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는 잠에 들지 못했다. 악마의 모습으로 있다 보니 수면량이 현저히 줄었기 때문이다. 길드원들이 깨지 않게 소리 죽이며 방에서 나갔다. 거실로 나가니 상급 마족의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필츠가 보였다. 보호경으로 보이는 안경을 쓰고서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다.
“죽음의 서…… 인가요?”
시아가 다가오자 필츠는 그녀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줬다. 시아는 1인용 소파에 앉아 필츠가 들고 있는 책을 진지하게 응시했다. 파피루스로 만들어지지 않은 걸 보니 사본이었다. 그런데 겉표지나 두께나 실물과 아주 흡사했다.
“네. 이단의 책입니다. 정본이며 모든 사본을 오딘이 없앴지만 딱 한 부, 얼음의 대지에 있었던 사본은 대지가 수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완벽하게 재현한 사본이라 그런지 몰라도 얼음의 대지가 보물처럼 여깁니다.”
필츠는 책장을 천천히 한 장씩 넘겼다. 비밀 언어를 해독할 수 없기 때문에 책장을 넘기는 것은 무의미한 손동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림인 듯 문자인 듯 현혹스러운 문자가 책장의 움직임을 따라 출렁거렸다.
“문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까지 재현됐네요. 정본이라 해도 되겠어요.”
“너무 부산하게 움직여서 징그러운 면도 있습니다.”
“풋. 그럴 수도 있겠네요.”
시아는 죽음의 서에서 눈을 떼고 등을 편히 기댔다. 얼음의 대지 심층부에서 대지의 마력이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뼈마디가 끊어질 정도로 아픈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며 등을 뗐다.
“그 의자는 일종의 충전기입니다. 글라셰가 대지에게서 마력을 받는 방법 중 하나죠. 그런데 대지의 마력이 바르베리트-진 씨와 맞지 않는 모양입니다.”
“악마의 마력이 타 종족에 비해 차갑다고들 하지만, 그건 진짜 온도를 얘기하는 게 아니니까요. 얼음의 대지는 마력마저 진짜로 차가운 곳이군요.”
“무스펠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몸에 맞지 않는 것이 좀 섭섭합니다. 대지는 당신을 마음에 들어 하는데 말입니다.”
필츠는 웃으면서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죽음의 서를 낮은 탁자에 올려놓은 다음에 등을 소파에 파묻듯이 깊게 기댔다. 크리스털처럼 투명하면서 짙푸른 마기가 그의 등에서 풍겨 나오더니 그를 감싸 안았다. 얼음 수정에서 느낀 그 마력이었다. 필츠는 두 눈을 가만히 감고, 몸에 힘을 빼고서 그 마력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가디안스의 보스는 그의 모습을 관찰하듯이 쳐다봤다. 무척이나 편해보였다. 그녀는 다시 도전해볼 겸, 대지의 마력이 가진 특수한 속성에 호기심을 갖고서 등을 기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지의 마력이 등을 자극했다. 척추를 따라 쓰다듬는 손길이 생각보다 섬세했다. 시아는 긴장을 풀고 자신의 마력을 편하게 방출했다. 그러자 짙푸른 마기가 그녀의 검은 마기에 섞여들었다. 처음에는 체액마저 얼어버릴 만큼 냉랭했다. 하지만 금세 대지의 마력에 동화했다. 자연계의 그 어떤 마력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고순도 마력이 그녀의 몸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었다. 더 이상 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습니까?”
“음……. 유명 안마사에게 시술을 받은 것처럼 개운하네요.”
안 그래도 뒷덜미 근육부터 어깨 근육이 전체적으로 뻣뻣했는데, 그 뻐근함이 완전히 사라졌다. 근육에 조금씩 축적되어 있던 유산도 깨끗하게 씻어낸 것 같았다. 원체 피로를 느끼지 않는 종족이라지만, 이건 피로를 느끼기 전에 상쾌함이 가득했다.
