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신의재림-두번째라그나로크(완)

신의 재림 : 제 4문 (3)

★은하수★ 2009. 6. 5. 16:54

진원은 오전 두 번째 강의가 휴강되는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귀가할 수 있었다. 아르바이트야 저녁 늦게 돼서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위의 여러 제안들을 부리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마법을 사용하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데는 집만큼 적당한 곳도 없었다. 더욱이 첫 번째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마블이 찾아와서 억지로 맡긴 악마를 시험해 보기 위해 더 서둘렀다. 이런 점으로 보면 진원은 가능성 있는 도구나 방법은 모두 써보는 오딘의 성격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원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궁니르를 주머니에서 꺼내 본 크기로 만들었다. 그리고 궁니르를 지팡이 삼아 바닥을 짚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는 어제 저녁에 어질러 놓은 그대로였다. 청소 담당인 진원이 아침에 바쁘게 학교를 가느라 청소를 못했으니 온 집 안 상태가 어제와 다를 것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런 문제는 일단 제쳐두고, 가방을 의자 위에 올려놓고 옅은 하늘색 구슬이 달려 있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소환구슬이군요.”

진원의 오른손 중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검은색 반지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블이 억지로 우겨서 맡은 하급 악마 세이테였다.

“발키리 소환구슬이야.”

“솔릭이었군요.”

아무리 하급 악마라도 알 건 알고 있었다. 과연 마야가 골라낸 악마다웠다. 직급이 낮아서 어디 방패막이 정도도 되겠느냐 싶었지만 지식이라도 들어있을 만큼 있는 것 같으니 억지로 맡은 ‘짐’은 아니었다. 진원은 목걸이를 목에 걸고 거실로 나갔다. 집 안에는 진원밖에 없기 때문에 이왕 할 거 넓은 곳을 선택한 것이다.

“세이테, 잠깐 나와 있어.”

세이테는 진원의 명령에 따라서 본 모습으로 돌아와 진원에게서 좀 떨어진 곳에 가서 섰다. 진원은 왼손에 궁니르를 짚고 오른손은 앞으로 내밀어 손바닥이 아래를 향하도록 했다.

“안수저, 페후, 에화저, 마나저.(ansuz, fehu, ehwaz, manaz.)"

진원의 발 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크기가 같은 정사각형 두 개가 서로 엇갈려 겹치고 그 마깥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원인 둘러 있는 형상이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룬 문자를 비롯하여 기하학적 그림과 상형 그림이 가득했다. 처음에는 푸른색을 띠던 마법진이 금색으로 변한 순간 진원이 다른 주문을 읊었다.

“라케리에 아르세네드 프로모하르 발할라.”

[바지지지직]

“으으윽.”

마법진에서 전기가 일어나더니 진원의 몸을 타고 올라왔다. 진원은 마법 충격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마법진이 사라졌으나 주변에 악간씩 마법 충격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세이테가 진원을 부축하기 위해 다가가려 했으나 진원의 마력을 기초로 생성된 마법 충격의 잔재 때문에 진원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진원의 마력을 직접 보고 느껴보니 새삼스레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세이테는 라그나로크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신의 힘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 못했으니 그럴 만 했다.

“이런, 으윽.”

[지직]

주변뿐만 아니라 진원의 몸을 휘감던 것도 조금 남아서 진원을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 마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방류식 마법 충격과는 다른 것이었다. 더 강한 마법에 가로막혀서 자신이 건 마법이 이질적으로 변하여 되돌아오는 반사식 마법 충격이었다.

[지직, 지직]

마법 충격의 잔재는 당분간 더 지속될 것 같았다. 진원은 궁니르에 의지하여 겨우겨우 일어섰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세이테는 오도 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자기보다 훨씬 강한 힘 앞에서 경외심도 모자라 겁먹기까지 했다. 하급 악마의 평균 최고 나이를 비교해 보아 세이테의 나이는 어린 축도 아니지만 헬이나 귀족급 악마와는 질적으로 다른 위압감에 꼬마 악마인 것 마냥 두려워했다. 함부로 다가갈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했다.

“다쳤다기 보다는……. 으윽.”

[지직]

[탁!]

양 쪽 어깨에 전기가 흐르는 듯 한 충격이 가해지자 진원은 양 팔로 어깨를 감싸듯이 안았다. 덕분에 왼손에 들고 있던 궁니르가 떨어졌다. 진원은 주저앉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런, 이런.”

