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 윌랜드! 드렌필드! 세이버! 플리! (完)

★은하수★ 2009. 3. 20. 16:54

D-1 윌랜드! 드렌필드! 세이버! 플리!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 성전은 균형을 잃고 깨져가는 세계를 바로 잡는데 힘썼습니다.

독초가 무성하고 괴수가 뛰놀던 드렌필드, 이상기후와 지진이 쉴 새 없이 이어지던 윌랜드, 오염된 바다와 해저 화산의 폭발에서 기형으로의 변형까지 죽음의 바다로 변해가던 세이버, 천재지변은 기본이고 두꺼운 먼지층으로 해와 달이 보이지 않아 어둠뿐이던 플리.

겨우 사태가 진정되고 숨어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밖으로 나왔습니다. 곳곳의 부서진 건물과 수많은 사상자는 체이서스에 살고 있는 성전들의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뒷정리에 동참하고 서로를 도왔습니다. 게으름 피우는 이 한 명 없이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한 번 깨진 질서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는 수년의 시간이 걸리지.”

초대 신이 그의 권좌로 돌아가기 전에 성전들과 대표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입니다.

성전 세이버의 각오를 듣고 비스 성녀를 살려두기로 한 후, 그는 저희 모두를 체이서스로 옮기고 카오스로 통하는 모든 문을 굳게 잠갔습니다. 하지만 지배권은 그대로 카오스에 남겨뒀습니다. 자신이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살아 있는 동안엔 누구에게도 카오스의 지배권이 넘어가지 않도록 할 것이며 카오스로의 출입도 금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카오스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다시 예전처럼 방관만 할 거라 박았습니다.

체이서스로 돌아온 대표들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고 살아남은 심판단은 슈볼츠아웃 가에서 맡기로 했습니다. 어둠의 실험에 자금을 대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던 슈볼츠아웃 가가 이때부터 혼혈을 위한 복지시설을 만들고 혼혈을 후원하는데 앞장서기 시작했습니다.

“텍스트리터 씨는 만나봤어?”

“응. 헤시리스에 한 번 가보라고 계속 부추기는 통에 도망쳐 나왔어.”

일리안 쌍둥이와 저는 황제에게 마지막 보고를 하고 며칠 황도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소드마스터 중에서 텍스트리터 씨만 황도에 머물고 있어서 저 혼자 인사차 다녀왔는데 좋은 얘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언제까지 네 자리를 비워둘 수 없잖아.”

“언젠간 돌아갈 거야. 근데, 치니비는?”

“지붕 위에 있어. 별자리 구경하는 걸 좋아하거든. 이렇게 평화로운 게 오랜만이니까 당연히 취미생활을 만끽하고 싶겠지.”

의외의 새로운 사실이었습니다. 근 한 달을 같이 있으면서 치니비가 밤하늘을 감상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별자리를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어제도 거의 밤 새다시피 했는데 오늘은 일찍 쉬지.”

“놔둬. 피 보는 일 아니면 하고 싶은 대로 두는 편이 나.”

살짝 웃는 패시의 얼굴엔 여유가 보였습니다.

“흐응. 패시가 아가씨를 독점하고 있는 거야?”

“히익!”

“좀 평범하게 나타나지 그래? 문은 저쪽이야.”

창문에 폴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나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문에 이상한 비명까지 지르고……. 아무튼 방심할 수 없는 별난 녀석입니다.

“아, 폴!”

폴의 방문을 눈치 챈 치니비는 사다리는 내버려 두고 과감하게 뛰어내렸습니다. 워낙 단련된 몸이고 지붕이라 해서 딱히 높은 것도 아니라 그 정도는 가뿐하게 해냈습니다. 하긴, 제가 치니비였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아가씨, 착한 아이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미안, 아가씨는 착하지 않지.”

[우득]

“왜 온 거야?”

[딱!]

손가락 관절 소리를 한 번 내준 다음에 폴의 이마에 땅콩을 시원하게 먹였습니다.

“너무해. 난 손님이라고.”

“창문으로 방문하는 손님이 어딨어?”

이마를 감싼 손을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데 어느 순간 폴이 사라져서 팔이 앞으로 쑥 나갔습니다. 텔레포트로 집 안으로 들어온 겁니다. 창틀에 몸을 기대고 한숨을 푹 쉰 다음에 뒤를 돌아봤는데, 폴 녀석, 패시에게 딱 달라붙어서는 불쌍한 강아지 눈으로 동정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있잖아, 통하는 사람한테 해.”

패시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온 치니비를 가리키자 폴은 금방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박자 좀 맞춰주면 안 돼?”

“큭큭. 패시는 자기가 내키지 않으면 안 해. 무슨 일로 왔어? 드렌필드는 지금이 한창 복구에 힘 쏟을 시간이잖아.”

“땡땡이-.”

폴은 치니비가 준 의자에 털썩 앉았습니다. 짧아진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 앞뒤로 교차하며 흔들었습니다.

“성전의 아들이란 놈이 모범을 보이진 못할망정 땡땡이친다고? …라고 말하면 실례겠지. 그치? 눈 따로 입 따로 노시는 분.”

제가 폴을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트레져 헌터로 살면서 곧잘 부딪치며 지냈는데 그 눈을, 그 뻔한 거짓말을 못 알아차리겠습니까. 배실배실 웃는 낯을 보고 제 생각이 맞다고 확신했습니다.

