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3 우린 그를 체이서스라고 부른다!

★은하수★ 2009. 3. 20. 16:53

D-3 우린 그를 체이서스라고 부른다!

 

체이서스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나 신화라고 하면 모두 네 개의 성전에 관련된 것들입니다. 성전 얘기가 아니면 영웅이야기가 고작이고요. 그런데 어느 기록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신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성전보다 먼저 내어난 초대 신은 여러 명이었는데 신끼리의 큰 싸움 후에 한 명 밖에 남지 않았다합니다. 그 신은 성전을 만들기 전체 이 세상을 만들었고 후세대 신에 해당하는 지금의 성전에게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는 절대적은 방관자로서 네 국가와 네 종족을 관찰해 왔습니다.

“아하하, 이제 그 ‘절대 방관’이 깨졌네.”

이마에는 긴 사각뿔이, 등에는 커다란 백색 날개가 세 쌍이 있다는 사실 빼곤, 훤칠한 키에 깨끗한 흰 피부가 매력적인 미남이었습니다.

“저…… 윌랜드. 높은 분이라서 정중히 ‘모셔올’ 줄 알았는데 과감히 ‘끌고’오셨네요.”

실례되는 말이란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윌랜드가 그를 사슬로 칭칭 감고 나타나서 무례를 무릅쓰고 말한 겁니다. 이 기묘한 장면에 넋이 반쯤 나간 건 저 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존재를 알고 있던 폴이 제일 어이 상실했다는 표정이었습니다.

“암만 말해도 들은 척도 안 하는데 별 수 있나. 이 무책임한 분을 무슨 일이 있어도 높디높은 권좌에서 끌어내야 했으니 이 정도면 많이 얌전히 모셔온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건 너 하나야.”

“하하. 나도 이 정도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네가 드렌필드의 아들이지? 역시 어린 아이 모습이 잘 아울려.”

위대한 초대 신은 너무나 긍정적인 인성의 소유자였습니다. 하긴, 나타나자마자 한 말이 ‘이제 그 절대 방관이 깨졌네.’라는 천연덕스런 대사였으니 그의 성격에 대해 일일이 서술한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는 사슬을 쉽게 풀어내고, 아니 없애고 나서 주변을 천천히 들러봤습니다. 새벽에 강진으로 땅이 갈라지고 땅 위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잔뜩 어질러진 마을이 그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보기만 했을 뿐 그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도와줄 거야?”

폴은 초대 신, 체이서스에게도 서스름 없이 반말을 사용했습니다. 폴의 언어체계에는 처음부터 반말 밖에 없는가봅니다.

“아……. 세이저의 딸이 크-게 사고치고 있다지?”

“이게 웃으면서 말할 거이야?”

“아하하하. 윌랜드의 괴력과 엄청난 성격은 역시 세계 제일이야.”

“자꾸 그렇게 빙글빙글 웃고만 있을 거냐고!”

윌랜드가 체이서스의 뿔을 붙잡고서(!) 협박하듯이 밀어붙였습니다. 하지만 체이서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있지, 엑시델. 저거 보니까 생각나는 거 없어?”

지브릴이 제 뒤에 달라붙더니 그녀의 턱을 제 어깨 위에 받쳤습니다.

“어떤 거?”

“꼭 너랑 폴이 싸우는 것 같지 않아?”

말도 안 된다고 반박하려다가 순가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아서 좀 진지하게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있는 성질 다 부릴 때 웃는 낯으로 절 상대하면서 결국은 절 굴복시키는 위인이라면…… 패시와 폴입니다. 체이서스와 윌랜드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세상엔 닮은꼴이 존재한다잖아.”

“흐응. 그래도 뭐랄까, 분위기가 달라. 너랑 폴은 부부싸움, 저쪽은 부녀싸움.”

[빠직!]

“쓰을데 없는 소리일!”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습니다.

“반 장난, 반 진심이야.”

아무래도 제가 공인 장난감이 됐나 봅니다. 패시한테도 당하고, 폴한테도 당하고, 지브릴한테도 당하고……. 그나마 절 존중해주고 한 몫을 하는 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건 혈안왕 뿐이었습니다. 사는 게 참 서럽다고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체이서스께선 카오스를 열어주시는 것 까지만 하실 겁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정리될 때까지 모든 것을 도와주실 겁니까?”

윌랜드가 체이서스의 뿔을 붙잡고 혼자 성내는 중에 패시가 누구도 생각하지 않은 것을 언급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체이서스가 개입한다니까 모두들 당연히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윌랜드의 영리한 백성, 패시 일리안. 그대는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지?”

“신이란 당신처럼 방관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등 수동적입니까?”

“하하. 멋진 한 방이야.”