진원은 고통을 억지로 참으며 궁니르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궁니르에 기대다시피 하며 소파까지 힘들게 걸어갔다. 주변의 마법 충격은 많이 잠잠해졌다. 그래서 세이테가 얼른 진원에게 다가가 소파에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고마워. 그런데 너는 나를 무서워하는구나.”

진원은 세이테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세이테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새 주인이 고통스러워하면 걱정하는 게 당연한 것인데 오히려 주인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주인을 모시는 악마로서 이건 결례나 마찬가지였다. 세이테는 눈을 내리깔았지만 눈에 비쳐 보이는 두려움은 진원의 앞에서 숨길 수 없었다.

“하긴 귀족급 악마들도 큰 힘을 쓸 일이 줄어들었으니 이런 건 처음 겪어볼 만하겠네.”

다 이해한다는 말투에 진원의 미소는 ‘네가 어려서 그렇다’는 의미를 숨기고 있었다. 끽 해야 500세 정도인 하급 악마의 평균 최고 나이에서 진원의 눈에 보이는 세이테는 360~380정도였다. 어린 건 아니지만 세상 알 만한 나이도 아니었다. 게다가 마법적으로 평화 시대였던 때에 태어나서 자랐으니 괴물처럼 강하고 난폭한 마법은 전혀 겪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진원은 궁니르로 시선을 돌려 잠깐 더 앉아 있다가 통증이 많이 가라앉은 즈음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 하시려는 겁니까?”

세이테가 부축하기 위해 진원의 팔을 잡았지만 진원은 슬며시 팔을 뺐다.

“다른 걸 해 봐야겠어.”

진원은 거실 가운데로 나가서 아까와 똑같은 마법진을 만들었다.

“안수저, 페후, 에화저, 마나저.”

마법진이 금색으로 변하긴 했지만 푸른색을 유지하는 시간이 좀 길었다. 다음 마법이 다른 것이라 그런지 마법진 내의 문자도 몇 개 바뀌었다. 진원은 마법진의 색이 변한 때를 맞추어 궁니르를 가로로 들고 자신의 앞에 살며시 띄었다. 궁니르는 마법진과 같은 황금색 빛을 발했다. 그리고 궁니르의 몸에 룬 문자가 빽빽하게 나타났다.

“황야에 흩뿌려지는 핏방울을 마시고 자라난 망자의 꽃이여, 붉은 꽃잎, 피보다 붉은 열매, 그대가 머금은 피의 영혼은 지금 내 속에 잡혀 있나니. 불러라. 외쳐라. 부르짖어라. 성스러운 안내자의 이름이 그대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노라.”

이 주문은 오딘이 아스가르드가 아닌 곳에서 발키리를 소환할 때 사용하는 주문이다. 진원의 목걸이에 달려 있는 구슬이 흰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진원은 좀 더 마력을 끌어 모은 다음에 나머지 주문을 외웠다.

“성스러운 빛의 발키리여, 이곳에 용맹스러운 자들이 손을 뻗치고 그대들의 이름을 하늘 높이 외치고 있노라. 그대들은 이들의 영혼을 발할라로 인도할 지어다.”

진원의 마력이 완전한 상태였다면 이 긴 주문을 다 외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마력의 양이나 마법 실력이 부족한 때에는 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들여 외울 수밖에 없다. 진원은 주문을 외우면서 양 팔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법진과 궁니르는 더 찬란한 황금색 빛을 띠었고, 소환구슬은 하얀 빛이 금빛으로 동화되었다. 진원은 곧장 왼손으로 궁니르를 잡고 세워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구웅]

거대한 북이 울리는 듯 한 소리가 주변에 울려 퍼졌다. 세이테는 진원의 마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진원에게서 더 떨어졌다. 가슴이 콱 막힌 듯 하고 저절로 무릎을 꿇을 것만 같았다. 실력 차이. 이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진원이 서 있는 곳보다 앞쪽의 천장에 둥근 금테두리가 그려졌다. 그리고 금테두리의 안쪽이 구름화 되어 점점 바깥으로 밀려나갔다. 구름 사이로 황금색의 뭔가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으로 만들어진 신발, 흰 피부의 다리, 금으로 만들어진 갑옷과 투구. 긴 머리를 가지런히 빗은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오딘을 위한 여전사, 아름다움과 지혜, 용맹스러움을 겸비하고 있는 소녀만이 될 수 있다는 발키리였다. 진원은 발키리 하나를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발키리가 소환된 후에 천장의 구름과 금테두리, 마법진, 그리고 궁니르의 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소환구슬만이 금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우리들의 왕, 만물의 아버지, 마법과 전쟁의 신, 오딘이시여.”

