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6 치니비! 리버스!
드렌필드에 비정상적으로 가득한 독초에 취해 잠시 열병을 앓았습니다. 성전 드렌필드가 사라진 후유증을 몸소 겪어보니 빨리 윌랜드로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다행히 소원대로 생명의 숲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몇 분 만에 열병이 나았습니다.
“뉴노멀족이라 윌랜드의 힘이 몸에 잘 받나보다.”
패시의 말이 상당히 그럴듯했습니다.
“세이버까지 없어졌다는 소문에 분위기가 장난 아니야.”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마자 물품을 정리하고 확인하는데 레베카 씨가 왕궁에서 보낸 서찰을 흔들어 보였습니다.
“병사들의 동요가 심했나요?”
“헤케온이랑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어수선하지 않아. 그래도 불안한 표정은 감추지 못하지.”
“수고하셨어요.”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주 소문은 ‘세이버의 바닷물이 오염되면서 기형인이 생겨났다’였습니다. 괴수가 나타나는 것보다 괴물이 되는 것이 더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요.
[푸드득]
“잘했어.”
데스마크가 주변을 정찰하고 돌아왔습니다.
“레베카 씨가 제자리에 없어도 알아서 잘 찾아오네요.”
“원래 훈련이 잘 된 애들은 이 정도는 기본이야.”
레베카 씨는 데스마크를 머리부터 등을 따라 꽁지까지 길게 쓰다듬었습니다. 자식이 있으면 자식도 저렇게 예뻐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난 가서 윌-프로텍터나 챙겨야겠다.”
“그러고 보니까 그 네 명, 어떻게 지냈어요?”
“뭐, 별 거 있나. 새 리더는 뽑지 않았지만 조직을 해체할 생각은 없나봐. 나름 씩씩하게 잘- 지내던데.”
“그래요?”
리더 비스테스 씨와 동료 키스밋의 장례식 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싸우다 죽었다는 얘기를 듣더니 자세한 건 묻지 않고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끝까지 생명의 숲에 남아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입니다. 안 그래도 자리를 비울 때 그들이 빠지면 어떡하나 걱정했거든요.
“그럼, 가볼게.”
“네.”
레베카 씨를 밖으로 보내고 무기고와 식료품 창고의 정리를 마쳤습니다. 저 대신 어떤 병사가 한 덕분에 일이 적었지만 손을 대긴 대야 해서 힘깨나 썼습니다.
창고에서 나오는데 치니비와 마주쳤습니다. 폴과 같이 숲의 서쪽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점심도 안 먹고 여태껏 정리하고 있었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점심때가 조금 지나있었습니다.
“좀 늦게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또, 또.”
패시가 제 말버릇을 지적하며 나타났습니다. 자동적으로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받아. 레베카 씨한테 창고에 있단 얘기 듣고 왔어.”
파초 잎으로 만든 주머니 안에는 주먹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 주먹밥을 먹으며 일리안 쌍둥이와 폴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세계수를 기준으로 생명의 숲 북서쪽에는 숲이라 부르기 애매한 넓은 초원이 하나 있습니다. 정강이 중간까지 오는 풀이 융단처럼 깔려 있고 몸집이 작은 동물이 제일 많은 곳입니다. 초원의 일부는 아이리스 군락지인데 생명의 숲에만 있다는 하얀 아이리스도 드물게 자랍니다. 체이서스 전체에서 희귀종이라는 붉은 아이리스도 있습니다.
[부슥]
아이리스 사이에서 붉은 시니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그러다 저희를 발견하자마자 잽싸게 도망쳤습니다.
“하얀 아이리스 구군, 붉은 아이리스 꽃잎, 은방울꽃 줄기, 로즈 퀸 꽃잎, 수국 뿌리. 맞지?”
세계수와 플리의 심부름으로 다섯 가지 재료를 찾았습니다. 세계수는 플리와 다르게 토양의 성격을 바꿔 다른 식물이 자라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저희가 직접 찾아야 했습니다. 숲을 큐브처럼 부분을 통째로 움직일 수 있지만 가급적 하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건 저희도 반대했습니다. 병사들이 놀라거든요. 혹시나 미아가 생길 수도 있고요.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아주 잠깐밖에 안 될걸?”
세계수가 가르쳐준 재료로 만들 약은 환각제의 일종으로 현기증을 유발시키고 집중력을 저하시키는 효력이 있습니다. 카오스를 통해 드렌필드와 세이버를 쥐락펴락하는 비스 성녀에게 대항하기 위해 보조 수단으로 만들기로 했습니다.
