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6 선우 찬필, 마족에게 찍히다?
재와 먼지만 남은 폐허에서 뭘 건져낼 수 있겠느냐마는 바알님과 레플리카님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다. 길드원이 사용한 마법의 종류, 기존 아바트 길드원이 아니라는 것 등 난 인간이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잔해물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마력으로 알아낸 것이다.
줄곧 바알님의 뒤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것을 전부 기록했다. 문제는 내가 쓴 것을 바알님이 읽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바알님은 내게 언어마법(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쪽 부류다.)을 걸어줬고 난 자연스럽게 마족의 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됐다. 그 후에 내가 인간의 언어로 쓴 것들을 전부 마족의 언어로 바꿔서 다시 쓰느라 오른손과 오른팔로 노동을 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바알님, 언제까지 여기 계실 건가요?”
“왜?”
“왜…… 라뇨. 성에 일이 쌓였을 텐데. 세인트폴리아에도 가셔야 하고.”
트렌들리샤에 갑작스럽게 오는 바람에 일정 수정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류도 미처 다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쯤 시녀들이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을 거다. 그나마 성을 비운지 만 하루 밖에 안 돼서 다행이지 체류 시간이 길어질수록 감당 안 될 양이 될 것이다.
“세인트폴리아는 무시해. 그리고 마침 잘 왔다. 이거 좀 정리해.”
성의 집무실에 있어야 할 서류들이 처리 완료된 채 바알님의 임시 막사에서 내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에요?”
“당연히 가져왔지. 인간의 상식으로 마족을 보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이걸 다 하셨냐는 거에요.”
서류를 정리하는 내내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일을 끝냈을까?
“내 일을 내가 하는 게 신기하냐?”
“조금요. 아니, 신기하다기보다는 기특해서요. 아…… 죄송해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고개를 푹 숙이고 정리에 열중했다. 문자를 읽을 수 있으니까 서류의 묶음 띠 색에만 의지하지 않고 더 세세하게 분류·정리할 수 있다. 그렇다. 난 지금 바알님을 피하고 있다.
“위화감 없는 녀석이라니까.”
바알님은 내 머리를 툭 치더니 막사 밖으로 나갔다. 전에도 그러더니, 뭐가 위화감이 없다는 건지 모르겠다.
[툭툭]
종류별로 순서를 맞춘 서류들을 책상 위에 가볍게 쳐서 가지런히 했다. 그런데 뭐랄까, 갑자기 서운하다는 느낌이 든다. 세일마글레님이 안 계신 동안 바알님이 알아서 업무를 처리하는 건 좋지만, 다른 의미로는 날 미덥지 않게 여긴다는 뜻이지 않은가. 분명 내가 워낙 부실해서일 것이다. 그러면 혼자서도 이렇게 잘 하면서 왜 날 방치해 두는지 모르겠다. 그냥 인간계로 보내줘도 될 텐데 말이다.
[쿠과광!]
“으어어…….”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폭발음과 시야가 어지러워질 만큼 강한 지진이 일어났다. 중심을 못 잡고 넘어졌는데 짧은 지진이 끝난 후에도 일어나지 않고 바닥에 몸을 밀착시킨 채 있었다.
“야, 뭐해?”
“흐걱.”
바알님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붙잡는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인 것은 레플리카님과 처음 보는 마족 간의 싸움이다. 몇 초 사이에 수가지 일이 일어나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틈이 없다.
“가,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
“범인은 범죄현장에 한 번 더 나타난다지?”
“그, 그, 그, 그러면…… 그, 튜리-엘더 길드인가요?”
“아, 여기 얌전히 있어.”
내 옆에 있던 바알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레플리카님이 있는 곳으로 갔다. 레플리카님의 상대는 트렌들리샤를 부순 두 명인데, 한 명은 바알님에게 기습 공격을 받고 맹렬하게 낙하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쿠과과과과과]
두 마왕은 봐주는 것 없이 튜리-엘더의 길드원을 공격한다. ‘살려줄까?’라는 형식적인 자비의 말도 없이 얼른 죽으라는 듯이 퍼부어댔다. 허공에 가만히 뜬 채 지상으로 추락한 마족을 향해 연속 공격을 하는데, 멀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죄책감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무표정이다.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무섭다.
“저렇게까지……. 꼭 저렇게 해야 하나?”
“마족이나 인간이나 용서해주면 반드시 뒤통수치기 마련이니까. 확실하게 제거해야 뒤탈이 없어.”
