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5 질리온, 강등되다?
트렌들리샤와 그 주변을 레플리카님에게 맡기고-협박이 따랐다- 성으로 돌아왔다. 바알님이 부지런해서 생각지도 못한 여유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쉬고 있을 땐 바알님도 쉰다는 이론은 없는 듯하다. 왜냐면 난 지금 집무실에서 쫓겨난 상태기 때문이다. 어쨌든 당분간은 일이 없어 보여서 성 안을 천천히 돌아다니는 중이다.
“여, 인간.”
“안녕하세요, 질리온님.”
질리온님의 얼굴보다는 팔이 없어서 펄럭거리는 왼쪽 소매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여타 상처는 마법으로 치료한 것 같은데 왼팔은 완전히 소멸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외팔로 살아야하나 보다. 그래도 정작 본인의 표정이 좋으니까 내가 일부러 팔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디 가?”
“그냥 돌아다니는 거에요. 아직 못 가 본 곳이 많거든요.”
“이봐, 인간. 여기가 마계라는 사실을 자각하라고. 어느 구석에서 어떤 놈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이야.”
방금 전 한 시녀에게서 들은 말이다. 그녀는 특히 서쪽 복도를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심약하고 호기심도 없는 내가 가지 말라는 데를 갈 리가 없다. 그리고 옛날이야기에도 많이 나오지 않은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금기를 어긴 인물들의 말로가 얼마나 비참한지. 뻔히 알고 있는데 이 내가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알고 있어요. 그래서 바알님이 심부름을 시킬 만한 곳을 골라서 길을 익히고 있었어요.”
“성실하구만. ……다 알지 않아? 나도 한가한데 카드나 하자.”
“예에?”
그 하나 있는 팔로 잘 끌고 가시네요. 반강제적으로 질리온님의 집무실로 끌려가는 중이다.
“질리온, 뭐하는 거야?”
“인간이랑 있잖아.”
가는 중에 장고나 파슈만을 만났다. 장관 중에서 최고의 해결사라고 불린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파슈만에게 구조요청을 해볼까 하는데 질리온이 너무 열심히 날 끌고 간다. 파슈만이 점점 멀어진다. 네, 그냥 그러려니 살지요.
“인간이랑 뭐 할 건데?”
흐억! 빠르다! 아니, 마족이니까 가능한 건가? 엄청난 경보다. 저 위에 있던 파슈만이 단 3초 만에 우릴 따라잡더니 나란히 걷고 있다. 공포 영화에서 귀신이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무섭기까지 했다. 마족과의 공동생활은 역시 심장에 좋지 않다.
“카드나 한 판 벌릴까- 하는데, 낄래?”
“카드라……. 오랜만인데.”
“나도 껴.”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바로 왼쪽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바람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질리온이 계속해서 끌고 가는 바람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멈춰 서지도 못했다. 장관 엘레나가 블루 로즈의 꽃잎을 연상시키는 단발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찰랑거리며 나타났다. 그녀는 공중에 살짝 떠서 발끝을 바닥에 스치며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갔다.
“역시 카드는 네 명이서 해야 돼. 안 그래, 인간?”
“아, 네…….”
물론 4인 기준으로 만들어진 게임이지만 꼭 4명을 맞출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뭐, 알아서들 끼다보니까 우연히 4명이 됐지만 난 빠지고 싶다. 지금 팔도 빠질 것 같고 다리의 종아리 근육이 팍팍 땅긴다. 내가 신체가 많이 부실하다는 걸 알고 있는 분이 너무 들뜨는 바람에 이 중요한 사실을 잠시 잊어버린 것 같다. 여하튼 카드를 시작하기도 전에 탁자 위로 쓰러질 것 같다.
우연히 만난 네 명은 질리온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탁자를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앉았다. 난 멀거니 볼 새도 없이 질리온이 우악스럽게 앉혔다. 오른쪽이 질리온, 왼쪽은 엘레나, 맞은편은 파슈만인데 내가 그들과 대등하게 앉아있다기보다는 그들에게 둘러싸요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마왕인 바알님이나 레플리카님과 같이 있는 것보다 더 거북하다.
“인간, 브릿지 할 줄 알아?”
[차각 차각 차각]
“두 명이 한 팀이 돼서 하는 거… 말인 가요?”
“응.”
[차각 차각 차각]
질리온은 마법으로 꽤 빠른 속도로 카드를 섞는다. 많이 해본 솜씨십니다… 라고 아부성 찬사를 해도 될 듯하다.
“에- 이. 그러면 너랑 한 편을 해야 하잖아. 포커로 바꿔.”
