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4 루시퍼, 개념 밥 말아 먹다?
이른 아침부터 바알님의 심기가 아주 많이 불편하다. 아침 식사 중에 마왕 루시퍼님이 긴급 방문(내가 좋은 표현으로 바꾼 거다. 바알님의 표현은 ‘망할 기습 침입’인데 억지로 갖다 붙인 것 같다.)을 하더니 점심때가 지나고 한창 오후인 지금가지도 바알님의 집무실에서 한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오늘은 바깥 업무가 없어서 진종일 집무실에만 있었는데 혹시 바깥 업무가 있었다면 루시퍼님은 거기까지 따라 움직였을까? 꼭 루시퍼님이 바알님을 감시하는 것 같아서 나도 심적으로 많- 이 불편하다. 서류를 나르는 내내 눈치 보이고 말 한 마디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진다.
“바알님, 내일 오전에 세인트폴리아로 가시기로 돼 있는데, 지금 다녀오실래요? 남은 것들은 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거니까요.”
거짓말이다. 세인트폴리아 건은 전에 기각하지 않았는가. 루시퍼님의 눈을 피해 어디든 피신가라고 최대한 돌려 말한 거다. 바알님이 밖으로 나가면 난 일거리를 들고 내 방으로 가서 편하게 끝낼 수 있다. 루시퍼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서 대리 주제에…….”
아마도 뒷말은 ‘상관한테 명령이나 하고.’ 아니면 ‘상관하고 맞먹으려나 하고.’일 거다. 말은 그래도 진자로 기분 나빠하는 게 아니다. 마왕과 비서가 같이 움직이면 당연히 중요한 일(굳이 중요하지 않아도 일은 일)이니까 루시퍼님이 불편한 시선으로 쫓아오겠지만, 둘이 갈라서 움직이면 웬만해선 예측할 수 없다. 분명 바알님을 쫓아가겠지만 바알님이 설마 루시퍼님에게 당할까. 무능한 비서 대리가 알아서 성에 남으니 루시퍼님을 피해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거다.
“바알.”
루시퍼님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다. 줄곧 입을 다물고 앉아서 무거운 포스를 풍기고 있었는데 바알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때에 맞춰 입을 열었다. 레플리카님이 바알님보다 훨씬 가벼운 톤이라면 루시퍼님은 바알님과 비슷하다. 지금은 일부러 밑으로 깔아서 낮은 음이 청신경을 건들지만 원래 톤이 어떨지 충분히 감이 잡힌다. 흑마의 털 같은 머리칼과 어울리는 목소리다.
“혼자 도망가면 그 인간은 곧바로 시셰야의 결혼 축하 선물이 될 거야.”
“이 자식이…….”
아, 걸렸다. 단에 머리를 쓴 건데 뻔히 티 났나 보다.
“내 딸한테 그 정도 돈 쥐어 주는 게 그렇게 아깝냐?”
“겨우 축의금 받으려고 여기 죽치고 앉아 있는 게 시간 아깝지도 않냐?”
“브리싱가멘 때문에 안 주는 거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언급됐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바알님이 루시퍼님의 시선을 피한다.
“그건 절대 못 줘.”
브리싱가멘이라는 건 물건인가 보다. 바알님과 루시퍼님이 신경전을 벌일 정도로 꽤 진귀한 아니면 중요한 것인 듯하다. 내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바알님 표정이 주기 싫다는 표정이 아니라 씁쓸하고 우울한 표정이라는 거다.
“이젠 너한테 필요 없잖아.”
“그래도 안 돼. 특히 시셰야 같은 왈패한테는 더더욱 안 줘.”
아니, 바알님. 시셰야 공주님은 루시퍼님의 딸이란 말입니다. 아비 앞에서 딸을 ‘왈패’라고 하면 어떡합니까. 틀린 말은 아닐지 몰라도 예의상 그러면 안 되지요.
“세상에 내 딸만한 애가 어디 있다고!”
