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28 바알, 변하다?

★은하수★ 2009. 3. 17. 17:32

D-28 바알, 변하다?

 

마계에 대한 아주 짧은 감상을 하자면, ‘인간 세계랑 다를 게 없다.’라고 할 수 있다. 외모도 딱히 크게 다르지 않고, 음식이라든지 복색이라든지 이런 건 ‘지역 차’라고 해도 될 정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한 마디로 종족이 다르다고 해서 생활 방식도 획기적으로 다른 건 아니라는 말이다.

비서대리인 나는 바알님보다 일찍 일어나서 오늘 일정을 체크하고 어제 밤에 정리한 서류들을 다시 확인한 후에 새로 들어온 것이 없는지 찾아봐야 한다. 그리고 온갖 일감을 바알님의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아침 식사를 마친 바알님을 기다리면 된다. 아, 난 당연히 일- 찍 아침밥을 챙겨먹었다.

바알님이 일을 시작해야 할 시간은 오전 10시. 이제 1분 남았다. 오늘부터는 나 혼자 바알님을 챙겨야……, 찾으러 다녀야 하구나. 호수부터 시장의 도박장까지. 그래, 이건 체력훈련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체력을 기르는 거야!

“뭐 그렇게 의욕이 넘쳐 있어?”

10시다. 딱 10시다! 바알님이 10시에 집무실에 나타났다!

“세… 세… 세일마글레님! 바, 바, 바, 바알님께서…….”

이렇게 놀랍고도 기적 같은 일은 세일마글레님에게 보고해야 한다. 세상에, 바알님이 세일마글레님이 있었던 500년 동안의 탈주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기적을 일으키다니! 종지부가 아니더라도 좋다. 난 오늘 일이 줄은 거다. 그게 더 중요하다.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응……, 제 시간에 나오셨다고?”

“어? 어떻게 아셨어요?”

세일마글레님은 다 알고 있다는 투였다. 별 거 아닌 일처럼 반응이 싱거웠다.

“야! 집무 시간에 뭐하는 거야?!”

굵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양쪽 고막을 뚫고 지나간다. 오늘 아침에 기차 화통을 드셨습니까? 시녀들은 20단 콤보의 버럭이 익숙한지 멀쩡하다. 나 같으면 웬만해선 익숙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쿡, 자기 텔레파시는 무시하면서 네 연락은 받으니까 삐친 거야. 열심히 해. 난 더 잘 거니까.”

“아, 예.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피어싱을 호주머니에 집어넣고 바알님을 슬그머니 쳐다봤다.

“보지만 말고 정리해.”

벌써 두꺼운 것을 세 개나 해치웠다. 한 번 자리에 앉아서 시작하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지만 오늘은 더 열심이다. 세일마글레님에게 화난 것을 여기에 푸는 건 아닌가 싶다. 아니, 아니, 그리고 마왕씩이나 돼서 삐지기나 하고 나이가 부끄럽지 않은가 몰라.

“서류를 다 보시면 로이흐테에 가셔야 해요.

“파슈만이 가도 정리가 안 되는 데는 그냥 버려.”

로이흐테는 최근에 드래곤 양성 실험을 하다가 실험체가 전부 난동을 부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래서 장관 파슈만이 시찰 겸 수습 담당 요원으로 파견됐다. 결과는 파슈만의 포기. -라고 한다.

“백성의 안전을 보살피는 건 왕의 의무잖아요.”

“인간의 상식이 마족의 상식일 리가 없잖아.”

[퍽]

일곱 번째 서류가 내 두 팔에 들려 있는 서류 더미로 세차게 떨어졌다. 하마터면 죄다 떨어뜨릴 뻔 했다.

“그러면 마왕이 하는 일은 뭐에요? 설마 서류만 만지작거리는 거…… 아니겠죠?”

내가 지금 입을 너무 가볍게 놀리고 있다. 바알님의 비위를 거슬러서 좋을 거 없는데 말이다.

“그저 우상이야. 정신적 상징밖에 되지 않아.”

뭡니까. 이 당연하다는 말투와 표정은. 인간의 상식, 아니, 상상 속에 있는 마왕은 그저 우상이 아니란 말입니다. 저절로 ‘왕’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강력하고 위엄 있고 포스가 굉장한 모언가가 ‘마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건 사람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충격적인 사실이라고요.

