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4 백 번 듣느니 한 번 겪어라!

★은하수★ 2009. 3. 20. 16:52

D-4 백 번 듣느니 한 번 겪어라!

 

달콤한 잠을 깨우는 무례한 것은 태양의 눈부신 햇살도 실크보다 부드러운 바람도 아니라 황폐해진 생명의 숲을 통째로 뒤흔드는 지진이었습니다.

“일어났구나.”

성전 윌랜드는 비스 성녀에게 쓰려 했던 비약을 만지작거리며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밤새 보초를 선 패시와 텍스트리터 씨는 그의 옆에서 갑주를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그거 엄청 셌어. 잠이 확 깰 정도로.”

“골이 다 울리네.”

치니비도 머리를 감싸며 일어났습니다. 뒤이어 밤의 종족을 뺀 대부분이 차례차례 일어났습니다.

“아아, 좋지 않아. 불쾌한 손님이 올 거야.”

윌랜드는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얌전히 쭈그려 자고 있는 폴을 지긋이 바라보더니 다가가서 옆구리를 살포시 밟았습니다. 살. 포. 시. 꾹. 꾹. 꼼꼼하게 밟았습니다.

“무슨 짓이야?”

“언제까지 잘 셈이야?”

“난 지금이 한창 잘 때라고.”

폴은 상체를 일으켜 세우고선 턱이 빠지도록 크게 하품을 했습니다.

“아무튼 파탄적인 그 성격……. 으아아.”

“보태준 거 있어?”

윌랜드는 폴의 머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렸습니다. 상대가 누구건 간에 마이페이스를 유유히 고집하는 폴의 천적이 바로 윌랜드였습니다.

생명의 숲의 지주, 세계수가 따뜻하고 포용력 있는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실제로는 굉장히 거친 괴짜입니다. 네 성전 중에서 유일하게 드렌필드의 아들을 쳇바퀴 속 다람쥐처럼 가지고 놀 수 있는 엄청난 위인입니다.

“난 그분을 설득하러 가야 하니까 네가 책임지고 여기 있는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알. 겠. 지?”

“으, 응. 물론 당연히 그래야지.”

남이 시키는 일은 웬만해선 순순히 안 하는 녀석이 단번에 수긍했습니다. 덕분에 윌랜드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라고 하셨는데, 성전보다 높은 분이 계신가요?”

역시, 패시 일리안.

“절대 방관만 하는 무책임한, 평소에는 쓰잘데기 없는 골칫거리가 한 분 있지.”

경멸적인 어조로 웃어른 되는 자를 실컷 비방했습니다. 그래도 악설에 일가견 있는 제가 들어본 바에 의하면, 감정을 절제하고 좋게 말하려고 노력한 것 같습니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거든요. 저보다 더 한 독설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한 번 터놓고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고까지……. 이건 아주 개인적인 취향이니 신경쓰지 마시기를.

“설득할 수 있어?”

“해야지. 라나 녀석, 나보다 마력이 강해서 혼자는 힘들다고. 무리야 무리. 그리고 사태가 이 지경까지 닥쳤는데 그분이 안 움직이고 배기겠어?”

“그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야?”

폴은 걱정 때문에 한숨을 쉬었지만 저는 윌랜드의 당당함에 반했습니다. 제가 꿈꾸던 이상적인 성격입니다!

윌랜드는 다시 하늘을 보더니 구름의 움직임을 읽고 바람의 움직임을 쫓았습니다. 심상치 않은 흐름을 상당히 언짢아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자리에서 막 일어난 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찌르듯이 가리켰습니다.

“뭐, 뭐야?”

폴은 잔뜩 긴장하고 다음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윌랜드는 무언의 눈빛만 보이고 나서 사라졌습니다.

“괜히 쫄았잖아.”

드렌필드의 아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저 폴을 쥐고 흔들다니 대단해.”

지브릴이 어느새 일어나 있었습니다. 밤의 종족인 그녀의 제자들도 일어나서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죄다 타버려서 나무 그늘도 없는데, 역시 빛에 저항력이 강한 종자들이었습니다. 불쾌해 하는 기색 하나 없었습니다.

“언제 일어났어?”

“방금. 윌랜드가 가진 치유의 힘과 회복의 힘 전부 감탄스럽지만 성격이 제일 끝내주는데?”

“응. 그래서 윌랜드를 이상 모델로 삼고 열심히 단련할 거야.”

“푸훗! 그거 괜찮네.”

저는 한껏 작지만 큰 포부를 드러냈는데 지브릴은 반 장난 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살짝 기분 나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죠. 사람마다 시각도 취향도 다 다르니까요. 물론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 있지만 전 그 틀과는 연이 없으니 아주 독특하게 보이는 겁니다. 아마 절 이해해 주는 건 레베카 씨 한 명 뿐일 겁니다.

“무슨 비린 냄새… 이거 피 냄새잖아.”

킬 씨의 뛰어난 후각이 불길한 징조를 가장 먼저 눈치 챘습니다.

“설마.”

폴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그리고 윌랜드가 뭘 당부한 건지 바로 감을 잡았습니다.

“탑 실드.”

[쏴-]

하늘을 향해 방어막이 쳐지자마자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습니다. 폭풍우 다음으로 내리치는 강도가 세다는 ‘지나가는 소나기’였습니다. 그런데 소나기 치고는 불길했습니다.

“하늘에서 피가 내리다니…….”

피의 소나기가 체이서스의 위기를 상기시켰습니다. 방어막이 조금이라도 늦게 쳐져서 혈우를 맞았더라면 피비린내에 현기증이 나기 전에 모두가 피를 뒤집어쓴 광경에 놀라 현기증이 났을지도 모릅니다.

