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츠의 구역을 침범하려는 간 큰 무뢰한이 필츠의 힘에 밀렸다. 그의 낌새가 완전히 사라지자 시아와 필츠가 마력을 감쪽같이 감췄다. 필츠야 자신의 구역을 보호하기 위해 마력을 뿜었다지만, 시아는 적이 나타나니까 자동적으로 마기가 새나왔다. 타고난 본성이란 어쩔 수 없었다.
“으…….”
쓰러졌던 몰이 신음 소리를 냈다. 정신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모우.”
메이와 이안이 몰에게 곧장 다가갔다. 이안이 혀로 몰의 볼을 핥았다. 메이는 조막만한 손으로 오랑우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이 쓰러졌던 자에게 어떤 점에서 좋은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이 그만큼 걱정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에는 충분했다.
오랑우탄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키다가 소파에서 떨어졌다. 마야와 이안이 받친 덕분에 바닥에 머리를 들이 받지 않았다. 키메라 몰 코톤은 다시 위로 올려주려는 도움을 마다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엉금엉금 내려갔다.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보였다.
“재밌는 친굽니다.”
“흥미로운 생물체이긴 해. 이미 글라셰 순종을 세 개체나 접했기 때문에 몰 코톤에 대한 내 관심도가 떨어졌을지도 몰라. 좀 더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런 건 차차 알아가는 쪽이 더 재밌지 않겠습니까?”
시아는 딱딱한 표정을 일관했다. 낭인족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긴 했지만 결핍감을 채우고픈 욕구가 끊임없이 꿈틀거렸다.
“손님들께서 오신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서 송구스럽습니다.”
필츠가 뒷정리까지 완벽하게 해치우고 돌아왔다. 시아에게마저 적을 들켰던 만큼 더 철저하게 뒷수습을 한 모양이었다. 이에 시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한 전 생긋 웃었다.
“난폭한 멍청이가 늘어나서 탈입니다. 가끔 얼음의 대지가 변덕을 부리면 몇 년 동안 혈향을 퍼트리며 시끄럽게 싸워야만 합니다. 이미 10년 전에 대대적인 난리가 끝났는데 아직까지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잔존한 난봉꾼이 동료를 늘려가고 있다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개체수를 줄이기 위한 사투가 왜곡됐다는 건가요?”
“역시 눈치가 빠르십니다. 그렇습니다. 본디 개체수를 조절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던 성전(聖戰)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살아남은 개체 중에 불순분자가 남은 것이 화근입니다.”
“그래도 일일이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잔챙이들만 남은 것 같네요. 10년이면…… 당신 같은 이들이 나서서 청소하고도 남을 시간이라고 보는데요?”
“하하하하하하. 이거 못 당하겠습니다. 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일부러 약하지만 오기 있는 녀석들을 살려뒀습니다.”
필츠는 만족스러운 듯이 시원하게 웃었다. 그리고 이제야 손님을 대접할 마음이 생겼는지 긴 옷자락을 사락사락 끌면서 손님 머릿수만큼 차를 준비했다. 바닥에서 눈이 끌어올려지더니 모두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원형 탁자가 커졌고 의자의 수도 늘었다.
“자, 앉으십쇼. 필츠 판바이스가 여러분을 대접하겠습니다.”
길드 가디안스의 선발대 12인이 각자 자리를 잡았다. 메이와 이안도 필츠의 눈짓에 따라 쪼르르 다가왔다. 겨우 제 몸을 가눌 수 있을 만큼 정신이 든 몰을 쳐다본 다음에 자리에 앉았다. 이안은 의자에 앉기 편하게 마족의 모습으로 형태를 바꿨다. 은백색 장발을 뒤로 곱게 땋아 내린 소년이었다. 인간으로 치면 10대 중반쯤 되는 외모에 유아스런 앳된 티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몰. 널 찾아온 분들이다. 와서 인사해야지.”
필츠는 몰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몰은 모피 망토 사이로 약간 나온 가늘고 긴 손으로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었다. 이제 조금씩 주변이 파악되는 중이었다.
“몰 코톤입니다.”