낯선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온다. 엄청난 공포로 심장 박동이 두 배로 빨라진다. 뒤를 돌아보면 안 된다. 도망쳐야 한다. 바알님을 불러야 한다. 돌아보면 안 된다. 달아나야 한다. 누군가에게 살려달라고 해야 한다. 근육이 오그라들고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그리고 위기에 처한 인간의 본성은 정확한 결론을 외친다. ‘낯선 목소리는 위험하다!’
“재밌네. 얼마 만에 보는 거지? 인간이 마계로 오는 경우는 아주 드문데. 신비로운 곳에 와서는 이런 잔인한 광경만 봐서 어쩌지?”
낯선 마족은 내게 흥미를 가진 것 같은데 세일마글레님을 만났을 때와는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르다. 내 신경과 내 본성은 계속해서 경고한다. 위험하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내 몸은 온 근육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마왕 바알과 같이 다니더라? 마왕 바알이 키우는 애완동물인가? 탐나는데? 나도 인간을 키워보고 싶어.”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아니 지껄일 때마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커지고 불안감도 몇 배씩 커진다. 도망치고 싶다, 벗어나고 싶다. 그런데 할 수가 없다. 누가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움직일 수 없다. 심약한 나 자신이 아무것도 못하고 움츠러들고만 있다.
“내게 와. 마왕 바알보다 더 예뻐해 줄게. 저런 잔혹한 것을 볼 일도 들을 일도 없어.”
[휘이익]
돌풍이 내 등 뒤로 불면서 나와 낯선 마족의 사이를 갈랐다. 그리고 단번에 공포가 모조리 사라졌다. 의심할 것도 없이 누가 돌풍을 만들었는지 감이 온다.
“그 녀석한테서 떨어져라.”
“마왕 바알이시여. 인간을 키우는 취미도 있으셨습니까?”
“간땡이가 부은 놈이라는 건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바알님은 내 옆으로 살포시 착지하더니 겨우 두 다리로 버텨 서있는 날 밀어 넘어뜨렸다. 너무 당황스럽다. 넘어지면서 발을 잘못 딛는 바람에 발목을 삔 것 같은데 바알님의 의미 모를 행동 때문에 통증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난 그냥 방해물인가. 신이시여, 절 괴롭히고 싶으시거든 다른 방법으로 바꿔주시면 안되겠나이까. 허약한 몸뚱이보다 심약한 정신이 너무 괴롭나이다.
“제 동생을 데려가셨으면 됐지 미개한 인간까지 탐하십니까? 바알님의 욕심의 끝은 어디입니까?”
날 공포로 몰아넣은 마족의 모습이 이제사 눈에 보인다. 누렇게 뜬 눈동자에 암청색 장발이 마구 흐트러져 있는 광인. 지금 이 순간, 난 내 눈이 의심스럽다. 머리카락의 색과 얼굴 윤곽이 세일마글레님과 너무나 닮았다. 눈동자 색은 다르지만 그건 가족 관계를 따지는 데 있어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여하튼 세일마글레님과 말도 안 되게 많이 닮은 마족 때문에 바알님에게 가지고 있던 서운한 감정을 순간 잊었다.
“이 녀석을 데려온 건 네 놈 동생이야. 나도 이래저래 골치 아프다고.”
[욱신]
확인사살을 당했다. 여시 난 걸림돌이고 쓸모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면 제 동생은 어디 있습니까? 세이레는 어디가고 저 미개한 축생이 당신의 옆에 있는 겁니까?”
“그러니까 골치 아프다고. 녀석이 저 놈을 던져놓고 멋대로 나가버렸단 말이야. 아무튼 내 속을 뒤집는 재주 하나는 타고났어.”
“그래서… 그것 때문에…… 당신의 옆에 짐승을, 인간을… 세이레 대신…….”
아-. 악감정이 저 마족에게로 옮겨 간다. 미개한 인간까지는 참아주겠는데, 참아선 안 되는 거지만, 축생? 짐승? 내게 힘이 있다면 면상을 한 대 갈기거나 저 멀리 날려버리거나 할 텐데 지금의 난…… 속으로 분을 삼킬 수밖에 없다. 난 어딜 가나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구나.
“이 입이 이 세상에 미련이 없나 보군.”
[우둑]
“으으…….”
바알님은 큼지막한 오른손으로 세일마글레님의 형-내 눈은 정확했다-의 입을 붙잡고 턱뼈가 부러질 만큼 힘을 줬다. 이름 모르는 마족의 탁하고도 누런 눈이 점차 하얗게 변하는 것 같다.
