은 아니지만 위압감 정도는 주기 위해 기를 좀 개방했더니 류등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파르르 떤다. 현무가 어떤 성수인지 누누이 얘기를 들어 왔나? ‘자비롭지 못한 성수처형관’을 늘 달고 다닌다고……. 그래도 한 때 친구였는데 내가 죄 없는 아이를 해코지 할까.

“됐어. 어디 있는지 대충 파악했으니까.”

황룡의 기가 기의 기를 숨기고 있지만 아주 못 찾을 정도는 아니다. 희미하지만 기의 흔적을 찾아냈다. 그러면 이제 이름을 받지 못한 제자는 필요 없어.

“있잖아. 다른 성수의 제자는 죽일 수 없다는 규칙 말이야. 평화 시에나 통하는 거지 지금은 아니야. 그러니까 목숨 부지하고 싶으면 눈에 띄는 짓은 절대 하지 마. 이건 옛 친구로서의 유일한 배려니까 감사하게 여겨.”

내 말만 다 하고 돌아섰기 때문에 류등의 마지막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아마도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일 거다. 믿을 수 있는 이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괜찮을 지도 모른다. 스승인 성은 전투불능 상태고, 기는 가까운 사이 같지만 같이 사는 건 아닌 것 같다. 헤에. 기는 황룡하고 같이 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 요즘 어디서 살고 있는 거지? 빙황은 성이 천계에 딱 하나 밖에 없는데 말이지.

“현…… 지희야…. 현, 현무!”

이미 멀찍이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류등의 목소리가 내 등을 건드린다. 하아? 문에게 했던 것처럼 나한테도 대들어 보려고? 은근히 성격 더럽다는 거 잘 알 텐데…. 나 정신이 휙 돌거나 눈이 싹 뒤집히면 친구고 뭐고 없다고. 전에는 ‘무시’와 ‘어둠의 공작’을 무기로 했지만 지금은 ‘힘’이 있단 말이지. 게다가 결정적으로 내가 널 죽여도 뭐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우리 편이잖아. 왜 갑자기 개천파로 간 거야? 기와 넌 파트너잖아.”

최고속의 내 두뇌가 해주는 말. ‘저 녀석은 이 사움의 내막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름 없는 고마 제자가 제 스승에게 제대로 이용당하고 있었군. 전쟁에는 언제나 알게 모르게 피해자가 생기는 법이다. 자신의 윗사람이 절대정의라고 믿는 어리석은 하수인들이 그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런 아이는 죽일 가치도 없다. 굳이 내가 죽이지 않아도 이 사움 속에서 죽게 될 아이다. 원래 수동적이고 아둔한 하수인들은 그런 운명이다.

“무례하군. 감히 내게 반말을 하자니. 말했지? 널 살려두는 게 내 유일한 배려라고 어리석은 백호의 제자여, 네 스승을 간호하면서 옛날이야기나 해달라고 부탁해 보거라.”

절대 류등을 향해 돌아보지 않았다. 나도 사람이다. 인정이란 게 얼마나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다. 난 그에게 충분히 자비를 베푼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스승에게 검을 들이대지 않는 것도 대단한 호의다.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백호 역시 사성수라 불리는 구위 성수 중 하나니까. 그 제자야…… 이름 없는 제자 정도야… 지금 그 얼굴을 보면 후에 죽일 일이 생겼을 때 못 죽일 지도 모른다. 인정은 그런 거다.

류등이 뒤에서 날 부르며 쫓아 오길래 은신술을 쓰고 내 자취를 지웠다. …기의 흔적은 여전히 황룡의 기에 가려져 있지만 추적하는 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차라리 황룡이랑 같이 있지 왜 떨어져 있어? 둘이 따로 놀고 있으면 누구든 죽이기 쉽다는 거 알면서도 왜 이런 모험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 이른 오전에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겨울 방학이기 때문이고, 조그만 공터에 20대 연인들이 꽤나 눈에 띄는 건 오늘이 토요일이기 때문이다. 대학생들은 토요일에 학교에 안 가니 좋겠군 그래. 아, 난 앞으로 학교갈 일이 없으니까 더 좋긴 하지. 제길, 스스로 재수 없는 소릴 하다니……. 이 근처에 기가 있는데 …정확하게 어디인지 집을 수가 없다. 기는 내가 온다는 걸 일찍이 알아차렸을 텐데.

그런데 말이지 여기에 귀신들이 은근히 많다. 공터에 있는 뭔가들 중에 반 이상은 귀신이다. 원래 귀신 성불이 주 임무인 성수는 정석대로 해야겠지만 타 임무가 주 임무인 성수에게는 ‘특칙’ 혹은 ‘특혜’라는 것이 있다. 제 임무에 방해가 될 만 한 건 정석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해결할 것. 다시 말해서 이 조그만 공터에 득실거리는 귀신을 내가 한꺼번에 억지로 성불시켜도 된다는 거다. 흐음. 말 나온 김에 해 봐?

“귀혼영역(鬼魂領域).”

우선 어디까지의 귀신을 성불시킬지 영역을 지정하고,

“성불.”

성불쯤이야 진언을 외지 않아도 괜찮지만 다수인데다가…… 날 엿보고 있는 기보고 잘 들으라고 일부러 소리 내서 말했다. 은신술을 쓰고 있는 내 모습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건 현혹 주술 계통이 통하지 않는 봉황족의 특질이다. 기가 날 엿보고 있는 줄 어찌 알았느냐고? 진짜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은 격이다. ‘귀혼영역’에 ‘령’인 성수까지 포착될 줄은 몰랐다. 억지 단체 성불을 끝내고 (무슨 학교 민방위 훈련 억지로 시키는 것도 아니고) 기가 있는 자리를 흘금 쳐다봤다. 소수형이네-. 내가 보고 있는 줄 모르는군.

은신술을 해제하고 기가 숨어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데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기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날 보고 있을까? 아, 생각하고 싶지 않다. 난 차대 왕을 설득하러 온 거지 죽이러 온 게 아니란 말이다. 그걸 본인에게 어찌 알릴 지가 참… 애매하다.

에… 이러고 보니까 세상 참 평화롭다. 나도 그러 평범한 아이였다면 이런 어이없는 싸움의 정체도 모르고 저들 속에서 살았을 지도. 시간은 고요히 흐르고 맑은 하늘의 구름도 바람 따라 흐른다. 강물은 잔잔히 흐를 때가 가장 예뻐 보이고 사람도 소리 내지 않고 살며시 미소 지을 때가 가장 품격 있어 보인다. 조용히, 나지막이 그런 평화를 꿈꿔본다. 내 뒤의 기는 긴장하고 있는 것 같지만 난 의외로 평온하다. 아직은 이 평화 속에서 내 손에 피 묻힐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누굴 죽여야만 한다면 이곳은 평화롭게 보이지 않았을 거다.

“그래도, 왕은…… 내가 죽여야 하나?”

기보고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닌데, 그래도 기가 들었으면 하는 건 또 무슨 심보야? 응? 나도 참 성격 이상하다. 갑자기 내가 변한 것 같은…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