오랑우탄에서 키가 훤칠한 청년으로 서서히 변했다. 모두의 시선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오리지널이 정령이기 때문일까? 잘 빚은 도자기 인형보다 훨씬 곱고 아름다웠다. 인간의 모습이지만 엘프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난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 시아 바르베리트-진입니다. 오리지널일 땐 진 시아라고 합니다. 여기 동석한 자들은 전부 같은 길드 소속의 길드원. 당신도 우리의 동료가 되어 달라고 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나머지 11인의 소개는 곧바로 생략했다. 뭐가 그리 급한지, 시아는 딱딱한 사무형 말투로 처음부터 직구로 나갔다. 탐색전을 해봄직 한데도 상대에게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 정체와 목적을 다 드러냈다.
“악마계의 바르베리트 후작을 직접 뵈다니 영광입니다.”
“절 아십니까?”
“정신계 소속 중에서 후작님을 모르는 자는 없습니다.”
예상한 전개였다. 키메라가 된지 얼마 안 된 정령이면, 정령계에서 얻은 지식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것이며 아직까지는 얼음의 대지 밖에 나가서 정령계와 접촉할 것이다. 정령계 3대 종족의 우두머리급 유명 인사는 정령계에서 상식이니, 그도 당연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길드 가디안스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키메라가 되고 나니까 흥미가 생겼을 뿐입니다. 아직 가디안스나 크루세이더 같은 큼직한 길드조차 아는 바가 적습니다.”
정신 못 차리고 해롱거리던 모습에 비해 언행이 상당히 반듯했다. 대화 중간에 잠깐 생긴 틈에 맞춰서 자리에 앉는 일련의 모습도 오랜 시간 몸에 밴 것이 틀림없었다. 불의 정령이 강한 물리력 때문에 과격한 이미지가 짙지만, 정령이라면 기본적으로 예절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몰 역시 능숙하게 행동했다.
“우와-. 모우가 아는 사람이었구나.”
“저 분의 이름과 명성을 알 뿐입니다.”
메이에게도 깍듯하게 경어를 사용했다.
“몰 코톤. 길드 가디안스는 길드 크루세이더에 대항하기 위해 뭉친 조직입니다. 순종을 억지로 키메라로 만들고, 키메라에게 광기를 유발시키는 약을 강제 투약하는 만행을 막는 것이 주된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펜타곤을 견제하는 것도 겸사겸사 하고 있습니다.”
“펜타곤……! 절대 키메라 말씀이십니까?”
키메라라면 ‘본능적’으로 그 존재를 알고, 경외하고, 거역하지 못한다. 누구에게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직접 봐서 아는 것도 아니다. 키메라가 되는 순간부터 펜타곤의 존재와 그들의 의미를 자동적으로 알게 된다.
얼음의 대지에서만 평생을 산 글라셰 순종 3인은 몰이 놀라는 이유를 전혀 몰랐다. 그들에게 펜타곤에 관한 지식은 일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가 진행될 것이다.
“펜타곤 중에 디 페어츠베어플루흐가 헬이 금지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그에 대항하기 위해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헬이 금지한 실험 중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장 악질적인 실험입니다.”
“읏……. 무스……. 말도 안 됩니다. 무리입니다.”
“‘무리’란 어떤 무리를 뜻하시는 겁니까?”
“제 아무리 펜타곤이라도 신이 금지한…… 그것도 창조에 가까운 실험을 할 수 없습니다.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실험의 이름이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았지만 막힘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신족이 남긴 지식의 편린을 계승한다는 정신계(비물질계). 다행히 몰은 무스펠 실험의 전반에 대해서 아는 쪽이었다. 어금니를 꽉 물고 아주 진지했다.
“앗, 시아, 모우, 치사해. 자기들만 알아듣고.”
“마야라임. 중간이 끼어드는 건 실례야.”
“하지만……. 알았어.”
필츠의 온화함에 마야가 물러섰다. 인자하게 타이르는 표정 뒤에 카리스마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그녀도 어른이라면 어른이기에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는, 최소한 저에게는 만약을 대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같이 하찮은 것이 그것을 위해서 바르베리트 후작님 아래에 용병으로 들어간다니, 가당치 않습니다.”
