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3문 (5)

★은하수★ 2009. 5. 7. 17:21

투명한 유리구슬. 안에서 아무리 두드려 보아도 둔탁한 소리만 울릴 뿐 전혀 깨질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크게 소리쳐 보았다. 목소리가 유리에 반사되고 반사되어 그대로 귀로 들어와 고막을 심하게 울렸다. 유리구슬에서 빠져나가도 싶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감이 든다. 일어서서 발로도 차보고 주먹을 내지르기도 했다. 소용없었다. 발과 손만 아플 뿐. 이 안에서 한 쪽 면만 밀면 굴러가다가 어딘 가에 박고 깨지지 않을까 싶어 두 팔로, 두 손으로 열심히 밀어도 보았다. 나보다 훨씬 크고 두께도 상당한 유리구슬이 밀릴 리가 없었다. 빌딩의 벽을 미는 것처럼 힘만 쭉 빠질 뿐이었다.

황금색 구름……. 눈앞에 보이는 황금색 구름은 가가이서 보기 위해 발을 데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밖은 그냥 어두운 밤일뿐인데 그런 공상적인 것을 보다니, 많이 지친 모양이다. 공기가 통할만한 구멍도 없지만 구슬 안은 상식과 다르게 숨쉬기 편하다. 온도나 습도도 생활하기 딱 좋다. 물론 내가 감각적으로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지금 내 몸에 별 지장이 없는 걸 보면 일반 공기와 같은 것 같다. 하지만 이게 다 정상적이라고 해도 갇혀 있으니까 미쳐버릴 것만 같다. 그냥 주저앉았다. 다시, 또 다시 그 구름이 나타났다.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아 손을 내밀어 보았다. 구름은 다시 사라져 버렸다. 신기루… 일까? 정신적으로 정말 피곤하다. 그렇다면 진자 헛 걸 보는 것이다. 세상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빛 구름이 있을 리가 없는데.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이 튀었다. 유리구슬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새어들어 왔다. 밖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지만 두 사람이 서로 마주보고 있었다.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긴 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곳곳에서 빛이 터졌다. 보고 싶다. 듣고 싶다. 알고 싶다. 그 두 사람이 보이는 쪽으로 가서 유리면에 거의 들러붙듯이 몸을 밀었다. 그래도 잘 보이지 않았다. 밖이 너무 어둡다. 아무라도 좋으니까 날 여기서 꺼내줬으면 하는 바람에 세차게 유리를 두드렸다. 그러자 점차 밖이 밝아졌다. 두 사람의 형상과 주변의 모습이 점차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손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심하게 훼손된 땅바닥과 무너져 내린 건물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흙먼지도 낮게 깔려 바람에 다라 흐르고 있었다. 밖에 있는 두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익숙한 모습이다. 둘 다 몸이 이상한 빛에 휩싸여 있다. 입은 뭔가를 계속 말하고 있다. 점점 불안해 진다. 이 안에 갇혀 있어서가 아니라 두 사람이 앞으로 할 것들 때문에 불안하다.

“…이 심…. 집에 전…하지 ……까?”

도대체 뭐라고 말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여자?

<세연아, 일어나.>

익숙한 목소리가 주변을 울리자 심한 현기증이 세연을 괴롭혔다. 세연은 유리벽에 몸을 기댄 채 그를 따라 미끄러지며 쓰러졌다. 주변은 다시 어두워졌다. 세연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 쥐고 온몸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전화해……다.”

“……만 더 기다려요.”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지만 세연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쉽게 기억해 낼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은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윤세연. 괜찮은 거야?>

머릿속을 잔득 울리는 듯 한 목소리는 현기증과 두통을 말끔히 없애주었다. 세연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았다.

“아, 엄마. 일어났어요.”

“정말?”

세연은 누구의 목소리인지 기억할 수 있었다. 민혁과 그의 어머니인 양호 선생님이었다. 밝은 실내, 주위에 둘러쳐져 있는 옅은 하늘색의 천, 그리고 하얀 천장은 자신이 있는 곳이 양호실임을 가르쳐주었다. 세연은 손을 위로 올려 이마를 짚어보았다. 손이 이마에 닿기 전에,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에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오그렸다. 얼음주머니가 얹어져 있었던 것이다.

“세연아, 이제 좀 괜찮니?”

