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2 키니의 선택!

★은하수★ 2009. 3. 20. 16:53

D-2 키니의 선택!

 

비스 성녀가 카오스의 지배권 때문에 힘을 거의 소진하여 무기력한 사이에 체이서스가 세 성전을 속박에서 해방시켜줬습니다. 자유로워진 성전들이 원래의 힘을 회복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공간이 뒤틀렸었는데 라나가 또 뭘 꾸미는 건가?”

성전 세이버는 자신의 딸이 쉴 새 없이 어긋나고 있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 아이가 한 게 아니야. 카오스가 한 거지. 아하하. 세이버, 너만한 팔불출도 없을 거야.”

“팔불출이 아니라 자식 사랑이 특출한 거라 해줘.”

눈물이 그렁그렁?

“성전이 사람다워 보일 때도 있구나.”

“이성도 있고 감정도 있으니까 그런 게 아닐까?”

일리안 쌍둥이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사고를 깨는 장면을 봤으니 반응이 비슷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보다 지금 키니의 수명이 얼마나 남았어?”

강제로 드렌필드에게 안겨 있는 폴은 그 팔에서 벗어나기 위해 꼼지락 거리면서 세이버를 눈으로 질타했습니다. 붉은 눈동자에 살기가 차올랐습니다.

“아직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 생각해.”

누가 들어도 괜찮지 않다고 여길 대답이었습니다.

“폴과 반대로 비스 성녀 쪽은 성전과의 유대가 끊어지면 시종이 아니라 세이버의 딸이 위태로워집니다. 격리 기간이 폴의 시종보다 길지만 격리 동안 비스 성녀가 힘을 남발하면 기간이 점차 줄어듭니다. 참고로 유대를 유지시켜주는 매개체가 바로 시종입니다.

“시종이 죽었으니까 더 위험하겠군.”

“말~ 하~ 지~ 마~”

플리가 아픈 가슴을 예리한 한 마디로 푹 퍼냈습니다.

“아하하, 보아 하니 네 딸이 아주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어. 이런, 카오스의 지배권을 다시 가지려나 봐.”

체이서스는 날개를 천천히 펄럭거렸습니다.

“패시, 어쩐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아?”

“확실히 좀 전 보다 분위기가 무거워졌어. 아니, 무거워진 게 아니야. 누군가가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아.”

“뭔가가 ‘쿠궁!’하고 나타날 것 같단 말이지.”

일리안 쌍둥이는 주변을 둘러보며 경계했습니다. 찰흙을 아무렇게나 쌓아 놓은 듯한 이상한 덩어리들뿐이었지만 그들 말대로 누군가가 저희를 누리는 것 같은 긴장감이 신경을 자극했습니다.

“단장이 화낼 때와는 다른 느낌이군.”

지금에서야 서술하지만, 혈안왕과 심판단원들은 비스 성녀를 단장이라고 부릅니다.

“비스 성녀가 화내면 어떤데?”

“어떻다고 꼭 집어 설명할 수 없어. 감으로만 느낄 수 있는 것을 언어로 요구하는 건 억지라고.”

혈안왕은 그의 커다란 손을 제 머리 위에 턱 얹었습니다. 제 머리가 그의 손바닥에 다 들어갔습니다. 곰 발바닥처럼 손바닥 전체에 굳은살이 박여 있는 터라 느낌이 그닥 좋지 않았습니다. 손이 아니라 돌멩이가 얹어진 느낌이었습니다.

“비스 성녀가 화를 내면 주변이 싸- 해지는 느낌이야, 어니면 심장박동수가 급상승하는 느낌이야?”

“굳이 꼽자면 후자 쪽이지.”

“화가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면 물불 안 가리는 타입이군. 주변 사람이 많이 피곤해지지.”

“훗. 부정하지 않겠어.”

“시달려봤군.”

“이래 뵈도 간부보다 더 측근이었으니까.”

점점 자연스럽게 원티드 헌터 현역 시절의 표정을 지었습니다. 심판단을 나온 직후엔 계속 표정이 굳어 있기만 했는데 점차 다양해졌습니다. 물론 그의 표정 중 90%가 딱딱하게 굳은 무표정이지만 10%의 변화가 있냐 없냐는 정말 차이가 큽니다. 사람의 분위기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의 공포가 느껴졌다가 사라졌습니다. 그 충격 때문에 심장박동이 미칠 듯이 빨라졌습니다. 진정하느라 애먹었습니다. 순간의 히트는 침묵도 만들어냈습니다. 그 한 순간에 모든 대화가 정지됐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공포의 주인을 알고 있는 초대 신이었습니다.

