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4문 (2)

★은하수★ 2009. 6. 5. 16:53

레이는 평범하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쉬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교실 밖이나 교실 안이나 비슷하게 분주하고 소란스러웠다. 교실 내의 어느 누구도 아침 자습 중간에 몰래 교실을 나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일까지 다 물어본다면 교실 내에서 물어 보지 않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화장실에 간 이유까지 일일이 물어보는 것과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Ray, Did you do Korean history…… Ooph…….(레이, 너 한국사 숙…… 웁…….)”

레이가 자리에 앉자마자 베일리가 반갑다는 듯이 다가왔는데 레이는 필통을 베일리의 입에 밀착시켜 짓이기듯이 문지르면서 밀어버렸다. 국사 숙제를 베끼러 온 것을 뻔히 알 수 있었다. 레이는 베일리의 그런 행동거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혼자 해.”

레이는 필통을 책상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수학 문제집과 공책을 나란히 준비했다. 베일리는 불쌍한 강아지 눈을 하며 애처롭게 레이를 봤지만 레이는 그 시선을 느끼고 아예 돌아보지 않았다. 베일리는 통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필사적이었다. 레이에게 확실하게 무시당하는 베일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베일리의 강아지 눈에 넘어가서 인지 한 여학생이 베일리에게 다가왔다.

“내가 도와줄까?”

“Really? Thank you!"

베일리는 금세 해맑을 표정을 지었다.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남학생이 말을 걸었다.

“안 될 거라는 거 뻔히 알면서 왜 매일 레이한테 붙는 거야?”

베일리는 대답을 찾기 위해 골똘히 생각하더니 엉뚱한 말을 뱉었다.

“지선이면 간천이래잖아.”

“아?”

“지선이면 간천.”

남학생이 잘 못 들었다는 표정을 짓자 베일리는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주변 학생들은 큭큭 거리며 웃었다. 베일리는 그들이 왜 웃는지 몰라 멍했다. 레이도 베일리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알아차려서 한숨을 가늘게 내쉬었다.

“어이, 베일리. ‘지성이면 감천’이야. 큭큭.”

“……? ……!”

남학생의 짧은 오답 정정을 들은 베일리는 부끄러워서 뒷머리만 긁었다. 교호나 학생의 말실수는 주변 학생들의 즐거움 거리 중 하나였다. 혼혈인 베일리가 오히려 레이보다 말실수가 많아서 학급의 기쁨조였다. 준은 집에서 베일리를 통해 베일리의 말실수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으면 한숨만 쉴 뿐이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그런 실수를 하냐는 것이었다.

“뭐 어때. 말만 통하면 됐지. 그치?”

베일리는 레이를 향해 돌아보다가 잠깐 멈칫 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돌리고 숙제를 도와준다던 여학생을 쳐다봤다.

“내가 네 자리로 갈게.”

“그래.”

베일리와 여학생은 자리를 이동했다. 레이는 방금 전의 베일리의 반응이 좀 이상하다 싶어서 베일리 쪽을 한 번 쳐다봤지만 기분 탓인가 싶어서 바로 칠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글씨도 써 있지 않은 녹색 칠판은 새 칠판처럼 깨끗했다. 주번이 열심히 닦을 모양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칠판은 1교시 수학 시간이 지나면 뿌옇게 흰 분필가루로 뒤덮일 것이다. 다시 닦고 다시 더러워지고.

수학 시간은 다른 어느 시간보다 괴롭다. 특정 몇몇 학생들을 제외하고 모든 학생들이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레이나 베일리만큼 고통스러울까? 미국에서 온 두 교환학생은 아무리 기고 뛰어 봐도 한국의 고등학교 수학을 따라가기 벅찼다. 고등학교 1학년 수업을 듣는 것이었기 때문에 여느 2,3학년 인문계 학생처럼 ‘수학’이라는 과목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서양계 교환학생들을 위해 특별 조치를 취했다. 고등학교 1학년 수학은 아무래도 무리이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수학을 1학기에, 중학교 3학년 수학을 2학기에 수업하기로 했다. 덕분에 레이와 베일리는 학급 내 학생들이 고1 수학 수업을 듣는 동안 중2 수학 문제집을 정해진 분량만큼 풀어야 했다. 수업 시간 중에는 학생들이 문제를 푸는 시간에 한해서 선생님께 질문할 수 있다. 나머지는 재량껏 해야 한다. 학생 입장에서 보면 참 무책임한 처사지만 레이와 베일리는 나름대로 적응하는 듯싶었다. 둘 다 집에서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으니까 많이 어려워하지 않았다.

