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문. 노력? 필승? …다시 얻어낸 마법
레이는 등굣길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훨씬 무거웠다. 베히모스를 상대하면서 마법을 쓰는 장면을 인철에게 보인 뒤에 인철은 레이를 경계하는 눈으로 대했다. 가족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레이와 인철이 서로 마주칠 때면 인철은 순간적으로 적대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게다가 어제 저녁에 공원에서 혼자 마력을 몸 전체적으로 활성화 하며 마법 구현화 속도를 증가시키는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도장에 나가기 전 다른 곳에 들렀다가 가는 인철에게 그 모습을 들켰다. 레이는 그 후에 도장에 들어가서 수련할 때, 집에 돌아갈 때 모두 인철의 눈치를 보며 긴장할 뿐이었다.
“내가 괜히 긴장할 필요는 없는데.”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레이가 인철보다 강하지만 왠지 모르게 인철은 레이에게 천적 같은 존재였다. 집에서 가족들에게나, 학교에서 친구들에게는 유쾌하고 다정한 아이지만 레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레이가 처음 그 집에 들어갈 때부터 인철의 인상은 그닥 좋지 않았다.
자기 반 교실로 들어간 레이는 책가방을 내려놓기 전에 베일리에게 교실 내 여기저기를 끌려 다녀야 했다.
“Wha, What's up?"
레이는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둘러보니까 여학생 두 명이 셔츠 소매를 걷어 붙이고 악작같이 베일리를 추격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레이는 베일리의 방패로 발탁되어 본의 아니게 교실 내릴 분주하게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베일리는 친구들을 약 올리고, 사정모르는 레이를 끌어 들이고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이러면 안 되지.”
반장은 중간에 베일리의 팔을 붙잡고 아주 자연스럽게 레이를 구출(?)한 후에 추격자들에게 베일리를 넘겼다.
“Ah… Stop! 이러면 어떡해?”
[팍! 퍽!]
베일리는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여학생들에게 등짝과 팔뚝을 얻어맞았다. 여학생들의 손에는 분노를 비롯한 몇 가지의 감정이 실려 있어서 내려치는 힘이 장난 아니었다.
“저 천하의 바보한테서 구해줘서 고마워.”
레이는 베일리가 실컷 두들겨 맞는 것을 상관하지 않고 반장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베일 리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학교를 제 세상인 것 마냥 활개치고 다녀서 친구들에게 호되게 당하는 모습을 하루 일과처럼 보며 지냈기 때문에 레이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거 맞고 안 죽으니 괜찮다는 식이었다.
“언제 봐도 레이는 베일리한테 매정하구나.”
반장은 이제 아이들을 말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여학생들은 손을 멈추고 베일리의 다리를 한 번씩 걷어 찬 후에 어디론가 가버렸다.
“크……. 이러다가 병나겠다.”
베일리는 불쌍한 강아지의 눈을 하며 레이를 쳐다봤으나 레이는 아예 베일리 쪽을 보지도 않았다. 그 눈은 베일리에게 어울리지 않아서 누가 보면 더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괜찮아. 바보는 몸이 튼튼해서 굳이 일일이 신경 안 써도 괜찮아.”
[뻑!]
레이는 보지도 않고 손바닥으로 베일리의 등을 정확하게 내리쳤다.
“Cool attack.(멋진 공격이야.)”
베일리는 한 번의 타격에 다리가 무너졌다. 레이가 자리로 돌아가서 가방을 정리할 때까지 일어서지 못했다. 반장은 베일리와 마주 보며 쭈그려 앉아서는 나름 위로해줬다.
“너도 참, 타지에 와서 여러 가지로 고생한다.”
“No problem. It's my work.(괜찮아. 이게 내 일이야.)”
여지없이 말썽꾸러기의 모습이었다. 등교하자마자 장난을 시작했으니 하루 종일 복도와 계단을 질주하며 우렁찬 고함소리와 패대기치는 소리를 곳곳에 뿌리고 다닐 것이 분명했다. 전형적인 우등생인 반장은 공부 좀 한다는 외고에서 중학교와 비슷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을 늘 이상하게 여겼었다. 특목고를 선망하는 학생들에게 일정하게 나타나는 정신적 충격이나, 이 정도는 입학 후 한 달이면 금방 극복할 수 있다. 아주 가끔씩 특목고에 대한 환상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어서 현실에 좌절하는 학생도 있긴 하지만, 반장은 일반적인 케이스이기 때문에 문제될 건 없다.
