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9 선우 찬필, 버려지다?
바알님이 업무를 팽개치면 찾아볼 곳… 이라……. 어린 애도 아니고 (비밀이라 하기 힘든) 피신처를 만들다니, 마왕이라 해도 별 수 없는 하나의 생물체인가 보다. 보리수나무가 있는 호수, 물푸레나무 숲의 이끼로 뒤덮인 오두막, 성 꼭대기의 붉은 기가 펄럭이는 망루. 여기마저 없으면 동서남북 각 시장의 모든 도박장?!
비서 일이라고 하지만 하는 일의 90%가 누구를 찾는 일이라더니, 그 숫자가 과장은 아닌 것 같다. 마계 각지에서 날아드는 서류를 정리해서 마왕의 집무실 책상에 올려놓고 곧바로 마왕 찾기를 개시할 것. 어제부터 계속 강조된 이야기다. 막상 당해보니까 강조한 이유를 뼈저리게 알겠다.
“세일마글레님. 오두막엔 안 계세요.”
오늘 도착한 서신과 각종 서류들을 받아놓고서 바알님의 비서인 세일마글레님과 같이 바알님을 찾는 중이다.
“걱정 마. 방금 남쪽 시장에서 잡아왔으니까.”
왠지 ‘방금 남해에서 생선을 잡아왔다.’는 어감이 든다. 한 시녀의 말처럼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의 관계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먹이사슬로 이뤄져 있다. 천적은 당연히 세일마글레님이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바알님을 잘 다룬다.
“튈 생각 마시고 오늘 중으로 이것들 다 끝내 놓으세요.”
“얌마, 너 말 좀 골라가면서 할 순 없냐?”
“바알님께서 행동거지를 고치신다면 저도 사용 단어를 바꾸도록 하죠.”
[바드득-]
역시 타인을 다루는 솜씨가 가히 지존급이다. 제대로 반격도 못하고 책상 앞에 앉아서 불편한 얼굴로 서류를 읽고 있는 모습이 진짜 안쓰럽다.
“뭘 해야 하는지 다 기억하고 있지?”
“아, 네. 몇 가지 없는 데요 뭘. 다만 한 가지 일이 참- 대대적인 일이라 걱정이죠.”
세일마글레님이 날 인간계로 돌려보내 줄 마음이 생길 때까지 이 어마어마한 일을 해야만 하니 갑갑할 뿐이다. 눈앞이 깜깜해지고 패닉상태에서 헤매는 건 이미 어제 다 끝냈고, 지금은 그저 허탈감만 가득하다.
집무실 문 가까이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바알님이 일을 마치길 기다리고 있다. 잡심부름이야 바알님의 양 옆에 있는 시종들이 하는 일이고, 난 처리가 끝난 서류를 분류하고 심부름꾼에게 보내면 된다. 기다리는 동안 주요 주소랑 주요 인사나 외울까나.
“제길, 루시퍼 딸의 결혼식? 축의금 액수까지 정해서 보내는 놈은 대체 무슨 심보야?”
“시셰야님이 결혼하신다는 얘기가 있었을 때 다들 헛소리라고 했었죠. 거기에 대한 루시퍼님의 응징일 거에요.”
“쯧. 속 좁은 놈.”
가만 보자……. ‘루시퍼’는 바알님처럼 5대 마왕 중 한 분이고, ‘시셰야’는 마왕 루시퍼의 양녀. 「타고난 중상모략 능력을 높이 사서 양녀로 들이고 그 능력을 자신의 바로 옆에서 마음껏 펼치게 했다.」 마왕의 마음에 들 정도면 시셰야 공주님의 성격은 상당한 수준일지도 모른다. 결혼설이 헛소리라고 매장되는 경우는 대개 성격 때문이니까. 결혼 상대자가 있을 리 없을 정도의 성격 말이다.
“이건 또 뭐야. 증축? 이 자식은 욕심이 너무 과해.”
“페슬로네의 증축 건은 잊을 법하면 올라오는데 그냥 곱게 한 번 밟아주시죠.”
“안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어.”
‘페슬로네’라고 하면 북쪽에 있는 페슬로네 백작의 영지다. 허구한 날 성의 증축 허가를 요구하는데 이미 성의 규모가 바알님의 성과 맞먹는다고 한다. 마왕의 성보다 더 큰 성을 바라는 건 진짜 욕심이 과하다. 몇 번씩이나 꾹 참고 넘어가는 바알님의 인내심에 박수를 짧게 보낸다. 넘어간다는 건 허가해준다는 게 아니다. 그냥 안건을 받지 않은 것으로 치는 것뿐이다.
“어이, 세일마글레. ‘튜리-엘더 길드’라고 들어봤어?”
