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퍽!]
세연의 두꺼운 교과서가 민혁의 등짝에 제대로 내던져졌다. 민혁은 몸을 움질거리더니 졸린 눈을 살짝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점심시간을 이요해서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냐?”
“나다.”
민혁의 등을 친 도구는 세연의 것이었지만 민혁의 등을 친 장본인은 옆 반의 수미였다.
“왜?”
민혁은 노려보듯이 곁눈질로 수미를 쳐다봤다. 수미는 그 눈에 심히 불쾌해하며 책으로 민혁의 머리를 가볍게 툭 쳤다.
“자식이 말이야, 다짜고짜 그런 눈으로 쳐다보고 있어.”
“다짜고짜 사람 패는 녀석도 반갑진 않아.”
민혁은 수미의 손에서 세연의 책을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그리고 앞자리인 세연의 자리, 책상 위로 책을 가볍게 던진 다음에 다시 낮잠 자세를 취했다.
“아니, 이것이.”
수미는 괘씸하다는 듯이 민혁의 셔츠 뒷 칼라를 잡고 뒤로 휙 당겨버렸다.
“큭.”
민혁은 자동적으로 일어났다. 때마침 세연이 나타나서 수미의 등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수미를 부르지 않았다면 자기 셔츠에 자기 목이 조이는 웃지 못 할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다. 수미는 세연을 보자마자 손을 뗐다.
“남편이 아내 두고 혼자 자고 있더라.”
수미는 자연스럽게 위험한 발언을 뱉었다. 민혁과 세연은 동시에 이마에 혈관이 섰다.
“뭐 하러 온 거야?”
이를 악물고 말하는 세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 조금만 더 건드리면 세연의 머리 뚜껑이 증기압으로 튀어 나가고, 다음은 모자이크나 음성변조를 준비해야 할 상황이 닥칠 것이다. 쓸데없이 화를 잘 내고 자기에게 불리한 발언은 확실하게 막아버리는 세연에게 수미의 한 마디는 확실하게 부싯돌 그은 셈이다.
“책 돌려주러 왔어.”
수미는 세연의 책상 위를 툭툭 치며 말했다. 민혁은 다시 책상 위로 엎어졌다. 귀찮은 존재와 실없는 이야기로 아까운 낮잠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아침에도 일찍 등교해서 1교시 시작 전까지 눈 좀 붙이려고 했는데 매튜가 나타나서 방해해 버렸다. 마지막 희망인 점심시간마저 뺏길 수 없었다.
“이 자식이 원래 이랬었냐?”
수미는 민혁을 내려다보며 신기해했다. 민혁이 엎드려 있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든 진귀한 볼거리였기 때문에 신기해 할 만 했다. 세연은 수미의 팔을 잡아끌었다.
“이제 교실로 돌아 가. 자는 애 깨우지 말고.”
“아, 놀러온 친구한테 섭하게 말이야.”
“그러면 같이 가자.”
세연은 그 괴력으로 수미를 질질 끌어갔다. 수미는 더 장난치고 싶어 했지만 세연 때문에 그만 둬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민혁과 세연을 알고 지냈지만 아직 어디까지 건드려야 세연이 폭발하지 않는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냥 세연이 자기를 피하려하면 그만 두는 게 전부다. 오늘도 세연이 먼저 자리를 뜨자고 하니 그에 따른 것이다. 한 마디만 더 했으면 세연은 지금쯤 눈이 충혈 된 마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수미는 알지 못했다.
“장민혁 오늘 상태 안 좋더라.”
수미는 자기 반 교실의 앞문을 열고 들어가며 말했다. 세연은 수미를 쫓아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나, 이번 주 주번인데, 오늘 민혁이까지 덩달아 일찍 와 버렸어.”
세연은 민혁이 반 송장마냥 엎드려 있는 것이 자기 탓인 것처럼 말했다. 오늘 아침에 민혁이 일찍 등교한 것은 세연 때문이 아니다. 눈이 너무 빨리 떠지는 바람에 세연과 같이 등교하게 된 것 뿐, 세연이 주번이라는 것은 학교에 도착해서야 알았다.
“그러면 아침에 잤으면 됐지 왜 지금 자?”