“희준아, 수학 선생님께서 부르셔.”
한 여학생이 교실 앞문을 열고 들어 와 반장을 불렀다. 반장은 짧게 ‘응’이라 대답하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반 아이들은 모두 등교를 마쳤고 대부분이 자기 자리에 앉아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레이도 자리에 앉아서 자신이 한 숙제를 읽으며 틀린 부분은 없는지 검토하고 있었다. 한국어로 대화하는 것은 무리될 게 없다 해도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아직 힘들었다. 간혹 제출물에 받침을 잘못 쓰거나 띄어쓰기가 불량인 경우가 있는데 담당 과목 선생님들이 많이 양해해 주고 있다.
레이가 자기 일에 매진하고 있는 중에, 책상 가운데에 작은 체이스 홀이 생겼다. 그리고 악마의 손이 천천히 솟아 올라왔다. 레이는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악마의 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 손바닥에는 붉은 피로 글자가 써 있었다.
“Please go up to the top.(옥상으로 와 주세요.)”
레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글씨를 읽었다. 그러자 악마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내려가고 체이스 홀도 사라졌다. 특별히 이 근처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없었다. 상대는 마력을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 악마를 다루는 걸 보니 마야일 가능성이 높았다. 레이는 고개를 살짝씩 좌우로 돌리며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근처 가까운 데에 앉은 친구들은 제 할 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침 자습을 알리는 종이 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들이 복도를 거닐고 있었다. 레이는 어떤 선생님이 창밖으로 지나가는 것이 보이자 조용히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선생님들의 눈을 피해 계단이 있는 곳까지 갔다. ‘레이 윙’으로 쉽게 계단을 날아 올라가기 위해 마력을 모았지만 금방 관뒀다. 순간 인철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레이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층도 선생님들이 복도를 거닐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는 최대한 조심했다. 레이는 자습 시간에 돌아다니는 모습을 다른 누구에게 보일까봐 조마조마했다. 가끔 자습 시간에 교실을 이탈하는 학생들이 있는데 그 학생들이 어떤 마음으로 돌아다닐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건 똑같을 거라 생각했다.
레이는 학교 옥상으로 통하는 문 앞에 다다랐다. 주위를 한 번 둘러 본 후에 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열려있었다. 보통 때 같으면 사고 방지를 위해 문을 잠궈 두지만 지금은 레이를 위해 일부러 열려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줬다. 레이는 옥상으로 나간 후에 최대한 소리가 덜 나도록 문을 닫았다.
“어서 오시죠.”
악마 하나가 레이의 앞에 나타났다. 레이는 순간적으로 등을 문에 밀착시켰다. 레이에게 말을 건 악마는 그닥 강해보이지 않는 평범한 하급 악마였다. 하지만 레이보다 키가 크고 흑회색 피부에 조금씩 찢어진 자국이 있는 검은 박쥐 날개의 악마가 갑자기 바로 앞을 막아서니 조금 무서웠다.
“아, 네. 혹시 마야도 와 있나요?”
레이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악마의 인사에 응했다. 레이의 입에서 마야의 이름이 나오자 악마는 옆으로 비켜서며 정중하게 손으로 마야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야는 한 악마와 함께 서 있었다.
마야와 같이 있는 악마는 얼굴을 눈만 보이도록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날개는 크고 날개의 비늘도 가지런했다. 날개의 색은 단순한 검정색이 아니라 어둠속에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둠과 똑같은, 어둠의 색이었다. 피부는 평범한 회색이고 손톱은 날개 색과 같은 색이었다. 왼쪽 귀에만 귀걸이를 달고 있었는데 공중에서 내려다 본 심해의 색을 가진 사파이어로 만든 것이었다. 소매가 없는 긴 코트를 겉에 걸치고 있었다. 안에는 빠르게 움직이기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자객을 연상케 하는 옷이었다. 그가 입은 옷은 전부 어둠의 색이었다.
레이는 마야의 옆에 서 있는 악마를 주시하다가 긴장한 마음을 좀 가다듬고 마야에게로 걸어갔다. 마야는 마력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 어린 아이의 얼굴에서 근엄한 여왕의 모습을 충분히 구사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스카디님, 오셨군요.”
