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2 왕을 경외하는 이유
“아앗, 왜 잡아당겨?”
“조용히 해. ……잡을 데가 거기 밖에 없잖아.”
내게 머리채를 잡혔던 기는 두피가 심히 댕겼는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니까 진작 내 말 좀 듣지 왜 그렇게 싸돌아다녀?
“널 성에 데려온 걸 아빠나 문이 알면 큰일 난다고 말했잖아.”
지금 기는 현무 제 2성에 있다. 기가 황룡에게 왕의 성을 보고 싶다고 해서 대신에 여기로 보낸 것이다. 아무리 황룡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해도 대체 기는 무슨 생각으로 여길 당당하게 온 건지 모르겠다.
내가 개천파 내에서 기를 설득할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개천파 성수들과 같이 있으면서 내 안전이 확보된 후의 이야기다. 개천파에서는 기가 수천파에 뿌리박혀 있다고 판단한 터라 날 절대로 기와 1대1로 두지 않을 거다. 게다가 지금 이 순간 천계에서는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지고 있어서 기가 내 성 안에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숨겨야 할 정도로 위험한 문제다.
“다들 싸우느라 정신이 없잖아. 지상에서 그들의 기가 느껴지면 조용히 나갈 테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
이러니까 제 2성과 천계를 연결하는 문을 봉쇄해 놓은 거다. 혹여나 아빠가 벌컥 찾아오면 내가 뒷감당하기 너무 힘들어진다.
“하……. 성수의 성이야 다 거기서 거긴데 뭐가 보고 싶다고 찾아 온 거야?”
“빙황의 성은 주인이 왕위에 올랐을 때만 열리잖아. 그리고 난 평생의 반 이상을 지상에서 보냈다고. 성수의 성을 보는 기회가 좀처럼 없어.”
보르고 있었다. 빙황의 성이 천계에 딱 하나 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문이 함부로 열리지 않는다는 건 전혀 몰랐다. 성수가 성이 없으면 일족의 도시에서 조그만 집을 얻어 산다. 성수의 피가 흐르나 성수가 되지 못한 령들이 대체로 그렇다. 그런데 기는 일족에서 버림 받았으니 봉황족의 도시에서 살지 못하고 떠돌아다녔을 거다. 황룡이 거두거나 성이 몇 번 챙겨주는 그런 식으로 지냈겠지.
“…그러고 보니까 여긴 왕이나 성(珹)의 성(城)에 비해 엄청 조용하네. 음…… 조용하다기 보다는…….”
“고요하지?”
“그래. 엄숙한 것도, 침묵도 아닌 순수하게 고요한 성이야.”
기의 말 중에는 종졸 깊게 생각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고요함’이 그렇게 다양한 것일 줄이야……. 엄숙해서 고요한 것과 죽은 듯이 침묵을 지켜서 고요한 것과 그저 순수하게 고요한 것. 어떤 차이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본디 분위기 같은 추상적인 것은 설명하기 어려울뿐더러 비유하기 애매하다. 하지만 그 순간이 되면 감으로 알 수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빙황의 성도 이런 분위기였으면 좋겠다.”
성의 분위기는 주인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기의 성은 절대 고요하지 못할 거다.
“하? 희망사항이야. 그렇게 되기 힘들다는 거 나도 알아.”
아니, 뭐, 이번에도 얼굴에 티 났구나.
“왕은 날 아직도 어린애 취급한단 말이야. 너보다 더 어린애 취급한다고.”
“조금은 과잉보호하는 감도 있지만 왕 나름의 애정표현이야. 친아들보다 더 아끼는 것 같더구먼.”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황룡 채는 편의상 왕이라고 하지만 정식으로는 ‘여왕 황룡 채’라고 불러야 한다. 길어서 ‘왕’이라고 줄여 부르는 거다. 그래, 왕은 여자다. 성수계에서는 성별이 그닥 중요하지 않으니까 그러려니 하는 일이지만 말이지.
“왕한테 아들이 있어?”
“몰랐어?”
“응. 들어본 적 없는데.”