“몰이 그랬습니다. 키메라가 플러스에서 오리지널로 돌아가는 순간, 구속체에 싸여 힘이 회복되길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입니다.”
“아-. 그렇군요.”
시아는 소울 테이커급이고 그 이상으로 절대 키메라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구속체에 끌려 다니는 입장이 아니었다. 평범한 키메라는 구속체를 끊어 플러스로 변할 때 전신의 근육과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고, 다시 오리지널로 돌아갈 때 구속체에 단단히 묶여서 힘이 회복될 때까지 수십 톤의 피로에 시달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얼음의 대지에게서 힘을 받는 것과 그 느낌이 정반대라고 해야 한다. 덧 붙여 말하면, 플러스 상태로 오래 버틸수록 힘을 많이 사용할수록 구속체에 묶여 대기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하지만 시아는 수 초 만에 그러한 고통에서 풀려날 만큼 종족 변화에 능숙하다. 구속체가 필요 없는 절대 키메라에 가깝다는 증거였다.
“바르베리트-진 씨.”
필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두운 감색 옷을 정돈하고 소파 팔걸이에 걸쳐뒀던 흰 모피 망토를 조심스럽게 어깨에 둘렀다.
“잠시 저와 나가시겠습니까?”
시아는 자신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나밀어진 흰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일어서자마자 발밑에 마법진이 빛났다.
온통 얼음으로 뒤덮인 넓은 로비였다. 우리처럼 투명하나 절대 깨지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천장은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주변 공기가 대지의 마기로 충만해 있었다. 물론 무색투명해서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얼음의 대지의 중심이자 심장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왕국과 생자의 세계를 연결하는 문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곳을 ‘눌(Null : 아무것도 없다)’이라고 부릅니다.”
시아가 묻기 전에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필츠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빠르게 걸었다. 꼭 뒤쫓아 오는 자를 떨어트리려는 듯이,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불안한 걸음이었다. 시아는 그저 얌전히 그를 따랐다.
넓은 로비를 가로질러 가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필츠는 정면을 향해 손바닥을 세워들었다. 글라셰의 개인 구역에 들어갈 때와 같았다. 얇은 보호막이 반짝 빛나더니 다른 공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커다란 문이 나타났다. 그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다.
“휴.”
필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까 메이였죠?”
시아 역시 뒤따라오는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토끼의 모습으로 축지법을 쓰는 것처럼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오는데, 마력을 깨끗하게 감췄어도 이동 기척은 감추지 못했다. 시아와 필츠는 전투에 능하고 상대의 물리적인 움직임에 민감하기 때문에 메이의 희미한 이동 기척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기 위에 있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저를 의심하죠.”
“흠. 이 다음엔 어떻게 하실 거죠? 그녀에게 댈 핑계 정도는 있으시겠죠?”
“아직 마야라임은 이곳에 들어올 자격이 못 됩니다. 대지가 그녀를 내보내고 기억을 완전히 지울 겁니다.”
“그토록 중요한 이곳에 절 데려온 건, 역시 대지의 뜻인가요?”
“네. 얼음의 대지가 당신에게 흥미를 넘어 호의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부탁할 것이 있다 했습니다.”
오색영롱한 얼음 수정이 가득히 깔린 넓은 홀. 그곳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서야 필츠는 시아의 손을 놓았다.
“얼음의 대지에서 유일하게 색감이 다양한 곳 같네요.”
“그럴 겁니다. 이곳이 바로 대지의 심장 그 자체입니다. 글라셰가 아닌 자가 대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입니다.”
시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분홍빛을 내는 수정에 손을 댔다. 색은 다양하고 예쁘지만 한기는 변함없었다. 살과 뼈를 파고드는 한기에 절로 손이 수정에서 떨어졌다. 그래도 온화함이 느껴지는 건, 아마도 살기나 적대감이 없어서일 것이다. 그녀를 반기는 부드러움만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어리지만 위대한 키메라님.>
대지의 목소리는 텔레파시처럼 전해졌다. 어머니를 떠올리는 목소리였다.