양호 선생님이 체온계를 귀에 슬며시 대며 말을 걸었다. 세연은 손을 내리고 고개를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그래, 열이 내렸으니까 다행이다.”

체온계의 숫자를 확인하고 얼음주머니를 치우던 양호 선생님은 보송보송하게 말린 흰 수건으로 세연의 얼굴에 맺혀있는 땀방울과 물방울을 닦아냈다. 세연은 눈을 감고 얌전히 기다렸다.

“조금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병원에 실려갔을 거야.”

양호 선생님의 옆에 서 있는 민혁은 세연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연이 일어나려고 몸을 옆으로 살짝 비트는데 민혁이 손으로 막았다.

“더 누워있어.”

“이제 괜찮아.”

세연은 민혁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자세를 고쳐 누웠다. 그리고 민혁의 셔츠 밑 부분을 살짝 잡아 당겼다.

“왜?”

“나…… 어떻게 된 거야?”

세연은 자신이 언제 쓰러졌는가 뿐만 아니라 쓰러지기 전에 오늘 한 일 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누워 있는 곳이 양호실이니까 어떻게든 학교에 오긴 온 것 같은데 아무 것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민혁은 자신의 옷자락을 잡은 세연의 손을 꽉 잡았다.

“오전 내내 두통 때문에 상태가 좋지 않았어. 수업 시간에도 계속 엎드려 있기만 하고. 결국 점심시간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도중에 쓰러져 버리더니 지금까지 누워있던 거야.”

민혁은 말하는 중에도 세연이 다시 정신을 놓을까봐 세연의 손을 놓지 않았다. 세연의 손은 담으로 끈적거렸지만 그 정도는 신경쓸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랬구나.”

세연은 천장을 보며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손을 잡아당겼다.

“설마…… 지금 수업 다 끝난 거야?”

세연은 시선을 민혁에게 옮기고 나서 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늘 하루 학교생활은 완전히 종친 셈이었다. 뭔 하나 제대로 된 것 없이, 기억나는 거라곤 지금 이 곳에 누워 있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한심스러웠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시험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야?”

민혁은 세연을 옆으로 슬쩍 흘겨보았다. 시험이 2주 정도 남았기 때문에 에르띠에의 특별 수련은 평소보다 많이 약해졌다고 알고 있었다. 덕분에 밤 11시 내지 12시까지 버틸 수 있다고 세연이 자랑스럽게 말한 것이 사, 나흘 전이었다. 세연의 성적은 반에서 중상위권이나 대부분 2,3일 전 벼락치기로 시험을 준비해서 가끔 중하위권까지 내려갈 때도 있다.(중위권끼리야 얼마나 차이 나겠는가 싶지만.) 이제는 중 3이니까 좀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계획표도 자고 실천도 꽤 하는 듯 싶었다.

“우. 그런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되지 않아.”

세연은 민혁에게서 손을 뺐다. 그리고 하얀 천장을 쳐다보며 아까 꾼 꿈을 다시 기억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희미해졌지만 유리구슬에 갇혔을 때의 느낌과 그 안에서 본 구름은 그대로 기역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지금도 구슬 안에 갇혀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다시는 그곳에 있기 싫을 정도였다.

“어디 아파?”

세연이 두 눈을 꼭 감고 있으니까 민혁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아니야. 이제 가자.”

세연은 눈을 뜨고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상체를 세워 일어났다. 깨어난 지 시간이 좀 지났지만 여전히 기분이 찝찝했다. 몸 전체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가더라도 집에 도착해서는 쓰러져 자버릴 정도로 피곤했다.

“계속 누워있었는데도 뭔가 이상하게 힘들어.”

“쓰러졌다가 깨어나면 더 피곤한잖아. 한두 번도 아니고.”

민혁은 일어서서 침대와 침대 사이에 쳐 놓은 커튼을 걷어 내고, 옆 침대 위에 올려놓았던 가방들을 챙겨들었다. 세연이 침대에서 나와 자기 가방을 찾기 번에 먼저 챙겨서 손에 들었다. 민혁의 눈에 세연은 확실히 상태가 나빠 보였다. 세연이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것도 눈에 보였다. 세연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남이 모르도록 숨기는 데에 서툴렀다. 그래서 민혁은 그 모습을 보지 않기 위해 먼저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먼저 가볼게요.”

