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29 이제부터 시작이다!

★은하수★ 2009. 3. 17. 18:14

D-29 이제부터 시작이다!

 

뉴노멀로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검사는 일리안 쌍둥이를 포함해서 총 11명입니다. 마법을 할 수 있거나 원체 강한 종족들은 굳이 검을 주전술로 이용할 필요가 없으니 소드마스터의 수가 5명 이하로 적습니다. 그래도 강한 종족에서 배출된 소드마스터는 뉴노멀 출신의 소드마스터보다 강할 테니 유명세를 타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 대표적 주자가 바로 윌랜드에 잠시 상주하게 된 폴 나이티입니다.

폴은 소드마스터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트레져 헌터로써도 유명합니다. 아주 가끔씩 저와 똑같은 걸 노릴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서로 오기가 생겨서 누가 먼저 목표물을 손에 얻는지 경쟁에 붙어버립니다. 간혹 제가 이기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은 폴의 승리로 끝납니다. 아주 가끔 부딪히는 사이인데 폴이 제 밥그릇을 뺏는 것 같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전날 회의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와서 각지에 흩어져 있는 소드마스터와 실력이 출중한 길드에게 구원 요청 편지를 급보로 발송했습니다. 대규모의 군대를 준비하는 것도 좋지만 조금이라도 싸울 줄 아는 사람들, 일단은 믿을 수 있는 실력자달을 우선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나서 국왕 폐하께 회의의 내용을 보고하고 군대를 모집하는 글을 전국에 퍼뜨려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왕궁에서도 부지런히 도와주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만큼 빨리 모일 지 걱정이야.”

저희는 세계수가 있는 시작의 숲에서 왕궁의 유능한 목공들이 지어준 오두막집을 거점으로 지냈습니다. 오두막집은 거의 폼이고, 대부분의 시간을 높은 나무 위에서 보냈습니다. 세계수 가까이로 가지 않으면서 세계수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빨라야 삼, 사일 뒤에야 사람을 볼 걸?”

하긴, 세계수를 중심으로 반경 100km가 모두 시작의 숲이고 사람이 살지 않으니 하루, 이틀 내에 지원자가 나타나진 못할 겁니다. 그리고 지원자는 저희가 직접 편지를 보낸 이들이 아닌 이상 왕궁에 모였다가 단체로 시작의 숲으로 들어오는 거니 더 시간이 걸릴 겁니다.

“비이, 엑시델.”

땅 위에서 패시가 소리쳤습니다. 나무에 꽤 높이 올라가긴 했는지 패시가 땅콩 만하게 보였습니다.

“왜?”

“혹시 폴 봤어?”

“너 봤어?”

“아니.”

그러고 보니까 아침에 눈뜨고 나서부터 폴이 보이지 않습니다. 점심때가 다 돼 가도록 혼자 어디서 뭐 하는 건지, 단체 활동이란 걸 모르나 봅니다.

“둘 다 못 봤어.”

“그래?”

패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치니비가 있는 나무로 능숙하고 빠르게 올랐습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보자기에서 누런 종이로 싼 뭔가를 세 개 꺼내서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점심이야.”

주먹보다 더 큰 주먹밥 두 개에 비슷한 크기의 샌드위치 하나, 사과 한 알이 점심이었습니다. 혼자 먹기에 좀 많은 게 아닌가 싶은데 건장한 두 청년은 그것들을 금방 해치우더군요. 점 주먹밥 하나를 남겼는데 나중에 동물이 다니는 길목에 조각내서 뿌렸습니다.

“성전 중에서 세계수가 가장 지키기 힘들어.”

숲의 중앙에 거대하게 솟아서 반경 500m내에는 그 어떤 나무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세계수를 보며 패시가 난처한 듯이 말했습니다. 높이도 가까이서 보면 고개를 아무리 뒤로 젖혀도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줄기의 굵기도 20명의 성인이 팔을 둘러도 조금 모자랄 만큼 굵은데 어째서 지키기 힘드냐는 식으로 세계수가 패시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크기 때문에? 세계수가 제일 크긴 해도 폴리 빼고는 다 고만고만하잖아.”

“크기는 상관없어.”

“세계수가 지키기 가장 힘들면 몬데비언족 녀석들이 세이버가 아닌 세계수를 먼저 공략했어야지.”

치니비가 간만에 논리적인 사고를 해냈습니다. 평소에도 장난꾼 이미지를 버리고 이런 이미지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패시랑 분위기가 비슷해져서 삶에 재미가 없어질 지도 모릅니다.

“세이버를 습격한 건 그저 예고였다고 봐. 조만간 죽을 준비를 하라는 식으로.”