“아하하. 좀 만 있으면 세이버의 딸이 카오스에게 먹히겠는걸. 상대가 안 돼.”

“그게 웃으면서 말할 거리야?”

윌랜드라면 멱살이라도 잡았을 텐데 세이버는 발만 동동 굴렀습니다. 제자리에서 안절부절 못하다가 좌우를 방정맞게 오가더니 어디론가로 새려는 걸 플리가 붙잡았습니다. 그것도 팔이 아니라 뒷덜미를 움켜잡았습니다.

“뭐 하는 거야?”

“너야말로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 잊었어?”

“알아. 그런데 내 딸이 지금 위험하다잖아.”

아마도 세이버의 눈에는 비스 성녀가 괴로워하는 모습이 환상으로 보이고, 귀에는 신음 소리가 환청으로 들렸을 겁니다. 플리는 세이버의 마음은 잘 알겠으나 지금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세이버를 놔주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해야 할 일? 하하하. 뭔가를 꾸몄었구나? 뭘 하려고 했어?”

체이서스가 직접 플리의 손을 떼고 세이버를 다독였습니다. 세이버는 불안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별 거 아니야. 어차피 하지도 못해. 세이버가 그 꼴인데 뭘 어떻게 해.”

“아하하하, 혹시 세이버가 엄마로서 딸을 달래는 작전은 아니겠지? 정말 그거라면 화낼 거야.”

체이서스는 밑도 끝도 없이 생긋 웃었습니다.

“비슷하게 때려 맞췄다고 하긴……. 아니야, 그런 유지한 거.”

플리가 손사래를 쳤습니다. 제가 볼 땐 체이서스의 미소를 의식한 언행입니다.

“아하하. 그렇지? 여기 백성들도 뛰어난 지성으로 빼어난 책략을 구사하는데 이들의 모범의 되어야 할 너희가 그것 밖에 안 되면, 하하, 체면이 말이 아니지.”

“그럼 잘나신 분은 앞으로 어쩌실 건지?”

“아하하. 우문이야. 당연히 힘으로 밀어붙여야지.”

초 단순한 대답에 윌랜드의 표정이 화… 려하게 이…상하게 일그러졌습니다. 아마도 윌랜드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대답다운 대답을 원했을 겁니다. 저도 그러길 바랐고 모두가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짧은 시간을 지켜본 바에 의하면 체이서스가 그럴 리 없다는 걸 눈치 채야 했습니다. 별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고 체계적으로 배열하면서 겉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번듯한 결과만 보여줄 뿐입니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가르쳐야지.”

거짓말쟁이.

“진심이야?”

“아하하. 세이버의 딸이 단번에 죽을 수도 있어.”

절대적인 힘. 순수하게 힘으로만 1 : 1로 붙으면 당연히 체이서스가 비스 성녀를 갈대 꺾듯 꺾어버릴 겁니다.

“정말로……. 내 딸을 죽일 거야?”

“그 아이는 이미 죽을 각오를 했어. 그런데 어미가 각오가 안 됐다니. 하하하. 어떡하지?”

“…아니야, 아니야. 난 충분히 각오했어.”

세이버는 아주, 아주, 아주 슬픈 얼굴을 하고 드렌필드에게 기댔습니다. 드렌필드는 기꺼이 어깨를 빌려줬습니다.

“체이서스는 어쩌려는 걸까?”

전 드렌필드에게서 빠져나온 폴과 키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굽히고 조용히 물어봤습니다. 폴은 체이서스의 눈치를 한 번 보더니 고개를 가로 저였습니다. 뭐, 다른 사람의 머릿속을 들춰보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고, 폴이라고 해서 다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근처에 녀석들이야.”

지브릴이 한 곳을 매섭게 노려봤습니다. 붉은 눈동자가 유난히 붉어 순수한 피로 만든 구슬로 보였습니다.

“아하하. 내가 너희를 데려온 건 이 대대적인 사건의 대단원을 보여주기 위해서지 싸움터로 또 다시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야.”

체이서스가 지브릴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그는 날개를 세 쌍을 동시에 위협적으로 활짝 폈습니다. 그리고 압도적인 살기를 내뿜었습니다. 연신 웃는 얼굴과 그 살기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얌전하고 순진한 사람이 화내면 제일 무섭다는 말과 잘 맞았습니다. 온몸에 전율이 흐를 만큼 오싹한 살기에 심판단 전원이 그 자리에 멈춰 섰습니다. 한 발 짝만 더 오면 죽이겠다는 포스를 신랄하게 풍기는데 어떻게 감히 대들겠습니까.

“누가 왔나 했더니 당신이었습니까?”