민혁은 약품을 정리하고 있는 양호 선생님을 불렀다. 양호 선생님은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세연에게 가까이 갔다.

“오늘은 집에 가서 그냥 푹 쉬어. 무리하지 말고.”

“네.”

세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민혁을 따라 나갔다. 민혁은 앞서 걸었지만 세연이 따라 올 수 있게 속도를 조절했다. 세연 역시 민혁과 나란히 걸으려고 무리하게 다리를 움직이지 않았다.

교실 청소를 하는 아이들도 모두 하교하고, 학교 내는 일과 중일 때와 비교해서 많이 조용했다. 교문 밖으로 나갈 때까지 방과 후 특별 활동을 하는 교실을 몇 개 지나치지 않기 때문에 드문드문 들리는 선생님들의 목소리를 제외하고는 별 다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쓸데없이 교실에 남아 수다를 떠는 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운동장에도 저 멀리 농구 골대 아래서 놀고 있는 네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교문 밖을 나가서 길거리를 지날 때까지 주변이 너무 조용해서 민혁과 세연은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고 집을 향해 걸어가기만 할 뿐이었다.

 

민혁은 세연을 집에 데려다 주고 나서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을 지나 거실을 비껴서 자기 방문을 열자,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는 꼬마 아이 세 명이 눈에 들어왔다.

“아, 로키님.”

매튜가 먼저 민혁을 보고 침대 위에서 그대로 일어섰다. 그러자 곧 마블이 뒤에서 발로 발목을 차는 바람에 뒤로 자빠져 버렸다. 그 충격으로 침대가 위아래로 요동을 쳤다. 마야는 재미있는지 깔깔 거리며 웃었다.

“침대 위에서 그렇게 뛰면 못 써.”

민혁은 책가방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에 세쌍둥이가 바닥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놓은 슬리퍼를 침대 옆에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엎치락뒤치락 장난을 쳤다.

“언제 온 거야?”

민혁은 침대에 걸터앉더니 매튜를 깔아뭉개고 있는 마블을 들어올렸다. 마블은 벗어나려고 바둥거렸지만 결국 민혁의 무릎 위에 앉게 되었다. 매튜는 마블에게 깔려서 괴로웠는지 몸을 약간 일으키는가 싶더니 도로 엎어져 버렸다.

“한 시간 쯤 전에요. 마땅히 놀러갈 데도 없고 해서 여기로 왔어요.”

마야는 매튜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듯이 손가락으로 매튜의 팔뚝을 쿡쿡 지르며 말했다.

“여긴 피서지나 놀이터가 아니야.”

“알아요. 윽.”

“아는 녀석들이 이러고 있어?”

민혁은 마블의 목을 팔로 휘감고 확 조였다. 마블은 민혁의 팔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7살 대 16살의 상황에서 어림없었다. 마블의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얌전히 옆에 내려놔 주었다.

“크. 아퍼.”

마블은 상의의 네크라인을 앞으로 죽 잡아당겼다.

“마블 오빠. 매튜 오빠가 완전히 뻗었어.”

마야는 매튜의 팔을 간간히 찌르며 상태를 확인하다가 마블을 불렀다. 매튜는 얼굴을 침대 시트에 박고 엎드린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설마. 그 정도로 뻗으려고.”

민혁은 마블이 침대 위를 기어서 매튜에게 손대기 전에 먼저 매튜의 옆구리에 손가락 두 개를 대고 조금씩 간지럼 폈다. 매튜가 몸을 움찔거리자 이번에는 양손으로 마블의 옆구리를 마구 간지럼 폈다. 매튜는 조금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드리고 몸을 배배 꼬았다.

“푸하하하 하하 하하하하…. 그만요……. 하하하하.”

매튜가 엎어졌다 바로 누웠다를 반복하다가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사태에 이르게 돼서야 민혁은 손가락 움직임을 멈췄다.

“하하… 켁켁, 하하……. 휴.”

매튜는 잔기침을 몇 번 하더니 웃음을 멈추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매튜의 얼굴도 불그스레해졌다. 마야는 매튜의 옆에서 손으로 부채질을 해줬다.

“얼굴 좀 봐. 복숭아가 되 버렸어.”

“응. 뜨끈뜨끈 해.”

매튜는 손으로 볼을 만져보았다. 이렇게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장난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 듯싶었다. 마블의 얼굴도 아직 붉기가 다 가지 않아 매튜처럼 양 볼에 홍조가 어려 있었다.

