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8 방 안에서!

★은하수★ 2009. 3. 20. 16:47

D-8 방 안에서!

 

드렌필드의 역사 중에서 가장 암울한 사건을 꼽자면 성전의 행방불명이고 가장 수치스런 사건을 들라면 원로회의 몰살일 겁니다. 원로 중에서 가장 나이가 적지만 제일 영향력이 강한 지브릴을 제외한 전원이 심판단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사건은 체이서스를 두려움에 떨게 했습니다.

전투 민족의 최고 집단이 무너진 이 사건을 저지른 후 비스 성녀와 휘하 심판단은 보란 듯이 회의장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마이너 아지트가 메인 아지트로 탈바꿈한 겁니다.

체이서스의 일곱 성녀 중 제 1 성녀인 비스 성녀가 심판단을 이끈다는 소문이 돌자 드렌필드 내에 한심한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심판단이 그저 체이서스를 정복하고자 활개 치는 길드라 생각하고 콩고물 좀 얻어먹기 위해 그들에게 빌붙는 빌어먹을 귀족이 차근차근 생긴 겁니다. 자신의 안전과 눈앞의 이득만 챙기는 소인배답다고 밖에 생각 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는 상징물로 밖에 취급하지 않는 나라에 처음으로 황제가 권력을 쥐는 날이 왔네.”

유일하게 남아있는 드렌필드의 원로가 회의장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요새에서 검은 장미꽃잎으로 아래로 흩뿌리며 비아냥거렸습니다.

당시 저희는 심판단을 가까이서 견제하기 위해 성전이 없는 드렌필드에서 대기 중이었습니다. 저희와 생각을 공유한 성전 플리는 스스로 겉껍데기에서 벗어나 윌랜드로 갔습니다.

드렌필드와 세이버의 부재 때문에 체이서스의 질서가 뒤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플 리가 제자리에서 윌랜드와 함께 체이서스를 유지해야 옳겠지만, 며칠의 여유가 있고 부재중인 두 성수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심판단에게 대항하기 위해 두 성전이 한 곳에 뭉쳤습니다. 실은, 윌랜드는 실체마저도 넷 중에서 제일 약해서 플 리가 직접 움직인 겁니다.

“무늬만 황제인 분이 얼마나 해낼까나?”

폴이 난간 위에 걸터앉아 지브릴의 눈앞으로 붉은 장미꽃을 살랑살랑 흔들었습니다.

“어딜 가나 권력 다툼 뿐이야.”

원로 지브릴의 손에는 드렌필드 황가의 상징인 검은 장미가, 성전 드렌필드의 뜻에 따라 황제 밑에 있어 온 폴의 손에는 원로회의 상징인 붉은 장미가 쥐어져 있으니 오묘한 구도를 이뤘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역겹게 보여서 눈을 씻기 위해 일리안 쌍둥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밖은 좀 어때?”

다들 가구 하나, 장식 하나 없는 넓은 방에서 돌아가면서 대련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들어갔을 땐 캐트스와 치니비가 검을 맞대는 중이었습니다. 패시는 문 바로 옆에 서서 제가 돌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아까랑 다를 거 없어.”

“그래?”

“혈안왕이랑 테스의 대련은 어땠어?”

“살벌했어.”

“좀 더 길게 설명해주시죠.”

“세계수 아래서 싸우던 것처럼 살벌했어.”

패시는 대화중에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가 시선을 박은 곳을 따라가 보니 치니비와 마주보고 있는 캐스트였습니다. 무표정으로 있었지만 꽤나 신경 쓰고 있다는 걸 감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캐스트의 머리엔 뭐가 들었을까?”

“뭐?”

“이제야 보네. 말할 땐 그 사람을 보고 말하는 게 예의야.”

패시는 피식 웃고 나서 다시 대련 쪽으로 눈을 집중시켰습니다. 무표정 속에서 타인을 꿰뚫는 듯한 강렬한 눈은 단연 돋보였습니다.

“내 말에 민감하게 반응한 걸 보니 캐스트가 께름칙한가봐?”

위태로운 질문을 받았을 때 상대를 말로 현혹할 자신이 없으면 함구하고 무대답을 지키는 것이 현명하다. 과연 패시다운 처세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이 입 대신 대답을 해준 덕분에 계속 말을 이을 수 있었습니다.

“비스 성녀에게 떨어질 수 없던 캐스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이 자리에 있다. 비스 성녀가 똑똑하다 해도 우리의 움직임을 혼자서 그렇게 빨리 파악할 수 있었을까? 혹시 처음부터 캐스트를 우리 속에 첩자로 심어 놓은 게 아닐까?”

