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마녀가 잔뜩 부은 얼굴로 장미 마녀를 찾아갔다. 장미 마녀는 아직 무스펠 실험을 10%도 진척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지루할 법도 하건만, 긴 수명을 누리는 그녀에게 그 정도 수고는 시간 대우기에 최적이었다. 그리고 경쟁을 워낙 좋아하는 터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즐겼다. 이렇게 한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에 몰두하며 혼자 즐거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의 방해를 받으면 상당히 불쾌하기 마련이다. 플루는 페라이의 방문이 전혀 반갑지 않았다.
“플루. 우리의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어.”
페라이는 시아에게서 곧장 플루를 찾아갔다.
“살아 있는 건 언젠가 죽어. 그것이 자연의 섭리야.”
“살해당하는 것도 섭리야?”
“대자연이 그들의 생존을 원하지 않기에 운명에 따라 살해되는 거야.”
“어쩜 그렇게 냉정할 수 있어?”
“우리가 이걸 빌미로 순종들을 무차별 학살했잖아.”
플루는 페라이에게 절대 다정한 한 마디를 해주지 않았다. 장미 마녀는 이름(본명)에서 알 수 있듯이 ‘절망’ 그 자체다. 페라이(좌절)가 이미 겪은 후 느끼는 고통이라면, 플루는 겪기 전부터 느끼는 고통. 희망을 갖고 나서기 전부터 꺾이는 괴로움이다. 남에게 다정할 여지가 없다. 그녀는 이 본성에 충실했다.
“동포가 무참히 죽어 가는데, 능욕을 당하면서 불쌍하게 죽어 가는데, 그걸 대자연의 섭리라는 이유로 방관할 수 있어?”
“동-포-? 핫. 웃기지도 않는군. 디 페라이더루흐. 긴 잠을 자고 나더니 자신의 본질을 잊은 모양이지?”
디 페어츠베어플루흐라는 긴 이름의 슈튀크는 부지런히 놀리던 손을 멈추고, 칭얼거리는 슈튀크를 비웃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다가가 오른손으로 그녀의 왼뺨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페라이는 등골이 오싹했다.
“키메라에게 ‘동포’가 있을 수 있던가? 각기 다른 종족이 뒤섞인 잡종에게, 순종에게만 해당하는 ‘동포’라는 단어가 허락되던가? 대자연이 뒤틀리면서 태어난 우리는 그저 돌연변이 괴물이야. 괴물에게 동포라니.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핏줄’이 우리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던가? 소수 잡종이 서로를 측은해 하고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망정, 동포라니. 말도 안 돼. 말이 될 리가 없지.”
볼을 천천히 쓰다듬는 손과 아랫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눈. 페라이는 제대로 치욕스러웠다. 플루의 말이 틀린 것이 아니건만, 그 말이며 자신을 대하는 태도며 전부 불쾌했다. 플루가 펜타곤의 대장격이기에 참았다. 그녀 혼자서는 플루를 이길 수 없기에 인내했다.
장미 마녀는 거울 마녀의 뺨을 요염한 손놀림으로 좀 더 간질이더니, 차가운 눈동자로 마주보고 있는 두 눈동자를 깊게 응시하면서 손의 움직임을 멈췄다. 거울 마녀는 영문을 몰라, 잔뜩 상기된 얼굴과 부자연스럽게 굳은 몸으로 장미 마녀가 다음 모션을 취하길 기다렸다. 심장을 얼려버릴 것만 같은 차가운 시선은 같은 펜타곤이더라도 견디기 힘들었다. 곁에 그 눈을 가려줄 제 3자가 없으니 1초도 빼먹지 않고 눈에서 읽을 수 있는 한기를 만끽해야 했다. 장미 마녀는 그렇게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거울 마녀를 고문할 수 있었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즐거운 실험을 방해한 값으로 충분히 계산할 수 있었다. 그녀는 거울 마녀가 다리에 힘이 풀려 제 몸 하나 못 가눌 즈음에 차디찬 시선을 거뒀다. 그리고 자신의 실험대로 몸을 돌렸다.