“나나 키니는 약발이 안 받는 체질이라 윌랜드의 비약이라도 잠깐이 고작일 거야. 순간뿐이라 해도 충분해. 우리만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
폴은 성전들의 적극적인 지원, 적극적인 참여가 난세를 바로 잡아 줄 거라고 강조했습니다.
세계수가 몇 번이나 카오스를 열려고 했지만 비스 성녀가 단단하게 봉해놔서 소용없었다고 합니다. 윌랜드와 생명의 숲을 포기하고 억지로 열면 그 충격으로 체이서스 전체가 빨려 들어갈 지도 모른다는 얘기에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비스 성녀의 힘을 약화 시키거나, 그러지 못하면 다른 쪽으로 비틀어서 카오스를 여는 게 최선책이라 했습니다.
“아이리스 군락지가 대책 없이 넓어도 이것들 꽃 색이 눈에 확 띄니까 금방 찾네.”
치니비가 하얀 아이리스의 구근을, 패시가 붉은 아이리스의 꽃잎을 가져왔습니다. 그것들을 받아서 은방울꽃 줄기가 들어있는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여기서 플라타너스가 보이는 쪽으로 가면 로즈 퀸하고 수국이 있댔는데……. 저쪽이다.”
키 작은 폴이 길은 잘도 찾아냈습니다. 조그만해서 잃어버리지 않을까 했는데 폴의 나이를 생각하면 쓸데없는 걱정이었습니다.
“로즈 퀸의 꽃잎은 좀 많이 챙길까?”
“왜?”
“로즈 퀸의 꽃잎으로 만든 향수는 진정 효과가 있거든. 치니비가 이성을 잃으면 써볼까 하고.”
꽃잎에 상처가 나지 않게 조심했습니다. 그래도 벨벳처럼 부드러운 촉감에 기분이 좋았습니다. 촌스럽지 않은 짙은 분홍빛은 근처의 붉은 장미보다 화사하고 고급스러워 보였습니다.
“아가씨는 장미가 좋은가봐?”
“싫지는 않아. 왜?”
“표정이 환해서.”
“그럼 찌푸리고 있어?”
주머니를 열어서 폴에게 내밀었습니다. 폴은 근처에서 캔 수국의 뿌리를 조심스럽게 넣었습니다. 세계수가 각 재료의 위치를 자세하게 가르쳐준 덕분에 금방 심부름을 마쳤습니다.
“엑시델. 아까 말한 향수. 효과 좋아?”
치니비가 애니시릴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응.”
“됐다. 자기 의지가 약한 녀석은 그런 거 써도 안 먹혀.”
“케엑.”
패시가 치니비의 목에 팔을 감아서 확 조였습니다. 쌍둥이라지만 패시는 이성을 잃고 변한 치니비에 많이 예민했습니다. 아니, 지나치게 신경 쓴다는 쪽이 좀 더 정확한 것 같네요. 특별 관리하는 것 처럼요.
“리버스라고 했던가?”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치니비가 눈을 크게 뜨고 제 앞으로 바짝 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습니다.
“전에 한 번 패시가 그렇게 부른 적 있어.”
치니비는 벙 뜬 얼굴을 하더니 울상을 짓고 또 다시 멍 한 얼굴을 했습니다. 마지막은 일 년치에 해당하는 긴 한숨이었습니다.
“다중 인격자 중에 인격마다 이름을 다르게 붙이는 사람이 있다더니 바로 옆에 있었군.”
“응.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거야. 난폭한 제 2의 나는 그 이름을 무지 싫어하지만.”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인격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아이처럼 굴어야 한다니 골 때리는 예방법입니다. 본성은 저 만만치 않게 자기중심적이고 타인 멸시적이라 피터 팬 증후군 같은 언행은 아무래도 힘들 겁니다. 그래도 개인 감상을 하자면, 가끔 비치는 뚱한 얼굴이나 개구쟁이 같은 말은 나름 귀여우니까 어른답지 않다 해도 봐줄 수 있습니다. 치니비 본인도 익숙해 하고요.
“대대로 두 번째 인격에 붙이는 이름이야.”
“아, 맞아. 지어주신 게 아니라 가르쳐주신 거였지.”
“대대로? 다중인격이 유전이야?”
“광기가 집안 내력인 경우가 있잖아. 그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우리는 한 세대 걸러서 광기의 인격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 그 두 번째 인격에 초대 조상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례고.”