“이건 뭐 재앙이나 다름없군. 아, 성전에 문제가 생기면 재앙이 일어난다고 했지.”

테스의 냉소적인 미소가 피의 소나기만큼 괴기스러웠습니다.

비린내 나는 붉은 비는 약 1분을 세차게 내리더니 지상에 불운의 흔적을 남기고 나서 조용해졌습니다. 시커먼 재의 땅 위의 붉은 피는 완전히 눈 버리는 광경이었습니다. 세상 어느 졸작도 그만큼 눈을 더럽히진 못할 겁니다.

“쉽게 얘기해주고 가면 어디 덧나?”

폴은 방어막을 해제하고 자리에 없는 윌랜드를 향해 툴툴 거렸습니다.

“피 비린내 때문에 코가 마비되겠어.”

“그러게. 다른 냄새는 전혀 못 맡겠는데.”

후각이 제일 예민한 몬데비언족이 누구보다도 불편해 보였습니다. 그에 비해 피에 거부반응은커녕 제일 궁합이 잘 맞는 딥데어족은 냄새 때문에 미간을 찌푸리는 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쏴-]

“젠장.”

게릴라성 강우도 아니고 이번엔 완전히 피의 소나기에 푹 절었습니다. 이상 기후의 농간에 제대로 당했습니다.

“모든 물이 피로 변한 건 아니겠지?”

“그건 최악 중의 최악이야.”

“말이 씨가 된다고 입 조심해.”

치니비의 소년과 같은 순진한 발언을 패시와 제가 거의 동시에 짓눌렀습니다. 안 그래도 속으로 그와 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저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심장이 철렁거렸습니다.

“어차피 다들 씻어야 하니까 확인하러 갈까?”

짓궂은 폴은 꼭 확인 사살을 하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텔레포트로 이동해 간 강은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서 확인 사살에 실패했습니다.

“여긴 생명의 숲 밖인 것 같네.”

얼굴과 팔을 먼저 씻고 기분이 좀 나아지자 주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정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가 몇 개 있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부러진 나무도 더러 보였습니다.

“숲 밖에 있는 강 중 제일 가까운 데로 온 건데 분위기가 별로다?”

폴은 자신의 잘못된 장소 선정에 유감을 나타냈습니다.

혈안왕도 그의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습니다.

“꼭 폭풍이 쓸고 간 것 같은데?”

“으응. 그런 것 같아. ……으음, 패시! 혹시 여기 헤이븐 백작의 영지 아니야?”

윌랜드는 뉴노멀족이 알아본다고, 치니비는 멀리 보이는 볼품없이 변한 성을 보고 저희가 있는 곳을 알아냈습니다. 강둑에 올라가서 주변을 세세히 살피던 패시는 한숨을 쉬면서 내려왔습니다.

“헤이븐 백작의 영지가 맞긴 한데, 여길 초토화시킨 건 폭풍 중에서도 예사롭지 않은 놈이 분명해. 원래 여기는 흔히들 ‘폭풍’이라고 말하는 자연재해와는 거리가 먼 곳이니까.”

패시의 말이 신경 쓰이고 궁금하기도 해서 직접 강둑으로 올라가 봤습니다. 건물이 무너진 형상, 주변을 어지럽히는 잡동사니의 위치들 등 성질 더러운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었는지 곧장 알 수 있었습니다. 그냥 폭풍보다는 회오리바람이었습니다. 그것도 크기가 어마어마한 회오리바람이 백작의 영지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윌랜드가 이 정도니 다른 나라들은 상상 이상으로 최악의 시나리오가 계속되고 있겠지.”

“그냥 편하게 드렌필드라고 말해도 돼.”

“맘 아파서 입 밖으로 안 나온다, 왜?”

지브릴은 폴을 노려보면서 으르렁 거렸습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야?”

텍스트리터 씨가 폴과 지브릴 사이에 끼어들었습니다. 그의 뒤에는 레베카 씨와 윌-프로텍터의 소드마스터 4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어. 윌랜드가 이 세계의 신을 데려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고작이야.”

“정말 신이 존재하는 건가?”

“물론 존재하지. 그러니까 키니가 얌전히 성녀인 척 지냈지. 대신관보다 더 신과 가까운 존재로 조용히 살 줄 알았는데 뒤통수나 치고. 하……. 여하튼 신은 어느 순간에든 방관자야. 하지만 신의 최초 피조물인 성전이 설득하러 갔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거야. 우리는 그 후에 신의 움직임에 따라 대처하면 돼.”

솔직히 성전은 피조물보다는 신에 가깝죠. 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사실은 윌랜드가 열심히 씹은 ‘그분’이 ‘신’이었다는 겁니다. 폴이 성전에 대해 뒷담화를 하는 거랑 윌랜드가 신에 대해 뒷담화 하는 걸 동급으로 취급해도 될까 하고 안 해도 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면 대표 외의 인물들은 없어도 되겠군.”

“틀린 말은 아니야.”

폴은 지브릴의 말에 동조하더니 패시를 힐끗 쳐다봤습니다. 패시는 그 눈짓을 알아봤습니다.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황도가 좋겠지. 텍스트리터 씨. 저 대신 황제께 그 동안의 일을 말씀드려 주시겠습니까? 폴이 황도까지 보내줄 겁니다.”

“우릴 내치는 것 같아 썩 내키진 않지만, 별 수 없지.”

텍스트리터 씨는 패시의 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소드마스터들의 의사를 확인했습니다.

이로써 기존 대표들과 개인 고집으로 남은 혈안왕을 제외하고, 윌랜드의 소드마스터들과 지브릴의 제자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이 후에 멀리서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들판을 휩쓸고 지나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