두 번재 분단 맨 앞자리에 품위 없이 털썩 앉은 수미는 민혁을 이상하게 여겼다. 민혁이 학교에서 자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오전 중에 충분히 잠을 보충하고도 남았을 텐데 계속 피곤해 하는 건 더 이상했다. 정말이지 앞으로도 볼 수 없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아침에는 잠깐 손님이 왔었거든.”
“엥?”
세연은 빙긋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책상 위에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어디론가 바쁘게 걸어가는 민혁의 뒷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다. 아리송하면서 난처해하는 얼굴로 뭔가를 찾는 듯이, 누군가를 만나려는 듯이 보였다. 그래서 슬그머니 타로카드를 꺼내 간이점을 쳐 보니 민혁에게 손님이 찾아 올 거라는 점괘가 나왔다.
“손님? 학교에?”
수미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자기 집도 아니고 학굔데, 어떻게 손님이 온 줄 알아? 아침 일찍 이면 방송도 안 한다고.”
지극히 평범한 학생의 사고에서 내린 수미의 판단이었다. 그야말로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생각해 보면 수미의 말이 맞다. 하지만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항상 상식적인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세연은 수미 혼자서 멋대로 생각에 빠지도록 놔두고 자기는 수미의 원맨쇼를 감상했다.
“아니, 그리고 어떤 손님인데 매너 없이 아침에 사람을 찾아? 그것도 학교에서.”
수미는 표정이 이렇게 저렇게 바뀌고, 손짓 몸짓도 말에 맞춰서 현란했다. 누가 봐도 ‘저 아이는 혼자서 참 잘 놀겠다.’라 말할 정도의 원맨쇼 수준을 보였다. 세연은 마침 점심시간을 어떻게 때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수미가 눈을 즐겁게 해줘서 그 고민을 말끔히 벗어버렸다. 게다가 세연 아씨 추종자들도 주위에 없어서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도 그렇지. 장민혁 그 자식은 자기 아내가 들어오는데 퍼질러 잠만 자고 말이야.”
마음이 편안하다는 말은 취소해야만 했다. 수미의 말에 바로 심기가 불편해졌다. 같은 농담이라도 듣는 사람에 따라서 혐오의 정도가 천지차이인 것을……. 수미는 이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세연의 판단에서 수미는 완전히 철없는 아이였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기분은 내 알바 아니요, 난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말하리라. 이게 수미의 생활관인 듯 했다. 어찌 보면 정말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자신의 수명 단축을 재촉하는 길이자, 세상에서 외로운 빈 깡통이 되는 지름길이니 말이다.
“수미야.”
“응?”
세연은 가만히 수미를 불렀다. 수미를 타일러 볼 생각이었다.
“넌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한다지만 난 무지무지 기분 나쁘거든. 나랑 민혁이랑 이상하게 얽어서 말하지 마. 알았지?”
타이름이나 부탁하는 게 아니라 하지 말라는 협박조의 말투였다. 세연은 조절한다고 한 것 같은데 말투가 쉽게 부드러워지지 않았다. 암만 들어봐도 화났다는 게 확실하게 티났다.
“아, 저번에도 네가 경고했었지. 맞아. 잊어버리고 있었어. 미안해.”
세연이나 수미나 자기 조절이 안 되는 건 닮았다. 실수를 지적받으면 그 순간에는 반성하면서 다음에 그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도 닮았다. 세연은 이 사실을 민혁이 알려줘서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점점 눈에 보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수미만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고 ‘나 잘났소’하며 살고 있었다.
“그래도 너희 둘 은근히 잘 어울려. 매일 같이 다녀서 그래 보이는지 몰라도 정말 잘 어울려.”
수미는 진심이었다. 그냥 농담조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해 왔던 것이다. 새연은 귀에 두꺼운 딱지가 생길 정도로 수 없이 들은 말에 일일이 항의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아는 애들은 다 똑같이 말하던데. 너희 둘이 따로 다니면 지구가 뒤집어진다고.”