성수들은 전부 왕의 신하로서 왕의 주변에 대해선 좀 알고 있어야 한다. 말단 성수도 아니고 차대 왕이 될 녀석이 왕의 아들을 존재조차 모르다니 큰일이다. 뭐, 차대 왕이 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 태어나서 ‘왕자’의 호칭을 받지 못했으니까 그가 왕의 아들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래도 기랑 비슷한 나이라 한 번 쯤은 보거나 얘길 들어봤을 거다. 기가 성수계에 문외한이 아니길 바란다. 진심으로.
“휘(揮). 왕의 아들 이름이야. 용족의 일원이고, 왕의 수호령으로 있어. 아마 황룡 제 4성에 있을 걸?”
왕자나 마찬가지인 자기 아들을 수호령으로 만든 왕도 대단하지만 제가 자청해서 왕의 거들떠도 안 보는 제 4성에 간 아들도 대단하다. 그 모자, 성격 참 별나다.
“제 4성? 도대체 왕은 성이 몇 개인 거야……. 그 보다 그 성은 지상계에 있는 거야?”
“애석하지만 영토에 있어. 지상계에 있는 건 제 5성이야.”
황룡 채의 성은 총 다섯 개다. 제 1성부터 제 3성까지는 천계에, 나머지는 방금 내가 말한 대로다. 영토에 성이 있는 성수는 황룡, 청룡, 공작. 이 셋이 전부다. 음. 공작은 천계와 지상계에 성이 없는 대신 영토에 딱 하나 있다. 계급이 높은 편에 비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공작의 임무가 영토의 전반적인 관리다 보니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나야 성수처형관이기 때문에 제 1성과 제 3성이 천계에 있다. 제 2성은 거의 별궁 같은 거라 지상계에 있는 성수의 성이지만 ‘성’으로 불리지 못했다 한다. 전전대 현무, 표께서 제 2성을 애용하면서부터 질이 좋아졌다고 하니 성끼리의 권력다툼(?)이 은근히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헤. 그러고 보니까 제 3성에는 근처도 안 가봤네. 어차피 천계에 있어서 가기도 귀찮고 말이지.
“빙황은 특이종이라서 성이 한 개 뿐이구나.”
나와 기는 자가 준비해 놓은 다과를 먹기 위해 표담정(漂潭亭)에 올라가는 중이다. 표담정은 제 2성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정자다. 누가 성을 기습 방문해도 표담정에 있으면 얼마든지 대처 가능하기 때문에(멀어서 시간벌이가 되니까) 일부러 이 구석진 곳을 고른 거다.
“그간 왕이랑 붙어 있었으니 성이랑 만난 지도 꽤 됐겠네.”
“며칠 가지고 뭘. 내가 그 무리랑 어울리는 걸 왕이 싫어하는데 내가 먼저 찾아갈 필요 없어.”
이젠 왕이 기 앞에서 노골적으로 수천파를 경계하는가 보다. 성을 대하는 기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졌다. 전에는 티격태격해도 은근히 성을 반기는 듯 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관심 외의 대상으로 정해놓은 것 같다. 기가 수천파와 떨어져 지낸다면 나야 좋지. 내가 할 일이 그만큼 줄어드는 거니까. 그러면 왕과 개천파의 성수들이 담화를 나눌 자리를 주선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흐음……. 응? 그래.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
“기.”
“왜?”
“처음에 우리 집에 살면서 우리 아빠가 청룡이라는 거 눈치 못 챘어?”
“응.”
“전혀?”
“전혀. 성도 나중에 알고 놀랬는데?”
이상하다. 아빠는 기와 성이 우리 집을 드나든 걸 알고 있던데 왜 그들은 아빠의 존재를 몰랐을까? 집 구석구석에 아빠의 기가 남겨져 있어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말이지.
“이상할 거 없잖아. 여의주 없는 용을 무슨 수로 알아내.”