오늘 수학 시간도 주변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이 이리저리 난사되는 동안에 열심히 문제집의 문제들을 공략해 내야 했다. 레이는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갔다. 중간에 막히는 문제는 바로바로 건너뛰었다. 제 시간에 오늘 분량을 끝내고 아리송한 것들만 몰아서 한꺼번에 질문하기 위해서다. 가끔은 조금만 생각하면 풀 수 있는 문제까지 남기는 바람에 하진이나 하린에게 혼나기도 한다. 레이는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누가 졸다가 걸려서 난타 공격을 받든, 학생들이 칠판에 나가 문제를 풀고 돌아오든, 선생님이 열변을 토하다 한 바디 잘 못 내뱉든) 상관하지 않고 제 일에 집중했다.

베일리도 수학 시간에는 문제집에 집중했다. 게으른 흔적을 보이거든 형 준에게 심히 혼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작은 일 하나라도 신중히, 정성을 다해서 해야 하는 형의 신조 앞에서 베일리는 얌전히 따라야만 했다. 다 풀지 못해도 좋다. 한 문제라도 끈질기게 붙어서 풀어낸다면 준이 나머지 문제를 얼마든지 도와줄 것이다. 그래서 레이는 손을 빨리빨리 움직이는 반면에 베일리는 머릿속을 꾸준히 헤집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한다.”

“감사합니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치고 선생님은 칼같이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학생들은 하나 둘씩 천천히 움직이더니 금방 교실 내가 시끄러워졌다. 레이와 베일리도 거의 동시에 문제집을 덮었다.

“Good."

베일리는 만족할 만큼 풀었는지 표정이 쾌활했다. 베일리의 짝이 베일리를 슬쩍 쳐다봤다.

“많이 풀었어?”

“응. 오늘이 최고로 많이 풀었어.”

베일리는 ‘최고로’를 강조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 문제집을 펼쳐서 손가락으로 오늘 푼 부분을 표시했다.

“여기부터 여기까지. 모두 25문제 풀었어.”

베일리의 짝은 책장을 넘기며 베일리가 푼 문제 수를 세 보았다. 25문제가 맞았다. 풀이 과정까지 깔끔하게 써 있었다.

“야, 굉장해. 잠깐만…….”

짝은 오늘 마저 풀어야 할 문제도 세기 시작했다. 책장은 두 세장 정도 더 넘어갔다.

“그래도 단원 마무리가 껴 있어서 42문제는 더 풀어야 되는데.”

“Oh, my god."

베일리는 손으로 이마를 소리 나도록 세게 짚었다. 레이의 표정도 깔끔하지 않는 것이 베일리 만만찮게 남은 문제가 많은 듯 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틈틈이 풀지 않으면 집에서 해야 할 과제가 상당할 것이다. 이런 고달픈 마음을 노려서 남학생 한 명이 베일리의 명치에 화살을 꽂았다.

“내가 이거 풀고 싶다. 이거 너무 쉽잖아. 3일 만 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풀 텐데.”

남학생의 발언은 확실하게 베일리의 염장을 질렀다. 학기 초부터 심심할 때면 들려오는 대사 중ㅎ나나였기에 면역이 됐을 법 했지만 은근히 속이 울컥 해서 입이 삐죽 나왔다. 지금은 그 남학생이 앉아 있는 책상을 확 엎어서 남학생을 바닥에 떨구고 싶었다.

[휙]

[쿠당]

“으야. 누구야?”

베일리 대신에 그 남학생을 바닥에 앉혀준 이가 있었다. 모든 학생들에게 ‘킬러’라고 불리는 긴 커트머리의 여학생이었다. 남학생의 셔츠 뒷 칼라를 잡아채서 직접 바닥에 메다꽂은 것이었다.

“수학 성적이 바닥을 길 것 같은 녀석이 입만 살았어.”

남학생은 반격의 말을 시도하려 했으나 킬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입만 벌리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킬러는 그런 남학생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툭툭 쳤다.

“학교의 손님을 놀리면 못 쓴다고 그리 말했는데 이러면 쓰나. 다신 이러지 마라. 한 번 만 더 걸리면 1층 땅바닥에 살포시 얹어주는 수가 있어.”

킬러는 모범적인 돌려 협박하기(돌려 말하기+협박하기)로 남학생의 입을 싹 다물게 했다. 남학생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킬러의 마수에 걸리면 다른 사냥감이 킬러의 눈을 끌 때까지 빠져나올 수가 없다. 베일리의 든든한 보디가드이긴 하지만 베일리도 킬러를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 레이는 킬러와 잘 지내는 것 같은데 베일리는 특유의 장난기 때문에 킬러의 표정이 될 뻔 한 적인 한 두 번이 아니다.