세연의 입장에서, 정말 웃기지도 않는 오버였다. 물론 둘이 같이 다니는 경우가 더 많지만 따로 다니는 것 보다 압도적으로 많다고 할 수 없었…… 주위 아이들이 그런 오버를 할 정도로 같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소꿉친구로서 좀 유별나게 친한 것뿐이지 다른 아이들이 생각하는 관계에 대해서는 일절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 감정이 전혀 없었다. 해명하려고 시도한 적이 수없이 많으나 어느 누구도 민혁과 세연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모습만 멋대로 해석했다.
“세상에 그 어떤 형제나 커플도 너네만큼 붙어 다니지는 않을 거야.”
수미는 입을 양 옆으로 쭉 찢으며 씨익 웃었다. 수미는 별 의도 없이 웃은 거였지만 세연은 수미가 놀리는 것 같아서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았다. 그래도 제 세상에서 자기 말을 쉼 없이 늘여 놓는 수미를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냥 저 혼자 떠들도록 놔뒀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한기에 세연은 등이 오싹해졌다. 견디기 힘들었다.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어디로 간다 한들 이 한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수미가 혼자 즐겁게 지껄이는 모든 말이 들리지 않았다. 눈에는 수미가 보이는데 수미와 전혀 다른 공간에 있는 것 같았다. 두려웠다. 그만하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열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을 것 같았다.
“아, 세연아. 너 고등학교 정했어?”
얼마 후에 수미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세연은 평소답게 행동했다.
“특목고는 어차피 못 가고, 나머지 인문계는 뺑뺑이잖아. 될대로 되라야.”
주위를 휘감고 있던 한기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말끔히 사라졌다. 이런 기분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1지망으로 넣고 싶은 데는 있잖아.”
“교복이 제일 예쁜 학교 순으로 쓸 거야.”
이렇게 말하면서 웃는 세연의 얼굴은 외모에 관심이 많고, 자기 나름의 꿈을 갖고 있는 평범한 여학생의 얼굴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뭔가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이렇게 평범하게 친구들 속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은 지루하지 않고 매일 즐거웠다. 물론 무섭게 날뛰어야 할 때도 있지만 그것도 일과의 한 부분이다. 이 생활을 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부서져 버릴 것 같은 감이 계속 들었다.
“역시 교복은 예뻐야 해.”
수미는 익살맞게 웃었다. 자기 생각을 숨기지 않고 다 드러낸다는 것을 웃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었다. 소리내서 웃지 않아도 입을 양 옆으로 길게 찢고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은 그 자체로 솔직해 보였다.
“크. 중간고사는 싫다.”
세연의 등 뒤에서 지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연은 다른 반에서 같은 반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바로 고개를 돌려서 얼굴을 확인했다.
“너도 장민혁처럼 한숨자지 왜 이렇게 돌아다니냐? 어제처럼 또 쓰러질라.”
지현은 세연의 볼을 양쪽 다 잡고 쭉 늘렸다.
“우우.”
세연이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를 내자 볼을 집었던 손가락을 거뒀다. 세연은 친구들이 계속 잡고 늘리는 통에 붓기가 빠질 날이 없는 볼을 손으로 감싸고 살살 문질렀다. 손가락으로 세게 집지는 않았지만 볼을 꽤 많이 당겨서 얼얼했다.
“아, 어제 너 쓰러졌었지. 민혁이가 너 업고 뛰는 거 봤어. 역시 아내…….”
[퍽!]
“욱!”
지현은 제대로 된 타이밍으로 수미의 입을 세차게 가로막았다. 세연이 조용히 화내는 모습이나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나 어느 쪽도 보고 싶지 않았다. 세연이 수미를 데리고 나가는 걸 교실에서 본 지현은 수미가 말실수를 하지는 않을까 걱정하다가 여기에 온 것이었다.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머리에 수십 번 지나갔다.
“너 어제 집에 가서 계속 공부한 건 아니지?”
지현은 중간고사 쪽으로 얼른 화제를 바꿨다. 세연은 도리질을 쳤다.
“밤 9시부터 푹 잤어.”
오전 내내 친구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듣고 똑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자기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기 때문에 지겹지는 않았다.