“그러면 무슈후슈나 간달파를 섭외할까요?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겁니다.”
몰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시아는 그와 대화하면서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무한한 자애를 품은 어머니의 미소였다. 이제 17살의 소녀가 악마의 모습으로 그 미소를 연출할 줄이야. 길드원들도 자신들의 보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디 페어츠베어플루흐가 금지된 실험을 하는 건 무료하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을 제 손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장난감과 놀기 위해서 하는 일시적인 오락에 부로가합니다. 그런데 유사 신족과 같은 자가, 그서도 순종이 멋대로 그를 저지하려 들면 키메라의 상징이자 자존심 자체인 펜타곤이 얼마나 불쾌해 하겠습니까? 그리고 펜타곤이 무차별 살생을 즐긴다지만 키메라를 직접 노린 적은 없습니다. 순종을 공격하는 중에 휘말린 키메라는 어쩔 수 없을 뿐. 펜타곤에게 키메라를 고의로 죽인다는 명령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시아는 하나씩 천천히 또박또박 알기 쉽게 설명했다. 글라셰 순종도 펜타곤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적어도 고의로 몰을 해치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죽이지는 않지만 괴롭힐 수는 있겠군요.”
“그래서 금지된 실험에 손을 뻗은 겁니다.”
“정말로 실험에 성공한다고 하면…… 전 대항할 수 없습니다. 턱없이 약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제 판단이 맞는다면 당신은 수십 명 분의 몫을 할 수 있습니다.”
몰은 말도 안 된다는, 자신 없다는 눈을 했다. 그에 비해 시아는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길드원 중 누구도 끼어들지 않았다. 보스를 동조하거나 반대하는 이가 한 명도 없었다. 보스가 일단 결정한 것은-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그들은 몰이 설득되기만을 기다렸다. 이 시점에서 보스를 제외한 선발대의 역할은 주변의 장식품과 다를 게 없었다. 각자 앞에 놓인 차를 마시며 그저 보스가 의도한대로 일이 끝나길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몰. 바르베리트-진 씨는 널 동료로 확보하면 이곳 얼음의 대지에 있는 유능한 인재 수 명을 같이 포섭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거야.”
“음……. 잘 모르겠습니다.”
몰은 눈을 내리깔았다. 정령계에서 막 벗어난 풋내기라서일까? 단순히 자기 방식과 달라서?
“염려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다른 길드원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맡은 일을 하면 되는 것이고, 일이 일어나면 널 통해 이곳에서 지원군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야. 아무래도 글라셰의 힘이 필요한 별난 일이겠지.”
필츠의 눈썰미는 과연 훌륭했다. 시아는 부정하지 않고 엷은 미소를 유지했다. 몰은 필츠와 시아를 번갈아 보면서 망설였다. 펜타곤이 손 댄 실험이 무엇인지 알기에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모우. 정령계에서 나가고 싶어서 키메라가 된 거잖아. 좀 더 넓은 곳으로 나가고 싶다며.”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 길드에 들어가는 게 좋을 거야. 이건 기회라고. 그리고 시아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데.”
이안과 메이가 몰의 등을 떠밀었다. 무스펠 실험이 이 대화의 집중 화제라는 것을 알면 그들도 망설일 것이다. 그러나 가디안스 측에서도, 몰도 그 단어는 절대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가디안스는 몰을 원하고 몰은 밖으로 나가길 원하니, 글라셰 순종 쪽에서 먼저 물어보기 전까지 절대 말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 당장 제가 필요한 건 아니죠?”
“네. 입단하자마자 임무를 맡기는 건 저희로써도 지양하는 일입니다. 아주 특수한 케이스가 아니고서야 훈련실 선입실(첫 임무를 배정받기 전에 훈련을 하는 것)은 필수입니다.”