[콩]

“뭘 그렇게 중얼거려?”

패시는 그의 머리를 옆으로 떨어뜨리듯 기울여 제 머리에 기댔습니다.

“패시 머릿속에 있는 말.”

“어디서 독심술을 배웠어?”

“독심술이라고 못하지. 이건 내 생각이기도 하니까.”

치니비와 캐스트의 대련이 끝나자 패시가 고개를 세웠습니다. 다음은 아무 대련 없이 휴식을 취하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말해 봐.”

“응?”

“캐스트 이피머스에 대한 너와 나의 생각 말이야.”

평상시 같으면 대련이 끝나자마자 패시에게 쪼르르 달려와야(?)할 치니비가 어느새 친해진 혈안왕과 얘기를 나누자 패시가 먼저 저와의 대화를 이끌었습니다.

“비스 성녀가 심판단을 마이너 아지트로 이동시킬 수 있게 도와줬을까? 심판단이 아직 회의장에서 나오지 않는 건 우리가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겠지. 캐스트가 그녀에게 보고한 걸까? 그렇다면 그는 언제쯤 그녀에게 돌아갈까? 이 정도면 선한 자를 악인으로 낙인찍기 충분하지 않아?”

“아직 어느 쪽인지 모르는데 낙인찍었다고 말하긴 일러.”

캐스트는 패시의 강렬한 시선을 느끼지 못했는지, 느끼고도 모르는 척 한 건지 저희 쪽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워낙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는 편이라 그 두꺼운 낯짝을 꿰뚫어 보는 것도 일이었습니다.

“재밌는 거 가르쳐줄까?”

이번에는 제가 패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습니다.

“내가 흥미를 가질만한 거라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은 뭐든지 흥미로워.”

“이미 괴기와 충격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어. 자연의 섭리를 어떻게 거스르든 흥미가 생길만큼 충격적일 수 있을까?”

패시는 동요하지 않고 본인의 페이스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괜히 오기가 생겼습니다.

“순순히 가르쳐 주기엔 값이 많이 나가는 정보고……. 그래도 패시에겐 알려줘야 할 것 같다는 양심이……. 어떡할까?”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며 캐스트에게 집중하고 있는 패시의 눈을 쳐다봤습니다. 패시는 별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한 손으로 제 눈을 단번에 가렸습니다.

“너 트레져 헌터잖아. 본업은 어쩌고 인포머처럼 구는 거야?”

“트레져 헌터도 먹고 살기 위해선 때론 원티드 헌터가 될 수도 인포머가 될 수도 있는 법이야.”

패시가 무얼 생각하느라 잠깐 멈칫한 사이에 치니비가 총총총 가볍게 뛰어왔습니다.

“눈은 왜 가리고 있어? 엑시델한테 검술 가르쳐 준다며.”

휴식 시간인줄 알았더니 패시와 저를 위해 자리를 비켜준 거였습니다. 혈안왕도 저희를 보며 바닥에 앉아 있었습니다.

패시는 제 눈을 가렸던 손을 허리춤으로 내리더니 제 단도를 가볍게 툭 쳤습니다.

“검술은 무슨. 호신술을 가르쳐야지. 호신술 과외료하고 정보료를 샘샘으로 치자고.”

“이보세요. 아카데미 졸업생이 호신술 하나 못할까.”

“그래?”

자신 만만한 미소가 제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방 한가운데로 유유히 걸어가는 그의 걸음걸이도 은근히 얄미워 보였습니다. 검을 뽑지 않고 어깨를 천천히 돌리며 몸을 푸는 것마저 절 놀리는 듯 했습니다.

“무슨 말이야?”

“들은 그대로 돈 얘기야.”

순진한 소년의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치니비를 뒤로 하고 못이기는 척 패시 앞에 섰습니다.

“전 맨손으로 할 테니 아가씨는 단도를 꺼내시죠.”

신사의 미소가 굉장한 밉상으로 보이는 것도 한 순간이더군요.

“그 말투, 폴한테서 배운 거지?”

“글쎄.”

패시는 평소에는 진지하게 있다가 한 번 장난기가 발동하면 상대를 제대로 휘굴려야 직성이 풀립니다. 대부분 그 상대가 치니비고 그 외는 전부 저라서 은근히 많이 당했습니다. 이번에도 호신술을 핑계 삼아 절 갖고 노려는 거라 나름 각오했습니다.

“호신술이니까 네가 선공이지? 읏!”