“너희들 뭐하려고 여기 온 거야?”

민혁은 마블과 매튜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정리해 주며 물었다.

“두 눈으로 직접 보시다시피 놀러 왔죠.”

세쌍둥이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어린 아이다운 미소를 짓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일제히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가히 합창 수준이었다. 민혁은 괜히 물어봤다 싶었다. 제 눈으로 보기에도 이 아이들은 그냥 놀러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여기에 온 이유가 단순히 그것만 있는 건 아니니까.”

매튜는 침대에서 내려와 민혁의 책상 서랍 중 가장 밑에 있는 서랍을 가리켰다. 그 서랍은 매튜가 민혁에게 선물한 엑셀 암렛을 상자에 넣은 채 숨겨 놓은 곳이었다.

“너희들 설마……. 여기 와서 온 방을 다 뒤진 건 아니겠지?”

“숨겨놓을 만한 곳 몇 군데만 골라서 찾아보면 금방 나와요.”

마블은 물건을 아주 쉽게 찾았다는 듯이 말했다. 마블의 말대로 방은 침대 위가 좀 어지러울 뿐이지 다른 곳은 정리한 그대로인 듯 했다. 매튜는 민혁의 앞에 가서 서더니 민혁의 손을 곡 잡았다. 민혁은 매튜의 마력이 손을 통해 들어와 팔을 휘감는 것이 느껴지자 바로 손을 뺐다. 손이며 팔이며 매튜의 마력이 흐른 부분은 전기가 오르는 것처럼 찌릿했다.

“이건…….”

“일시 마비에요. 오늘 하루 동안은 그 손으로 마법을 쓸 수 없을 거에요.”

매튜가 한 것은 이종(異種)마력의 충돌을 이용한 마비법 중 하나였다. 서로 성격이 다른 마력이 충돌하면 간혹 마력을 사용한 사람이 마비 증세를 보일 때가 있다. 그걸 이용한 것이 이 마비법이다. 서로 마력의 특성이 다른 자끼리 상대방의 몸에 자신의 마력을 투입하면 그 부분이 일정시간 동안 마비된다. 마비되는 범위와 시간은 마력 투입 정도로 조절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일단 당하고 나면 저절로 마비가 풀릴 때까지 하제할 수 없다. 그래도 마력을 다룰 수 없을 뿐이지 단순히 물리적으로 움직이는 데는 지장 없다.

“로키님께서 무리하게 마력을 사용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에요. 그리고 가끔은 왼손에 의지해 보는 것도 좋을 거에요.”

세쌍둥이는 민혁이 엑셀 암렛을 이용해서 아직은 무리인 마법에 도전할 것이라 예상한 것이다. 민혁은 어제 섀도우 테크닉을 시도한 것을 아이들이 알아차린 게 아닐까 싶어 약간 뜨끔했다. 그리고 민혁은 오른손잡이다. 때문에 왼손으로 마력을 다루려면 오른손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아마 아직은 마력을 활성화하거나 퀵 볼의 형태를 잡는 것이 전부일 것이다.

“너네 이러면 어린 애 다운 귀염성이 없단 말이지.”

민혁은 저린 손과 팔을 주물렀다. 피가 잘 통하지 않아 평범하게 저린 것처럼 깔끔한 느낌은 못됐다.

“No problem.(상관없어요.)”

마야는 귀여운 투로 말하며 민혁의 뒤에서 민혁의 목을 싹 끌어안았다. 그러나 곧 마야는 눈을 차갑게 뜨며 민혁에게서 떨어졌다. 마야의 왼쪽 눈은 순흑으로 변했다. 마야의 행동이 이상해서 다들 주위를 살폈으나 수상한 건 없었다. 민혁은 아직 마야의 살기가 묻어 남아있는 자신의 뒷덜미를 문질렀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야의 왼쪽 눈은 다시 옅은 갈색이 되었으나 표정은 싸늘하니 곧바로 여왕의 모습으로 돌아갈 기세였다.

“어차피 나도 곧 엄마가 돌아오실 테고 너네도 일이 생긴 것 같으니까 오늘은 이만 가 봐.” 민혁은 마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야는 아무 말 없이 침대에서 내려와 한쪽 벽에 워프를 만들었다. 별 주문을 외우지 않고 시동어 만으로 워프를 생성한 것을 보면 마야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원도 주문 없이 바로 워프를 생성할 수 있으나 일부러 주문을 짧게라도 외우는 것은 마력을 신중하고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다.)