……생각해 보니까 문을 처음 만났을 때 아빠의 여의주를 찾았다고 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아빠가 청룡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여의주를 갖고 있었던 터라 의심할 만한 게 없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빠가 일시적으로 여의주를 갖고 있지 않았었군. 내가 어렸을 땐 분명히 여의주를 갖고 있었으니까 그저 잠깐 다른 곳에 뒀을 것이다. 설마 용이 제 여의주를 다른 이에게 뺏겼을까.
“덕분에 너희는 편하게 나한테 접근했잖아. 누가 감시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른 채 말이지.”
“나중에 사실을 알고 나서 몸에 소름 돋는 걸 생각해 보지? 성보다는 청룡이 더 똑똑한 것 같아.”
기는 진심으로 아빨 칭찬하는 가 본데 왜 나는 그걸 동의하기 힘들까. 가끔씩 아빠가 청룡의 진면목을 보여줘서 내가 감탄할 때가 있지만 그래도 왠지 기의 말에 약간의 거부감이 생긴다.
“머리 좋은 건 왕이 최고지. 모든 성수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고 있잖아.”
뭐야, 그 표정은. 절대 동의할 수 없다는 떫은 표정이잖아. 기는 아직까지도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뭐, 하긴. 기는 아직도 왕이 일일이 움직여야 할 장기말이니까 아무 것도 모를 수 있다. 에, 따지고 보면 기는 수천파도, 개천파도 아닌 그저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거였네. 그야말로 철저한 왕 편이잖아. 나도 왕과 진실 된 이야기를 하고 나서 부터는 ‘능동적’인 왕의 편이 되긴 했지.
“아무리 그래도 왕이야. 속에서 무얼 생각하는지 알아 챌 수 없어도 왕을 존경해야 해.”
“헤…… 지상계에서 빈둥거려도 왕은 왕이라는 거야?”
왕이 자신의 힘으로 기를 열심히 지켜주고 있는데 빈둥거린다고 말하다니, 완전 철없는 어린애잖아. 왕이랑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이렇게까지 왕을 모를 수가 있어? 성이 기를 애송이라 불렀던 게 납득이 된다. 나이만 200살 먹음 뭐해. 정신은 나보다 어리구먼.
“그럼 못 써. 다음 대 왕이 현대 왕을 존중하진 못할망정 뒷담 하는 건 꼬마나 할 짓이야.”
“현무가 되시더니 그 속이 아주 깊어지셨군요.”
자신이 곧 왕이 될 것까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 정신머리를 싹 뜯어 고쳐주고 싶다. 성수계가 단지 왕 때문에 분열된 게 아닌데, 자기도 성수계에서 주시하고 있는 주요 인사라는 걸 모르고 있다면, 미안하지만 두들겨 패서라도 알게 해 줄 거다. 아, 차 맛이 영 아니다. 주한테 시킬걸.
“그래도 난 왕이 시키는 대로 다 했어. 적어도 내게 해가 되는 건 시키지 않으니까. 이랬다저랬다 해도 날 거둬준 이잖아. 뒷담은 해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파렴치한 짓은 하지 않아.”
이보세요, 그건 어느 정도 머리 큰 놈이면 당연히 알고 있는 거잖아요. 약 100년 후에 기가 왕이 될 텐데 그 측근에서 일할 아빠와 문을 생각하니까 그 둘이 측은하게 여겨진다. 내 후임이 일찍 나타나면 얼굴모르는 그 후임 역시 불쌍하다. 이런 생각 짧고 단순한 주군을 모셔야 한다니 참 복도 없다. 일단 기가 왕이 되면 봉황족에서도 어쩔 수 없이 기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왕의 교육관, 금봉·황이 즉위 초기 몇 년은 고생 좀 할 거다. 처음부터 가르쳐야 할 테니 말이다.
“최소한 나이 값을 해. 왕이 널 보호하는 보람을 조금이나마 느껴야 하지 않겠어?”
“날 보호해? 그저 내 기를 감춰주는 게 보호하는 거라 한다면 그건 과대평가야. 난 이 시대를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왕이 마음에 들지 않아.”