“플루, 키메라를 학살하는 녀석들이 너의 사랑스러운 장난감도 괴롭힌단 말이야. 스피의 장난감 병정 주제에 건방지다고.”
자신의 정신을 유지한 거울 마녀 페라이는 포기하지 않고 장미 마녀 플루에게 매달렸다. 플루에게 어떤 무관심한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실컷 바보취급을 당하더라도 플루가 직접 움직이도록 설득하고 싶었다.
“다스 트라우어스필의 장난감 병정이 내 장난감을 괴롭힌다고? 아, 그 에덴 길드인가 뭔가 하는 병정단(兵丁團)말이지?”
플루는 헬의 나흐폴게르가 쓴 책을 곁눈질로 보면서 삼각 플라스크에 담겨 있는 투명한 액체를 500cc짜리 비커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비커 안에는 푸딩처럼 생긴 연한 분홍색의 물체가 들어있었다. 투명한 액체가 연분홍 젤리에 스며들어가자 젤리가 짙은 감색으로 변했다.
“요즘엔 순종도 그 안에 섞여 있다던데 진짜야?”
실험에 눈과 손을 집중하면서 입과 귀는 페라이를 향했다. 페라이는, 일단 자신이 원하는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분한 심정을 십분 토로했다. 길드 에덴에서 진행 중인 키메라 변조 실험이며 그 여파 피해를, 그녀가 보고 들은 것 전부 빠짐없이 전달했다. 플루는 페라이가 실컷 떠드는 동안 묵묵히 약을 섞고 결과를 관찰하는 등, 실험에 모든 정신을 쏟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반응만 없었을 뿐 똑똑히 다 듣고 있었다.
“어차피 다스 트라우어스필이 싫증나서 버린 장난감이잖아. 네가 직접 없애도 되는데 왜 굳이 나한테 말하는 거야?”
“스피가 버려?”
“보스가 순종이 되는 순간, 이미 애저녁에 버렸다는 뜻이잖아. ‘자신의 것’에 집착이 심한 녀석이, 자신이 만든 병정단에서 순종이 대장 노릇을 하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까? 깨끗하게 버린 거야.”
“듣고 보니 그러네.”
페라이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봤다. 몇 번 씩이나 길드 에덴의 아지트에 찾아갔었는데 스피의 기척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고, 키메라가 뒤섞인 괴물 살덩어리가 사고를 치는 현장에서도 스피의 낌새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것보다, 최근에 스피와 만난 적이 없었다.
“우리의 피에로 나으리는 네가 호들갑떠는 그 사건 자체를 모르지 않을까?”
“워낙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녀석이니까. ……. 그러면 뒷정리를 확실하게 했어야지. 무리를 가만히 방치하면 어쩌자는 거야? 애꿎은 키메라들이 추하게 죽어가고 있잖아.”
거울 마녀는 그 자리에 없는 피에로를 향해, 화 가까스로 억제하면서, 분한 감정을 아슬아슬하게 드러냈다. 아무리 감정에 충실한 펜타곤이라지만, 플루가 눈앞에 있는 탓에 과감하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상대가 간다르바 순종이면 내 장난감이라도 고생 좀 하겠어. 절대 키메라인 우리도 사태가 복잡해지고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봐 유사 신족 이상의 종족은 안 건드리잖아. 한다면 얼마든지 실력 발휘 할 수 있지만 유사 신족 이상을 손댔다간 자연계 질서가 무너질 수 있으니 말이야.”