“레플리카님과의 국경 근처에서 활동하는 신설 길드에요. 무역 길드라고 알고 있는데……. 그들이 보낸 건가요?”
“무- 역-? 위장 길드군. 트렌들리샤 말이, 튜리-엘더 길드의 영토 침략 때문에 골머릴 앓고 있다는데, 얘네 실력이 비상한가봐.”
“길드 하나에 영지가 함락되면 그건 순전히 트렌들리샤의 잘못이죠. 바알님께 도움을 청할 가치가 없는 일이에요.”
남서쪽 끝자락에 마왕 레플리카가 다스리는 곳과의 경계지가 트렌들리샤다. 약 700년 전에 마왕 레플리카가 바알님께 대들다가(마왕도 마왕에게 대든다고 하나?) 고스란히 뺏긴, 원래는 마왕 레플리카 지배하에 있던 곳이란다. 그나저나 튜리-엘더 길드는 리스트에 없네.
“하? 얌마!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바알님이 구겨지도록 붙들고 있는 저 서류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세일마글레님이 따로 준 건데 바알님이 맨 마지막에 보시도록 놓으라 특별 지시한 서류다. 마계 문자를 몰라서 서류 내용이 어떤지 당연히 모르지만 필체가 세일마글레님 것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기 써 있는 대로에요.”
“어이, 네 놈이 언제 휴가를 챙겼었어?”
“한 번도 없으니까 이번에 챙기는 거에요. 저 대신 일할 아이도 있으니까 상관없잖아요.”
방금 굉장히 엄한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저 녀석은 네 보조잖아!”
그렇다. 처음엔 ‘후임’이라고 했다가 ‘보조’로 바뀌었다. 마족이 아닌 덕분이다. 그리고 체력도 거지같아서(세상의 모든 거지님들껜 죄송하오나) 보조도 겨우 할 성 싶다는 비난을 받았다.
“보조니까 제가 휴가 간 동안 제 일을 저 아이가 하는 거에요. 후임이면 사직서 썼어요.”
바알님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저 표정. 저 표정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바알님의 이마 혈관.
아니, 잠시만. 두 분을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내가 깊- 게 관련된 일인데 방관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않은가. 그래도 두 분 사이에 끼어드는 건 무서워서 싫은데……. 아니지, 살기 위해서 용기를 내야한다.
“저…… 세일마글레님!”
“할 수 있지?”
상큼한 미소가 내 말을 막아버린다. 신이시여, 왜 이렇게 잔혹하시나이까.
“당연히 불가능하지! 마법도 못하는 비서는 그냥 석상끼고 앉아있는 거랑 똑같다고!”
마알님의 말이 정말 가슴 아프지만, 어쨌든 사실이니까 바일님이 그대로 밀고 나가서 세일마글레님을 막아주셨으면 한다.
“제가 그동안 마법을 쓴 건 제 편의를 위해서, 바알님의 뒤치다꺼리 때문에. 이 두 가지 이유에서였어요. 솔직히 비서는 마법을 쓸 일이 없는 직업이라구요.”
“저 놈은 생 초짜잖아! 어떻게 이 일들을 맡겨?”
“일은 바알님이 하셔야죠.”
맙소사. 잠시나마 했던 기대가 무너져간다. 역시 바알님은 세일마글레님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난 이렇게 세일마글레님의 뜻대로 되는 것인가.
[쾅!]
“너 작정하고 저걸 데려온 거지?”
“신이 물으라고 준 미끼를 그냥 지나치면 아깝잖아요.”
신이시여, 전 떡밥이었습니까?
“시- 인?”
바알님의 얼굴이 형용 불가능하게 일그러진다. 세일마글레님 입에서 ‘신’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나보다. 하긴, 마족이 그 단어를 언급하는 게 좀 생소하긴 하다. 마족이라고 하면 신이 아니라 마왕을 부르는 게 일반 상식이니까. ……. 세일마글레님이 마왕을 부르는 모습이 절대 상상이 되질 않아!
“네.”
아주아주 상큼한 미소로 간단명료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대답하는 당신은 진정 최곱니다. 마왕을 자기 뜻대로 쥐어흔들기는 기본이요, 마족의 상식까지 깰 죽이야.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한 위인이다.
“그렇게 쉬고 싶냐?”
“뻔한 사실을 굳이 확인하는 건 좀 비굴하지 않나요?”
“으…….”
안 그래도 조금씩 밀리고 있던 바알님은 카운트펀치에 무너지고 말았다. 마왕의 위신은 어디다 팔아먹고 비서에게 저리 휘둘릴까……. 상대가 세일마글레님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다. 이제 겨우 만 하루를 같이 보냈지만, 늘 일방적인 결말이다.
“알았어, 갔다 와. 적당히 갔다 와.”