마야는 좀 전의 근심 가득한 표정을 감추고 밝게 웃으며 레이를 맞이했다.
“일단 이 쪽은 네르갈이에요.”
‘네르갈’이라고 소개된 악마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레이에게 인사했다. 레이도 덩달아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네르갈이라면 천재적인 스파이 악마라고 알고 있는데…….”
레이는 약간 놀라워하는 눈으로 네르갈을 쳐다봤다. 네르갈은 레이에게 인사한 후에 마야의 옆에서 가만히 서 있을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네. 제가 네르갈에게 부탁한 일이 있었는데 오늘 새벽에 돌아왔어요.”
레이는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고 싶었지만 마야가 다시 여왕의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오딘님께는 마블 오빠가, 로키님께는 매튜 오빠가 가 있어요. 같은 이야기를 전달할 거에요.”
마야는 레이의 눈을 보다가 레이가 들을 준비가 된 것 같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악마 쪽에게는 벨제뷔트라는 왕이 있어요. 제가 니플헤임을 맡기 전에 니플헤임의 나스트론드와 무스펠 지역 사이에 왕국을 이루고 있었죠.”
“그건 나도 아는 얘기야.”
레이는 수업도 있고 해서 마야의 말을 끊었다.
헬이 니플헤임을 다스리기 전에 니플헤임은 그야말로 무법지대였다. 천사족과 악마족, 불귀신 무스펠(거인 무스펠과 다르다.)이 죽은 자들의 생활에 이것저것을 간섭하고, 때로는 환생의 강 입구를 막아 현세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니플헤임의 혼란상태가 제어 불가능 할 정도로 심해지자 오딘은 니플헤임을 다스릴 자를 물색했다. 그 때 로키가 자신의 딸, 헬을 추천했다. 로키의 세 아이들은 신들에게 미움을 받아 아스가르드의 한 쪽 구석에 있는 빙산에 갇혀있었다. 그러나 로키의 노력으로 하나씩 제 일거리를 찾아나갔다. 헬도 니플헤임을 맡으면서 빙산에서 빠져 나온 것이었다.
헬은 아직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해 약해 보였지만 머리가 좋고 마법 능력도 뛰어나(아마 로키에게서 물려받았을 것이다.) 니플헤임을 야금야금 자기의 나라로 만들어 나갔다. 천사족을 본래 있어야 할 곳(엘프하임의 한 지방)으로 돌려보내고 특별한 몇몇만 골라내서 니플헤임을 임무가 있을 때만 드나들 수 있게 했다. 이건 오딘과 프레이르의 도움을 받아 한 일이었다. 무스펠은 그들의 도시에서만 살 수 있게 하고 드래곤 룽게르타를 시켜 그곳을 감시하도록 했다. 이건 요르문간드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악마족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헬 혼자서 처리했다. 신들도 감히 건들지 못할 일이었다. 헬은 자체 왕국을 가지고 있는 악마족을 무릎 꿇게 하고 자신의 수하로 들어오게 했다. 헬이 어떤 방법을 썼는가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지만 악마족이 헬을 여왕으로 받들게 된 건 사실이었다.
니플헤임을 활개치고 다니던 종족들을 정리한 후에 죽은 자들을 위해 니플헤임의 영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몇 군데의 지명도 바꾸고 성과 건물도 새로 짓거나 수리했다. 헬은 어느 순간부터 인가 죽음의 여왕, 니플헤임의 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니플헤임이 정리되고 헬의 마법 실력이 늘자 미드가르드에서 ‘신’격화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스가르드에서도 헬의 공은 혀를 내두르며 치하했다.
“그러면 필요한 본론만 말할 게요. 악마족은 라그나로크 전부터 조금씩 두 부류로 나뉘기 시작했어요. 쉽게 말하자면 헬 세력과 반 헬 세력으로요. 이 현상은 라그나로크가 끝나고 신들의 환생이 하나씩 이루어지면서 뚜렷해 졌어요. 지금은 누가 어느 세력에 있는 지 대충 알 수 있어요.”
“그게 어쨌다는 거야?”
“반 헬 세력은 단순히 저한테서 독립하려는 그런 게 아니에요.”