장미 마녀는, 언뜻 보면 새초롬해 보이는 무표정이었다. 증류수를 삼각 플라스크에 반 정도 담아, 병목을 살며시 잡고서 슬슬 흔들어 내부를 헹궜다. 소형 둥근 플라스크와 대형 비커도 같은 방법으로 약품으로 오염된 내부 벽을 씻어냈다. 그러던 중에 주석판 위에 올려둔 짙은 감색 젤리가 녹아내렸다. 주석판과 닿은 부분부터 산화 환원 반응을 일으키며 푸른색으로 변하고 있었는데, 전체가 변할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무너졌다. 게다가 무너진 표면적으로 약품이 승화하면서 쓸모없는 물체로 바뀌어버렸다.
“아까워라. 이번엔 될 줄 알았는데.”
변질된 실패물이 꼬물꼬물 움직이는가 싶더니 안에서 장미 가시덩굴이 하나 둘 솟아나왔다. 가시덩굴끼리 실패물을 이리저리 뚫고 다니면서 서로 얽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실패물이 사라졌다. 완전히 제거한 후 자신의 임무를 마친 가느다란 소형 가시덩굴은, 검푸른 불꽃에 감싸여 순식간에 깨끗하게 소멸됐다.
“뭐, 내 장난감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데, 이왕이면 네 말을 거절했으면 좋겠어. 내가 아닌 다른 자가 내 장난감을 망가트리는 건 마음에 안 들거든.”
“진 시아는 강하잖아. 충분히 간다르바를 이길 수 있어.”
“그래도 싫어. 나처럼 깔끔하게 이기지는 못하잖아. 분명 부상을 당하거나 상처가 생길 거야. 내 장난감이 망가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너도 안 도와주고, 네 장난감이 망가지는 게 싫다는 건, 내 멋대로 길드 에덴을 뒤짚어도 된다는 얘기야?”
“항상 그래왔잖아.”
플루는 새삼스럽게 뭔 소리냐며 페라이를 흘겨봤다. 그런데 페라이는 길드 에덴과 접촉하는 것 자체에서 거부감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진짜 박살내고 싶은 것은 길드 에덴의 수장, 간다르바 순종 벡터스 뿐이었다. 첫눈에 그가 마음에 안 들었으며, 지금은 근처에서 그의 낌새가 느껴지는 것도 싫을 만큼 그가 거슬렸다. 자신의 손으로 처치하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가까이 있는 것조차 꺼림칙해서 일부러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답지 않게 쓸데없이 과민반응을 보이네.”
대놓고 오만상을 쓰고 있으니 플루가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난 유사 신족이 싫어.”
“나도 싫어.”
플루는 일관성 있는, 새초롬한 것 같은 무표정으로 페라이를 상대했다. 대답할 가치가 적은 말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페라이는 입을 최대한 삐죽 내밀고, 오른발로 바닥을 쿵쿵 내리쳤다.
“벡터스가 계속 자기 세력을 넓히면서, 키메라 말살 계획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단 말이야. 우리 펜타곤에게까지 덤벼들걸?”
페라이는 몸서리를 치면서 적의 이름을 한 번 더 입에 담았다. 그를 생각하기만 해도, 이름을 언급하기만 해도 몸에서 거부 반응이 과하게 일어났다. 플루는 대놓고 싫은 티를 잔뜩 내는 페라이를 깊게 응시했다. 에메랄드빛의 황홀한 광채가 탁하게 보일 만큼, 불온한 분위기가 페라이의 겉을 휘감싼 것 같았다. 살기와 적의감이 그 불온한 분위기의 기본 요소임에는 틀림없었다.
“키메라가 마구잡이로 죽인다고 해서 멸망할 종족이야? 자연에서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종족이나 멸하지, 키메라는 아니잖아. 어떻게든 창조되는 후천적인 종족이야. 어디, 다 죽여보라고 해. 키메라를 이 세상에서 완전 제거하는 일은 그 누구도 못 해.”