일리안 쌍둥이도 평범한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마법도 쓸 수 없고 신체능력이 뛰어나지도 않은 뉴노멀족에게 특별한 무기가 있다면 피로 계승되는 광기입니다. 뉴노멀족 출신 중에서 소드마스터가 아니면서 유명한 전사라 하면 대개 광기를 가진 자입니다. 눈에 뵈는 게 없고 무적 돌진 하여 승리를 거머쥐는 거죠. 하지만 광기를 가진 자는 말로가 불운합니다. 흔히들 광기에 먹혀 죽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피 속에 흐르는 광기가 생전의 영광에 대한 보상을 챙기는 거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재밌네.”
딥데어족에겐 없는 일이니 폴이 흥미를 가졌습니다.
“당사자한텐 심각한 일이야.”
폴의 머리를 꾹 짓눌렀습니다. 너무 세게 눌렀는지 폴은 두 손으로 폭을 감싸면서 파르르 떨었습니다.
“구성원 대부분이 광인인 것보단 낫지, 뭐.”
“우린 한 세대에 한 명 뿐이고 그것도 격대로 나타나니까 얌전한 축에 속해.”
일리안 쌍둥이의 말대로입니다. 광기가 계승되는 가문을 저주받은 가문이라고도 하는데 광기의 정도가 심한 가문에 붙이는 말입니다. 가문 구성원 대부분 혹은 일부가 어렸을 때부터 광기에 씌어 죽어가는 형태나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여지없이 광기 속에서 자아를 잃고 살아야 하는 형태가 대표적입니다. 광기가 드문드문 나타나는 가문은 그들의 광기에 저주라고 붙이지 않습니다.
“광기로 유명한 페셀로네 가에 비한다면…….”
위에 언급한 형태 중 후자에 해당하는 하급 귀족 가문입니다.
“일란성 쌍둥이인데도 한 명만 광기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거야?”
“아까 말한 ‘한 세대에 한 명’과 ‘격대 계승’은 우리 가문의 피의 규칙이거든.”
“뉴노멀족의 광기가 무작위로 생기는 게 아니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로 규칙이 있었군.”
폴은 점점 더 흥미를 가지고 눈에 생기를 머금으며 치니비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치니비는 아카데미에서 질리도록 실컷 당한 시선이라 거북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 인격에 짓는 이름이 정해져 있구나. 근데 왜 하필이면 초대의 이름이야?”
“리버스 일리안에 대해 들은 적 있을 텐데?”
이름과 성을 붙여서 생각하니까 누군지 금방 생각났습니다. 그 사람이 일리안 가문의 초대라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하지만 뉴노멀족의 역사를 모르는 폴은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뉴노멀족의 전설적인 영웅이야. 어둠의 시대였던 다에그 기에 타국의 침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지. 광기의 전사 중 모범으로 손꼽히는 12퀄리티 중 한 명이고.”
“다에그 기라고? 너네 장수 가문이었어?”
보통 ‘12퀄리티’에 놀랄 텐데 폴은 그들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뭐, 예상한 반응이긴 했지만요. 이름난 가문 중에 1000년 넘게 작위와 명성을 그대로 유지한 가문은 많지 않잖습니까.
[쿠구구궁]
먹구름 없는 맑은 하늘에서 낮고 탁한 천둥소리가 났습니다. 멀리서 들려온 소리였습니다.
“윌랜드에도 체이서스의 불균형이 나타나기 시작하나 본데?”
드렌필드와 세이버는 이미 뒤죽박죽이 됐고 윌랜드와 플리도 그 여파로 조금씩 기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윌랜드의 변화의 시작은 이상기후였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태아닌 우박, 오로라의 출현, 기습 강우 등 각지에서 이상 기후 때문에 피해가 속출했습니다.
“광기가 본인에게 좋을 거 없지만 당분간은 써도 될 것 같아.”
“그러면 엑시델. 네가 내 광기를 진정시켜줄 거야?”
“응? 내가? …잠깐, 그렇게 기대의 눈빛을 보내지 마.”
역시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는 부담스럽더군요.
“농담, 농담. 하……. 난 언제쯤 초대처럼 광기를 조절할 수 있을까?”
치니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매번 광기에 휘말리는 자신을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래도 광기를 물려받은 자가 하필이면 왜 자신인지, 그런 비관은 하지 않더군요.
“최소한 할아버지처럼 비참해지지는 마라.”
“또 그 얘기. 아주 날 압박 속에 죽여라.”
일리안 쌍둥이의 조부는 광기를 견디지 못하고 일반 광인들처럼 생을 마감했나 봅니다. 광기가 두 번째 인격으로 있는 경우엔 광기 때문에 죽을 가능성이 아주 적은데 말입니다. 드문 케이스가 가까운 사람이라 일리안 쌍둥이가 더 부담스러워 하는지도 모릅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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