레이는 바로 눈치 챌 수 있었다. 반 헬 세력이 누구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지 감을 잡았다. 그러나 인정할 수 없었다. 이유나 명분 같은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어요. 그래서 여기 네르갈에게 여러 주요 악마들을 감시하라고 시켰던 거에요.”
그 다음에 마야가 할 말은 뻔했다. 레이는 마야의 입을 막거나 자신의 쉬를 막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기에 얌전히 마야의 말을 끝가지 들었다.
“우트가르드 로키 쪽에 붙은 악마가 대략 1/4정도는 되요. 주요 고위급 악마가 꽤 된다는 게 문제지만…….”
며칠 전에 마야가 네르갈에게 감시를 부탁했던 아스타로트도 우트가르드 로키와 접촉하고 있었다. 그래도 다른 악마들처럼 완전히 그 쪽 편은 아니었지만 마야 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상태였다. 아스타로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권력을 믿고 더 이익이 많은 곳으로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마야, 네르갈이 네 편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어?”
레이는 네르갈을 한 번 노려보았다. 네르갈은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전 불확실한 자만 감시를 해요. 어느 편인지 확실한 자는 의심 같은 거, 생각 같은 거 하지 않아요.”
마야는 레이의 발언에 약간 불쾌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네르갈은 원래 악마왕 벨제뷔트의 첩보요원이었다. 벨제뷔트 만을 위해 움직였다. 그러던 중에 벨제뷔트가 악마의 왕으로서 헬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네르갈을 충성의 표시로 바쳤다. 네르갈도 기꺼이 헬을 하나 뿐인 주군으로 모셨다. 네르갈이 헬의 비밀 요원으로서 행동한 지 수 백, 수 천 년은 더 되었다. 그런 네르갈이 의심을 받는 건 헬로써는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레이도 니플헤임에서 지낼 때 네르갈이 항상 헬 옆을 지키거나 직접 그녀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야가 기분 나빠 할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어. 확실하게 증명할 뭔가가 있어야지.”
레이는 네르갈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제가 여왕님께 바치는 충성은…….”
아무 말 없이 마야의 곁을 지키고 있던 네르갈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무언가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제 몸이나 정신은 여왕님을 위해 바쳐진 제물입니다. 제 목숨보다 주군의 목숨을 우선하는 자에게 충성의 증거를 내보이라 하신다면, 보여드리겠습니다. 다만, 여왕님께서 제가 목숨을 버리길 바라실 때, 제가 목숨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때에 보여드리겠습니다.”
네르갈의 말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미리 준비한 대답이라서가 아니었다. 네르갈은 진심이었다. 주군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할 기세였다. 그것이 설령 목숨이 걸린 일일지라도 상관없었다. 헬에게 처음 무릎 꿇은 그 날부터 네르갈의 목숨은 이미 죽음의 위험 속에 내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건 말할 가치도 없어. 어리석은 질문에는 침묵이 그 답이야.”
마야는 어린 아이의 가는 목소리로 위엄 있게 말했다. 네르갈은 짧고 강하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야의 말에 응했다. 레이는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말 할 수 없었다. 네르갈의 존재에 대해서 계속 태클을 걸면 그 동안 쌓아온 마야와의(여왕 헬과의) 친분에 금이 갈 것 같았다.
“미안해. 난 악마 자체를 제대로 알지 못해. 그런데 이렇게 둘로 갈리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렇다면 바로 눈앞에 있는 것부터 의심할 수밖에 없어.”
“‘것’이 아니라 ‘네르갈’이에요. 이름 있는 상급 악마라고요.”
“응. 기억해 둘게.”
레이는 자심보다 차가워 보이는 마야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마야를 화나게 하면 자기만 손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주치고 싶지 않은 눈을 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마야의 기분이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다.