소환된 발키리는 진원에게 무릎 꿇고 정중하게 절했다. 진원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마력을 계속 소환구술에 공급했다. 발키리가 소환되는 순간에 갑자기 다량의 마력이 소모되어 하마터면 마법이 해체될 뻔 했으나 겨우 참았다. 이제는 소환 후 얼마나 지배할 수 있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 지가 관건이었다.

“지금 남아 있는 발키리는 모두 몇 명이냐?”

진원은 최고신의 기품 있는 어투로 엄숙하게 물었다. 발키리는 함부로 고개를 들지 않고 공손하게 대답했다.

“발할라에 있던 자들도 모두 발라스칼프로 모여서 15명입니다.”

진원이 예상했던 숫자보다 적지 않았다. 오히려 든든하다고 여길 정도의 수였으나 진원 자신이 이들 모두를 소환할 수 있겠느냐가 문제였다. 한 명을 소환해서 유지하는데 애먹고 있는데 15명은 고사하고 2명도 힘들 것 같았다. 아무리 마력의 봉인을 아홉 조각 중 세 조각이나 가지고 있어도 소환 마법은 고위 마법이었다. 게다가 솔릭이니 더 힘들 법 했다.

“그렇다면 내 마력을 받아서 어느 정도의 마법까지 쓸 수 있겠느냐?”

말 한 마디를 하는데도 진원의 관자놀이에는 땀이 흘러내려 볼까지 적셨다. 역시나 소환 마법은 다른 마법보다 마력 소비량이 너무 컸다. 아직은 소환 마법보다 소환물이 사용하는 마법을 직접 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거나 그거나 거기서 거기지만.

“중간 레벨 정도의 정신 마법까지 가능할 것입니다.”

발키리의 대답은 어느 정도 만족스러웠다. 진원이 소환 마법에 익숙해지면 상위급 마법도 가능하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가히 희망적인 대답이었다. 하지만 사용하는 마법의 정도에 따라 소환 유지 시간이 많이 차이 날 듯 했다. 그래도 지금이 처음이니까 힘이 부치는 거뿐이지 다음번은 발키리에 하나 정도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은……. 너희는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느냐?”

지금 발키리 모두가 발라스칼프에 있다면 김리궁과 소식을 주고받으며 인간계(미드가르드)의 전체적인 사정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아직 싸움에 휘말리지 않은 제 3자의 눈이 객관적이고 정확하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부정적인 대답이 나올 거라 확신하면서도) 물어보았다. 발키리는 대답하기 어려운지 바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오딘께서는 지금 마법 거인왕 우트가르드 로키와 대치중이십니다. 하지만 오딘께서 마력의 봉인을 다 찾은 게 아니시기 때문에 시작부터 불리하게 되셨습니다.”

발키리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녀는 잠깐 멈추더니 곧 다시 이었다.

“로키님과 스카디님 그리고 펜리르, 요르문간드, 헬께서 오딘님을 돕게 된건 다행입니다. 하지만 신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일?”

진원의 귀가 번적 뜨일 수밖에 없었다. 프리그를 구하기 위해 신들을 깨운다는 것 밖에 목표나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원은 정신을 가다듬고 발키리의 말을 경청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괜히 프리그님을 납치한 것이 아닙니다. 스피릿 크리스털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신에게 있었다면 그 신을 납치했을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 우트가르드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열쇠 세 조각 중 하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 경로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때문에 김리궁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진원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동안 우트가르드 로키가 진원 일행을 가볍게 장난하듯이 만 상대한 이유가 시간을 끌기위해서인 것처럼 보이긴 했었다. 자신의 시험작을 실험해보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진원 일행을 괴롭힌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강도가 예상보다 약하기 때문에 의심을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트가르드 로키가 중요한 것을 하나씩 모으고 있다면 그것 역시 고려해 볼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 진원은 훤히 알고 있었다.

“스피릿 크리스털과 아스가르드의 열쇠 조각이라면 분명히 4대 보물을 노리는 거야.”

“김리궁의 발데르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으음.”

진원은 신음소리를 입술 사이로 가늘게 뱉었다. 우트가르드 로키가 정말로 4대 보물을 모두 찾아낼 생각이라면 진원도 응당 찾아서 우트가르드 로키의 목적을 막아야 했다. 하지만 4대 보물을 찾는 일은 신을 깨우는 일보다 어려웠다.