“내 사람에 대해 그딴 천한 말을 붙이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지? 저 놈은 세일마글레가 내게 맡긴 녀석. 고로 지금은 내 거야. 그리고…… 저 놈을 욕하는 건 네 동생을 욕하는 거랑 똑같아. 아…… 또, 인간이라는 사실만 다르지, 저 놈, 네 동생이랑 완전 판박이야. 친형제인 너보다도 더 닮았어.”
[두근]
나름 감동이랄까. 쌓여있던 서운함이 엷어지고 엷어지니까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진다. 바알님은 날 세일마글레님과 같게 보고 있었어. 최소한 필요 없는 존재는 아니었던 거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던 게 진짜 한심스럽다.
“으으…….”
눈동자가 백화 된 세일마글레님의 형은 바알님의 손목과 팔을 붙잡고 괴로워한다. 그리고 머리칼 색도 점점 하얗게 변하고 있다. 피부도 거무스름해지는 것이 꼭 빠른 속도로 늙는 것 같다.
“오늘 일은… 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네 놈의 애정을 높이 사서 봐주마.”
[철퍽]
완전히 몇 백 년 묵은 망자처럼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전체적으로 빼빼 마른 몸이 흙먼지 위로 내던져졌다. 징그러운 산송장이 지면에서 괴상하게 몸을 꼬았다.
“네 놈이 원해서 스스로 받은 저주. 그래, 세일마글레를 위해 그 저주를 받았잖아. 저 녀석을 위해 받은 것과도 같아. 알아들었지?”
“으…… 저런 인간 하나……, 미개한 짐승…….”
[흠칫]
백화 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향한 증오심이 보인다. 그의 살기가 내 모든 신경을 자극하는 것 같다. 척추를 따라 소름이 올라온다.
“아, 야! 네 몸은 좀 네가 챙겨봐.”
바알님이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날 쑥 일으켰다. 어안이 벙벙하게 있는데 발 부근이 느낌이 이상하다. 내려다보자마자 뱃속에서 의미 불명의 소리가 끓어오르더니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으어으아으어-!”
지면이 울퉁불퉁하게 움직이면서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꾸물꾸물 거리는 모양이 징그럽다고 생각하기 전에 무섭다.
“이 빌어먹을 하급이 어디서 기어들어온 거야?”
[파샥!]
재가 섞여 있는 모래가 무릎 높이까지 뿜어 올랐다가 낙하했다. 바알님이 제거했는지 지금 아주 잠잠하다. 음, 아무래도 아까 바알님이 날 민 것도 이 때문인 것 같다. 멋대로 오해해서 죄송한걸.
“너, 될 수 있으면 나한테서 1m이상 떨어지지 마.”
“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만……. 읏, 또 그 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 경멸하고 있다. 내가 세일마글레님 대신에 여기 서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거슬리나? 언뜻 들으니까 세일마글레님을 위해 스스로 저주에도 걸리고, 완전히 동생을 병적으로 아끼는 형님이다. 브라더 콤플렉스의 초중증이라고 해도 될 거다.
“마왕 바알. 당신이 죽으면 세이레는 자유가 될 겁니다.”
부리부리한 눈매는 바알님 쪽으로 방향을 바꿨고 저주성 망언이 말라비틀어진 입술 틈새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분노를 간직한 채 사라졌다. 그가 있었던 자리에 끈적끈적하고 시커먼 액체가 흥건히 남아있다.
“골 때리는군. 혹시나 했는데……. 제길.”
바알님은 양손으로 어두운 보라색 머리칼을 마구 털었다. 정말이지 마왕이 이미지구기고 망가지는 건 한 순간이다.
“으… 저…….”
“헬하운드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나한테 즉시 알려. 그 녀석도 튜리-엘더 안에 있을 테니까.”
“아……. 네.”
세일마글레님의 형님 되시는 분이 왜 여기에 왔을까 라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헬하운드’라는 그도 튜리-엘더 길드에 소속한, 한 때 아바트 길드에 있었던 마족이었다. 그러니 이 시국에 여기 나타났던 건 우연이 아니라는 얘기다. 뭐랄까, 세일마글레님을 중심으로 관계가 꼬인 듯이 보인다. 그 실타래에 본의 아니게 내가 얽힌 걸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기분이 든다.
“바알-. 시킨대로 했어.”
레플리카님이 스키니아님과 같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왔다. 어제부터 바알님께 꽉 잡혀가지고는, 마왕으로서는 수치스럽게, 바알님이 시킨 것을 고분고분 하고 있다. 바알님의 말을 다르게 재탕하자면, 헬하운드의 일도 레플리카님도 튜리-엘더 길드 자체도, 전-부 골 때린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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