17살이나 되는 고등학생이, 그 반도 안 되는 나이의, 7살의 여자 아이를 어려워하는 모습은 구도적으로 맞지 않다. 물론 요즘은 7살이라 해도 알 것 다 알고 말솜씨도 제법이기 때문에 어른들도 꽤 곤혹스러워 한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17살의 고등학생이 7살의 꼬마를 피하려 하는 것은 참 보기 드문 광경이다. 스카디와 헬의 관계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스카디가 라그나로크 이후 니플헤임에서 지내기 전부터, 아니 스카디가 신으로 임명되기 전부터 둘은 잘 아는 사이였다. 나이를 따져보면 스카디가 헬보다 두 살이 어리다. 헬이 빙산에 갇히기 전에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스카디를 펜리르가 발견하고 나서부터 스카디와 헬은 자주 같이 놀며 친해졌다. 헬이 빙산에 갇힌 후에는 당연히 서로 만날 수 없었다. 니플헤임이 헬에 의해 정리되었다는 소문이 들려오자 스카디는 헬을 만나고 싶어 니플헤임의 입구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로부터 2년 쭘 지나, 헬은 두, 세 달에 한 번씩 니플헤임에서 나와 스카디를 만났다. 이미 니플헤임이라는 거대한 곳의 여왕이 된 헬과 단순히 거인족 소녀일 뿐인 스카디는 그 차이가 너무 컸다. 가뜩이나 헬이 언니라고 스카디를 억눌렀었는데 신분마저 엄청 차이 나게 되었으니 스카디가 헬에게 꼼짝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스카디가 신이 되고 나서도 헬과 스카디 사이의 서열은 변함이 없었다.
제 3의 세계에서 마야가 존댓말을 써서 레이가 얼마나 어색했는지 모른다. 마야는 당연하다는 듯이, 익숙하게 존칭어를 사용했지만 레이는 내심 부담스러워서 마야가 그냥 편하게 말을 놨으면 했다. 차라리 영어로 말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화제가 좀 빗나갔습니다, 여왕님.”
레이를 맞이했던 악마가 마야의 뒤에 나타났다.
“아, 그래. 휴. 우트가르드 로키는 아직 악마들을 전투에 내보내지 않은 것 같지만 앞으로도 안 내보낼 거란 보장은 없어요.”
마야는 감정을 누르고 본론으로 돌아갔다. 담담한 표정의 얼굴은 새로 생긴 문제의 예방책을 들고 온 듯 했다.
“아군과 적군을 구별할 방법이 있다면 악마들이 싸움에 끼어든다고 해도 크게 어려울 건 없겠지.”
레이는 문제와 해결방안의 요점을 제대로 잡았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별별 것을 다 동원하는 판에 뭔가 한 가지가 더 늘어난다고 이상할 것도 귀찮을 것도 없었다. 아군을 공격하는 실수만 없으면 상대가 누구든 상관할 것이 없었다.
“네. 그래서 데려온 거에요.”
마야는 눈짓으로 뒤에 서 있던 악마를 앞으로 나오라 불렀다. 악마는 특유의 소리 나지 않는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서는 양 팔을 몸통 옆에 붙이고 45°로 허리 숙여 레이에게 인사했다. 레이는 이번에는 네르갈 때처럼 맞인사를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대가 하급 악마니 신의 체면도 있고 해서 맞인사를 피했던 것이다.
“이름은 리켄. 앞으로 스카디님의 심부름을 할 것입니다.”
악마 리켄은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왼쪽 무릎은 바닥에 붙이는 자세로 무릎을 꿇었다. 주종관계를 맺거나, 주종관계를 확인할 때 의례적으로 ‘종’이 취하는 자세였다. 레이는 오른 손의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망설였다. 마야의 눈치를 살폈으나 마야는 어떤 미동도 하지 않고 레이의 모습만 감상하듯이 쳐다 볼 뿐이었다. 레이는 가늘게 떨리는 손을 리켄의 머리 위에 얹었다. 그 순간 리켄은 검은 연기로 변하여 레이의 오른손을 감쌌다. 레이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이게 뭐야?”
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연기에 둘러싸인 손을 최대한 멀리 두고자 했다. 상체를 뒤로 젖히기까지 했다.
“침착하게, 조금만 기다리세요.”
마야는 레이가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에 살짝 미소 지었다.
“진원 오빠랑, 민혁이도 이러고 있는 거야?”
레이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꿈치를 붙잡고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오른손 전체를 감싸던 검은 연기는 중지손가락 가장 아랫마디에 집중 되었다.
“네. 그 분들께도 하급 악마를 한 명씩 붙여 드렸어요.”
마야는 레이의 모습을 보다 못해 레이에게 다가가서 레이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검은 연기가 반지의 모양으로 굳어지고 나서야 레이의 발이 진정되었다. 검게 칠해진 강철 고리에 작은 흑수정 조각이 두개 붙어있는 반지였다.