“너, 가끔씩 바보 같은 표정 잘 짓는다.”

“충격 받은 거에요.”

“아? 그러면 나도 하나 있지. 인간이 그렇게 약한 종족일 줄 몰랐다.”

“읏, 그건……. 제가 인간 중에서도 체력 하위 1.24%의 프리미엄급 레어라서요.”

“푸핫! 프리미엄급 레어? 그것도 하위? 유머감각은 좀 있군.”

유머가 아니라 심각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바알님이 신경 쓰지 않으니까 상관없는 걸까나.

“야, 오늘 중에 루시퍼의 심부름꾼이 온다고 했었나?”

“네, 오후 2시 즈음에 도착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저는…….”

“쫓아내.”

“네?”

사람이 말하는데 그렇게 사뿐히 즈려밟아 주시다니 아- 주 황송합니다. 이건 그렇다 치고, 다른 마왕의 심부름꾼을 쫓아내다니 나중에 뒷감당은 어쩌려는 건지. 그 전에, 예의가 아니잖아.

“쫓아내라고. 수금은 사절이야.”

시셰야님의 결혼식에 낼 축의금 때문이다. 바알님이 참석하지 않는다니까 친히 축의금 액수를 정해서 심부름꾼까지 보내는 루시퍼님이나, 그걸 쌈박하게 걷어차는 바알님이나, 이것도 신경전의 일환 같다.

“제가 무슨 수로요?”

“그거야 네 사정이고.”

떠넘기고 발뺌이라뇨.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인간 중에서도 젤 부실한 인간보고 마족을 상대하라고 시키다니 생각 없는 처사다. 실은 인정머리 없다고 하고 싶지만 바알님은 마족이니까 ‘인정’은 기대하지 않는다. 어쨌든, 갑자기 생긴 일거리가 터무니없는지라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것 같다.

“읏챠.”

그 많은 것들을 벌써 끝냈다. 하면 할 수 있는 분이 그동안 왜 그렇게 튕겼을까. 결국은 세일마글레님께 붙잡히지만. 지치지도 않았나? 뭐, 남의 과거사야 나랑 상관없다. 지금 열심히 잘 해주니까 내가 편하다.

“안 보신 게 하나 있는데요?”

자리에서 일어선 바알님에게 아무 것도 없는-승인이든 거절이든 뭐든- 서류를 보여줬다.

“또 트렌들리샤야? ……. 꽤 거슬리는군.”

트렌들리샤, 트렌들리샤……. 아, 튜리-엘더 길드에게 습격을 받고 있다는 남서쪽 영지다. 보통 보고서를 이틀 연속으로 보내지 않는데 꽤 다급한 일이 일어나고 있나 보다.

“튜리-엘더 길드인가요?”

“아.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바알님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태가 나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어떤데요?”

“트렌들리샤의 1/3이 고작 두 명 때문에 쑥대밭이 됐다? 어떻게 생각해?”

“에……, 제 생각이요?”

만약 마족 두 명이 인간을 공격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겠다.’라고 걱정 겸 위로를 하겠지만, 마족이 마족을 그렇게 쉽게 쓸어버릴 수 있나 싶다. 마왕이 그랬다면 얘기가 또 달라지겠지만 그저 평범한 마족 두 명이, 아무리 길드원이라지만, 거대 영지의 1/3을 쓸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역으로 보면 그 길드원 두 명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으음, 튜리-엘더 길드가 범상치 않은 것 같아요.”

“그래, 네 눈에도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바알님이 그곳에 직접 갈 것 같다는 감이 확 든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시했던 일이 하루아침 사이에 이렇게 커졌으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내일 오전이 비었는데 다녀오실래요?”

재빨리 일정을 확인했다. 암기는 내 주특기라서(몸이 안 되면 머리라도 돼야지) 굳이 펼쳐볼 것 까진 없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훑어 봤다. 세일마글레님이 없으니까 불안해서 온갖 것을 달달 외웠다. 덕분에 머릿속이 복잡하나, 필요한 건 그때그때 찾을 수 있다.

“야.”

“네? ‘야’가 아니라 ‘선우 찬필’입니다만.”

갑자기 뚫어지게 쳐다보는 건 무슨 뜻이오리까?

“위화감이 없어.”

“네?”

“그렇다고.”

