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5 윌랜드의 절규!
“크읏. 왕궁 군대는 전멸할지도 몰라.”
심판단 전원이 생명의 숲에 나타났습니다. 나머지 두 성전이 모두 숲에 있으니 당연한 일입니다.
대표들과 소드마스터에 비해 전투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왕궁 군대는 심판단 앞에서 차근차근 죽어갔습니다.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지브릴의 제자들이 지원병으로 온 덕분에 대책 없이 밀리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동료 몇몇을 더 데려오긴 했는데 드렌필드 내부도 잔뜩 엉망이라 소수의 지원이 고작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수라도 심적으로 큰 힘이 된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화르르륵]
심판단은 생명의 숲에서 가장 효과적인 전투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숲이 생소한 그들이 매일 숲에서 지낸 덕분에 자잘한 돌멩이 하나의 위치도 몸으로 익히고 있는 자들을 상대하려면 거치적거리는 것을 없애면 되는 겁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숲을 태워버리면 되는 겁니다.
“치니비, 위!”
[서걱]
[쿵!]
치니비는 테스 덕분에 위에서 덮쳐온 하프 데몬을 공중에서 처리했습니다.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한 자리에 서서 팔만 휘두르는 방식으로 최대한 적게 움직였는데 한계에 다다랐는지 허리를 꼿꼿이 펴고 검에 묻은 피를 털었습니다.
“엑시델. 만약 내가 정말 미친 짓을 하려고 하면 내 다리를 쏴서 말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굵은 나뭇가지에서 지상을 향해 화살을 퍼붓던 제게 혹시 모를 뒷일을 맡겼습니다. 미소 하나 없는 비장한 얼굴과 긴장 때문에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가 제 심장 박동까지 빨라지게 했습니다.
“그냥 날뛰어. 오늘만큼은 패시도 봐줄 거야.”
“그럴까?”
[쾅!]
[우두둑]
제 옆에 있던 나무가 마법 때문에 부러졌습니다.
“제길.”
다른 쪽에서 퍼진 불길이 제가 있는 나무도 먹기 시작했습니다. 가까운 곳에 적당한 나무가 남아 있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지상으로 내려갔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발을 떼기 직전에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화살 몇 발을 쐈습니다.
“죽…….”
[푹, 푹, 푹]
뒤에서 제가 지상으로 내려오길 기다린 심판단원은 하늘에서 잔인하게 떨어진 화살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내가 엄호할 테니 어서 영역으로.”
“부탁해.”
테스의 엄호를 받으며 세계수를 향해 힘껏 질주했습니다. 사방에 즐비한 싸움 소리와 뜨거운 열기, 매캐한 연기 그리고 볼품없는 시체가 제 사고를 흩트렸습니다. 휘말리지 않으려고 정신 차리라는 자기 암시를 수없이 걸었습니다.
“크릉!”
“읏.”
한 순간 바로 코앞에 심판단원이 나타났습니다. 급하게 발로 땅을 끌었지만 달리던 속도 때문에 바로 멈추지 못하고 그와 부딪혔습니다.
“엑시델!”
[뻑!]
“흐익!”
상대에게 양팔을 잡힌 상태라 고개를 뒤로 젖히는 묘기로 테스의 발을 피했습니다. 어차피 심판단원이 저보다 키가 커서 테스가 절 신경 쓰지 않고 충분히 그의 머리를 걷어찰 수 있었지만, 그래도 찰 면적이 넓으면 더 편하잖아요. …솔직히 이건 핑계고, 그 때 왜 그랬는지 저도 모릅니다.
“얼른 가!”
테스는 절 먼저 보내고 나서 그에게 한 대 맞고 비틀거리는 심판단원을 마저 손봤습니다.
세계수의 영역에 들어간 순간 아직 그곳에는 불이 번지지 않은 사실에 안심했습니다. 세계수 주변의 넓은 풀밭이 불밭으로 편한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심장이 철렁거렸습니다. 그건 세계수에게 생명의 숲을 유지할 힘조차 남지 않은 것을 의미하니까요.