“시험 기간에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프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지현은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시험 전날이면 늘 배탈이나 두통이 생기는 징크스를 작년 2학기 중간고사 때 깬 후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 친구들에게도 ‘자기관리 파동’을 전파하고 있다. 아마 제 고집만 피우고 유독 말을 듣지 않는 아이가 세연일 것이다. 돌아다닐 때는 애들 잡아먹으려는 듯이 뛰어다니면서 아플 때는 병원에 실려 갈 것 마냥 아프니 제일 심각한 아가씨다. 지현은 세연이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시한폭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위태해 보인다는 것이다.
“응. 조심할게.”
자기 일과는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지현은 세연에게 일종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가끔 숙제를 안 해온다는 게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게 멋있어 보였다.
“아, 언제까지 막고 있을 거야?”
수미는 지현의 손을 겨우 떼어냈다. 수미가 입을 헐겁게 열지 않길 바라는 지현의 마음을 모르고 있었다.
“세연아, 교실로 가자.”
“아직 시간 남았잖아.”
지현이 세연의 팔을 잡으려는 걸 수미가 막았다.
“너네 5교시 영어라며. 숙제는 했냐?”
지현은 다른 학생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는 영어 교과서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렸다. 수미는 지현의 속을 파고드는 눈초리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숙제는 언제나 뒷북이거나 배 째라는 수미가 숙제를 했을 리가 없다.
“숙제는 해야지.”
세연이 수미에게 달래듯이 말했다. 지현이 구박형 엄마라면 세연은 구슬리기형 엄마였다. 하지만 수미는 양쪽 다 먹히지 않는 고집 센 아이였다.
“괜찮아. 안 해도 돼.”
아주 의기양양했다. 학교에서 ‘수미 전담 보모’로 임명된 지현이(수미 어머니가 지현에게 엄청 사정했다는 설이 있다.) 그 행태를 가만 둘 리가 없었다. 숨을 많이 들이 마시고,
“야, 이 머저리야! 베껴서라도 해라! 언제까지 막나가면서 살래?”
라고 교실 내와 근처 복도가 울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노, 놀랬잖아. 왜 소리 질러?”
자신만만하게 버티고 있던 그 기세가 한 방에 쪼그라들었다. 수미의 천적은 역시 지현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처음 알게 된 사이지만 심하도록 친하고 심하도록 싸운다. 서로에게 태클을 거는 현란한 기술과 가끔씩 가벼운 폭력이 오가는 과감한 액션. 그래도 최종 승자는 늘 지현이었다. 지현의 한 번의 윽박지름이나 한 방의 무시무시한 주먹 혹은 발길질은 ‘벼룩 간’수미를 세게 눌러버린다.
“당장 안 움직일래?”
“네, 네.”
수미는 바로 영어책과 공책을 꺼내고 샤프도 손에 쥐었다. 그리고 지현의 눈치를 보더니 최대한 부지런히 손과 눈을 움직였다. 본문 옮겨 쓰기가 숙제니까 다른 사람 것을 베낄 일은 없었다. 최수미를 숙제하게 만든다. 이 정도면 프로 교관들도 지현을 높게 평가할 것이다. 아주 가끔씩, 정말 아주 가끔, 지현이 세연을 향해 협박을 휘날릴 때도 있다. 세연도 그 때는 지현이 시키는 대로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그러니 지현의 ‘명령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있지, 지현아. 민혁이 깼겠다.”
세연의 말에 지현은 교실 한편에 걸려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괜찮아. 어차피 깰 때 됐어.”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을 알리는 예비종이 칠 시간이 다 되었다. 세연도 시각을 확인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미는 세연을 한 번 보고 지현을 한 번 보다가 얼른 눈을 숙제에 박았다.
“수미야, 우리 갈게.”
“그거 끝가지 해.”
“응. 잘 가.”
수미는 쭈뼛쭈뼛하게 손을 흔들었다.
세연과 지현은 수미네 반 앞문, 자기네 반 뒷문이라는 최단 코스를 통해서 교실로 돌아갔다. 다음 시간이 체육이지만 시험을 앞두고 이론 수업을 하기 때문에 평상시 이 시간 때와는 다르게 여유로웠다. 멀찍이 민혁은 왼손으로 턱을 괴며 앉아있었다. 아까보다 피곤한 기색이 덜했다.
