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귀신성불록(완)

한 달 간의 귀신성불록 : D-2 어줍잖은 이유를 붙이는 이유

★은하수★ 2008. 5. 26. 13:01

D-2 어줍잖은 이유를 붙이는 이유

 

백호가 사라지고, 수천파가 풀이 꺾일 줄 알았던 개천파는 우두머리 없이 자진해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파리 떼를 쫓는 것처럼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성수계의 상급 성수 중 웬만한 성수는 다 개천파고, 전체 구성원 수도 개천파가 많아서 수천파가 밀리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왕이 살생을 금하고 생포를 명한 덕분에 소멸된 성수는 없다 한다. 어젯밤에 수천파의 갑작스런 천계 침공으로 시작된 거대 전투는 오늘 해가 뜨고 그 각도가 눈에 띄게 변해 지면과 수직이 되기 전에 끝났다. 근 10시간으로 알고 있다. 아빠도 당연히 그에 참가했다. 개천파 중 아빠와 화마(火馬) 등 몇몇 성수가 지상계에 머무는 중이라 수천파가 천계로 올라갈 때 뒤에서 그들을 쳤다. 기는 혹여나 금봉과 마주칠까봐 나가지 않았다.

“드세요.”

“응. ……코코아? 오랜만이네.”

“그러세요?”

“응. 올 겨울 들어 처음이야.”

주인이 자리 비운 청룡의 성에 있는 것이 불편해서 채강의 집에 왔다. 기도 있으니까 심심하진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물론 어제 죽은 것처럼 쓰러져 놓고서 멋대로 밖을 돌아다닌다고 기에게 잔소리 듣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어젯밤에 일이 터지고 나서 궁금해가지고 잠깐 나갔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큰 일 하나 했잖아.”

“무슨 큰 일?”

단 걸 싫어하는 기는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시더니 표정이 살짝 이상해졌다.

“채강, 뜨거운 물 남았으면 기 잔에 더 부어줄래?”

채강도 기의 표정을 봤기 때문에 ‘풋’하고 웃은 다음에 기에게 뜨거운 물을 더 부어줬다. 기는 티스푼으로 저은 후 맛을 확인하더니 자기가 직접 물을 더 붓는다. 저러느니 그냥 맹물 마시는 게 낫겠다.

“밤에 한 큰 일이 뭔데?”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뭘 말하다가 중간에 다른 일에 정신 팔려서 화제를 잊어버리는 타입 말이다. 기가 그런 유형의 화자는 아니지만 대화가 중간에 끊기는 건 개인적으로 싫어해서 본인이 피하고 싶은 티를 내지 않는 이상 내가 꼭 대화를 잇는다.

“내가 원래 성수끼리 싸우는 담당이 아니잖아. 본 업무에 매우 충실한 일을 했다는 거지. 꽤 대어를 낚았는데 ‘참혼’ 수준의 놈이었어. 성불은 도저히 안 될 것 같고, 암렵도 안 통하더라고. 이미 요력이 요괴 직전까지 가서 이도 저도 안 먹힌 거지.”

귀신 성불은 암렵, 참혼을 맡는 성수가 있기 때문에 성불 가능한 귀신만 맡으면 된다. 따지고 보면 안전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직권 외 성수가 그 일을 하는 건 그만큼 심각하거나, 그 일을 한 성수가 할 일 없이 노닥거리는 중에 일이 걸려들어서일 때 정도다. 기의 이번 경우는 전자 쪽이다. 분쟁 중에 본업에 집중하는 성수가 드물다보니 기가 손을 쓰게 된 것 같다.

“어떤 녀석이었기에 참혼을 쓴 거야? 요력이 그 정도였으면 사람들을 많이 해쳤겠는걸?”