“발데르께서 다른 신들과 함께 김리궁과 미드가르드를 연결하는 임시 통로를 만들 거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4대 보물을 찾는 게 전력을 다할 거라 하셨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발키리의 말은 희소식이긴 했으나 걱정되는 게 없는 건 아니었다. 모든 세계가 다 단절된 때에 일부 임시통로를 연다는 것은 다른 세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거센 물살을 막고 있는 둑에 조그만 금이 가면 그 둑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버리며 엄청난 양의 물이 주변을 삼키며 무섭게 돌진한다. 혹여나 임시통로의 중간에 다른 세계와 통하는 틈이 생긴다면 그 어디보다도 미드가르드에 혼란이 생길 것이다. 혹은 반대로 우트가르드 로키가 통로와 틈을 통해 마수를 뻗칠 수 있다. 염려되는 바가 한두 가지가 아니나 임시통로를 만드는 것을 아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프리그만 구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군 그래. 우트가르드 로키를 반드시 막아야만 해.”

진원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씩 힘이 부치는 게 느껴졌다. 가지고 있는 마력을 모두 개방해서 소환한 것이 아니라 그런지 금방 지쳤다.

“그만 돌아가봐도 좋다.”

“네.”

발키리가 사라질 때는 몸이 빛가루로 변하여 공중으로 흩어지는 듯 한 형상으로 사라졌다. 소환구슬도 빛이 사라졌다. 진원은 궁니르에 몸을 의지하고 천천히 크게 숨을 쉬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세이테는 조심스럽게 진원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진원은 세이테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대답대신에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땀을 흘리며 힘들어하긴 했지만 아직 다리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적당한 때에 발키리를 돌려보냈기 때문에 다리가 후들거리지도 않았다. 마력 쪽에서 힘든 것이 체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몸 전체가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마력을 전부 개방하면 지금보다야 상태가 괜찮아지겠지만 이런 것 때문에, 위험상황도 아닌 때에 쓸데없이 마력을 전보 개방하고 싶지는 않았다. 진원은 세이테의 부축을 받으며 소파에 앉았다.

“역시 소환 마법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말은 이렇게 해도 진원의 입가에는 미소가 피어있었다.

“처음부터 수확이 좋으시네요.”

“그래 보이나?”

“네?”

진원은 궁니르를 작게 줄이고 나서 꼭 쥐었다. 슬픔 대신에 통증을 느끼는 것이었다. 스스로가 만족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은 슬프기 그지없다. 마음이 나약하지는 않다. 힘이 약했다. 이 현실을 꿋꿋하게 일어서서 헤쳐 나가기에는 슬프도록 힘이 약했다. 그 사실을 오늘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자신이 바보같다는 것도.

세이테는 진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소호나 마법도 성공했고 중요한 정보도 얻었으니 이만하면 성공이 아닌가. 하지만 진원의 미소에는 ‘만족감’이 없었다. 자신을 비웃는 조소였다. 상대적으로 약한 자는 자신의 눈에서 강한 자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그 모습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뭘 더 바랄 게 있어 저럴까하는 생각이 대부분일 것이다.

“세이테, 네 앞에 있는 나는 무엇이냐?”

“저의 주인님이십니다.”

세이테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저 제 주인만 ‘이 세상 놓은 이’라고 생각하는 종의 그지없이 평범한 대답이었다.

“내가 주인이기 전에 나는 무엇이냐?”

“오딘이십니다.”

이번에도 세이테의 대답은 단순했다. 진원은 아직 어린 아이를 다루듯이 미소로 일관하고 있을 뿐 세이테의 말에 거친 힐난을 하지 않았다. 머리 좋은 하급 악마라도 하급 악마의 한계는 있었다.

“내가 오딘이라고 생각하나?”

“저에게는 오딘이십니다.”

거침없는, 머뭇거림이 보이지 않는 대답이었다.

“다른 이의 눈에도 내가 오딘으로 보일까?”

“헬께서는 오딘이라 하셨습니다.”

세이테의 종으로서의 단순한 대답이 연속되면서 진원과 세이테 사이의 문답은 잠시 멈췄다. 진원은 정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네가 과거에 알고 있던 오딘과 내가 일치하느냐?”

“전 과거의 오딘을 모릅니다. 지금 네 앞에 계신 오딘, 당신 한 분 잒에 알지 못합니다.”

“네가 아는 오딘은 강한가?”

그제야 세이테는 진원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전부는 아니었지만 일부분이라도 진원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제 3자의 눈에서 당사자가 강하고 약하고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스스로가 자아에 대해 의심하고 회의를 느낄 때 그 감정의 나락의 깊이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 세이테의 눈에서 오딘은 강했다. 하지만 진원의 입장에서 지금의 오딘은 어떤가? 한심스럽다고 느낄 지도 모른다. 세이테는 조금 걱정이 됐다. 오늘 만난 이 새 주인이 스스로 무너져버리지는 않을까.