단도를 뽑고 빙글빙글 돌리는데 패시가 시작 신호 없이 갑자기 주먹을 내질렀습니다. 옆으로 피하는데 주먹 바람이 얼굴을 스쳤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발차기가 두 번 연속, 주먹 한 번, 또다시 발차기 한 번이 쉴 새 없이 절 위협했습니다. 전부 정확하게 급소를 노린 공격이었습니다. 어떻게 반격해야 할지 생각할 틈이 없었습니다. 피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막는 것보다 피하는 게 더 어려운데 제법이군.”

제가 활을 쏘는 모습만 본 혈안왕은 처음 보는 모습에 작은 찬사를 던졌습니다.

그 뒤로도 패시의 불규칙적인 연속 급소 공격이 이어졌습니다. 인중을 노리는 발차기와 명치를 향한 발차기, 인중을 노리는 주먹과 관자놀이를 갈기려는 발차기, 그리고 명치를 향한 발차기 두 번…….

“피하기만 하면 소용없잖아.”

패시가 겨우 선공을 멈췄습니다.

“난 궁수라고. 화살을 만들 때 말고는 단도를 써본 적이 없어.”

“얼마 전에 사과 껍질 깎는 데도 썼잖아.”

“으윽. 그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게 재밌어?”

[훅!]

패시의 오른 주먹이 바람을 일으키며 관자놀이를 빠르게 스쳐지나갔습니다.

“뭐야, 잘만 막잖아.”

저도 모르게 단도의 칼등으로 패시의 팔을 막고 있었습니다. 무의식중에 한 거라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만 느낄 뿐 머리는 텅- 비었다가 띵- 하고 현기증을 일으켰습니다.

“트레져 헌터로서는 폴 나이티에 필적하는 천하의 엑시델 크로네스테가 의외로 싸움엔 약하군.”

“그러니까 너 같은 원티드 헌터를 안 하고 트레져 헌터로 살지.”

혈안왕에게 까지 놀림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단도를 집어넣었습니다.

“벌써 그만 두는 거야? 한 번 밖에 막지 않았잖아.”

“대신 한 대도 안 맞고 다 피했잖아.”

처음에 서있던 문 옆쪽으로 미련 없이 걸어갔습니다. 패시도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따라왔습니다.

“역시 아가씨는 영원한 장거리 담당이구나.”

“폴 말투 따라하지 마.”

“푸훗, 미안.”

드디어 패시의 장난이 끝났습니다. 소드마스터가 격투술까지 구사하다니, 정말 초긴장했습니다. 사람을 구석 끝-까지 밀어 넣는 패시의 무서운 장난은 다신 당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평생 패시에게 당해온 치니비에게 안쓰러움이 아니라 존경을 느낍니다.

“아까 무슨 돈 얘길 한 거야? 과외료는 버려두고, 정보료는 그냥 넘길 수 없는데.”

치니비가 잊고 있던 핵심을 깊숙하게 푸욱 찔렀습니다.

“일단 진정 좀 하고 보자.”

벽에 기대서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습니다.

마침 혈안왕과 킬 씨가 치니비를 불러서 치니비는 꼬마 아이마냥 그들에게 갔습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그들과 잘 어울려 지냈습니다.

“치니비는 자기를 피떡으로 만든 장본인이 혈안왕이란 걸 기억하고 있나?”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않잖아.”

치니비가 순간순간 단순하게 산다는 것 정도야 일찍이 알고 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스승인 레베카 씨의 영향인 것 같습니다. 뒤끝 없는 좋은 태돕니다. 저랑 자주 투닥대지만 항상 금방 풀리는 것도 그 때문이죠.

“진정 됐어?”

“재밌는 거 가르쳐 달라고?”

“캐스트 이피머스와 관련된 거라면 흥미를 갖고 들어야지.”

“그 분이 이쪽을 보고 있는데 지금 말해?”

“흐응. 일부러 지뢰 밟을 필요 없잖아.”

패시도 제 옆에 편하게 앉았습니다. 그리고 리바이브를 정신없이 구경하고 있는 치니비를 제 아들 보듯이 바라봤습니다. 제가 볼 땐 캐스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임기응변이었습니다.

“폴의 말대로 비스 성녀는 스스로 ‘마(魔)’가 된 걸까?”

혼자 사색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 싶더니 철학적인 문제까지 생각한 모양입니다.

폴이 자신의 본명과 정체를 밝힐 때 비스 성녀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스스로 ‘악’에 물들어 스스로 ‘마’가 된 세이버의 딸을 스스로 만든 어둠에서 구해달라는 얘기였습니다. 마음이 약한 존재일수록 쉽게 부정적인 것에 취할 수 있다는 옛 대현자의 말에 딱 맞는 표본인 셈입니다. 그녀의 과거를 직접 본 적 없는 제겐 웃기지도 않는 비유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