“킬러,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외고에 들어왔는데 바닥을 기겠어?”

베일리의 짝이 킬러를 보며 멋쩍게 웃었다.

“모르지. 중등 수학하고 고등 수학이 레벨이 다른데.”

킬러의 대답은 간단했다. 수학의 레벨이 올랐으니 분명 바닥을 기는 녀석이 생길 거라는 뜻이었다. 타인을 이렇게 평가해 버리는 킬러는, 주먹 좀 쓰고 날카로워 보이고 불량소녀의 이미지를 한껏 내뿜고 다녀도 머리 좋은 것 하나는 끝내준다. 정작 본인은 단순히 생각 좀 해서 문제를 푼다 하지만 타인이 보기에는 대단한 머리를 달고 있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웬만한 짓을 해도 선생님들이 건들지 않는다. 이건 아마도 킬러를 두고 나온 말이 아닐까?

“한국 애들은 모두 수학 조기 교육을 받는 구나.”

베일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킬러는 베일리의 앞에서 대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핫, 뭐? 하하하하. 수학 조기 교육? 크흣. 좋은 표현이야. 푸하하하.”

“후후. 베일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만 해.”

베일리의 짝도 재미있어 했다. 베일리만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한국의 영어 조기 교육이란 말을 그렇게 응용할 수 있구나. 크흣. your head has a word factory.(네 머리는 말 공장이야.)”

웬만해서는 칭찬이나 좋은 말을 잘 해주지 않는 킬러가 기분이 좋은지 베일리에게 칭찬을 내뱉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킬러식 칭찬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이유도 모른 채 기쁨조가 됐다는 사실만 파악했을 뿐이다.

베일리가 이런 일을 겪고 있는 동안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레이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가슴이 턱 막힌 듯이 답답했다. 이상한 가스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오는 느낌에 이를 내뱉고 싶었지만 가슴만 쥘 뿐 기침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괴로웠다. 코, 기도, 폐 모두 가스로 가득 차서 들이마시지도 내쉬지도 못했다. 결국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레이!”

“어, 왜 그래?”

근처에 있던 급우들이 레이에게 다가갔다. 레이는 갑갑함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현기증까지 일었다. 그 때 누군가 레이를 부축해 주었다.

“양호실로 가자.”

레이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몸이 정상이 아니니까 헛 게 들리는가 싶었다. 2학년인 인철이 1학년 교실에 있을 이유가 없다. 더군다나 인철은 학교 내에서 레이를 전혀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한다. 이렇게 도움이 필요할 때 나타날 인물도 아니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꾸 성가시게 굴면 가만 안 둬.”

다시 한 번 인철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레이를 부축한 사람은 인철이 맞았다. 그리고 인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는 다시 숨을 수기 편해졌다. 산소가 재공급되자 현기증도 가라앉았고 나중에 생긴 가슴의 통증도 말끔히 나았다. 레이는 허리를 펴고 혼자 힘으로 일어설 수 있었다.

“저기…… 누구세요?”

레이에게 다가갔던 학생들 중 한 명이 인철에게 말을 걸었다. 인철이 했던 말이 의아스러울 법 했다.

“레이랑 아는 사이니까 그렇게만 알아 둬.”

인철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레이가 괜찮아 진 것 같자 레이를 부축했던 손을 놓았다.

“고마워요.”

레이는 인철의 눈치를 보면서 인사했다. 인철이 레이를 도와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처음 같은데 처음 같지 않았다. 그보다 지금 자신에게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 때문에 머릿속이 아주 복잡했다. 아까의 그 증상은 무엇이며, 인철은 왜 여기에 있는지, 잘 듣지 못했지만 인철이 한 말, 모두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버려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교실에서 기다려. 데리러 올 테니까.”

인철은 레이의 대답을 들을 것도 없이 제 말만 끝내고 가버렸다. 레이는 그렇다 치고 주위 학생들은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등장해서 무례하다고 붙여도 될 만한 말들을 내뱉고 멋대로 사라지는 이 장면이 아리송할 뿐이었다.

“레이, 괜찮아?”

뒤늦게 상황을 전해들은 반장과 부반장이 레이에게 다가왔다.

“응. 이제 괜찮아.”

레이는 친구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방긋 웃어보였다. 표정이 언제나 솔직한 레이였기 때문에 주위의 모두가 안심하는 듯 했다.

“아까 그 사람……. 아니, 그 선배 말이야, 2학년 남인철 선배 아니야?”

“아! 생각났다. 맞아. 그 선배야.”