“일어났어?”
세연이 자리에 앉으면서 물었다.
“40단 콤보급이상의 괴성을 듣고 깼어.”
세연의 예상대로 지현의 고함소리에 깬 것이었다. 평범하게 일어나지 못해서인지 한 숨 잔 사람치고는 표정이 별로였다.
“큭큭.”
“왜 웃어?”
“지현이 소리에 네가 놀라서 일어나는 모습을 상상하니까 웃겨.”
“이 아가씨가…….”
세연이 민혁이랑 오랜 시간을 같이 지내면서 민혁의 여러 가지 표정을 봐 왔을 것이다. 아마도 그 중에 가장 웃긴 놀랜 표정을 상상한 게 아닐까 싶다.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 같은 민혁이 설마 진짜로 그렇게 일어났겠느냐마는 세연이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었다. 꼭 한 번이라도 민혁의 이미지가 무너지는 순간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에 그런 상상을 멋대로 하는 것이었다.
“많이 놀랐어?”
세연은 윤세연표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민혁은 오른손 검지로 세연의 볼을 쿡 찌르고 앞쪽으로 시선이 돌아가도록 밀었다.
[탁]
“뭐하는 거얏?”
세연은 민혁의 손을 쳐내고 민혁의 이마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민혁의 고개가 뒤로 젖혀질 것을 기대했겠지만 민혁이 목에 힘주고 버텼기 때문에 세연의 주먹이 민혁의 이마에 붙은 채 정지 상태가 되었다.
“아프다. 하지 마라.”
민혁은 세연의 손목을 붙잡고 책상 위로 내렸다. 세연은 샐쭉해져서 손을 확 빼버렸다.
“삐졌냐?”
“응.”
세연은 너무 단호하게 대답해 버리니까 민혁은 할 말을 잃었다.
민혁과 세연이 서로 장난치는 모습은 누가 봐도 귀여운 커플이 서로 토닥거리는 모습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예비종과 본종이 모두 지나가고 학생들도 다 자리에 앉고 나서 귀여운 장난이 끝났다.
8교시 보충수업까지 모두 끝나고 인철이 레이의 교실에 들어갔다. 레이는 6교시 정규수업만 하는 반이었기 때문에 혼자 교실에 남아 숙제를 하며 인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철도 매일 8교시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늘 우연찮게 8교시였던 것이다.
“가자.”
인철이 레이를 불렀다. 레이를 대할 때는 무표정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무표정이 레이를 긴장하게 만들고 은근슬쩍 압박감을 심어주었다. 레이는 물건들을 가방 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적으로 안 좋은 기분이 들었지만 곧 사라졌다.
“안 갈 거야?”
“네, 가요.”
인철은 벌서 복도로 두 세 걸음 나가 있었다. 레이는 인철을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갔다.
[뚜욱, 쿵!]
무너가 부서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이가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교실 옆 벽에 붙어 달려있던 선풍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좌우 양쪽 모두 떨어졌는데 소리가 한 번 크게 난 걸 보면 동시에 떨어진 것이었다.
“왜 떨어졌지?”
레이가 교실로 들어가려는 것을 인철이 붙잡았다. 그리고 레이를 복도 쪽으로 잡아당긴 후에 대신 자기가 들어갔다. 선풍기가 달려있던 자리를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박살난 선풍기를 내려다봤다. 선풍기는 나사가 빠져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몸체가 부서지면서 떨어진 것이었다. 둔기로 두드렸다거나 밖에서 강한 압력을 주지 않는 이상 이렇게 부서질 수가 없었다. 자연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게 믿겨지지 않지만 교실 내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선풍기 두 대가 동시에 부서진 것을 우연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기사님 불러올까요?”
“아니, 내려가면서 들리면 돼.”
인철이 교실에서 나가려는데 인철의 머리 위에 있는 형광등이 빠져버렸다.
“아……!”
[챙!]
레이의 짧은 비명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근처에 울려 퍼졌다. 인철은 형광등이 떨어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여유롭게 피했다. 그리고 자기 발 앞에 널브러져 있는 형광등 조각을 넘어 지나갔다.
“유치하군.”