영역엔 폴, 패시 그리고 혈안왕이 낯익은 얼굴과 그 외 하프 데몬 몇몇을 상대로 혈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폴의 상대는 낯익은 얼굴 중 한 명이었고 패시와 혈안왕은 나머지들을 상대했습니다.
나머지들 중 낯익은 얼굴 1인을 향해 화살을 쐈습니다. 그녀라 불러도 상관없는 그는 마법으로 화살을 막았습니다. 한 때 왕궁 수석 기사로 군림했던 터라 윌랜드의 보배와 같은 소드마스터를 상대하면서도 갑자기 끼어든 제 화살 하나는 그에게 위협거리도 못 됐습니다.
“이피머스 양이 전력으로 싸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네.”
별 거 아닌 한 마디가 캐스트의 움직임을 붙잡았습니다. 그에겐 별 거 아닌 한 마디가 아니었으니까 효과가 있었겠죠.
[챙!]
패시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캐스트의 검을 쳐냈습니다. 저 역시 그 순간을 기회 삼아 캐스트의 왼쪽 무릎과 오른쪽 어깨에 화살을 한 발씩 명중시켰습니다.
“본명을 부르는 게 예의일까 평소대로 부르는 게 예의일까? 골라봐. 아리아 이피머스 양.”
캐스트의 정수리에 크로스 보우를 바짝 겨눴습니다.
“그 이름은 어디서 알아냈지?”
“내가 비스 성녀, 아니지 라나 클라이네 오리에드의 계보를 조사했단 얘기 못 들었나봐? 그 계보에 시종의 이름도 같이 있잖아. 나같이 유능한 헌터가 그 정도도 못 알아낼까.”
제가 캐스트를 상대하고 있을 때 패시와 혈안왕이 심판단원을 거침없이 해치웠습니다. 패시의 눈부시게 화려한 검술과 혈안왕의 파괴력 넘치는 리바이브 솜씨가 제 눈을 통해 뇌로 들어와서 ‘최강’이라는 두 글자를 새겼습니다.
“한 눈 팔면 안 되지.”
[취악!]
갑자기 물기둥이 솟아 올라왔습니다. 그 속에 갇혀 제가 포로가 되는 꼴이 됐습니다.
“엑시델!”
패시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렸습니다. 물속이 공기 중에서보다 소리가 잘 전달된다더니, 그 말을 실제로 체험할 줄은 몰랐습니다.
“읍…….”
한 가지 더 체험한 건, ‘뉴노멀족은 물속에서 숨 쉴 수 없다’였습니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도 물기둥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습니다.
“엑시델? 엑시델 크로네스테!”
“나보다 그 애가 우선이야? 메피 오빠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
간드러지는 목소리는 폴을 ‘메피 오빠’라고 친근하게 불렀습니다.
“그 앨 놔라.”
화가 실려 있는 낮고 무서운 목소리.
“캐스트. 겁먹을 필요 없어.”
“그. 앨. 놔라.”
한 단어씩 분명하게 끊어 말하는 그의 목소리.
“메피 오빠가 신경 써야할 건 하찮은 피조물이 아니라 위대한 성전이잖아.”
“아리아 이피머스. 널 죽이기 전에 그 앨 놔라.”
물기둥 안에서도 폴의 오라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뒤이어 비스 성녀의 히스테릭한 외침이 들렸습니다.
“아악! 캐스트, 그 년 죽여! 어억.”
폴이 비스 성녀의 목을 한 손으로 쥐고 힘을 잔뜩 줬습니다. 캐스트는 생각할 필요 없이 물기둥을 없앴습니다.
“주인님!”
[촤락]
“쿨럭, 쿨럭.”
“괜찮아?”
패시가 바로 달려와서 부축해줬습니다. 겨우 숨통이 트였기 때문에 말 대신 고개로 대답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주인님에게서 그 추악한 손…….”
[휘리릭-]
리바이브가 캐스트의 눈앞을 지나갔습니다.
비스 성녀는 폴이 손에 힘을 빼자마자 뒤로 한참 떨어졌습니다. 계속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진심으로 불쾌했습니다.
