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30 세일마글레, 후임을 낚다?

★은하수★ 2009. 3. 17. 17:30

D-30 세일마글레, 후임을 낚다?

 

정말이지 삭신이 다 쑤신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고, 다리 근육이 내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건 세 말하면 입 아프다.

[퍽!]

“끄억!”

자칭 절친이라는 녀석은 남의 속도 모르고 과감하게 등판을 가격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도 고단해서 책상 위에 엎드려 있으니 때리기 좋은 자세일 만도 하다. 여하튼 난 지금 온몸으로 통증이 전해져서 무지무지 아프다.

“야, 그깟 체력장 좀 했다고 그렇게 뻤냐?”

“시끄러워.”

“1교시 미술인데 업어줄까?”

“됐어.”

“자식, 남의 호의를 무시해? 몸은 최고로 부실한 놈이 자존심은……. 됐다. 조심해서 천천히 따라와라.”

그렇다고 혼자 가 버리냐. 부축이라도 해 주면 어디 덧나냐고. 신이시여, 어째서 저에게 저런 매정한 놈을 친구로 주셨나이까.

신세 한탄할 때가 아니다. 교실은 5층, 미술실은 3층. 이 저주스런 몸뚱이를 이끌고 두 층을 내려가려면 당장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내 몸은 움직이려 하질 않는다. 사람이 서 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 있으면 눕고 싶고, 누워 있으면 자고 싶다더니 딱 날 두고 하는 말이다.

“제엔- 자앙-.”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칠판 옆에 있는 시간표를 보니 오늘 수업 중에 체육은 없다. 그 사실에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찬삐일-. 미술실 안가?”

“네, 가요.”

반 애들 챙기는 것만큼은 1등인 담임이 혼자 교실에 남아 있는 날 발견했다.

“얼른 움직여.”

“네.”

오늘 같은 날, 이동 수업은 죄다 빠지고 싶다는 욕구가 절정으로 치달아 오른다. 하지만 생활기록부에 ‘결과, 지각, 결석, 조퇴’기록이 하나라도 생겼다간 집에서 쫓겨날 지도 모르니 이 엄청난 욕구를 참아야만 한다.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제멋대로인 다리를 질질 끌듯이 걷는데 통증이 척추를 따라 올라온다. 신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참고 간신히 계단을 내려가는데 몸이 자꾸 기우뚱 거린다. 그런데 계단을 너무 많이 내려간다 싶어서 층수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더니 벽이 보이지 않는다.

“이제 눈까지 맛이 갔나?”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봐도 벽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까 지금 밟고 있는 계단도 학교 계단이 아니다. 설마 나 자고 있는 건가?

“아.”

꼬집어서 아프단 얘기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 현실이라는 거다. 살다보면 기이한 일을 겪는다지만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아, 나 참. 되돌아가려는데 뒤에 계단이 없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이 최고층이다. 검은 계단이 밑으로 일자로 쭉 뻗어 있을 뿐이다. 한 칸을 내려가니까 뒤에 한 칸이 사라졌다.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혼자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아서 오싹하지만 그나마 주변이 환해서 다행이다.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럽게 내려가고는 있지만 대체 여긴 어디야? 그저 ‘밝다’라고 느껴지는 푸른 허공에 검은 계단이…… 푸른 허공? 푸른 허공이구나. 설마 내가 지금 하늘에서, 하늘까지 닿는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건가라는 말도 안 되는 의심 천만한 생각을 해본다.

“아!”

다시 한 번 꼬집어 봐도 아프다.

아크릴 물감에 팔레트에 4절 캔버스에 물통, 붓 등을 다 들고 있으니까 팔이 점점 지쳐가고, 끝없는 계단을 내려가다 보니 가뜩이나 정상이 아닌 다리가 더 정상이 아니게 돼 간다.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도 심지어 죽은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확실한 셈이다.

“뭐야, 이거. 인간이잖아.”

좌측 허공에 비행생물체 발견. 응? 장신 차려라, 선우 찬필. 인간이 어떻게 허공에 떠 있을 수 있냐? 등엔 날개도 없지, 발밑엔 받침도 없지, 이렇다 할 기구 하나 없는 홀홀단신이란 말이다. 설마 내가 미친 건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미치면 헛 게 보인다니까.

“인간, 어떻게 여기로 온 건가? 아니, 누가 보낸 건가?”