“그 반지를 볼 수 있는 건 악마나, 그런 반지를 가지고 있는 자, 악마와 계약 중인 자 뿐이에요.”
반지가 완성되고 레이가 안정된 듯 싶자 마야는 레이의 팔을 놓았다. 레이는 여전히 팔을 쭉 뻗고 고개를 뒤로 좀 당겨서 가능한 거리를 멀게 하여 반지의 모습을 살폈다.
“일단은 잘 받아둘게.”
레이는 입으로만 인사하고 몸 전체적으로는 반지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몸에 악마를 달고 다니는데 기분 나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악마의 물건도 아니고 악마를 직접 소지품처럼 데리고 다니려니 레이가 살짝 맛이 가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레이는 팔을 천천히 굽혀 손을 몸 가까이로 당겼지만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마야는 뿌듯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진원과 민혁도 레이처럼 반 억지로 악마를 맡았을 것이다. 진원은 정중하게 거절했겠지만 마블이 강하게 밀어 붙였을 것이고 민혁은 매튜의 동글동글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눈에 못 이겼을 것이다. 레이는 자신과 같은 상황이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으니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악마가 나타나면 아군과 적군의 구별을 리켄이 해 줄 거에요. 필요할 때 명령만 내리면 실체로 돌아가서 수행할 테니까 일종의 소환물이라고 생각하시면 되요.”
“으응.”
마야가 여왕으로서의 어두운 얼굴을 모두 감추고 천진난만한 꼬마의 표정으로 말하자, 레이는 최대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소환물도 소환물 나름이지, 악마를 이런 식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은 소환물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마야의 말에 투를 달면 남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내던지면 안 된다고 한 소리 들을게 뻔했다.
아래에서 학교 종소리가 들려왔다. 레이는 옥상 입구 쪽을 한 번 돌아본 다음에 마야의 얼굴을 봤다.
“일부러 여기에 와 줬는데 오래 같이 못 있어서 좀 아쉽네.”
레이는 내심 마야를 핑계 삼아서 학교를 빠지고 싶었다. 어제 저녁부터 심난한 것이 도통 일이 손에 잡히자 않았던 것이다. 숙제도 하진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겨우 한 건데 혼자 하려 했으면 절대 손대지 않았을 것이다. 마야는 레이의 눈에서 레이의 마음을 조금 읽을 수 있었다.
“조금 더 있으면 지겹도록 같이 있게 될 거에요.”
마야의 목소리는 따뜻한 공기가 되어 레이의 몸을 감싸는 듯 했다. 처음에 봤던 여왕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이에 비해 성숙한 마야 새턴이 눈앞에 있을 뿐이었다. 네르갈은 마야의 말이 끝나자마자 허공에 체이스 홀을 만들었다.
“응. 그랬으면 좋겠다.”
레이는 마야가 네르갈의 경호를 받으며 체이스 홀에 들어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래층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바깥 운동장에서 뭔가 바삐 움직이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레이는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며 결의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언제까지 의기소침하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두렵고 괴기스러웠지만 막상 반지를 끼고 나니까 진자로 전쟁이 시작한 듯 했다. 이제 전쟁에 대한 준비를 준비답게 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마야가 한 말은 레이의 귀를 계속 울리고 있었고 레이의 손을 따뜻하고 부드럽게 감싸 쥐고 있었다. 레이는 이런 위로를 원했던 것이다. 자신과 함께 있어줄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우트가르드 로키와의 싸움에서 이기면 이긴 대로, 지면 진대로, 혹은 살아남으면 살아남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마야와, 헬과 같이 있을 수 있다. 늘 혼자 외로이 떨어져 있다는 고독의 슬픔에서 구제 받을 수 있다. 기억을 되찾고 오래지 않아 마야를 만난 것을 축복으로 여겼다. 드디어 스카디답게 싸울 수 있게 되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의 재림 : 제 4문 (3) (0) | 2009.06.05 |
---|---|
신의 재림 : 제 4문 (2) (0) | 2009.06.05 |
신의 재림 : 외전 1 (0) | 2009.05.07 |
신의 재림 : 제 3문 (5) (0) | 2009.05.07 |
신의 재림 : 제 3문 (4) (0) | 2009.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