루시퍼님, 팔불출로 낙찰. 비열·잔학의 표본이고 중상모략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달이 그렇게나 사랑스러우신지요. 나라면 양녀로는 절대 들이지 않고 친딸이었으면 부녀지간 연을 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을 지도 모른다.
“크읏. 성격, 얼굴, 몸매, 품행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잖아!”
어쩌면 시셰야 공주님은 내가 상상한 것 보다 더 대단한 분일지도 모른다. 물론 부정적인 쪽으로 대단할 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브리싱가멘이 어떤 건지 모르지만 뭐든 간에 그런 공주에게는 못 준다는 바알님의 주장에 나도 속으로 가담하련다.
“네가 세일마글레 때문에 눈이 너무 높아졌어.”
“입 다물어.”
지금 내 머리 위로 커다란 물음표가 떠오른다. 세일마글레님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 거지? -라는 질문은 뒤로 하고 바알님 주변 분위기가 극도로 무서워졌다. 루시퍼님이 뒤로 살짝 물러날 정도로 눈으로 화를 내고 있다. 아무래도 내 의문을 뒤로 하면 안 될 것 같다. ‘세일마글레’님이라는 존재는 바알님을 비롯한 여러 부분에서 꼬일 대로 꼬인 비밀 덩어리라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런 분한테 얽혀 들었단 말이지.
“됐다. 너랑 이 얘기는 더 이상 안 할 테니까 돈만 내놔.”
“야!”
바알님이 소리치는 이유는 별 거 아니다. 축의금을 달라는 루시퍼님의 태도가 꼭 수금 같기 때문이다. 저렇게까지 축의금을 받고 싶을까? 본인 결혼식도 아니고 심지어는 친딸도 아닌 양딸의 결혼식인데 너무 오버하는 것 같다. 게다가 루시퍼님이 직접 정해준 금액도 거의 중급 마족의 집 한 채 값이나 된다. 그 만큼의 돈을 같은 마왕에게 서슴없이 요구하다니, 저런 위인은 제 부하들에게 아주 쉽게 목숨을 요구할 거다. 무서운 자다.
“나한테 돈 맡겨놨냐?”
“내 놔.”
“이 자식……. 그래 주마. ‘돈 만’ 줄 테니까 먹고 떨어져.”
네, 제게 새로운 일이 생기는 군요. 금고로 가서 루시퍼님이 요구한 액수의 돈을 꺼내오는 것도 비서 대리의 일이다. 아무한테나 금전 업무를 시킬 수 없으니 말이다.
눈치껏 알아서 행동해야 한다는 나름의 책임감을 갖고 집무실을 나서는 도중에 하마터면 안면으로 바닥을 내리칠 뻔… 했다. 무릎을 먼저 굽히고 손으로 바닥을 짚은 덕분에 꼴사나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시선이 아래에 있으니까 내 옆에 누가 있는지 그의 다리와 발이 보인다. 그가 누군지 얼굴을 확인하기 전에도 알겠다. 뒷굽에 톱니바퀴를 단 특이한 부츠를 신은 자라면 루시퍼님의 비서, 드로키님이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손과 무릎을 털고 일어나는데 날 벌레 보듯 내려 보는 눈이 보인다. 그런 눈초리를 처음 받는 게 아니기 때문에 쉽게 지나쳤다.
“저급한 인간 주제에.”
그를 지나쳐 문을 열고 나가는 내 등 뒤에서, 경멸적인 어조로 말하는 드로키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싫어하고 경계하는 거다. 뭐, 인간끼리도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자는 경멸하고 배척하는데 인간과 마족끼리는 오죽 할까. 그것 때문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다. 마족이 인간을 싫어하고 인간이 마족을 싫어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내가 바알님 밑에서 그의 장관들과 같이 아무 탈 없이 잘 지내는 게 이상한 거다. 이런 사실을 일일이 상기할 필요 없는데도 주변에서 자꾸만 자극한다.