“다음에 오면 간식이라도 만들어 줄게.”

민혁은 세쌍둥이가 워프에 들어가기 전에 그들을 불러 포근하고 따뜻한 투로 말했다.

“네.”

아이들이 워프로 들어간 후에 워프는 사라졌다. 민혁은 빈 벽을 보다가 아릿하게 저리는 자신의 오른손과 팔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왼손으로 시선을 옮겨서 마력을 다뤄보았다. 오른손잡이이긴 해도 왼손으로 마력을 활성화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동안 오른손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왼손으로 마력을 집중하는 것이 까다로운 뿐이었다.

민혁은 하던 것을 멈추고 책상 맨 아래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 있는 엑셀 암렛은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마력의 봉인을 찾기 전까지 임시방편이기도 했다. 그것에 쉽게 의지할 생각은 없지만 사용을 자제할 자신도 없었다. 사용이 필요없을 때는 이렇게 어딘가에 숨겨두는 것이 남용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민혁은 다시 서랍을 닫고 천천히 허리를 펴며 일어섰다.

어제 섀도우 테크닉을 시도했던 오른손은 매튜에 의해 마비되어 버렸고 남은 왼손은 아직 수련부족으로 움직임이 좋지 않다. 민혁은 몸 전체의 마력을 전체적으로 활성화하는 것을 시도하려다가 그만 뒀다.

“할 일은 하고, 그 다음을 해야지.”

민혁의 눈에는 책상 위의 책가방이 비쳤다. 손도 눈을 따라가더니 몇 년 동안 습관을 들인 것이 아깝지 않게 능숙하게 교과서며 부수적인 것들을 바꿔 넣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책상 위 자체가 깨끗하게 정돈되었다. 책은 책대로 과제물은 과제물대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며 민혁이 오늘 안에 말끔하게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혁은 책상 앞에 앉아서 샤프를 들고 부지런히 손과 머리를 움직여 나갔다.

민혁이 이렇게 지낼 동안에 진원은 얼굴 모르는 스위스 인에게서 받은 옅은 하늘색의 구슬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발키리를 호환할 수 있는 구슬. 이건 ‘오딘’만이 가질 수 있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구슬이다. 그리고 일단 이 구슬을 한 번 사용하면 몸에서 떼어낼 수 없다.

세상에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유일하게 이 세상의 속에서 공존하고 있는 물건을 ‘솔릭’이라고 한다. 이 솔릭은 처음 사용한 자가 주인이 되고 주인과 솔릭은 처음 발동한 순간부터 일체가 된다. 솔릭은 대부분 신의 무기 혹은 신의 애장품이나, 엘프나 정령과 같이 태어날 때 몸에 솔릭을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엘프나 정령이라고 꼭 솔릭을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드래곤의 이마에 달려 있는 ‘드래곤 스톤’이나 정령왕의 손등에 박혀 있는 ‘프레쉬스트’는 힘의 근원이자 무기이지만 신체의 일부이기도 하므로 ‘솔릭’이 아니다. 그리고 한 존재가 여러 개의 솔릭을 소유할 수 있으나 마력 자연 상실을 각오해야 한다. 진원이 가지고 있는 옅은 하늘색의 ‘발키리 소환구슬’도 솔릭이다.

“이걸 사용하면 나야 편하지. 하지만ㅁ 발라스칼프의 열쇠가 지금 내 손에 없기 때문에…….”

발키리는 오딘을 위핸 여전사들이다. 발라스칼프에서 이들을 불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발라스칼프의 열쇠가 있으면 좀 수월하다. 다만, 지금 발라스칼프의 열쇠가 없어서 발라스칼프의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걱정되는 것이 있다면 진원이 제 3의 세계에서 미드가르드(인간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아스가르드와 미드가르드의 연결이 어떤 상태인지 알지 못해 발키리를 아스가르드에서 소환해 낼 수 있냐는 것이다. 만약에 그 연결이 불안정한 상태이거나 끊어진 상태라면 발라스칼프의 열쇠가 필히 필요하다.