인철은 혼잣말을 하며 교실 밖으로 나갔다. 레이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 노리고 한 일이다. 하지만 근처에서 어떤 마력도, 수상한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마법이 아닌 것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 확률은 0%로 봐도 좋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미스터리라 하지만 레이는 납득할 수 없었다.
“가자.”
인철은 레이를 스쳐 지나가며 먼저 앞서 걸어갔다. 레이는 어질러진 교실을 눈으로 둘러보고 나서 인철을 쫓아갔다. 우트가르드 로키의 소행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전혀 마력을 감시할 수 없었다. 정말로 마법이 아니라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 그렇다 해도 일이 일어난 타이밍이 수상하다. 레이와 인철만 있을 때 선풍기 두 대가 동시에 떨어지고, 인철의 머리 바로 위에 있던 형광등이 떨어졌다. 계산된 타이밍 같았다.
레이와 인철은 8교시가 끝나고 하교하는 학생들과 섞여 계단을 내려갔다. 이미 많은 학생들이 하교한 후라 혼잡하지는 않았다. 1층까지 다 내려오고 나서 인철은 숙직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레이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면서 인철의 뒤를 따라갔다.
[똑똑]
인철은 숙직실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두드려보았으나 역시 무대답이었다.
“어떡할 거에요?”
레이는 다시 교실로 돌아가서 정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철은 손목시계를 보더니 뒤돌아서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가자.”
“가서 치워야 되지 않아요?”
레이는 무의식적으로 인철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교실의 모습이 계속 떠올라서 그냥 가기에는 양심이 찔렸다.
“우리가 한 짓이 아니니까 놔 둬.”
이기적이면서 단호한 말이었다. 레이는 인철을 세우려고 손을 뻗었지만 잡지 않고 도로 거뒀다. 학교 정문에 다다랐을 때 레이는 멈춰 섰다.
“저 가서 정리하고 올게요.”
이렇게 말하고 교실로 돌아가려는데 인철이 레이의 팔을 붙잡았다.
“니가 가서 어쩌려고? 어차피 학교 폐기장에 갔다 놔야 돼. 수위 아저씨들이나 기사 아저씨들이 발견하고 치울 거야.”
레이는 ‘하지만’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인철이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통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레이를 붙잡을 때 인철의 눈은 약간 무서웠다. 말을 듣지 않으면 한 대 맞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인철은 한시라도 빨리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길 바라는 것처럼 걸음이 빨랐다. 인철의 성큼성큼 걷는 속보에 따라 붙기 위해 레이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학교에서 좀 떨어졌다 싶으니까 인철은 레이의 팔을 붙잡던 손에서 힘을 뺐다. 레이는 쉽게 인철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리고 걷는 속도도 조금씩 느려지더니 평상시 같은 속도로 돌아왔다. 인철이 앞에, 레이가 뒤에 있는 것도 변함이 없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교실에서와 같은 수상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둘 다 어서 와.”
현관을 열고 들어가니 하진이 반갑게 둘을 맞아주었다. 인철이 미리 핸드폰으로 레이랑 귀가한다고 알렸기 때문에 둘이 같이 돌아온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린이 누나는?”
인철은 가방을 거실 소파 위로 던지며 물었다.
“오늘 늦는다고 했어. 그리고 가방은 방에 갔다 놔야지.”
“아, 있다가.”
하진의 엄마 같은 잔소리는 인철에게 아무 소용없었다. 인철은 가방이 던져진 곳 옆에 앉아서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했다.
“전 올라가 볼게요.”
레이는 인철의 눈치를 본 후에 방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인철과 같이 하교한 것은 너무 어색했다. 아니, 어디에서 돌아오든 인철과 같이 둘이서만 귀가하는 것은 익숙해 질 수 없었다.
하진은 레이에게 쉬라고 인사한 후에 소파에서 문자 삼매경에 빠져 있는 인철을 쳐다보았다. 인철은 오른손 엄지만으로 현란한 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하진은 인철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인철의 가방을 인철의 머리 위에 올리고 살짝 눌렀다.
“알았어. 갔다 놀게.”