키메라가 된지 이제 두 달 반이다. 길드 가디안스에서 제아무리 글라셰의 힘이 필요하고 체인급 이상의 키메라를 취급한다고 해도 경험과 기술이 부족한 신입 대원을 곧바로 전장에 보낼 수 없었다. 지원과 세나를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보스가 특별 수업을 할 정도로 철저하게 트레이닝을 한다. 물론 성장 속도가 빨라서 예외적으로 입단 후 단기간 만에 특별 부대에 배치되고 임무도 수행중이지만 훈련실 선입실을 피하지 못했다. 선발대가 얼음의 대지로 오기 전에 발굴한 슈퍼 루키, 크림슨 카마엘이 바로 훈련실 선입실에서 제외된 아주 특별한 케이스다.
“전 좀 더 판바이스 씨에게 검을 배우고 싶습니다.”
금세 체인급이 된 살라만더-글라셰 키메라는 강해지고픈 욕구가 보통 전사에 비해 몇 배나 컸다. 시아의 짐작으로는 50배 이상이었다. 과장된 숫자임이 당연하다. 허나, 이것은 시아가 그에게 건 기대나 마찬가지였다.
“일주일이면 되겠습니까?”
“네?”
“당신을 데리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니 기다리겠습니다.”
시아는 몰과 대화하면서 시선을 필츠에게 뒀다. ‘일주일 안에 만족할 만큼 가르쳐라.’ 그리고 ‘실로 대답한 주문이군.’의 서로 견제적인 눈빛이 오갔다.
“검술을 일주일 안에 마스터하는 건 무리입니다.”
“기본만 배우시면 됩니다. 자세와 기본소양이 갖춰지면 혼자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디 전투 기술과 실력은 자기 연마와 실전 경험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지 스승 밑에 오래 있는다 하여 느는 것이 아닙니다.”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한낱 하급 정령이 후작급 악마와 대등하게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됐다. 게다가 상대가 상대인 만큼 몰은 요구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할 수도 없었고 그것이 가능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가디안스의 가입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화 중간에 알아차렸다. 순수하게 보스의 눈에 들면 입단이요, 아니면 꽝이었다.
“이건 제안이 아니라 강제잖아.”
이안의 말투와 눈빛이 거칠었다. 시아에게서 풍기는 카리스마에서 압박감을 느끼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제 감정을 터뜨린 것이다. 만약 물리적으로나 약소한 마법으로 그녀를 위협했다면 10인의 진격 부대가 그를 향해 손톱을 세웠을 것이다. 소리를 지른 것만으로도 경계 대상 첫 번째로 찍혔으니 말이다.
“음……. 완곡한 표현입니다. 이왕이면 ‘납치’라고 해주시겠습니까?”
시아는 이안에게까지 사무형 말투를 사용했다. 이안이 느끼는 압박감이 한층 더 올라갔다.
“너희는 동료를 그런 식으로…….”
“이안. 조용히 해.”
메이가 웃지 않는 눈으로 이안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안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의자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본래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자리를 아주 피한 것이 아니었다. 메이의 발아래에 엎드려 조용히 기다렸다.
“메이. 이안을 다그치면 어떡해?”
“이안을 위해서야. 내가 끊지 않았으면 시아의 힘에 눌렸을 거야.”
꼬마 아가씨가 회색 눈에 진지함을 가득 채우자 귀염성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녀는 시아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았지만 압박감은 느꼈다. 긴장과 경계. 시아를 새로운 벗으로 생각한 이상 정체가 무엇이고 어떤 꿍꿍이를 갖고 있는지 따질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벗의 화만 일으키지 않으면 된다. 새로운 벗과 오래된 벗의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메이는 벗이 아닌 자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잔인하게 대하지만 벗에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벗에게는 터무니없이 마음이 약해지고 뭐든 양보했다. 시아가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도 싫고 이안이 시아에게 당하는 것도 싫었다.
“시아. 너희는 내 집에서 지내. 몰은 다른 사람한테 훈련 모습을 보이는 걸 꺼려하거든. 그리고 밖은 위험해. 또 내 집에 가면 따분하지 않을 거야.”
“흐음. 어차피 여기는 일주일 뒤에 다시 들를 생각이었어. 하지만 메이의 제안은 정중히 거절할게 이왕 태초의 땅에 있으니까 우리 아이들을 단련시키고 싶어.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도 괜찮고. 지금은 눈과 수정밖에 보이지 않지만 익숙해지면 다른 것들도 조금씩 눈에 보이겠지.”