“저야말로, 거부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아-. 상냥한 분이에요.>
눈이 부실정도로 흰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돌연 나타나더니 시아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차가웠다. 한기가 순식간에 심장까지 침식했다. 시아가 마력을 끊임없이 방출하여 보호마법을 유지하지 않았으면 쇼크로 인해 심장 마비가 왔을 것이다.
땅에 끌릴 만큼 긴 백발에 눈가루와 얼음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온통 희고 빛났다. 피부는 투명하기 직전까지 하얗고 깨끗했다. 과연 얼음의 대지의 인간 형상화였다. 아름다운 백색이 매혹적이었다. 동시에 티 없는 백색은 치명적이었다. 시아의 마기가 닿자마자 그것마저 백색으로 바꾸기 위해 힘을 과하게 방출했다.
“암만 그러셔도 전 글라셰처럼 새하얗게 탈색되지 않습니다. 허옇게 염색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시아는 아주 쉽게 대지의 마력을 밀어냈다. 대지의 형상화는 미소 지은 후 아쉽다는 표정으로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역시 강한 분이네요. 그런 당신께 꼭 부탁드리고픈 일이 있어요. 들어주시겠어요?>
“대지에 들어온 대가입니까?”
<꼭 그렇게 기브앤드테이크를 지켜야 하나요?>
“그쪽이 속 편해요.”
순백에 저항하듯이, 그녀의 아름답고도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순흑의 날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작급 악마의 상징이요, 시아 바르베리트-진을 상징하는 어둠 그 자체가 순백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흑색의 자태를 우아하게 뽐냈다.
<저들은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어요. 글라셰 외의 존재가 이곳에 오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신기해서 구경 온 것뿐이에요.>
악마의 날개는 장식용, 위협용 외에는 가끔 방패가 되는 게 고작이다. 혹은 지금처럼 적을 경계할 때 공작의 꼬리 깃처럼 가능한 크게 펼칠 수도 있다.
<필츠 판바이스와 동급인 자들이에요. 이곳의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졸지에 서커스의 피에로가 된 기분이네요. 뭐, 이단의 생명체니까 제가 참아야겠지만.”
날개에서 힘이 빠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수정의 뒤에 모습을 감추고 있는 자들이며 얼음의 대지를 절대 신용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가 그녀의 몸 전체적으로 풍겨졌다. 맘만 먹으면 이곳의 모두를 때려눕히고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는 당돌함까지 있었다.
“바르베리트-진 씨. 우리 모두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이곳까지 도달한 자는 누구든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룰입니다.”
“하긴. 다들 무지 강해 보여요. 아니, 확실히 강해요. 우리 길드에 넣고 싶을 만큼. 한 번 겨뤄보고 싶을 만큼.”
시아는 이제까지 천계의 유사 신족을 제외하고 자신보다 강한 자를 만나보지 못했다. 모두가 그녀를 먼치킨으로 인정하는 것도 신족, 유사 신족을 빼면 마왕이건 정령왕이건 그녀와 대등하면 다행일 정도로 그녀가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음의 대지의 심장에 도달할 수 있는 다섯 글라셰는 모두 시아와 맞먹었다. 글라셰도 천계와 지상계를 구분하는 종족이라면 이 다섯 개체가 필시 천계에 발을 들일 수 있는 유사 신족으로 분류될 것이다.
“그러면 반경 수십km는 무(無)가 될 겁니다.”
“그게 문제죠. 그래서 힘을 감추고 본성을 절제하며 매일 도를 닦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굳이 싸우지 않고 혼자 힘을 완전해방하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니까요.”
콧바람을 세게 ‘흥’하고 내뿜었다. 날개가 사라졌다.