“흠.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세계수가 가장 만만하니까, 여기부터 모습을 드러낼 거란 얘기지? 그런데 세계수가 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거야?”

“윌랜드의 성질 때문이지. 지키기 어렵다는 건 없애기 쉽다는 이야기야. 세이버는 진주, 드렌필드는 석관, 플리는 강철 상자라 제거하기 어렵지만 윌랜드는 나무야. 불을 지르면 끝이라고.”

“폴?”

“흐익.”

제 바로 옆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 나무에서 떨어질 뻔 했습니다. 패시 대신에 설명해 준 건 고마운데 왔으면 왔다는 얘기부터 해야지 느닷없이 대화에 끼어드니 안 놀랠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다른 데서 나타나지 하필 제 바로 옆에서 나타나 사람을 극도로 놀라게 하는 건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습니다.

“뉴노멀과 딥데어가 아무리 다르게 생겼거니와 괴물 본 거 마냥 놀랄 필요는 없잖아.”

“사고가 어째서 그쪽으로 흐르는 거야?”

트레져 헌터로 돌아다니면서 별의별 사람들을 다 봤는데 제가 폴의 얼굴을 보고 놀랐겠습니까? 딥데어족은 마법을 쓸 줄 아니까 갑자기 사라지든, 갑자기 나타나든 상관없겠지만 뉴노멀족은 아니란 말입니다.

“폴의 얘기에 보충을 하자면, 이 근처에 시내나 연못 같은 물이 없어. 한참 떨어져 있어서 세계수에 불이 붙으면 마법으로 물을 조달하지 않는 이상 끝장이야.”

당연한 말인데도 패시에게서 들으니 왠지 오싹했습니다.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면 내가 세이버로 당장 달려가서 캐스트나 비스 성녀를 데려와야지.”

“너도 마법을 쓸 수 있잖아.”

“모든 마법을 할 줄 아는 건 아니야. 그리고 할 수 있다 해도 물을 이용하는 마법에서 소울족을 이길 만한 자가 없잖아.”

그나마 다행인 건 성전 자체에 보호 마법이 있어서 쉽게 훼손 되지 않지만 혹여 라도 세계수에 불이 붙으면 끄는 것도 일일 겁니다. 퍼져나가기 전에 초기 진화 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충분히 실현될 수 있는 일이라 추측하고 걱정만 할 게 아니라 비상용 물을 오두막 근처에 비치해 놓기로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는 거였습니다.

“엑시델, 뒤에 거미.”

“에엑?”

폴이 손가락으로 제 등 뒤를 가리키자 재빨리 나무에서 뛰어 내려갔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거미라, 이름을 듣자마자 확인도 안 하고 피한 겁니다.

“오! 대단한 반사 신경이야!”

순간 깨달았습니다. 폴에게 바보같이 속은 겁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단숨에 허리에 차고 있던 크로스보우를 왼팔에 차고 화살까지 껴서 폴을 향해 조준했습니다.

“죽일 거야.”

“에이, 겨우 이거 갖고 뭘. 과민 반응이야.”

[척]

세상에서 자신이 달갑지 않게 여기는 사람한테서 제일 싫어하는 걸 당하면 그 치욕이 얼마큼인지 당해본 이만 압니다. 동맹국의 대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만난 거였으면 주저 없이 화살을 난사했을 겁니다. 예전에 100캐럿짜리 블루 다이아몬드를 드렌필드의 귀족에게서 훔치는 중에 폴에게 거미를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을 들킨 게 화근이었습니다. 반은 제 불찰이니 참을 수밖에요.

“폴 나이티. 우리를 도와주러 왔으면 최소한 우리에게 예의를 지켜 줘야지.”

“물론 그래야지. 그런데 크로네스테 양은 반응이 곧바로 있어서 왠지 계속 괴롭히고 싶거든. 뭐, 최대한 조심하지.”

[뿌득]

패시의 눈치를 봐서 활을 거뒀지만 폴의 사악한 눈동자는 제 화를 돋우기만 했습니다. 앞으로는 리더 격인 패시의 곁에만 붙어 다니자고 결심한 게 바로 이때부터입니다. 폴의 행동을 제지해 주거나 제 행동을 제지해 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숲은 원래 출입 금지 구역이라 뭐가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알려진 게 없어. 그러니까 개인행동은 될 수 있으면 하지 마. 특히 폴.”

“라져.”

폴은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대답했습니다.

생명의 숲에서 그나마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정식 입구에서 세계수까지의 직선 길, 딱 하나 뿐입니다. 그야말로 생명의 숲의 99%가 미지의 세계라는 겁니다. 저희가 윌랜드를 지키면서 생명의 숲을 꽤나 돌아다녀 봤는데 위험한 곳도 많이 있었지만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곳도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건 조만간 알 수 있게 될 겁니다.