장미 마녀는 팔짱을 끼고 실험대 위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며 기대섰다. 그녀는 간다르바 벡터스의 만행보다 거울 마녀의 민감한 반응이 좀 더 신경 쓰였다. 무관심을 고수하며 모르는 척 해도 되겠지만 페라이의 이런 언행은 실로 오랜만이라서 그냥 지나치기 아까웠다.
펜타곤이 천 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잠들기 전, 페라이가 지금처럼 누구 한 명을 극도로 거부한 바 있었다. 그 때의 상대는 분명 신 아수라였다. 페라이가 아수라의 구애를 몇 번이나 거절하면서, 페라이를 향한 아수라의 감정이 점점 비틀렸다. 결국 신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페라이에게 전에 없던 고통을 실컷 퍼부었다. 그렇게 감정이 타락한 아수라는 페라이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수없이 남기고서 다른 신들의 힘으로 이 세상에서 격리 당했다. 아수라를 페라이에게서 떼어낼 때는 슈튀크 ‘데어 토드’의 힘이 컸다. 개인플레이가 주를 이루는 펜타곤이 각기 다른 슈튀크를 돕는 일이 거의 없지만, 당시 아수라와 페라이의 일은 페라이의 존부가 걸린 문제라서, 페라이와 가까이 지내던 토드가 친히 나선 것이었다. 여하튼, 페라이는 아수라와의 일 때문에 생긴 심신의 상처를, 긴 시간 허무의 공간에 혼자 머물며 천천히 잊었다.
“아수라 때의 일이 반복되는 건가?”
플루는 일부러 크게 중얼거렸다. 이에 페라이는 흠칫 놀랐다, 척추를 중심으로, 등 근육이 긴장하고 머리카락이 쭈뼛 올라서는 불쾌한 기분이 전신의 신경을 찌릿찌릿 자극했다.
“순종이 키메라를 간섭할 수 없다는 법칙을 어겼으니 본때를 보여줘야 마땅하지만, 그 원인이 너한테 있다면 네가 책임지고 해결해야 해.”
굴곡이 없는 평범한 목소리지만 거역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페라이는 플루에게 끝까지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이 한 마디가, 펜타곤의 대장이 내리는 명령에 한없이 가까웠다. 본디 펜타곤이 각각 동등한 존재라지만 플루 만큼은 우위에 위치했다. 페라이는 그 정상에게 굴복하고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조금도 도와줄 수 없어? 간다르바 순종이 하는 짓은 우리들의 단죄의 대상이잖아.”
“네가 그를 기분 나쁘게 해서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유도했다면, 네가 우선 최선을 다해서 그의 악행을 끊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 낯짝 두껍게 여기저기 부탁하지 마.”
“내가 유도한 게 아니야. 그는 처음부터 키메라를 학살하고 있었어. 난 그에게 순종 주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말하러 갔을 뿐인데, 하필 보자마자 역겨운 대접을 받았다고. 정말 불쾌해. 자기 뜻대로 하지 않으면 키메라들을 더 고통스럽게 죽이겠다니. 지금도 충분히 잔인하잖아. 진심으로 그를 죽이고 싶어. 그런데 근처에 있기만 해도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
페라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아수라에게 고문을 당하던 때가 떠오른 것이다. 몸이 머리보다 먼저 떠올리고 곧바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트라우마가 뿌리 깊었다. 긴 수면을 마친 지금까지도 온전히 기억했다.
플루는 페라이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지도 않았고 위로의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과거와 현재의 오버랩으로 정신적 궁지에 몰린 모습을 보면서, 그녀에게 전해들은 현 상태를 다시 떠올려봤다. 펜타곤이 끼어들 만큼 가치 있고 흥미로운 일인가. 상대가 유사 신족 순종이라는 시점에서 이미 지루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펜타곤이 세상에 쉬이 드러나면, 외부 모두가 기억하는 펜타곤의 이미지가 많이 변할 지도 모른다. 유사 신족과 대등하다시피 한데, 평범한 키메라로 전락할 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녀는 더욱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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