“그래도 너한테는 최대한 손대지 않으려고 했는데 네가 화를 자초하는구나.”
“조그만 아이의 손이 이렇게 위협적일 줄은 몰랐어.”
“네가 그만두지 않으면 더 위협적일 거야?”
“뭘 그만두란 거야?”
여유 있는 미소가 비스 성녀의 얼굴에 가득하게 차오르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뭔가를 알아챈 폴은 세계수 쪽으로 잽싸게 고개를 돌렸습니다.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아.”
붉은 나이트 드레스를 입은 비스 성녀가 세계수의 가지에 앉아있었습니다. 성녀복을 입고 있던 처음의 비스 성녀는 물거품으로 변해 땅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주도면밀하군.”
“메피 오빠는 너무 똑똑해서 뭘 해도 금방 알아차리잖아. 이번엔 친애하는 분들의 눈도 속여야 하고. 그래서 얼마나 열심히 머릴 쥐어짰는데.”
비스 성녀는 천천히 세계수의 줄기를 쓰다듬었습니다.
“간사한 계집이구나.”
[구구구구구구]
생명의 숲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영역을 빼고 숲의 곳곳을 그림 퍼즐처럼 섞었습니다. 영역 바깥쪽에서 예상 밖의 해괴한 일에 동요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카오스를 열고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으면 그간의 악행을 용서해주마.”
플리도 세계수를 거들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악행이요? 저의 사랑스런 아이들은 혁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아이들?”
“응. 아이들. 세이버가 날 만들고, 드렌필드가 오빠를 만든 것처럼 우리가 저들을 만들었잖아. 그러니까 소중한 아이들이지.”
비스 성녀의 눈동자는 황홀함으로 빛났습니다. 두 팔로 자신의 몸을 꼭 끌어안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습니다. 비뚤어진 사랑을 퍼붓는 미친 어머니였습니다. 여느 어머니처럼 무한한 사랑을 조건 없이 퍼주지만 그 방식이 대책 없이 비틀어진 사랑이었습니다.
“난 지금 세대의 하프 데몬을 만들지 않았어.”
“무책임해. 어엿한 창시자면서.”
“그래서 정리하려는 거야. 내가 손대지 않았는데 태어난 결과물들을.”
“결과물이라니 너무 하잖아. 얼마나 착한 아이들인데. 난 그 아이들에게 새 세계를 줄 거야. 우리 아리들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말이지.”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새로운 세계가 그거였냐?”
포르이 분노가 최고조로 솟구쳤습니다. 전 패시의 팔을 꼭 붙잡았습니다.
마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제 눈에는 그들이 기싸움을 하고 있는 것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지브릴의 말을 빌리면 세계수의 힘 때문에 생명의 숲 외곽으로 밀려났지만 거기서도 폴과 비스 성녀 그리고 두 성전의 마력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단순한 기싸움이 아닌 겁니다. 있는 걸 다 내건 겁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비스 성녀가 느닷없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습니다.
“카오스를 여는 금기는 한 가지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푸욱!]
비스 성녀의 시선이 캐스트로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캐스트가 어느새 주워든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습니다. 비스 성녀가 자신이 직접 손쓰지 못할 사태를 대비해 캐스트의 목숨을 걸고 캐스트의 육신에 금기술을 건 것이었습니다. 그녀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았던 그녀의 시종은 주인이 시킨 일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취아악!]
심장에서 붉은 피가 솟구쳐 나왔습니다. 점점 피의 색이 탁해지더니 검은 피가… 카오스가 나왔습니다. 캐스트의 심장이 카오스로 통하는 입구가 되어 카오스를 토해냈습니다. 세상 어느 검은 색보다도 검고 어두운 색이었습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4 백 번 듣느니 한 번 겪어라! (0) | 2009.03.20 |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4.5 [외전3]넝마 조각이 되다! (0) | 2009.03.20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6 치니비! 리버스! (0) | 2009.03.20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7 전망대, 그 아래에! (0) | 2009.03.20 |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8 방 안에서! (0) | 2009.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