“우리가 도와줄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 그냥 들른 거야. 드렌필드의 심부름으로 윌랜드한테 다녀오는 길이거든.”

치니비가 폴에게 갓 데운 따끈한 우유를 한 잔 내밀었습니다.

“마법으로 이동하면서도 중간에 샛길로 빠져?”

“못할 거 없지.”

“한가하구먼.”

“아가씨는 내가 온 게 그렇게도 못마땅해?”

긍정하기도 부정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질문이었습니다. 전날 밤에 헤어지고 나서 만 하루 만에 보는 거라 딱히 반가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민폐 끼치는 불청객도 아니고. 그래서 그냥 입 다물고 있었습니다.

“치니비-. 나의 델 아가씨가 날 미워해.”

“어이, 야, 닭살 돋아.”

치니비는 폴의 응석을 받아주면서 키득키득 웃을 뿐이었습니다.

“마침 잘 됐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거든.”

“패시의 질문이라면 뭐든지 대답해드리지.”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패시 쪽으로 몸을 돌렸습니다.

“예상했다시피…… 지금 비스 성녀는 뭐하고 있어?”

성전 세이버가 비스 성녀를 가까이 두고 허튼 생각, 허튼 짓 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어차피 비스 성녀는 생명력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이라 당분간은 아무 것도 못하고 조용히 있겠지만 회복만 되면 또 뭐든 저지를 가능성이 충분했습니다.

“자고 있어.”

순진한 눈망울을 깜박이며 초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질문이 안 좋았어. 세이버는 앞으로 비스 성녀를 어쩔 셈이야?”

“아까 질문 괜찮았는데? 키니가 지금 자고 있는 건 세이버가 마법으로 재웠기 때문이야. 세이버가 만든 특수한 감옥 속에서 세이버가 깨울 때까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자게 될 거야.”

“그 다음엔? 한 번 자고 일어나서 변하는 사람은 없어.”

“아가씨, 우릴 단순하게 보면 못 써. 세이버는 긴 시간 동안 공들여서 키니의 정신을 초기화하려는 거야. 잠이란 최고의 안식이고 그 속엔 회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어. 키니가 할 회복은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정신의 회복, 그것도 태어나던 때로의 회귀를 뜻해.”

정신을 초기화 한다니 들어본 적 없는 말입니다. 아니, 인위적으로 정신을 처음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정신 이상 중에 어린 아이화 되거나 아예 백지화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남이 그렇게 만들고 싶어도 못합니다. 순전히 사고에 의해 우연히 혹은 스스로 마음을 닫아 버려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성전이잖아.”

토를 달 수 없는 분명하고 절대적인 답입니다. 평범한 기준에선 말도 안 되지만 세이버는 소울 족의 성전. 꼬치꼬치 따질 필요 없습니다.

일상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초롱초롱 빛났습니다. 꼬마 아이로서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듯 보였습니다. 손짓, 발짓 하나하나가 ‘난 아직 어린 아이에요.’라고 응석부리는 듯 했습니다.

“몇 년이 걸릴까?”

패시는 초점을 맞추지 않은 채 창밖을 멀거니 쳐다봤습니다. 보기만 해도 한탄이 쏟아질 정도로 망가진 세상이 과연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 의심했습니다.

“복구 작업이라고 하지만 내가 볼 땐 새로운 터를 닦는 거야. 복구라는 과거지향적인 표현보다는 새 건설이라는 미래지향적인 표현이 더 마음에 들어.”

일리안 쌍둥이의 의젓한 형은 비참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성전과 초대신의 도움을 받고 제 손으로 해낸 것이 없어 줄곧 찝찝한 기분으로 있더니 나름의 정리를 했나 봅니다.

“그렇군. 미래지향적인 새 시작이 훨씬 바람직하게 들리는군.”

“이 일을 계기로 새 달력을 만드는 걸까?”

“그럴지도 몰라. 아니, 그럴 걸?”

폴과 치니비가 머리를 갸웃 했습니다. 그러더니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멋대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지 마. 아무리 대사건 후에 연력이 바뀌어왔다지만 수습하기도 바쁜 와중에 연력 얘기가 먼저 나오면 어떡해?”

“델 아가씨, 뻑뻑하게 굴지 마.”

“치니비! 너까지 그렇게 부를래?”

“응!”

[뻑!]

가차 없이 주먹으로 한 대 갈겼습니다. 그 다음에는 폴의 멱살을 잡았습니다. 웃는 얼굴에 더 기분 나빠졌습니다.

“쌍둥이한테 이산한 거 가르치지 마-!”

“오~. 패시도 아가씨라고 불렀었나 보네.”

사람을 갖고 노는 게 그렇게 재밌나 봅니다. 확실히 남을 괴롭히는 일이 가해자 입장에서도 구경꾼 입장에서도 재밌지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눈 뒤집힌단 말입니다. 한 순간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화를 들쑤시는 건 일종의 고문입니다.

“아가씨는 아가씨잖아. 숙녀가 아닌 게 흠이지.”

“패시!”

 

투덕거리며 보낸 시간들. 지금 생각해 보면 즐거웠던 자유의 시간이었습니다. 헤시리스의 여왕으로 있는 지금. 몇 년에 한 번 겨우 볼까 말까하는 얼굴들. 이 글이 세상에 나가게 되면 그들은 곧장 헤시리스로 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