비스 성녀는 잃어버린 홀 대신 긴 창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우웅, 우웅]

“하하, 난 오면 안 되는 곳인가?”

초대 신의 사각뿔이 은은한 빛을 뗬습니다. 세이버의 딸이 몸을 움찔 거리는 걸 보니 뿔의 빛은 대단한 마력을 지녔나 봅니다.

“절대 방관자가 개입하는 건 제 계획에 없거든요.”

“아하하. 네가 하고 있는 일을 보면 내가 끼어들지 않을 거라고 보장할 수 없잖아. 최소한 의심은 했어야지. 하하, 안 그래?”

비스 성녀가 와들와들 떨었습니다. 두려워서 떠는 모양새가 아니었습니다. 몸이 많이 약해져서 병에 걸린 듯 했습니다. 그래도 심판단의 우두머리라는 자존심 때문에 양 옆의 손을 뿌리치고 꿋꿋이 혼자 두 다리와 창으로 버티고 섰습니다.

“이 와중에도 카오스와 권력 다툼을 하다니……. 어지간한 고집이 아니야.”

성전 드렌필드가 혀를 찼습니다.

그 때 플리는 몬데비언족의 피가 흐르는 심판단원을 심리마법으로 진정시키고 있었습니다. 몬데비언족 순혈보다는 덜 통하겠지만 그들도 엄연히 체이서스에서 태어난 혼혈 생명체니까 플리의 심리마법이 먹혔습니다. 그들의 나머지 반쪽인 소울족의 피는 성전 세이버가 다스릴 수 있는데 세이버가 망연자실한 상태니 플리 혼자 그들 전부를 상대했습니다. 전부라 해도 15~20명 정도였습니다.

일리안 쌍둥이는 손을 검의 손잡이에서 뗄 줄 몰랐습니다.

“체이서스랑 비스 성녀가 서로 쳐다보고만 있어.”

“체이서스의 상큼하게 웃는 얼굴과 비스 성녀의 병약한 무표정이 노려보는 것보다 더 무서운데?”

“텔레파시로 협상 아니면 언쟁을 하고 있는 거야. 대- 충 체이서스가 일방적으로 협박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어느 샌가 폴은 테스에게 가서 무동을 타고 있었습니다. 심판단 쪽을 더 잘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마법을 사용해도 되겠지만 주변의 여러 명이 마력을 발산하는 통에 정신이 없어서 자기 혼자나마 자제해야겠다 싶어서라고 합니다.

“신과 성전은 하프 데몬을 모두 죽일까?”

“심판단과 상관없는 하프 데몬이 훨씬 많아. 죄 없는 이들까지 죽일 위인들이 아니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폴은 테스의 어깨 위에서 테스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습니다. 테스가 동생 혈안왕을 염두하고 한 말이라는 것쯤은 뻔히 알 수 있었습니다.

잠시 약해졌던 위화감이 다시 심장과 신경을 자극할 정도로 세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비스 성녀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 이상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위화감이 약해졌습니다.

“어떻게 된 거야?”

심판단 전체도 잠들 듯이 쓰러졌습니다.

“역시 힘이 만땅인 성전과 신이 손쓰니까 한 번에 제압하는군. 우리가 여태껏 생고생한 게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단하게 처리하고 말이지.”

폴의 입에서 ‘이야-’하는 감탄사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다음 순간에 날아온 지브릴의 공격을 받아쳐야 했습니다.

“너도 비스 성녀와 같은 성전의 자식이면서 왜 게임이 안 되는 거야?”

“쟨 성실 노력파, 난 빈둥 대충파. 쟨 세이버의 딸, 난 드렌필드의 아들.”

“그것도 핑계라고 대는 거냐?”

“음, 체이서스 식으로 대답하자면……. 아아아, 변명이라고 할 수 있지.”

부들부들 떨리는 지브릴의 주먹은 곧장 폴의 머리를 쥐어박을 것 같았습니다. 폴이 테스의 어깨 위에 있어 머리를 높은 곳에 위치한 덕분에 지브릴이 팔을 풀스윙으로 휘두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하하……. 세이버.”

체이서스가 조용히 세이버를 불렀습니다. 세이버는 멍한 눈으로 체이서스를 쳐다봤습니다.

“네 손으로 끝낼래, 내 손으로 끝낼까? 하하하하. 네 딸이…… 날 죽이고 저들을 위한 세계를 만들겠대. 그리고 이 카오스도 가지겠대. 아하하하. 창조주로서의 책임이라는군. 그렇다면 나도 창조주로서 네 딸을 어떻게 해야겠는데 선택권은 네게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