“이미 몇 백 년을 산 몸이고 성수도 둘 정도를 해친 모양이야. 그래봤자 5급 성수인데…… 어쨌든 성수 체면에 말이 아니잖아. 인간 한 명을 ‘교주’라는 이름으로 노예로 부리면서 수많은 목숨을 공급받더라고. 제가 그 ‘사이비 종교’의 신이라는 이야기지. 몇 년 더 있으면 천 년을 채운다는데 가만있을 수 있나. 없애야지.”

사이비 종교 중에는 귀신을 섬기는 것도 있구나. 뭐, 귀신도 뒤에 ‘신’이 붙으니까 신이긴 하겠지. 에? 한자도 같잖아. 그 귀신의 노예였던 자칭 ‘교주’는 제가 신의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얼마나 뻐기고 다녔을까? 세상이 험난하니까 사이비 종교도 종류며 신도 수가 늘어간다고, 그 사이비 역시 신도가 많았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신도가 한 사람씩 내지 몇 사람씩 죽어나가는 걸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그 사이비 종교가 오랜 시간 계속된 걸 보면 귀신의 노예가 입담 실력이 훌륭한 모양이다.

“많은 목숨이 농락된 건 안타깝지만 그 귀신의 사냥감 몰이 수완은 나름 참신한 걸.”

분한 건 분한 거고 감탄할 건 감탄해 줘야 한다.

“이거 저거 다 제치고 날 애먹게 만든 그 요력 만큼은 인정해. 그렇게 강한 요력을 가진 귀신은 정말 오랜만이야.”

귀신 중에 요력을 가진 귀신의 수가 인간 중에 상류층 인간의 비율과 비슷한데 요력이 강한 귀신은 더 소수라 나보다 오래 산 기도 강한 요력의 소유자는 만난 적이 별로 없을 거다.

“내가 쓰러지지 않고 계속 너랑 같이 있었으면 그 귀신을 만나볼 수 있었을까?”

“너랑 같이 있으니까 싸움 구경하러 나가지도 않았을 걸.”

“야, 그러면 그 귀신, 복도 지지리 없는 거네. 강한 성수를 한참 나중에서야 만나가지고 성불, 암렵 다 뛰어 넘어서 참혼 됐으니 말이지.”

기가 픽 소리 내며 웃는다.

“보통 성수가 바쁘면 그 제자들이 도맡아 해야 하는데, 그러라고 제자를 양성하는 건데 지금은 전쟁에 제자들까지 껴서 밀린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에요.”

채강의 말대로다. 더 중요한 건 스승에게서 진실을 듣지 못하고 조작된 사명감에 따라 움직이는 제자가 대부분이라는 거다. 아마도 이번 분쟁에서 성수보다는 제자가 더 많이 죽었을 거다.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싸움 속에서 죽은 것 말이다. 채강이야 황룡 덕에 살아남았지만 그게 아니었으면 스승이 죽었으니 제자도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희금’이란 이름에서 명을 다했을 거다. 따지고 보니까 분쟁 중에 죽은 성수는 아직까지 엄마랑 성 뿐이다. 수명이 다해서 죽은 성수는 있는데 전쟁 통에 목숨을 잃은 경우는 이 둘 뿐이다. 그러면 제자들은 제 스승 대신에 죽은 꼴이 되잖아.

“그래. 왕이 내린 임무도 다 마쳤는데 앞으로 뭐할 생각이야?”

“앞으로… 라. 지금처럼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면서 담소를 즐기는 것도 운치 있고 좋지.”

감히 이 몸께 장래를 운운하다니 생각이 무척 짧으시군. 뒤늦게 아차 해봐야 소용없다네. 지금 그렇게 입 꼭 다물고 있는 다고 먼저 내뱉은 말이 안 한 말이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지.

“성수계가 어수선할 때가 아니면 천계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다닐 텐데.”

“흐응. 지상계도 못 가본 곳 천지인데 천계까지 어느 세월에? 성수계가 잠잠했다면 난 엄마랑……. 윽. 이걸 왜 화제로 꺼낸 거야?”

“현무 희가 살아있었겠지. 넌 태어나지도 않았을 날 만날 리가 없었을 거고.”