인철은 왼손으로 가방을 붙잡고 다시 자기 옆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인철의 두 다리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회사에서 메일이 오면 내일가지 바쁠 거야. 너 못 챙겨주니까 알고 있어.”
“응. 나 어린애 아니야.”
그제야 인철은 가방을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인철은 그대로 방에서 나왔다. 쓰고 있던 문자를 전송한 후에 핸드폰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나갔다 올게.”
인철은 하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현관으로 나갔다.
“내 말은 죽어도 안 듣는 다니까.”
하진은 인철의 뒤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이차이가 제일 적은 형제라서 그런지, 막내 누나라서 그런지 인철에게 하진의 존재는 다른 형제들 보다 가볍게 여겨졌다. 그래서 하진은 언니, 오빠들 보다 하나 밖에 없는 동생을 대하는 것이 가장 피곤했다. 어렸을 때는 위에 형제들이 많기 때문에 따로따로 봐줘서 하진과 인철이 특별히 부딪힐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학교를 다닐 때는 둘이 같이 다녀왔기 때문에 이야기도 많이 하고 장난도 많이 쳤다. 하지만 인철의 눈에 하진은 누나답지 않은 누나인 모양이었다.
집에서 나온 인철은 졸업한 중학교로 향했다. 거리에는 돌아다니는 꼬마나 학생들이 많았다. 자기처럼 아직까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도 더러 보였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급하게 찬거리를 사러 나온 사람들도 있었다.
“골대 바꿨네.”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서 운동장의 모습을 둘러보았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와 본 것이라 바뀌게 몇 가지 눈에 띄었다. 뒤판이 부서지고 링도 헐겁던 농구 골대를 새로 다 바꿨고, 축구 골대의 그물도 새로 갈아 놨다. 철봉이나 운동장 구석에 세워져 있는 핸드볼 골대는 그대로였다. 운동장에 학생이 한 명도 없어 정말 조용했다. 선생님들도 퇴근한 후라 학교가 전체적으로 고요했다.
“넌 머리가 좋으니까 고등학교는 맘대로 고를 수 있겠다.”
인철은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는 남학생을 염두하고 정면을 보고 있는 채 말을 걸었다.
“선배는 여전히 사람을 잘 맞추시네요.”
인철의 옆에 앉은 남학생은 민혁이었다. 둘은 초등학생 때 특별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이였다. 일주일에 두 번, 한 시간 반씩 학교에서 늦은 오후에 하는 활동인데 둘은 바둑부였다. 다른 학생들과 돌아가면서 대국을 하지만 둘이 같이 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부의 특성상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지만 서로에게 은근히 끌리는 게 있어 지금까지도 좋은 선․후배로 지내고 있다.
지나다가 만나면 서로 인사하고, 민혁이 올해 핸드폰을 장만하고 나서는 가끔 문자를 주고받는 것뿐이기 때문에 아주 친하다고는 할 수 없다. 민혁이 텔레파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은 민혁 스스로가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인철은 모르고 있다. 하지만 민혁이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타고난 직감 덕분이었다. 민혁은 그런 인철의 직감을 높이 사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가진 ‘감’에 비해 인철의 ‘직감’은 특수 능력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기 때문이다.
“여기는 평준화 지역이니까 일반 인문계 고등학교는 원하는 데에 못갈 수도 있어요.”
“우리 학교에 올 생각은 없어?”
“외고 쪽에는 욕심 없어요.”
중․고등학생의 평범한 대화가 진행됐다. 인철이 민혁에게 자기 학교를 권한 건 예의상으로 그냥 한 말이 아니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은 곁에 두고 뭐든 해주고 싶어 해서, 개인적 욕심으로 민혁도 영원한 후배로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도 집착적이거나 고집적이지 않기 때문에 민혁의 대답을 듣고는 더 이상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혹시 요즘에 힘들거나 하지 않아?”
인철의 질문에 민혁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인철의 우수한 직감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건 인간을 뛰어 넘은 경지였다.
“갑자기 그건 왜요?”
민혁은 포커페이스를 깔고 있었다. 자기가 중 3이니까 고입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지 확인하려고 불어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멋대로 판단한 건 접어두고자 했다.
“언제서 부턴가 이 근처의 분위기가 많이 이상해졌거든. 혹시나 무슨 일 생겼나 해서.”