변함없는 밝은 표정이지만 패시를 맘에 들어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체이서스를 대하는 패시가 진심으로 존경스럽습니다.

“패시의 말이 맞아. 어디까지 개입하고 다시 방관하러 돌아갈 거야?”

“일단 카오스를 열고 성전들을 구출해야겠지? 아하하. 그 아이들이 날 보면 깜짝 놀랄 거야.”

다시 언급하지만 정말 최고로 긍정적입니다. 낙천적인 인물의 표본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을 겁니다. 늘 심각한 인물들과 어울려서 체이서스와 같은 캐릭터가 심히 부담스러웠습니다. 어떤 의미에선, 진정한 무적·최강·막강 영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혈안왕이 리바이브를 손에 쥐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가 심판단에 들어갔던 건 그저 자신과 동류인 자들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일이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거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 때마다 조금씩 드러나는 두려운 현실에 환멸을 느꼈습니다. 이제는 자신의 손으로 심판단을 부수겠다는 일념이 그의 사고를 지배했습니다.

“나도 시간이 필요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거든.”

체이서스는 그의 세 쌍의 날개를 한 번 펄럭였습니다.

“네 놈의 절대 방관이 깨졌으니까 그 진리가 맞는 말인가 보네.”

“아하하. 넌 언제까지 나한테 퉁명스럽게 굴래?”

“이 무책임한 화상이 진지해질 때까지.”

“난 항상 진지한걸.”

역시 체이서스가 일부러 윌랜드의 성격을 쿡쿡 찌르는 게 분명했습니다. 윌랜드는 건드는 대로 바로 반응이 나오니까 그게 재밌어서 계속 하는 겁니다. 윌랜드에게는 여러모로 동질감을 느낍니다.

[쿠구구궁!]

멀쩡한 하늘에서 천둥이 쳤습니다.

“카오스를 어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우선 이 이변을 먼저 정리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모두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드렌필드의 원로가 그녀다운 발언을 했습니다. 그녀는 어느 순간에나 그녀가 책임지고 지켜야할 그녀의 종족을 생각했습니다.

“하하, 그건 불가능해. 이 세계의 지배권을 후세대 신들에게 넘겼기 때문에 그 점에선 난 개입할 수 없어.”

“대체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뭐야?”

폴이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한숨 한 번에 복이 하나씩 나간대.”

“그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하하. 드렌필드의 아들은 확실히 드렌필드를 닮았어. 언제나 이성적으로 말해. 윌랜드. 꼬마 도련님을 보고 좀 배워. 넌 너무 감정적이야.”

“흥. 남이 사.”

체이서스는 그의 뿔을 천천히 문지르더니 근처 단단한 흙더미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손짓으로 주변에 방어막을 쳤습니다. 돔형의 거대한 방어막은 처음엔 옅은 푸른색을 띠다가 점점 무색화되더니 보이지 않게 됐습니다.

“세이버의 딸이 우릴 찾을 수 없을 거야.”

“대단해. 고난이도 마법을 아무 것도 없이 해내다니…….”

마법에 소양이 깊은 지브릴이 체이서스의 보호막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평범한 방어막인 줄 알았던 보호막은 고급 마법 중 하나로, 보호막이 무색으로 변한 순간부터 외부의 어떤 이가 천리안으로도 내부를 볼 수 없고, 텔레파시로도 내부인에게 도달할 수 없습니다. 보호막의 위치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설사 보호막의 근처에 오게 된다 해도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보호막 내의 평범한 풍경 뿐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보호막 내로 얼마든지 들어올 수 있지만 환각에 의한 모습만 눈에 비치고 환각에 의해 주변의 인기척이나 마력 등을 느낄 수 없습니다.

마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딥데어족이나 소울족이라도 체이서스의 보호막을 사용하려면 상당한 준비 작업과 충분한 시전 시간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홀, 오브, 크리스털 등 매개체도 필수입니다. 그만큼 고난이도 마법입니다.

“이건 이렇게 한 번에 금방 만들어내면서 카오스를 여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니?”

“하하하, 우문이야, 윌랜드. 이것과 그것의 질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고. 그리고 본디 자기 소유가 아니면 범접하기가 무지무지 힘들어.”

“꼭 카오스는 자신이 만든 게 아니라는 뉘앙스군.”

“와, 슈볼츠아웃 가의 혼혈 도련님은 아주 예리해.”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알아들은 체이서스의 청각이 더 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아하하,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내가 헷갈리지 않을까? 아하하하……. 쉬운 것부터 시작하지. 이 세계를 왜 체이서스라고 부르는 지는 이제 눈치 챘지? 카오스도 마찬가지야. 카오스를 만든 신의 이름에서 따온 거야. 그 규모는 이 세계와 비슷해. 초대 신끼리의 싸움 중에 만들어지고 결국은 완성되지 못한 채 무로 변해 버린 곳이지.”