[차라락-]
질리온이 스프레드를 하고 있는 중에 엘레나가 오른손 검지를 퉁겨서 탁자 위의 모든 카드를 날려버렸다. 마법을 이런 사소한 데에도 쓰는 구나. 의미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공중에 가만히 뜬 카드 장처럼 나도 움직임을 멈췄다. 중력을 거스르고 공중 부양하던 카드들이 질리온의 손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마계에 와서 내 눈으로 직접 본 마법이라 하면 공격 마법, 이동 마법이 전부라 이런 소소한 기술은 마법이 아니라 마술쇼처럼 보인다.
“자신 없으면 자신 없다고 해. 이상한 핑계대지 말고.”
“누가 자신 없다고……! 너랑 같은 편을 하면 이길 게임도 진단 말이야.”
“여태껏 네가 져 온 게 나 때문이란 거야?”
“본디 원흉은 자각하지 못하는 법이지.”
양 옆에 있는 마족이 눈에서 불꽃을 튀기고 있다. 사소한 거리로 말다툼을 하는 건 남녀노소 종족불문 동일하나 보다. 아- 싫다. 나 때문은 아니더라도 가까이서 누가 말다툼을 하면 내가 불안해 진다고.
“좋-아. 포커로 해. 네 녀석의 실력이 얼마나 바닥인지 가르쳐주지.”
“헤-. 적어도 너한테는 안 져.”
[차라라락]
서로 열을 올리는 사이에 몰래 나가려고 조용히 일어나는데 질리온의 손에서 카드들이 날아와 자동으로 스프레드 됐다. 결국 얌전히 앉아서 양쪽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인가. 모처럼의 휴식시간이 우울해질 줄은 몰랐다. 신이시여, 절 구제해줄 생각은 없으시나이까.
“그러면 뭐라도 하나 걸지 그래?”
부추기시는 겁니까?!
“역시, 파슈만이야. …자존심 쌈이니까 진 녀석이 하루 종일 개 노릇을 하는 거야. 동의?”
“콜!”
개 노릇이라니요. 마왕의 장관씩이나 되시는 분들이 유치하게 다투더니 이젠 내기 카드로 넘어가는 겁니까? 파슈만은 구경하는 게 재밌을지 몰라도 난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불안하단 말입니다.
나 혼자 불안한 채로 카드가 여기저기 오간다. 몇 차례 카드를 뒤집고, 다시 스프레드하고, 또 섞고……. 어떻게 포커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손이 가는대로 움직이기만 했다. 분위기에 적응하면서 조금씩 제 정신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카드를 시작한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벌써 결판이 났다.
[쾅]
탁자 위로 머리를 떨어뜨린 마족은 다름 아닌 질리온이다. 자신도 이렇게 빨리 점수를 바닥낼 줄 몰랐나 보다.
“꺄아-. 질리온-. 오늘은 내 충실한 개가 되는 거야-.”
엘레나에게 좀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보기엔 둘이 실력이 비숫한 것 같다. 100점으로 시작해서 차근차근 깎아냈는데, 질리온이 먼저 ‘0’이 됐지만 엘레나 점수도 아슬아슬 하다. ‘14점’……. 파슈만이 96점, 내가 88점인 걸 보면 엘레나가 저렇게 신나할 이유는 없지 않나 싶다. 뭐, 나와 파슈만은 질리온과 엘레나의 내기에 들러리로 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냥 두자.
“으읏…….”
“첩보 대장 질리온……. 이 순간부터 나, 엘레나의 귀여운 개이니라. 오호호호!”
순간적으로 엘레나가 사디스트로 보였다. 소름끼친다.
“인간, 꽤 하던데?”
“아뇨……. 파슈만님에 비하면…….”
“이 두 바보들 보다야 훨씬 낫지.”
질리온과 엘레나가 자기들끼리 개니 뭐니 하고 있다고, 자기 말을 들을 새가 없다고, 막말하시는 군요. 솔직히 파슈만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친구들과 카드를 할 때면 브릿지든 포커든 뭐든 웬만해선 뒤로 밀린 적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질리온과 엘레나는 평균 이하로 못하는 것 같다. 카드가 운이 따라줘야 잘 풀리는 게임이라지만 매 판마다 최하위, 하위를 번갈아서 하는 건 파슈만과 내가 잘 한다기 보다는 그들의 실력을 의심해볼 만 하다.
“멍멍아, 짖어봐.”
“어이…….”
“짖으라고.”
“으…….”