레이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서 두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들끼리 수다를 즐기는 중이였는데 우연히 인철을 본 것이다. 그 두 명은 인철을 아는 듯 했다.

“너희 그 선배 알아?”

부반장이 여학생들 쪽으로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두 여학생은 부반장을 향해 돌아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중학교 때 우리 둘이 검도 좀 했는데, 아까 그 선배가 관장님 아들이야.”

“아마 막내일걸? 운동도 진짜 잘 하고 공부도 무지 잘 해.”

두 여학생은 인철을 동경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인기가 조 많은 유명인사에 대해 이런저런 찬사를 던지는 여고생의 모습이었다.(그 여학생들이 그런 모습이라는 거지 인철이 유명인사라는 것은 아니다.)

“너도 그 선배를 알아?”

부반장은 다시 레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홈스테이 하는 집 막내야.”

“좋겠다.”

레이의 말에 두 여학생은 레이에게 부러움의 시선을 보냈다. 아마도 이 여학생들은 검도장에서 인철에 대해 좋은 인상을 상당히 많이 받은 모양이다. 종종 있다. 좀 괜찮아 보이는 남학생이 있으면 호들갑 떠는 여학생들.(물론 반대 현상도 심심찮게 있지만.) 아마 그 쪽 부류가 아닐까 싶은데 그렇게 중증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뭐랄까…… 장단 맞추기 힘든 분 같아.”

부반장은 레이의 심정을 읽은 것 마냥 정확하게 집어서 자기의 소감(?)을 말했다. 레이는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은 더 인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침에 등교할 때 했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Be careful.……."

레이는 거의 소리를 내지 않으며, 입모양을 최대한 작게 하여 중얼거렸다. 인철은 오늘 레이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그 말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일이 일어나니까 인철이 옆에 있었다. 억지인 것 같지만 잘 맞아 떨어졌다. 레이는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게 있나 싶어서 다시 처음부터 생각하고자 했다. 하지만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에 생각의 고리가 끊어져버렸다.

“Look's bad.(몰골이 영 아니야.)”

베일리가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로 레이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레이는 어깨 위에 얹어져 있는 베일리의 손을 내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2교시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교내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 때 레이는 귀가 쫑긋해졌다. 소리가 달랐다. 멜로디는 같지만 음색이 평소와 달랐다. 벽 너머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를 벽 가까이에 귀를 대고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느끼는 건 레이 뿐인 것 같았다. 다른 학생들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만 다들 자리로 돌아가자.”

반장이 먼저 움직이자 다른 학생들도 하나씩 제자리로 돌아갔다. 베일리는 레이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레이는 이상하게 들린 종소리가 은근히 신경 쓰였다. 가까이에 있던 친구들의 목소리는 잘만 들렸는데 멀리 매달려 있는 스피커의 종소리는 장애물에 막힌 것처럼 들렸다.

“설마…….”

레이는 잠깐이지만 눈에 근시와 원시가 있는 것처럼 귀에도 근청과 원청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레이는 영어 교과서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턱을 괬다. 아무래도 그 생각은 너무 바보 같았다.

“Wall, Being stuffy, Sound, Wall, …….(벽, 숨막힘, 소리, 벽, …….)”

레이는 중얼거리면서 단어들을 연습장에 끄적였다. 그리고 생각나는 단어들을 계속 써 내려갔다. wall, suffocation, sound, voice, wall.(벽, 질식, 소리, 목소리, 벽.) 마지막 단어를 쓴 다음에 샤프를 든 오른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Berkana?"

레이가 읊은 ‘베르카나’는 룬 마법이다. 하지만 특정 신외에 룬 마법을 쓸 수는 없다. 룬 마법도 그 신의 그 마법이 고작인데다가 룬 마법을 모두 소화해 낼 수 있는 것은 오딘뿐이다. 레이는 다른 가능성을 찾아야 했다. 처음에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인철이 돌아가고 나서 근처에서 희미한 마력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마법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이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마법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너희 오늘 자습해라.”

영어 선생님이 교실 뒷문을 열어 몸을 반만 들어온 채 말했다. 문 밖에서 조금씩 새어 들어오는 소리에 의하면 다른 교실도 모두 자습이었다. 선생님들이 모두 회를 하는 듯 했다.

“네.”

학생들은 이유도 붇지 않고 고분고분 대답했다. 선생님이 나가고 교실은 조금 술렁거렸지만 곧 조용해졌다. 레이는 자기만의 깊은 생각에 빠질 수 있게 되었다. ‘50분 동안의 명상의 시간’이라 하면 거창할 지도 모르겠다. 레이는 뭐라도 좋으니 이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뭔가가 생각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