난 정말 미친 거다. 미쳤으니까 환청까지 들리는 거다.

“대답이 왜 없는 거지? 말이 안 통하나?”

아뇨, 아닙니다. 귀댁께서 하시는 말씀 모두 똑똑히 잘 알아듣고 있습니다.

“표정을 보니 알아듣는가 보네. 그러면 겁먹은 건가?”

이쯤 되면 바보라도 깨달을 것이다. 헛 것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환청이 들리는 것도 아니라고. 이건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저…….”

“겁먹지 마. 이유 없이 인간을 해치는 하급 마족이 아니니까.”

“네?”

잠시 청력 테스트 겸 기억력 테스트를 하겠습니다. 선우 찬필. 당신이 순간적으로 들은 그 단어가 ‘마족’이 맞습니까?

“인간이라서 구분을 잘 못하겠구나. 난 아주 상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되는 급이야.”

‘마족’이 맞습니다.

“이봐, 인간. 왜 그렇게 표정이 우울해?”

“여기가…… 마족이 사는 곳인가요?”

“뭐?”

되레 상대방 쪽에서 당황스러워 한다. 내가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자의로, 고의로 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인간과 마족이 서로 교류를 끊고 산 지 수천 년이라는데 어떤 겁을 상실한 인간이 혼자서 마족들이 사는 마계로 가겠냐고. 아니, 오겠냐고? 여하튼 난 지금 내가 있어서는 안 될 이곳에서 나가고 싶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음흉한 미소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애초에 인간과 마족이 거래를 끊은 이유가, 인간은 마족의 간사함에 질려서, 마족은 인간의 간사함에 질려서라는데, 설마 나 지금 이 마족의 감사함에 놀아날 예정이란 건가? 신이시여, 저에겐 그런 걸 받아치거나 막을 재간이 없단 말입니다.

“불쌍하게도 어떤 바보가 차마 치우지 않은 디멘션 워프 때문에 이 낯선 곳에 왔구나.”

실컷 동정해도 벌서 음흉한 미소를 봤단 말입니다.

“우리 주인님이라면 널 돌려보낼 수 있으니까 걱정 마. ……응? 겁먹었잖아. 혹시 이상한 상상을 하는 거라면 버려. 고문하거나 잡아먹거나 하는 추악한 짓거리는 요즘 하급들도 안 한다고.”

“아, 무슨……. 아니에요. 돌려보내 주신다는 데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생각을…….”

완전 정곡을 찔렸다. 바보같이 얼굴에 다 드러났나 보다.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마계 내에서의 워프는 나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주인님의 성에 갈 수 있어.”

“성… 이요? 높으신 분인가 보네요.”

“마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지.”

손에 꼽힐 정도로 신분이 높다면 왕족이거나 공, 후작급 귀족이려나? 아니, 그 전에 마족에도 인간과 같은 계급이 있나? 아까부터 상급, 하급 그러던데.

그게 뭐가 중요해. 어차피 잠깐 보고 다신 만날 일 없을 텐데 자세한 걸 알아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따라 와.”

마족이 만든 워프는 세로로 길쭉한 타원형으로, 워프 너머로 긴 복도가 보인다. 그러니까 저 워프만 슬쩍 지나가면 곧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거다. 크. 내가 마법을 쓸 수 있다면 오늘처럼 몸이 고단한 날, 교실에서 미술실까지 편하게 갈 수 있을 거다. 덧붙이자면 이렇게 수상한 곳으로 샐 리도 없을 거다.

“뭘 멍하니 보고만 있어?”

“네, 갈게요.”

워프에 대해 짧은 감상을 하는 사이에 마족은 벌써 워프 너머 복도 저- 쪽까지 가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 솔직히 두 번째지만 처음엔 무의식중에 통과한 거라 제쳐두고, 워프를 지나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오른쪽 눈만 슬쩍 떠 보고 주변을 확인한 다음에 왼쪽 눈을 마저 떴다.

천장이 학교 강당보다 훨씬 높다. 양 옆의 벽은 장식물이란 건 없고 벽지조차 바르지 않은 순수한 대리석 벽이다. 바닥도 같은 소재인데 사람… 마족이 밟고 지나다니는 가운데에 검은색 카펫이 길게 깔려있다. 보통 바닥에 까는 긴 카펫이라면 ‘레드 카펫’인데 역시 인간과 마족의 기본 관념은 다른가보다.