‘금단아의 등장=성수계의 혼란’ 이 공식이 다시 머릿속에 깊게 새겨진다. 기는 왜 제가 불리할 수밖에 없는 주제를 생각 없이 꺼내서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거야? 신경 쓰지 않는 척 해도 힘들어 하는 거 다 아는데.

“있지. 성수계가 분열된 건 순전히 황룡 탓이야. 미친 척하지 않았으면 개천파니 수천파니 할 거 없었다고. 남아 빙황이 태어났을 땐 그냥 좀 말 많다 싶을 정도로 시끄러운 게 고작이었다며. 그걸 기회로 미친 척에 자취를 감추고 성수계의 분파를 꾀한 황룡의 책임이 제일 크다고. 엄마의 죽음, 성의 죽음, …앞으로… 내 죽음. 결국 왕 때문이야.”

내기 이렇게 말해도 기는 제가 갖고 있는 죄책감을 조금도 덜지 못할 거다. 자신이 태어난 건 자체를 극구 혐오하는데 어디 그 죄책감이 쉽게 줄어들겠어.

“채께서 그러셨어요. 거사에는 늘 희생이 따른다고. 그 희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서는 안 된다고. 물론 어쩔 수 없겠지만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까지는 도무지 동의 할 수 없어요.”

“시시콜콜한 변명이지. 그런 말은 어디, 어느 상황에서나 다 통하는 거야.”

사는 게 다 그런 거다. 자기의 일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며 타인의 질책에서 교묘하게 빠져나오려는 것만큼 야비한 것도 없다. 누구든 이런 적이 한 번 쯤은 있을 거다. 만약 한 번도 없다 하면 ‘당신은 인생을 참 힘들게 살아 오셨군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뭐, 지금 중요한 건 코코아가 식어간다는 거지. 식으면 맛이 없거든.”

기가 잠시 말을 멈춘 것 치고는 너무 말이 없다. 제가 분위기를 흐려놓고는 제가 거기에 빠져들다니.

“과거사를 꺼내고, 과거사에 만약을 붙여봤자 지금은 지금이야. 현재에 충실하게 살고 미래를 기대해야지.”

“가끔은…… 누가 어른인지 분간이 안 될 때가 있어.”

“어떤 분이 너무 철없어서 그래.”

“어떤 분이 애답지 않은 것도 그래.”

기의 말 받아치기 기술은 확실히 아빠보다 위다. 뭔가 소통이 되는 느낌을 준 달까, 먼저 말 한 사람이 만족할 만큼의 받아치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어려운 얘긴 제쳐두고, 기가 분위기가 좀 산 모양이다.

“왕이 나타나도 정리가 쉽지 않네.”

“금봉까지 죽어줘야 할 테니까.”

금봉 얘기가 나오니까 여지없이 한숨부터 쉰다.

“여태껏 얘기 대상은 금봉이셨는데 금황은 어떻게 지내세요?”

나도 궁금한 얘기다. 금황이 봉황족에서 거의 엄마, 대모 같은 존재라는데 급이 높은 성수 치고는 소식이 너무 없다. 분쟁 이야기에 밀렸다거나 묻힌 것도 아니다.

“금봉이 수천파를 이끌고 별 짓 다할 때, 금황이 가뜩이나 숨어 사는 봉황족을 더 꽁꽁 숨겨두고 성수계와 단절된 삶을 택했는데 어느 누가 알겠어. 봉황족 전체가 다 모습을 감춘 상태야.”

꽤 대단한 수장이다. 부복을 통째로 분쟁에서 제외시키다니. 성수가 아닌 천계의 령이 성수계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만큼 억울한 일이 또 있을까. 부족의 수장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성수계의 왕좌를 노리는 금봉에 비하면 금황은 정말 현실적인 수장이 아닐 수 없다.

“뭐, 왕의 교육관이 금봉·황인데 둘 다 문제되면 곤란하지. 한 쪽이라도 무사해야 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