루시퍼님께 드릴 돈을 자루에 넣는데 뭔가 뒷골이 켕긴다. 누군가 감시하는 것 같이, 누군가 날 노리는 것처럼. 이 기분… 기억난다. 그 때랑 똑같은 느낌이다. 절대 돌아봐서는 안 된다고 온 신경이 경고하고 근육은 근세포 하나하나 일제히 굳어버리는 불쾌한 느낌. 이 기분을 잊을 리가 없다.
“바알의 장난감이 여기서 뭘 하는 걸까?”
역시 그다. 목소리도 분명 그다. 바알님이 찾고 있는 헬하운드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은 공포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은 살기가 숨통을 조여 온다. 도망칠 수 있는 길은 헬하운드가 막고 있는 저기 문 하나 뿐이다. 꼼짝없이 죽어야 하나……. 그건 싫다.
“세일마글레님.”
피어싱을 쥔 손도 세일마글레님을 부르는 목소리도 맹렬하게 떨린다. 심장이 터질 듯이 빠르게 뛴다. 머릿속은 이미 새하얗다.
“이번엔 무슨 일이야?”
시, 신기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린다.
“세일마글레님, 저…….”
“세이레?”
“아앗!”
손목이 부러질 것 같다. 무식하게 세게 비틀어 쥘 필요는 없잖아. 손목이 아니라 목을 그렇게 잡았으면 목뼈가 부러져 바로 황천길에 올랐을 거다.
“세이레, 너 맞지? 지금 어디냐?”
“……헬하운드… 군요. 어째서 당신이 제 대리와 같이 있는 거죠?”
직감으로 알 수 있는 건 세일마글레님이 헬하운드를 꺼린다는 사실이다. 사무적인 말투는, 그와 대화하는 것 자체가 불쾌하다는 듯이, 그가 하는 모든 언행을 불신한다는 듯이 적개심이 가득했다. 헬하운드가 세일마글레님을 열심히 챙기는 것과는 완전 반대다. 노골적으로 그를 싫어한다.
“이딴 쓰레기가 어떻게 네 대리라는 거야?”
“불쾌하군요. 전 당신과 할 얘기가 없어요.”
“난 있어. 만나서 직접 얘기할 거야. 지금 어디 있어?”
“가르쳐 줄 수 없어요.”
[뚝]
“세이레! 세이레!”
으크. 피어싱을 뺏었으면 됐지 날 내던지기 까지 하냐. 피어싱의 특성상 헬하운드는 그걸로 세일마글레님과 연락을 취하지 못할 거다. 결국 본노의 화살이 다시 날 겨눌 거라는 얘기다. 신이시여, 은총까지 바라지 않겠사오나 자비 정도는 베풀어 주시지 않겠나이까.
“인간…… 저급한 생물이…… 네깟 게 없으면 지금쯤 여기 있는 건 세이레였을 텐데…….”
바알님이 건 저주가 발동하는지 눈동자가 하얗게 변하고 있다. 역시 날 해칠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이번엔 정말 꼼짝없이 당해야 하나. 그런가 보다.
“아, 하나 얘기 안 한 게 있네요.”
“세… 일마글레… 님.”
“세이레!”
헬하운드가 꼭 쥐고 있는 피어싱에서 세일마글레님의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그런데 이 말투는 세일마글레님이 바알님에게 고요히 화낼 때 쓰는 말투다. 특히 협박할 때 상대를 짓누를 때 곧잘 쓰는 투다.
“제 대리에게 조금이라도 손댔다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에요.”
[뚝]
신이시여, 아니, 세일마글레님이시여, 당신은 절 버린 게 아니었습니다! 하마터면 피어싱을 향해 큰절을 올릴 뻔 했다. 감동의 물결을 따라 바다까지 흘러나가려는 찰나, 헬하운드라는 거대한 방조제가 날 막는다. 거 인상 참 애매하게 더럽네. 기분 나쁘겠지만 어쩌겠수.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게 아니라고 진즉 말했다우. 그저 팔자가 사나운 지라 세상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라고 인정하는 게 속 편할 게유.
“이… 이…….”
“아, 이 더러운 냄새는 역시 네 놈이군.”
만세! 구세주! 나이스 타이밍이십니다!