내 눈이 착시현상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엘레나는 진정 사디스트다! 언제 손에 채찍을 챙겼냐고. 조금만 더 있으면 휘두를 지도…….
[휘익, 착!]
“자정까지 내 개잖아. 응? 질리온.”
망설임 없이 채찍을 휘두르는 사디스트, 아니 엘레나다. 다행히 바닥을 내리쳤지만 질리온의 바로 옆을 노렸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내 눈 앞으로 긴 채찍이 갔다 오는데 심장이 벌렁벌렁 거린다.
“질리온.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거야? 실망이야.”
“크읏. 개 노릇을 한다는 게……. 진짜 ‘개’ 노릇이었어?”
“이 ‘개’, 저 ‘개’ 다- 하는 거지. 이제 와서 무르려고? 안 돼-.”
살포시 웃는 눈은 앞으로의 즐거움을 무지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다. 질리온은 얼굴이 사색이 돼서는 식은땀까지 흘린다.
“자……. 우린, 이만 뜨자.”
정신차려보니까 질리온의 방 밖이다. 내 눈은 방문을 향하고 있고 파슈만은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다. 안에서 엘레나의 목소리가 새나오는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손잡이를 잡고 귀를 문 가까이 가져가는데 파슈만이 피식 웃는다.
“왜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해?”
“네?”
[쿠당탕! 콰과과광! 쿠광!]
엄청난 소리에 반사적으로 문에서 떨어졌다. 온갖 것들을 죄 부수는 것 같은데 분명 엘레나일 거다. 아마도 그녀의 채찍이 이 문 안쪽에서 사방팔방으로 춤추고 있을 거다. 엘레나의 ‘오호호호’를 배경음악 삼아서……. 등골이 오싹하다.
“엘레나는 말이야 정신줄 놓으면 맹수 조련사가 돼. 그 때 희생되는 맹수는 대부분 질리온이고.”
설마 이 사태도 상당히 일상적인, 평범한 일이라고 말씀하는 것인지 여쭙고 싶었으나 안에서 들려오는 파탄적인 소리 때문에 입만 뻐끔거릴 뿐이다. 세상에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산다지만 엘레나 같은 인물은 만나기 쉽지 않다. 행운이라 할지, 불운이라 할지, 당연히 ‘불운’이라 외쳐야겠지만, 당하는 상대가 내가 아니라 질리온이니까 그의 안전을 기원하며 난 슬며시 내 자리로 돌아가련다.
“전 절대로 저기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어떤 머저리가 엘레나의 괴팍한 성격에 휘말리고 싶겠어.”
“……. 파슈만님, 의외로 언어 사용이 걸 하시네요.”
“아, 쟤네한테만.”
파슈만만의 사람차별 방법이군요. 같은 장관직에 있어도 바보는 바보 대접을 확실하게 해주는 그대의 지론에 엄지를 치켜 올립니다. 그런 점을 배워야 하는데 말이지……. 난 너무 우유부단해. 아니, 그렇다고 막말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쿠과과광!]
“끼얏!”
이젠 질리온의 비명까지 들린다. 이 문이 열리기 전에 어서 여길 떠야겠다.
“흠……. 세일마글레도 없으니 이번엔 진짜로 자정까지 개 노릇을 해야겠군.”
“그렇… 군요…….”
세일마글레님은 장관들의 중화제 역할까지 하셨구나. 내가 대리라곤 하지만 그건 무리다. 절대 무리다. 마법을 쓸 수 없는 심약·빈약·취약·최약·부실·허실·비실한 인간이 무슨 수로 저 난장판 속에 뛰어들어서 말리겠냐고. 그저 모르는 척 지나가야지.
“바알님께 갈 거지?”
“네. 그래야죠. 일하는 것 보다 쉬는 게 더 피곤하네요.”
“아, 저 녀석들이랑 같이 있으면 별 수 없어.”
웃고 있는 얼굴이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건 파슈만도 피곤하다는 뜻일 거다. 앞으로는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조용히 내 방에서 휴식 시간을 즐겨야겠다. 자칫 잘못했다간 성 안에서 바알님의 부하 손에 죽을 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아-, 머리아파.
-추가 이야기
자정까지 엘레나의 개가 되는 페널티를 받은 질리온은, 채찍을 중구난방으로 휘두르는 엘레나를 피해 밤새도록 열심히 도망 다녔다나 뭐라나. 바알님도 골칫덩어리 엘레나를 방치하고, 주변인들도 제각기 알아서 그 둘의 술래잡기를 요리조리 피하면서 제 할 일만 했다는, 슬프지만 눈물은 안 나오는 이야기랄까?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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