민혁이 처음에 한 생각이 맞았다. 인철의 직감은 가히 예술이었다. 아마 인철 스스로는 모를 것이다. 자신의 직감이 얼마나 무서운 흉기이자 얼마나 든든한 보호막인지.
“아, 이런 험악한 이야기는 사절이에요.”
민혁은 이 어색한 대화를 최대한 빨리 끝내고자 바로 싫은 기색을 보였다.
“안부 인사가 험악한 얘기냐?”
인철은 피식 웃었다. 그의 직감이 움직인 것이다. 민혁이 의도적으로 대화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걱정되기는 했지만 개인적인 사정이겠거니 하고 그만 뒀다. 둘의 친밀도가 그다지 높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감안하면 대화를 깊게 하는 것은 가급적 조심해야 했다. 민혁이나 인철이나 대화를 끊는 것이 의도적이었다.
“병아리는 잘 지내?”
“……아, 세연이요? 좀 아픈 거 빼면 잘 지내죠.”
민혁은 처음에 인철이 누굴 말하는 건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민혁의 주변 인물 중에 인철이 아는 사람은 세연 밖에 없기 때문에 금방 생각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한 번은 인철이 세연에게 직접 ‘병아리’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 때 세연은 선배니까 화를 내지는 못하고 나중에 민혁에게 대신 말로 분풀이를 했었다.
“다행이네.”
레이에게 좋지 않은 일이 여러 가지 생기니까 주변이 걱정되서 민혁을 부른 것 같았다. 세연에 대해서는 민혁이 ‘점 좀 칠 줄 아는 아니’라고 소개 받은 것과 평소에 얼마나 왈가닥인지 몇 가지 일화를 들은 게 전부였다. 세연을 직접 만난 건 작년에 한 번이 다지만 은근히 세연의 분위기가 뇌리에 기억되어 있었다. 세연과 레이의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최근에 알아내고, 레이에게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으니 세연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선배 오늘 이상해요.”
인철이 정말 못하는 것 중 하나가 기분을 감추는 것이었다. 특히 부정적인 감정은 잘 숨기지 못해서 민혁처럼 눈치 빠른 사람이 아니더라도, 정말 둔치가 아닌 이상 인철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계속 이상하다고 해야 맞는 말일 거야.”
민혁은 인철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최근에 안 좋은 일을 많이 겪어서 정신적으로 힘든 것인지, 고2니까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는지, 그 전에 알던 평정심이 가득한 모습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억지로 자신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적으로 피곤한 일이 많은가 보네요.”
“내가 아직 공적으로 피곤한 일은 없을 테니까 다 사적으로 피곤한 일이지.”
인철은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리며 기지개를 켰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보다도 자기 자신을 더 어렵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지고 있어서 주변의 일들은 일어날 수 있는 거라며 긍인 해 왔다. 하지만 역시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자신부터 인공적인 것처럼 하나하나가 자연스럽지 않게 맞물려 있었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야. 정상이 아닌 게 너무 많단 말이지.”
민혁은 왠지 모르게 인철의 말에 공감이 갔다. 세상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로가 꼬이고 꼬여서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 지 모르게 되었다. 덕분에 마음까지도 비정상처럼 섞이고 섞여버렸다.
“그 안에서 정상인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런 게 있다면 ‘죽음’이 가장 잘 어울리겠지. 더 이상 정상적이고 완벽한 것은 없을 거야.”
“혹시 염세주의에요?”
민혁은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자 인철은 그럴 리가 있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떠오른 단어가 그거였을 뿐이야.”
점점 복잡해지는 세상 속에서, 시작과 끝이라는 개념이 사라져버린 세상 속에서 가장 완벽한, 아니 가장 정상적인 걸 찾으라고 한다면 ‘죽음’이 가장 먼저 떠오를 수 있을까? 찾아보면 ‘죽음’이 가장 정상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변하지 않고, 어기지 않고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부여되는 것이니까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죽음’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하지만 ‘죽음’은 신성해 보이는 말이자 극단적인 말이다. ‘죽음’을 쉽게, 단번에 생각해 낼 수 있다는 건 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의미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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