“제가 아는 오딘은 강하십니다.”

세이테는 계속 진원의 질문에 자신의 대답을 했다. 이런 식으로 문답을 하다보면 진원이 스스로에게 만족할만한 대답을 하지 않을까 싶어 일관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아는 오딘은 강한가?”

“강하…… 십니다.”

세이테가 진원의 속마음을 완전히 알 리가 없었다. 진원은 계속 미소를 지고 있었지만 세이테의 이번 대답에 입가가 더 양 옆으로 당겨졌다. 진원의 눈에 세이테는 어린 아이로 보일테니 세이테의 대답이나 반응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진원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순진한 대답이었다.

“세이테. 이것 하나만 알아둬. 한 번 나락까지 짓밟혔던 사람은 다시 일어설 때 전보다 더 강해지지. 하지만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은 다시 짓밟히지 않고서야 위로 올라갈 수 없어. 난 설진원이지 오딘이 아니야. 오딘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낱 인간에 불과해. 오딘은 한없이 강하고 한없이 지혜로우며 한없이 존경스러워. 난 그를 본받고 싶어 하는, 그를 마냥 따라하는 인간일 뿐이야. 하지만 오늘에서야 내가 오딘이 될 수 있다고 알았어. 지금 나는 천천히 나를 짓밟고 있지. 자기를 부정하는 자는 일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그 중에도 일어서는 자는 자기를 뛰어넘게 된다. 내가 오딘이 되기 위해서 나는 나 자신을 처절하게 죽여야 해.”

진원은 자기 다짐을 하고 있었다. 소환구슬을 쓸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소환구슬을 사용하려고 했다. 아직 발키리를 부를 필요가 없는데 억지로 발키리를 불러냈다. 자기가 얼마나 약한 지 시험하기 위해서였다. 어렴풋이만 알고 있던 자신의 약함을 확실하게 각인하기 위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했다.

세이테는 더 이상 진원과 심리전 같은 고도의 대화를 할 자신이 없었다. 진원도 그걸 알고 세이테를 향해 조용히 오른손을 내밀었다. 세이테는 망설일 것 없이 바로 반지의 모습으로 변했다. 진원은 소파에 편하게 기대앉은 자세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진원이 봤을 때 자신은 아직 제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예상했던 게 맞았을 뿐, 충격을 받지 못했다. 약함을 다시 인정하게 된 것일 뿐, 약함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다. 아홉 조각 중에서 세 조각을 찾은 건 약하다고 할 수 없다.(그렇다고 마력이 1/3이라는 건 아니다. 아홉 조각이 모두 모이면 기하급수적으로 마력이 증가한다.) 객관적으로 보면 진원은 강하다. 마력을 전부 개방해서 힘을 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위태해 보인 것뿐이었다. 그러나 진원은 지금의 자신을 만족할 수 없었다. 과거의 오딘과 현재의 진원이 너무 비교되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스피릿 크리스털을 손에 넣은 우트가르드 로키는…… 내가 아홉 조각을 모두 찾아도 막기 힘들어.”

진원은 머릿속에서 마력의 크기를 가늠해 보았다. 그 때 진원과 우트가르드 로키만 상상 속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모두 본 힘을 되찾은 신들의 모습……. 여기저기가 다친 피투성이의 모습과 무너져가는 제 3의 세계의 모습도 저절로 그려졌다.

“역시 4대 보물을 찾는 일이 더 중요하겠어.”

진원은 눈을 뜨고 바닥을 뚜렷한 초점 없이 사선으로 내려다봤다. 작은 구름이 태양을 가리며 지나갔는지 거실 바닥이 조금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진원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뒤로 밀었다. 소파의 등받이가 움푹하게 패이면서 진원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미안해요, 프리그. 당신을 구하는 일은 두 번째가 돼야겠어요. 최근에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나서 정리가 되지 않아요. 적어도 우트가르드 로키에게 장난감처럼 휘둘리고 싶지 않아요.”

프리그가 자신의 약한 모습을 알지 못했으면 하면서도 앞에 없는 프리그를 향해 나약한 말을 했다. 속은 오딘이지만 겉은 미숙한 성년인 진원. 진원은 그 둘의 차이를 어떻게 줄여야 할 지 모르고 있었다. 아직 오딘과 진원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했다. 때문에 불안정한 이중적 삶으로 모든 게 힘들고 피곤해져 버렸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았다. 진원은 차라리 이대로 쓰러져버리고 다시 처음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행동과 현실은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바닥으로 치닫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