체이서스는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표정이 진지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서장이 끝나기도 전에 폴이 그의 말을 막았습니다.

“카오스가 네 것이 아니란 건 알겠어. 그러면 어째서 키니는 그곳을 맘대로 열고 닫고 할 수 있는 거야?”

“아하하. 드렌필드의 아들은 옛날이야기를 싫어하는 구나. 흠. 감단해. 초대 신 카오스가 죽은 후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카오스의 지배권을 세이버의 딸이 갖는 중이라서 그래. 아직 그 아이가 완전히 지배하지 못해서 그 아이도 고생 좀 하고 있지만. 하하. 그래도 대단해. 카오스의 지배권을 벌써 반이나 차지했어. 역시 신의 자식다워. 다음 세대가 될 지도 몰라.”

그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성전의 딸이니 아들이니 하는 건 정확하게 말하면 신의 딸, 아들이고 그들도 신인 겁니다. 폴과 비스 성녀가 비정상적으로 오래 살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은 신으로서 신이라 부를 수 있는 신이 되기엔 아직 미숙한 것뿐입니다.

“완전히 세대교체를 위한 혁명 같잖아.”

저도 모르게 이 말을 내뱉고 나서 손으로 재빠르게 입을 막았습니다. 왕권교체를 예언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발언인데 너무 제 생각 속에 빠져 있는 바람에 혀를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체이서스보다 윌랜드가 더 민감해 할 발언이라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제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체이서스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의 잡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나쁘지 않은 표현이야.”

패시가 낮고 작은 목소리로 제 말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카오스로 통하는 문을 다룰 수 있었던 건 지배자가 없었기 때문이고 지금 그 문에 접근하기 조차 힘든 건 라나가 지배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허무한 진실이야.”

“하하. 솔직히 여기서 가장 허무한 건 나야. 카오스를 내 손으로 죽이고 나서 그의 세계도 모두 부수고 나니까 그 때서야 내가 엄청난 죄를 저질렀단 걸 깨달았어. 그래서 최소한 공간만큼은 남겨두고 지배권도 그 안에 숨겨두고 있었다고. 그걸 지배하기 위해 대들 이가 있을 리 없다고 확신하기까지 했는데. 아하하, 정말이지 태초에 저지른 죄가 끝가지 발목을 붙잡는다니까.”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다. 체이서스의 날개가 그의 표정 대신 축 쳐졌습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결론만 확실히 하자. 카오스를 열 수 있는 건 분명한 거지?”

“물론. …하하. 드렌필드의 아들, 난 시간이 필요할 줄 알았어. 세이버의 딸에게서 카오스의 지배권을 빼앗을 시간 말이야.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어. 아하하. 지금 당장 카오스로 들어가도 괜찮겠지?”

축 쳐진 날개가 금세 생기를 뗬습니다. 무서울 정도로 재기가 빠르다? 아뇨, 그저 행운이라 해도 될 만큼 타이밍이 좋았을 뿐입니다.

“갑자기 뭐야?”

체이서스의 변덕스러운 변화에 윌랜드는 못마땅해 했습니다. 지금 안 된다, 지금 된다 하면서 말을 바꾸니 멋대로 갖고 노는 것 같았을 겁니다.

“아하하. 세이버의 딸이 그동안 열심히 수련해서 실력이 늘었지만 아직 공간의 지배권을 갖긴 무리인가 봐. 조금만 갖고 있었더라면 괜찮았을 텐데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주체 못하고 전부 잃어버렸어.”

“잃어버렸다는 건 빼앗겼다는 거야?”

“아마도 공간에 지배권을 흡수당했을 거야. 우리도 까딱 잘못했다간 그렇게 되거든.”

윌랜드가 체이서스 대신 폴의 의아함을 풀어줬습니다. 그 사이에 체이서스는 보호막을 없애고-막은 보이지 않지만 발밑의 마법진은 눈에 보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습니다.― 카오스로 향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열린 문을 통해 칠흑과 같은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더니 모두를 천천히 감쌌습니다.

“이, 이게 뭐야?”

“잘못된 거 아니야?”

“아하하. 걱정들 말어. 이게 무사히 카오스로 들어가는 방법이야.”

두 공간 사이에 틈이 있어서 문을 잘못 열면 틈으로 빠져서 미아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반대편 공간을 직접 가져와서 그것을 따라 이동해야 합니다. 어둠이 저희를 감싼 건 카오스가 공간만 있는 곳이라서가 아니라 체이서스가 낮일 때 카오스가 밤이기 때문입니다. 공간 내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공간만 남았다고 해도 빛과 어둠, 낮과 밤은 있는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