“걷는 게 영 시원치 않네.”

“어제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해서요.”

“그래?”

마족은 내 걷는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걷는다. 오른쪽으로 꺾어진 복도로 들어가더니 첫 번째 문을 열었다.

“일단 안에서 기다려. 주인님이 간만에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거든.”

간만에 낮잠이라는 건 그 동안 무지 바쁘게 지내다가 오랜만에 한가로워졌다는 뜻일까? 아니, 내가 왜 그런 세세한 거에 궁금해 하는 거냐고.

“손에 든 그것들은 그림 도구로 보이는데, 화가인가?”

“아뇨, 전 학생이에요. 이건 미술 수업 준비물인데 학교 이동수업 때문에 교실을 옮기다가 여기로 새 버려서…….”

결국 미술은 결과 처리 되겠군. 마계에 갔다 왔다는 이유는 핑계로 들리지도 않을 거다. 그냥 몸이 너무 안 좋아서 교실에서 잤다고 해야겠다. 그나저나 이 마족은 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으려나?

“몸이 뻐근하면 뭘 하든 시원치 않겠지?”

마족은 방 한 쪽에서 뻘쭘하게 서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오른손을 내 이마에 사뿐이 댔다.

“힐.”

한 순간에 몸이 가벼워졌다. 시험 삼아서 오른 다리를 들어봤는데 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처럼 움직임이 좋다. 요통도 말끔히 사라지고 척추를 따라 욱신거리던 등 근육의 결림도 없어졌다.

“어때?”

“괴, 굉장해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그냥 초보적인 마법인걸.”

인간들 사이에 마족이 어째서 부정적으로만 알려져 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도움을 받고 보니까 그런 편협적인 사고가 구세대 유물로 여겨진다. 일부의 충돌 때문에 두 세계가 교류를 끊은 거라면 다시 두 세계를 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쾅!]

“세일마글레! 대체 상관이 누구인 거야?”

나도 나름 큰 키인데 나보다 더 키가 큰 마족이 문을 걷어차면서 나타났다.

카리스마가 있는 수려한 외모다. 옷을 좀 단정히 입었으면 점수를 더 쳐줄지도 모른다. 그래도 검은색이 짙은 어두운 보라색 머리칼에 흰 피부가 은근히 잘 어울린다. 성격은 좀 괴팍한 것 같지만 외모는, 다시 말하지만, 남자인 내가 봐도 미남형이다.

“밀린 서류는 다 처리하셨나요?”

“하고 있는데 네 놈이 여기로 오라고 머리 깨지도록 불러댔잖아!”

“과장이 심하시네요.”

“과장? ‘제 방으로 지금 당장 오세요.’라고 수십 번을 부른 게 정상이란 얘기야?”

저기…… 사람 무안하게시리 두 분이서 너무 허물없이 대화하시네요. 분명히 저 키 큰 분이 이 상냥한 미소를 아낌없이 날리는 분보다 높은 분 같은데 어찌 이 분이 저 상관되시는 분을 쥐락펴락 하는 것 같다? 하긴, 인간 세계에도 그런 경우가 있으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 자기소개 해야지. 내가 말한 그 분이야.”

그냥 상관이 아니라 주인이었단 말입니까? 분명히 낮잠을 주무신다고 했는데 서류처리는 뭐고, 이 분은 여태껏 나랑 같이 있었는데 저분을 머리 깨지도록 수십 번 불렀다는 건 또 뭡니까?

“그 녀석은 뭐야?”

“보시다시피 인간입니다.”

뻔한 대답을 참 쌈박하게 하시네요.

“그러니까 인간이 왜 여기에 있냐고.”

“제 후임이에요. 자, 앞으로 네가 돌봐드려야 할 분이야.”

……! 내 두 눈이 튀어나올 만큼 커지고 온 몸이 한 순간 굳어졌다. 상대 키 큰 분도 표정이 일순간 굳어버렸다.

“저, 저기…….”

“네가 먼저 이름을 말하는 게 예의야.”

인간 세계로 되돌려 보내 준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주인을 만나게 해준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주인이 간만에 낮잠을 자고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한 마디로 난 철저하게 당한 거다. 이 마족에 대해 좋게 생각한 모든 것을 취소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