지금 내 머리 위로 수십 개의 물음표가 환상적으로 난무하고 있다. 내 질문은 꼭꼭 씹어 드시고 의미 불명의 말을 내던지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뜬금없이 위화감이 없다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질리온한테 가서 지금 당장 트렌들리샤로 가라고 해. 그 다음에 어떡할지 결정할 거야.”

“알겠습니다.”

바알님이 다시 건네준 트렌들리샤건 서류를 들고 장관 질리온의 집무실로 냅다 달렸다. 각 장관의 집무실은 비서실보다 멀어서 한창 뛰다가 중간에 한 번 쉬어야 한다. 쉰다 해도 숨만 고르는 정도지만, 그걸 안 하면 중도에 쓰러지는 부실·비실 몸뚱이이라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이럴 때마다 물어본다. 선우 찬필, 너 왜 사냐?

[똑똑]

“비서대리입니다.”

첫 날 세일마글레님과 같이 일일이 인사를 다닌 후로 장관들 집무실 쪽으로 온 건 처음이다. 혼자 안으로 들어가려니까 무지 긴장된다.

“바알님께서 임무를 내리셨습니다. 지금 바로 트렌들리샤로 가시래요.”

질리온도 서류랑 씨름 중이었다. 어느 조직이든 간에 고위직에 있을수록 두뇌 노동을 많이 한다는데 여기도 마찬가진가 보다.

“아, 인간. 뭐라고 했지?”

“바알님께서 질리온님께 지금 바로 트렌들리샤로 가라는 명령을 하셨어요.”

“지금?”

질리온은 갑작스런 파견 명령에 놀랐다. 그 보다는 내가 건네준 서류에 더 놀랐다. 그 때문에 손에 들고 있는 펜을 떨어뜨렸는데 잉크가 종이에 번지기 전에 펜대에 꽂아줬다.

“아, 고마워. 이거 굉장한데? 이렇게 재밌는 걸 나한테 맡기셨다고?”

호기심이 흘러넘치는 얼굴이다.

“전부 반어법이라고 생각할게요.”

“고맙단 인사는 반어법이 아니야.”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최대한 빨리 보고하겠다고 전해 드려.”

“네. 수고하세요……? 다녀오세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두 번 인사하는 꼴이 됐다. 질리온은 신경 쓰지 않고 ‘응’이라며 날 보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다음 일을 위해 바알님의 집무실로 또 다시 전력 질주했다. 그런데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진상은 무얼까나-.

일부가 부셔진 건물들과 푹 파이거나 옆으로 들린 길,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무언가들 그리고 내 옆에서 그것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바알님. 네, 상황파악이 끝났습니다. 그렇다. 바알님이 소환이든 워프든 사용해서 날 부른 거다. 주변 풍경이 어느 순간 변하는 경험을 일찍이 해 봐서……. 내 자신은 놀라기는커녕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벌써 익숙해진 게냐.

“질리온님이 최대한 빨리 보고하겠대요.”

“아.”

“혹시……. 생각보다 더 심한가요?”

“아.”

둘 다 정면만 보면서 짧은 문답을 했다. 바알님을 슬쩍 봤는데 표정이 ‘한심’에서 ‘못마땅’으로 바뀌었다.

“바알님, 가기 싫다고 하셨으면서 왜 오셨어요?”

“네가 궁시렁거렸잖아.”

조금 알 것 같다. 세일마글레님이 바알님은 무르다고 했던 그 말. 이런 거였다.

[그르르릉]

드래곤처럼 생겼으면서 드래곤은 아닌 이상한 공룡들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분명히 드래곤 양성 실험을 한댔는데 개조 실험을 했나……. 생긴 것들이 왜 저래?

“저 잡것들을 처리 못해서 날 불러?”

결국 화나셨다. 난 모르오. 여기 사는 분들이 알아서 하시오.

“눈 감아.”

“네? 에?

[츄아악!!]

바알님이 내 눈을 가리자마자 분수 소리가 났다. 이 근처에 분수는 없는 것 같았는… 맙소사. 눈을 뜨면 못 볼 것을 볼 것 같다.

“처음이니까 서비스해준 거야. 앞으론 혼자 알아서 해.”

눈을 뜨니까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바알님이 보인다. 전원 몰살로 끝장 보고 날래 다녀온 거구나. -라고 생각하면서도 바알님이 본성은 나름 괜찮은 마족이 아닐까하고 인물 재평가를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