“아까 돌아다니면서 우연히 찾은 게 있었는데, 온통 독으로 만들어진 늪도 있더라고.”

폴의 눈이 흥미로 반짝거렸는데 일리안 쌍둥이와 저는 놀라서 얼이 빠져버렸습니다.

“주변에 독기가 장난 아닐 텐데 늪이 있다는 것까지 확인한 거야?”

네. 치니비의 말대로 저희는 폴의 무모한 행동에 놀란 것이었습니다. 생명의 숲에 뭐가 있든 크게 놀랄 만 한 건 없을 겁니다. 웬만하면 상상의 범주 속에 들어갈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호기심 많은 청년은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입니다.

“아무리 궁금해도 혼자서 독기를 지나 늪을 확인한 건 무모한 짓이야. 한 번만 더 그러면 드렌필드에 연락해서 요원을 바꾸거나 그냥 아예 데러가라고 할 거야.”

“아, 아, 정말 잘못했어.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야. 다신 안 그럴게. 지브릴 손에 죽고 싶지 않아.”

폴이 훨씬 실력 있는 소드마스터지만 윌랜드 안에서는 패시의 말이 가장 지배적이니 폴이 표면적으로라도 잘 듣는 척 했습니다. 폴이 동맹 때문에 억지로 윌랜드에 온 거라면 아쉬울 거 없이 돌아가겠다고 말했겠지만 패시 때문에 사적인 판단을 앞세워 온 것이니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고 하루 만에 쫓겨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있잖아, 엑시델.”

“응?”

“그 크로스보우, 얼마나 멀리 날아가? 예전에 보니까 화살에 끈 달아서 꽤 멀리까지 가던데.”

“목표를 맞추는 경우엔 100~150m정도 가고, 그냥 쏘면 400m넘게 날아가.”

“보통 활보다 훨씬 멀리 가네.”

제가 가지고 있는 크로스보우는 제가 직접 만든 거라 평범한 크로스보우하고는 좀 다르게 생겼습니다. 최대 20발을 연사할 수 있게 만들어서 효율성도 좋은 터라 애용하고 있습니다. 무기라곤 검, 끽해야 가끔 단검 밖에 써보지 않은 치니비가 특이하게 생긴 제 크로스보우에 눈이 가는 건 당연했을 지도 모릅니다.

“활이 얼마나 쓸모 있는데, 아카데미에서는 검하고 창에 너무 치중한단 말이야.”

“평화 국가다 보니 아카데미 자체가 선택 입학이고, 가르치는 것도 보편적인 것뿐이니까 별 수 없지. 그래도 간혹 메이스를 전공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아카데미 건물이 부서지는 사건도 심심찮게 있잖아.”

패시가 다녔던 아카데미에서도 메이스 폭주 사건이 있었나 봅니다. 메이스를 전공하는 학생들 중에 힘자랑을 밥 먹듯이 하는 학생이 간혹 있어서 아카데미의 곳곳을 부수고 다니는 사건이 몇 년에 한 번씩 아카데미마다 일어나곤 합니다. 저는 6년제에서 월반 덕에 2년만 다녔는데 그 사이에 메이스 폭주 사건이 한 번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처럼 ‘쾅, 쾅, 쾅, 쾅’ 아주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녀석들은 열 명 중 아홉이 길드에 들어가서 열심히 더 설치고 다닌다잖아.”

“우리 아카데미의 그 녀석 비이 너랑 친했었지?”

“말도 마. 뒷정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 다음부턴 서로 민망해서 인사도 안 했어.”

아카데미를 나온 사람이면 그 시절 얘기로 몇 날 며칠을 보낼 수 있으니, 적에 대비해 보초를 서는 중에 시간 때우기로 안성맞춤입니다. 자기가 나온 아카데미의 전통, 자기를 가르쳤던 담당 교사, 특이했던 동기 혹은 선후배 등등 무궁무진한 얘기 소재를 꺼낼 수 있습니다.

“아, 폴. 드렌필드에도 아카데미가 있지?”

“모든 국가에 다 있으니까. 다만 가르치는 내용이 좀 다르지.”

폴이 아카데미 출신이란 건 제가 알고 있습니다. 한 번은 드렌필드의 어떤 아카데미에 ‘지옥의 손’을 훔치러 갔을 때 폴이 나타나서 ‘우리 아카데미’는 건들지 말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날 하루는 서로 자신이 나온 아카데미 이야기를 하면서 긴장되지만 지루할 지도 몰랐던 시간을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