<저들이 강해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그런 거라면 속성 문제군요.”
시아는 모든 경계와 긴장을 풀고 대지의 구현화를 향해 싱긋 웃었다. 대지의 구현화는 양손을 가슴 위에 살포시 얹고 가늘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기브앤드테이크 같은 게 아니에요. 그냥 흥미가 있는 거에요. 얼음의 대지가 직접 부탁할 정도의 일이니까요.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어요.”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너무 상냥한 분이에요.>
대지의 구현화는 몸을 옆으로 돌려 개나리 빛 수정에 왼손을 올렸다. 수정에서 한 가닥의 희미한 금색 빛줄기가 뻗어 나왔다. 다른 수정에 반사되면서 심장 밖으로 나갔다.
<빛을 따라가면 슈바르체트라움(der schwarze Traum : 검은 꿈-아공간을 칭하는 단어)에 닿을 거에요. 초대 악마왕 로키가 남긴 물건들이 봉인되어 있지요. 마력이 그 한 곳에 고여 썩는 바람에 제 힘으로 슈바르체트라움을 유지하기 어려워졌어요. 글라셰는 상극이나 마찬가지인 힘에 손댈 수 없고, 전 원래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마력의 부패가 진행된 지 어언 수백 년. 제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누구도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탓에 그 동안 부패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어요. 부디 로키의 보물을 대지 밖으로 옮겨 주세요.>
시아는 내심 놀랐다. 악마계에서 아무리 샅샅이 뒤져도 찾을 수 없던 로키의 보물이 얼음의 대지에 봉인되어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모든 악마를 다스릴 수 있는 왕의 반지와 로키의 상징이자 마력의 근원으로도 불리는 사안(邪眼)의 반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저주술을 담은 비서(秘書). 이것들을 직접 볼 수 있다. 악마에게 있어 절대 권력을 쥘 수 있는 기회였고, 그녀 개인적으로는 펜타곤에게 대항할 힘을 가질 수 있는 기회였다.
“로키가 왜 하필 얼음의 대지에 보물을 봉인했는지 아세요?”
그녀는 최대한 흥분을 가라앉혔다.
<어떤 신이나 자신의 물건이 더쿠니없이 위험하단 걸 알아요. 최대한 손이 닿지 않는 곳을 찾다보니 이곳을 택한 거죠. 로키와 그의 괴물 자식들은 후손이 없고 사제조차 없잖아요. 헬만이 나흐폴게르(der Nachfolger : 계승자)가 있었다는데 로키는 그런 걸 전혀 두지 않았어요. 그러니 자연스레 맡길 이가 없는 거죠.>
“악마에게 맡겼다간 대재앙이 일어났을 테니 여기에 둔 것이 현명한 처사일지도요.”
시아는 악마의 본성을 너무나 잘 알았다. 로키의 보물을 찾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그 역사를 알기 때문에-그녀가 키메라라는 점도 있고- 냉정한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우리 왕께 갔다 바치느냐, 제가 꿀꺽 하느냐, 다른 곳에 봉인하느냐라는 커다란 딜레마에 빠지겠지만, 우선은 독하게 썩은 것을 무사히 밖으로 꺼내야겠네요. 한 번 시도해보죠.”
<부탁드려요.>
“으음. 성공을 100% 부장하지 못해요.”
<그래도 이렇게 부탁드려요.>
처음부터 거절할 생각이 없었지만, 거절할 수 없도록 너무 간곡하게 부탁했다. 시아는 뒷머리를 슬슬 문지르다가 고개를 까딱 끄덕여 인사를 했다.
필츠 판바이스가 길잡이로서 앞섰다. 시아가 무사히 슈바르체트라움에 도달할 수 있도록 게이트(워프나 텔레포트와는 다른 이동방식)를 수차례 열며 전진했다. 빛이 진행하는 속도에 맞춰 빛이 도달한 곳까지 게이트를 통해 띄엄띄엄 이동했다.