만약 발키리를 소활할 수 있다면 진원은 매일 일정량의 마력을 구슬에 흡수당한다. 마력의 봉인을 아홉 조각 중에서 세 조각을 찾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래도 마력이 제 2의 세계에서보다 적기 때문에 발키리를 소환하는 수와 소환 후 능력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발키리를 소환하는 건 나중 일로 미루고 일단은 이 편지……. 이 안의 숨어 있는 글은 의심할 만 해.”

진원은 어제 풀어낸 편지의 비밀글을 손에 들고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왕의 이름을 가진 자여, 그대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대의 과오를 뉘우치라.」

예연과 같은 글귀가 편지 속에 암포처럼 숨어 있었다. 편지를 보낸 ‘세실뤼온’은 자신이 누구였다는 것을 각성하지는 못했지만 특별한 능력은 무의식 속에서 발휘하고 있던 모양이다. 아마 이 편지를 쓸 때 그 능력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세실뤼온은 아마도 ‘시즈뤼엘’일거야. 시즈뤼엘이 맞다면 이런 글을 쓰는 게 이상할 것 없지.”

진원은 종이에 적은 글귀를 몇 차례 눈으로 훑어 읽다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시즈뤼엘’은 제 2의 세계에서 ‘미드가르드의 예언자’로 유명했다. 여느 예언자와 다르게 특이하게도 남성이었다.(예언자나 마법사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여자였다.) 어머니는 노른 중 한 명인 우르드, 아버지는 물푸레나무의 정령이었다. 그는 신과 비등한 생명력과 마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스가르드에서 사는 것을 거부하고 미드가르드에서 살았다. 어머니 우르드이 영향으로 시즈뤼엘도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미드가르드에서 노른의 목소리를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신관 겸 예언자의 생을 보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그 자매들이 그랬듯이 라그나로크를 예언했다. 그리고 라그나로크가 완전히 끝나기 1년 전 부터는 남자 인간들을 물푸레나무에, 여자 인간들을 느릅나무에 숨겨 라그나로크가 끝나기까지 무사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여기까지는 진원이 환생하기 전에 니플헤임에서 미드가르드의 인간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 후의 이야기는 시즈뤼엘이 비밀을 당부하여 오딘, 즉 진원이 알지 못했다. 시즈뤼엘은 신과 정령의 혼혈이었기 때문에 신과 같은 능력, 정령과 같은 성장을 갖고 있었다. 노화 속도는 현저히 느리지만 수명에는 역시 한계가 있었다. 이둔의 황금 사과를 먹을 수 없었던 그 때, 라그나로크가 끝난 직후에, 시즈뤼엘은 자신이 죽는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제 3의 세계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김리궁에 있는 신들의 도움을 받아 오딘의 물건이며 다른 신들의 물건을 회수하고 제 3의 세계 각 지에 뿌렸다. 한 곳에 모아두면 우트가르드 로키의 손이 뻗쳐 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 타 무너져 버린 발할라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발키리들을 발라스칼프로 옮겨 보살펴주었다. 덕분에 발라스칼프에 있는 발키리의 수는 기존에 그곳에 있던 수보다 늘어 다른 신의 성보다 활기찬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시즈뤼엘이 마지막으로 한 일은 각 나라(아스가르드, 미드가르드, 알프헤임, 니플헤임 등 9개의 나라) 간의 연결 통로를 차단한 것이다. 김리궁의 발데르와 기타 2명의 신의 힘을 빌어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서 한 일이다.

시즈뤼엘이 니플헤임에 오자마자 펜리르가 그를 헬에게로 안내했다. 요르문간드와 헬의 명령을 맏은 악마들은 주변을 철저하게 감시하며 시즈뤼엘을 호위했다. 시즈뤼엘은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가지고 있는 자였기 때문에 우트가르드 로키와 그의 추종자들이 그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선수친 것이었다.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몇 년 되지 않은 때였기 때문에 니플헤임에 있던 신들은 제 3의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헬이나 그 측근들은 니플헤임의 외부와 계속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있었기 때문에 시즈뤼엘이 살아 있을 적에 마지막으로 한 예언을 전해 듣게 되었다.

「제 3의 세계에서 왕의 이름을 가진 자가 두 번째 라그나로크에 휩쓸릴 것이다.」

헬은 시즈뤼엘을 자신의 성에 정중히 무시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이 두 번째 라그나로크를 막기 위한 대책회의였다. 오딘이 환생을 준비할 즈음에 헬은 오딘에게 시즈뤼엘의 예언만 전달했다. 이것이 시즈뤼엘이 헬에게 한 당부 중 하나였다.