“시아가 그렇게 원한다면 그렇게 해.”
“이런 이런. 전 일주일 안에 몰을 가르칠 자신이 없습니다. 제 의견은 듣지 않으시고 두 분이서 결정하시다니요.”
필츠는 하는 말에 비해 매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반강제적이지만 결정이 됐다. 아직 납득하지 못하는 이안을 빼고 전원이 결정에 동의했다.
“후-. 역시 아무 말 않고 기다리는 건 힘들어, 보스.”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리 생색내?”
“에-이.”
밀리엄이 기지개를 켠 후 탁자 위로 엎어졌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에 힘을 준 채 빳빳하게 앉아 있던 것도 아니면서 어깨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긴장 때문에 굳은 근육을 풀었다. 보스가 반드시 일을 성사시키리라 믿었지만, ‘필츠 판바이스’라는 강한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미지수라서 은근히 가슴 뛰었다.
“보스. 몰 코톤이 정식으로 가입하면 어느 부서에 넣으실 겁니까?”
쿼터 엘프가 진격 부대에 넣어달라는 의도로 시아를 찔렀다. 시아는 몰을 빤히 쳐다보면서 골똘히 생각했다. 이에 대해, 몰은 마른 침을 삼키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마주봤다.
“무소속도 괜찮지 않아?”
“명색이 스카우트한 길드원인데 무소속입니까?”
“드러난 실력이 아직 없으니까 4천왕이 보는 앞에서 정식 테스트를 해 봐야지. 그런데 진격 부대는 최근에 슈퍼 루키가 들어갔잖아.”
“이번 임무에 참가하다면서 출정 직전에 다른 일로 개인 출장 갔잖아요.”
“어쨌든 진격 부대인 건 맞잖아.”
크림슨과 금세 친해진 쿼터 엘프는 엉뚱한 방향에서 떼를 썼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는 라미아가 그녀의 볼을 길게 잡아 당겼다.
“야-.”
“보스를 곤란하게 하지 마.”
“감히 파충류 주제에 내 볼으-.”
“어머, 파충류가 추위 속에서 당당하게 돌아다니는 거 봤어? 하반신이 뱀이라도 파충류는 아니란다.”
쿼터 엘프의 심술 대상이 곧장 라미아로 바뀌었다. 쿼터 엘프가 라미아의 하반신을 걸고 계속 시비를 걸었다. 라미아는 당하기만 하지 않았다. 쿼터 엘프는 1/4만 엘프고 나머지는 인간인데, 어째서 오리지널이 인간이면서 플러스를 쿼터 엘프로 골랐는지, 효율성이 없는 거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둘 다 유치해.”
하프 실피드와 사이킥 엘프가 동시에 빈정거렸다.
“바르베리트-진 씨의 일행은 역시 즐거운 분들입니다.”
“그런가요?”
평소에도 이런 일이 수시로 일어나는 터라 시아는 능숙하게 무시했다. 필츠는 아옹다옹 싸우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 사이에 메이는 이안을 데리고 소파로 가더니 토끼로 변하여 이안과 나란히 누웠다. 수면 본능을 충실히 따라 깊은 잠을 청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밤이었다.
“오늘은 여기서 머무시죠.”
필츠는 긴 옷을 조심스럽게 끌며 두 동물에게 다가가, 어디서 가져왔는지 벌써 손에 들려있는 모포를 덮어줬다. 둘 다 따뜻한 털을 가졌다고 감기에 걸리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얼음의 대지가 기온이 매우 낮아서 질병유발형 바이러스가 생존할 수 없지만 사소한 실수로 단기 감기 정도는 걸릴 수 있었다.
“재워주시면 감사하죠.”
“손님방으로 모시겠습니다.”
가디안스의 선발대는 필츠를 뒤따라갔다. 따라가다 보니 의외로 이 공간이 넓다는 것을 알았다. 드래곤 레어처럼 1인 1공간 같은데, 역시 드래곤 레어처럼 활용 가능한 공간이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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