“파슈만…….”
“널 죽이고 싶지만 발견 즉시 생포하라는 명령이 있어서 말이야.”
바알님의 그 명령을 장관들에게 직접 전달한 사람이 바로 나다. 아니, 자랑스러워 해봤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잖아. 파슈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바로 저 세상으로 직행했을 텐데 뭘 뿌듯해 하냐고. 그저 살았다는 사실 하나에 좀 들뜬 것 같다.
“세이레가 없는 마왕 바알께는 볼일 없지만……. 세 세계 창조를 위해서 그 역겨운 군주를 봐야 하는 현실이 참 증오스럽군.”
파슈만 뿐만 아니라 나도 신경이 곤두설 정도로 위험한 발언이다. 쇠 긁는 듯한 목소리는 차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분노를 갖고 있었다. 그의 마력이 얼마나 뿜어져 나오는 지는 느낄 수 없지만 주변에 강한 바람이 일고 그의 양손에 검푸른 구가 하나씩 생긴 걸 보니 장난 아니라는 건 알겠다. 파슈만도 손에 검붉은 구를 들고 경계태세를 취한다.
“인간, 내 뒤에 얌전히 있어.”
외팔 질리온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옆에는 쉘러, 파슈만의 옆에는 엘레나가 각각 자리 잡고 헬하운드를 노린다. 각자 무기를 들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엄청난 양의 기를 내뿜는다.
그들의 격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금고 안으로 더 들어갔다. 그런 중에도 내 양팔은 루시퍼님께 드릴 돈주머니를 꽉 안고 있다. 일종의 직업 정신인지, 아니면 너무 무서워서 뭐라도 붙잡고 싶은 마음에 그런 건지, 여하튼 내게 안긴 돈주머니는 졸지에 초 중요한 물건이 됐다.
[휘-익]
[쿠광!]
[챙!]
[콰과광!]
[휘익-]
눈앞에서 각양각색의 마법이 과격한 불꽃놀이처럼 펼쳐지고 있다. 언뜻 보니 파슈만을 중심으로 다른 장관들이 보조하는 것 같다. 질리온은 외팔로 부지런히 헬하운드를 상대한다. 분명 4 : 1. 4 대 1인데도 팽팽한 접전이라는 얘기는 헬하운드의 실력이 정말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생포하는 것이 죽이는 것보다 어렵다지만 헬하운드는 아직 상처 하나 입지 않았다. 되레 엘레나와 쉘러는 그에게 밀리는 중이다.
“그게 내 돈인가?”
“앗, 루시퍼님!”
언제 나타났는지 루시퍼님이 내가 들고 있던 돈주머니를 낚아챘다. 저렇게 당당하게 ‘내 돈’이라고 말하다니……. 질린다. 지금 저 앞에서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자기 돈 먼저 챙기는 건 또 뭔지. 그리고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로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는 것도 이젠 구역질 날 만큼 지겹다.
“다 쳐 부실 셈이야?”
[쿠웅!]
“끄윽-.”
바알님이 나서자마자 헬하운드가 바닥으로 추락해 납작하게 붙었다. 그렇게 상황이 정리됐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푸슈우-욱]
헬하운드의 몸에서 흰색 기체가 다량으로 뿜어지더니 거죽만 남았다. 마법으로 조종하는 인형인 듯싶다. 인형을 그만큼 조종한 주인은-아마도 헬하운드겠지만- 역시 보통내기가 아닌 거다. 파슈만을 제외한 장관들의 표정이 정말 볼만하다. 꼴사납게 당했다는-속았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했다. 그에 비해 바알님과 파슈만은 침착한데 인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후담이지만, 파슈만은, 인형 안에 있던 기체가 매우 위험한 거라 밖으로 터져 나오지 않게 조심하느라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한다.)
“루시퍼는 돈만 챙기고 날은 거냐?”
“아……. 그런 것 같아요.”
그 님은 또 언제 사라진 겁니까? 정말 싫은 마족이다. 레플리카님에 훨씬 양반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생각해 버리련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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