“항상 조용했지만 세상을 보는 눈은 누구보다도 날카로웠지.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걸 중명해 준단 말이야.”

진원은 책상 위에 있는 종이를 지긋이 내려 보았다. 100%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세실뤼온’이 ‘시즈뤼엘’이기를 바랐다. 솔직히 세실뤼온이 시즈뤼엘 이외 누군가일 것이라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대체할 수 있을 만한 자가 없었다.

“아, 혹시…….”

진원은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순간적으로 앞으로 내뺐다. 그리고 뭔가를 계산하듯이 빠르게 생각하는가 싶더니 몸을 다시 뒤로 기댔다.

“아무리 헬이라도 환생한 자를 구별 할 수 없어.”

헬은 죽은 자를 다스리기 때문에 환생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보통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착각이다. 헬은 어디까지나 죽은 자를 다스리는 것이지 산 자를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일단 영혼을 환생의 강에 태워 보내면 어떤 모습으로 환생 했는지 알 수 없다.

환생의 강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것이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오딘의 환생을 방해했을 때 강 입구에서 방해한 것이지 그 중간은 건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프리그는 이 사실을 이용하여 오딘이 강을 탈 때까지, 그 때까지 필사적으로 우트가르드 로키를 막았던 것이다.

역으로 보면 헬은 이미 환생한 자가 과거에 누구였는지 찾을 수도 없다. 이미 각성한 자에 대해서 마력이나 기타 부수적인 것으로 알아낼 뿐이다. 환생한 자를 누가 누군지 구별할 수 있다면 벌써 환생한 신들을 찾아냈을 것이다.

진원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뭔가 하나 해결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새로운 일이 밀려드니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매 순간순간이 피로 상태였다. 사적인 평소 생활에서 항상 일관된 그 ‘설진원’의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렇지만 한 번 쉬면 다음에 수많은 일들이 쏟아져 내릴까봐 겁이 났다.

“정말 미치겠군.”

진원은 턱을 앞으로 당겨 몸과 일직선이 되도록 머리의 각도를 원상 복귀했다. 그리고 종이를 다시 집어 들었다. 눈으로 한 번 글을 훑어 본 후에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즈뤼엘의 예언을, 헬에게서 들은 마지막 예언을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했다.

 

제 3의 세계에서 왕의 이름을 가진 자가 두 번째 라그나로크에 휩쓸릴 것이다.

외눈박이 왕은 두 눈을 뜨고 마법의 왕을 주시하라. 마법의 왕이 부른 라그나로크는 시작일 뿐이다. 새로운 전쟁이 진정한 끝이라는 이름 아래서 피와 눈물의 꽃을 퍼트릴 지어다.

악의 왕은 절망에서 살아남아라. 야수의 왕이 포효하고, 마드가르드의 뱀이 울부짖고, 죽음의 여왕이 좌절하며 그대를 부를 때 문의 왕으로 소생할 지어다.

검의 왕은 걀의 왕에게서 힘을 받아라. 왕의 눈은 왕의 힘의 근원이다. 새로운 전쟁에서 필요한 것은 눈의 힘이다. 눈이 아닌 눈의 힘으로 전쟁을 이끌지어다.

번개의 왕은 마법의 왕의 목소리를 듣지 말라. 왕의 손과 발이 새로운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열쇠가 될지어다.

얼음의 여왕은 왕의 이름을 가진 자의 방패가 되어라. 얼음의 여왕이 지나간 자리에서 검의 왕과 번개의 왕이 눈뜬다. 눈물을 떨군 곳에서부터 가야할 길이 보일지어다.

엘프의 왕은 전쟁의 여왕과 앞을 바라보라. 뒤에 잊혀진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쇠사슬을 보이는 도끼로 끊을 때, 깊었던 동굴의 출구가 찬란하기 나타날지어다.

왕의 이름을 가진 자여, 그대는 새로운 세상에서 그대의 과오를 뉘우치라.

여기에 불리지 않은, 왕의 이름을 가진 자여, 두 번째 라그나로크에서 그대들의 이름이 공중에 울려 퍼질 지어다.

-시즈뤼엘의 마지막 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