바알님은 의자를 휙 돌려서 창문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갔다 오라는 말에는 화도 짜증도 없었다. 아쉬움? 서운함? 그런 투였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세일마글레님은 의자 등판에 대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방 밖으로……. 진심으로 절 이렇게 뻘쭘하게 버려두시는 겁니까? 그저 허공에 가는 한숨을 쉴 뿐인가 보다.
“야, 안 나가?”
“네? 저요?”
휴가를 받은 건 세일마글레님 혼자고 난 그 자리를 메꾸는 역인데 왜 나가라고…….
“난 여기 죽치고 안장 있어도 되지만 보조는 상관을 배웅해야 할 거 아냐.”
“아, 네!”
당연한 기본 예의인데 이런 일은 난생 처음인지라 전혀 생각을 못했다. 혹시 앞으로 계속 바알님께 일일이 지적을 받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세일마글레님은 마법을 이동하니까 놓치지 않으려면 있을 법한 곳을 향해 이 약체로 죽어라고 뛰어야 한다. 도착하기 전에 숨이 가득 차서 문제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난 평범한 인간이다. 여하튼 전혀 귀띔해주지 않고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을 내던져 준 것에 무지무지 원망스러울 뿐이다. 덕분에 숨차서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도 통증이 통증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가면 갈수록 일이 커져만 가니 세일마글레님의 휴가가 끝날 때까지 또 어떤 큰 일이 생길지 두려워진다.
“들어올 거면 들어오지 뭘 그렇게 서있어?”
방문 앞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세일마글레님이 문을 열고 나왔다.
“배웅… 하러 왔어요.”
“보면 알아. 설마 용감하게 가지 말라고 하러 왔겠어?”
내 성격을 제대로 꿰뚫어 보고 있다. 역시 무서운 마족이다.
“이거 받아.”
사파이어로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피어싱이다. 정사각형에 깔끔하게 세공되어 있었다.
“이게 뭐에요?”
“일종의 통신 아이템이야. 귀에 이걸 달고 있으면 같은 짝을 달고 있는 상대와 마법을 쓸 필요 없이 대화를 할 수 있어.”
“헤에? 대단하네요.”
세일마글레님의 왼쪽 귀에 이미 짙은 파란색의 피어싱이 있다. 그러면 내 거는 오른쪽에 달아야 하는 건가 보다. 으음.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서 피어싱은 좀 곤란하단 말이야.
“근데 저… 귀 뚫으면 안 되는 데요.”
“상관없어. 잃어버리지 않게 귀에 다는 거니까 가지고 있기만 하면 돼. 사용 방법은 쉬워. 보석에 손가락 끝을 대고 내 이름을 한 번 불러. 그게 다야.”
인간들이 사용하는 휴대전화와 비슷하다.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지 상대방의 코드-휴대전화로는 전화번호, 피어싱으로는 이름-가 우선 필요하지. 다만 피어싱으로는 정해진 상대하고 밖에 안 된다는 거다. 하긴, 내가 여기서 누구랑 대화를 하겠어. 세일마글레님이 안계시면, 아는 이는 없고, 바알님은 날 무시할 테고, 나 홀로 멍 때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필요할 때만 써야 해.”
“아, 네. 얼마나…… 휴가는 얼마나 다녀오실 건가요?”
“바알님께서 말씀하셨잖아. 적당히 데려오라고.”
“네? 네…….”
순간적으로 지나친 말이 이렇게 중요한 말이었을 줄이야. 난감해하면 뭐하는가. 이미 결정 난 일이다. 그저 내 신세를 한탄하며 세일마글레님의 ‘적당한’ 휴가가 끝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 달 정도.”
세일마글레님은 세상 다 산 표정을 재밌어라 한다. 난 정말 우울한데 말이다.
“그 이상은 바알님도 못 기다리셔. 한 번 도망친 적이 있는데 한 달 뒤에야 잡으러 오셨거든.”
귀댁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요? 제가 믿을 수 있는 얘기를 해 주십쇼. 아니, 도망쳤는데 한 달이나 내버려둔 바알님도 상식선의 위인은 아니야. 역시 바알님과 세일마글레님은 나의 기존 사고를 잣대로 두고 판단하면 안 되는 마족들이다.
“뭐, 이번에도……. 내가 날짜를 잘못 세면 바알님이 찾으러 오실 거야.”
“그래서 적당히 갔다 오라고 하신 거군요.”
“큭. 아무튼 나한테 너무 물러.”
난 방금 엄청난 말을 들었다. 그런 거였다. 바알님은 그저 세일마글레님에게 무른 것이었다. 그리고 세일마글레님은 그걸 즐기는 것이었다. 아무튼 까면 깔수록 묘한 관계인, 양파 같은 두 위인이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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