제 흔적과 자취를 가려주는 것만 해도 왕의 상당한 은혜인데……. 기는 왕이 성수계의 싸움을 적극적으로 말렸으면 하나 보다. 미쳤다고 옛날부터 알려진 왕이 갑자기 제정신으로 부활해도 이것저것 복잡해 질 게 뻔한 걸. 무조건 왕이 밖으로 드러난다고 만사가 해결되면 왕이 지금처럼 미친 척 하고 뒷공작을 할 리가 없지. 가끔은 적절한 시기라는 것도 필요하다. 타이밍 말이다. 그리고 필요한 모든 무기도 갖춰줘야 한다. 왕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비록 몇 가지가 희생 되더라도 그게 최적의 해결책이라면 해야 한다. 이게 바로 왕의 결단력과 추진력이다.
“그래, 그나마 그 일을 너한테만 해주고 있잖아. 유일하게 왕의 알현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다른 성수들은 지금 왕이 어디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게 태반이야. 알아도 그 풍채를 볼 수가 없어. 네가 얼마나 큰 혜택을 받고 있는지 알아야 해.”
기는 내 말에 딱히 대꾸하지 못하고 차를 죽 들이킨다. 차가 벌써 그만큼 식었구나.
“졸지에 나만 못된 놈이 됐군.”
화난 것 같진 않은데……. 한참 어린 꼬마 애에게서 훈계를 들었으니 심기가 불편하겠지. 이젠 나도 ‘현무’라는 이름을 가진 성수니까 차마 예전처럼 소리 지르거나 쥐어박지 못하고 속으로 삭히고만 있을 거다.
“네가 바라는 대로 이제 곧 왕이 직접 이 허무한 싸움을 끝낼 거야. 나도 그걸 돕기로 했어. 너도 도와줘야 해.”
“왕을… 만났어?”
“네가 소개해줬잖아. ‘할머니’라는 이름으로. 찾아가니까 거절하지 않더라고.”
흐응. 왕이 다른 성수를 만난다니까 놀랐나 보네. 그래도 왕이 성수라곤 자신만 가까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구나. 뭐, 처음에 날 황룡 앞에 데려갈 때는 명령 때문에 잠깐 면식을 가진 거겠지. 그 때야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어서 그러려니 했지. 지금 보면 왕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 볼 수 있다. 가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지박령이 왕이 맞다.
“왕이 널 만나고 싶어 했던 건 그저 현무가 누군지 궁금해서가 아니었군.”
이제 조금씩 감이 오는 걸까? 기가 처음보다 많이 진지해졌다.
“왕이 널 나한테 보낸 이유도 조금은 알겠지? 나도 최근에 알았거든.”
“못됐어. 순전히 자기편 만들기잖아.”
또 그 어린애 같은 말투. 저건 어떻게 해야 고칠 수 있을까?
“네가 시한부라는 걸 알면서도 널 이용해서 수천파와 개천파의 싸움을 말리려는 거잖아. 이제 겨우 15살인데.”
그것 때문에 화난 거였냐. 사고 참 단순하다. 물론 성수가 쌓아온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나이이긴 하지만 지금 난 그걸 따질 입장이 아니잖아. 성수처형관 현무로서 왕을 돕는 거니까 나이가 어리든 다 죽어가든 중요하지 않단 말이지.
“네가 지금 왕이라면 쓸 수 있는 검이 딱 한 자루뿐일 때 그것이 약한 검이라 해서 쓰지 않을 수 있어?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 최대한 이용해야 해. 버려둘 수 없잖아. 그래도 지금의 왕에겐 나와 너. 무기가 두 개나 있으니까 든든해 보이지 않아?”
조금씩 현실을 보기 시작한 서툰 성수, 이제 막 성인식을 치르고 어엿한 하나의 성수로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어린 성수, 아무것도 모르고 허무한 삶을 살아와 겉껍데기만 성수인 기. 그가 내 말에 뭐라 대답할 지는 나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내게 조그만 바람이 있다면 그가 왕의 마음을 조금만이라도 헤아려 줬으면 한다. 지금 갑자기 왕이 죽으면 특별한 말썽이 생기지 않는 한, 기가 자동적으로 왕이 될 테니까. 지금 왕의 의지를 조금만이라도 이어줬으면 한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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