“판바이스 씨는 슈바르체트라움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겠네요.”
“네. 앞으로는 바르베리트-진 씨 혼자 가셔야 합니다.”
얼엄의 대지 최남단이라는 것을 감으로 알 수 있었다. 슈바르체트라움의 입구에서는, 변질된 독한 마기가 압력 밥솥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틈새마다 세차게 뿜어졌다. 일정 범위 밖에서는 대지의 힘으로 정화되긴 했으나 그 모습이 숨 차 보였다. 필츠 역시 마기가 정화되는 그 경계선을 넘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설마 별 일 있겠어요.”
시아는 정화 경계를 넘어 입구 가까이로 걸어갔다. 신경을 따끔하게 자극했다. 나쁘지 않은 감강이었다.
슈바르체트라움의 안은 마기가 아니라 온통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후작급 악마인 그녀도 숨을 쉬기 불편했다. 자동 보호마법 덕분에 몸이 녹지 않았지만 언제 마법이 풀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내부 자체가 제대로 철저하게 썩고 있었다.
“이 와중에 로키의 보물이 형체를 유지하고 있으면 그것도 그거 나름대로 굉장한 일이야.”
한 걸음 한 걸음 신중하게 걸어 들어갔다. 침입자를 경계하거나 내몰기 위한 장치는 없었다. 이곳에 도달할 수 있는 자라면 보물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뜻하는 것인가.
“헤에-. 굉장한 걸?”
두 개의 반지와 한 권의 책이 보호막에 둘러싸인 채 공중에 떠있었다. 로키의 보물 스스로가 형성한 보호마법이었다. 로키의 보물에서 스며 나온 마력이 공간에 갇혀 썩는 중에, 보물 자체는 보호막 안에서 특유의 어둡고 음산한, 고순도의 마력을 지니고 있었다.
“혹시 보호막에 닿으면 손이 타기라도 하려나?”
말로만 하는 걱정이었다. 거리낌 없이 로키의 보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은 아무 일 없이 보호막을 통과했고, 석류석 비슷한 붉은 보석이 박힌 사안의 반지를 움켜쥐었다. 반지의 마력과 시아의 마력이 공명했다. 신 로키의 마력이 그녀의 몸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증폭기 삼아 로키의 마력이 슈바르체트라움 전체를 집어 삼켰다. 오랫동안 썩어가던 마력이 한순간에 정화되었다. 정화라고 해봤자 악마에게 편한 사신의 마력으로 정화된 것이었다. 그래도 마력 자체의 순도가 높기 때문에 얼음의 대지와 속성이 다르더라도 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진짜 굉장해. 이거, 굉장하단 말 밖에 안 나오는데?”
왕의 반지와 비서도 마저 챙겨 들고 슈바르체트라움에서 벗어났다.
[구구구구구구-]
로키의 보물이 그곳에서 나오자 공간 자체가 소멸됐다. 입구 주변에 풍기던 독기도 완전히 사라져있었다. 긴 시간 동안 얼음의 대지를 좀 먹던 골칫거리가 깨끗하게 치유된 순간이었다.
“무사하십니까?”
필츠가 시아에게 다가왔다. 께름칙한 마기가 전부 사라진 덕분에 기존에 제한된 구역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됐다.
“네. 아무래도 보물을 다시 슈바르체트라움에서 빼낸다가 정답이었나 봐요.”
“정말 정답인가 봅니다. 거짓말처럼 평화로워졌습니다.”
“무려 평화인가요?”
“무려 평화입니다.”
시아는 재밌다는 듯이 싱긋 웃었다. 그리고 보물을 보며 간사한 눈웃음을 지었다. 악마왕에게 가져갈 것인가, 다른 곳에 봉인할 것인가 고민할 필요 없었다. 로키의 보물이 자신을 새 주인으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녀의 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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