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보석전쟁록

한 달 간의 보석전쟁록 : D-30 전장으로 돌아온 보석

★은하수★ 2010. 8. 10. 18:10

D-30 전장으로 돌아온 보석

 

정령을 포획하고 사육하며, ‘보석’을 무기로 사용하는 세계, 트라움 폰 눌(Traum von Null). 대소국가를 다 합쳐 84개 국가가 트라움 폰 눌을 구성하고 있다. 그 중, 대세력 중 하나로 꼽히는 나라가 있었으니, 트루마이어 왕조가 이끄는 클라마 왕국이다. 강대국과 약소국을 가르는 가장 큰 기준은 상주하고 있는 쥬엘 나이트의 수이며, 그 다음이 보석의 채석량인데, 클라마 왕국은 이 두 가지가 모두 톱10 안에 들어간다. 정치의 유연함이나 사회적 안정성은 가까스로 중간을 유지하지만, 국력과 직접적 연관성이 적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위에서 슬쩍 언급한 ‘쥬엘 나이트’는 ‘보석’을 무기로 구현화 할 수 있는 능력자로서, 세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다. 태어날 때부터 손에 쥐고 있는 보석을 그 자의 ‘탄생 보석’이라 부르고, 어미의 자궁 속에서 같이 자란 정령이 ‘탄생정령’이다.

탄생정령은 모두 하급으로 태어나 주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성장한다. 정령은 모두 주인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한 명의 주인 밖에 섬길 수 없지만, 쥬엘 나이트나 정령사 등 정령을 부릴 수 있는 자들은 여러 명의 정령을 소유할 수 있다. 자연에서 태어난 정령과 주종계약을 맺는 것이다. 그러나 소유한 정령이 많을수록 그들의 주인이 유능한 것은 아니다. 되레 소수의 정령을 정령왕 급까지 키우는 것이야 말로 정령을 가진 자의 이상향이다.

쥬엘 나이트는 세계의 축복을 받고, 탄생정령을 갖고 태어난 만큼, 정령사보다 자연 친화력이 월등히 높다. 그러나 소유 정령만 가지고는 정령의 주인의 정체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보석을 다루는 쪽을 쥬엘 나이트, 그러지 못한 쪽을 정령사라고 편의상 구별한다. 실은, 쥬엘 나이트와 정령사가 정령을 다루는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나,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석이라고 해서 전부 무기로 변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쥬엘 나이트와 동조하여 안에 무기의 축소판이 형성되어야 가치 있는 ‘보석’이라고 불린다. 무기가 될 수 없으면 그저 색이 예쁘고 빛 속에서 반짝 거리는 ‘돌’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쥬엘 나이트와 동조하여 ‘보석’의 가치가 결정된다지만, 동조 시 보석 안에 생기는 무기는 순전히 부석의 속성이나 보석이 채석된 곳에 따라 랜덤하게 결정된다. ‘보석’과 처음 동조하는 쥬엘 나이트와는 무관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쥬엘 나이트 중에, 돈과 명예가 보장되는 기사직을 포기하고 보석 감정사로 전향하여 다른 쥬엘 나이트를 위해 능력을 사용하는 자들도 있다. 이 ‘보석 감정사’를 구체적으로 ‘쥬엘 나이트만을 위한 무기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덧붙여 이들의 수는 한 국가에 한 명 있을까 말까할 만큼 굉장히 적다. 보석 감정이 상상 이상으로 중노동이고, 기사의 명예와는 아주 먼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주변 국가에 비해 쥬엘 나이트의 수가 많아서 축복 받은 나라 중 하나가 된 클라마 왕국. 이곳에 상식을 초월하는 실력가들도 많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쥬엘 나이트는 왕실에서 국가 차원으로 특별 대우한다. 전 국민의 본보기로서 손색이 없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국사(國師)’라고 부르며, 통틀어서는, 기존엔 ‘듀엣’이었고 지금은 ‘트리오’다.

클라마 왕국의 두 명의 국사, 헤르겔 다르케스와 잭 세스턴 홀은 언급한 순서대로 국사가 됐다. 둘은 통틀어 ‘듀엣’이라 불렀다. 그러던 중 10년 전, 동부 귀족 연합 세력이 왕가에 반기를 들어 독립 전쟁을 일으켰다. 2년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 눈에 띄는 인재가 몇몇 있었는데, 잭 세스턴 홀의 유일한 제자인 리벤 스피어가 누구보다도 출중했다. 종전 후, 그녀가 새로운 ‘국사’가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9세. 그녀를 만나 본 모두가 두려워하는 ‘푸른 사신’은 20세도 채 되기 전에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이 됐다. 그리하여 클라마 왕국의 국사는 세 명이 됐고, 통칭 ‘트리오’로 새로 정립됐다.

리벤 스피어는 국사가 되자마자 테스탈로차 포르포냐와 결혼하여 ‘리벤 포르포냐’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리고 8년 동안, 포르포냐 가문이 대대로 잠적한 페리아 숲에서 외부와의 연력을 끊고 조용히 살았다. 샤샤와 네리라는 남녀 쌍둥이를 낳아 기르고, 2년 전에는 남편 테스탈로차를 잃었다. 그래도 그녀는 ‘푸른 사신 리벤 스피어’가 아닌 ‘페리아 숲의 리벤 포르포냐’로서 은둔생활을 계속했다.

 

전쟁의 후유증이 가라앉은 지 얼마나 됐다고, 트루마이어 왕조에서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동부 독립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왕가의 핏줄을 두고 이래저래 시끄러웠지만, 언제나 레이먼드 제 1왕자의 고개 숙이기로 어물쩍 넘어갔다. 그런데 그렇게 상냥하고 온화하던 그가 직접 불화를 일으키고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아직 왕가 내에서만 긴장하고 있고 백작 이하 귀족부터 일반 백성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다. 그런데 페리아 숲에 있는 국사가 이 사정을 어찌 알겠는가. 그녀는 오로지 육아와 자기계발에 열중했다.

[따악 따악 탁 탁 딱 따악 탁 딱 탁 탁]

점심 식사 후, 지면의 열기가 가장 뜨거운 시각에, 리벤과 샤샤 모자는 목검을 들고 앞마당에서 대련 연습을 했다. 7살짜리 작은 소년이 성인을 상대로 수련 한다는 것 자체가 고된 일이었다.

“샤샤. 오른쪽이 비었잖아.”

‘꼬마’ 아들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아카데미 중급반 실기에 맞먹을 만큼 훈련 강도가 강했다. 그리고 초급반에서나 가르치는 ‘상황에 맞는 공격법과 방어법’은, 샤샤가 몸으로 깨우칠 수 있도록 유도하기만 했다. 절대 상냥하지 않은 가르침이지만 샤샤는 끈기 있게 리벤의 수업을 버텼다.

“평범하게 태어난 자가 쥬엘 나이트를 뛰어넘는 기사가 되려면, 쥬엘 나이트보다 몇 배로 더 단련하고, 몇 갑절 더 ‘기사’에 집착해야 한다. ‘적당히’는 자신을 갉아 먹는 기생충이야.”

리벤은 샤샤를 상대하면서 매일 하는 이 말은, 이번에도 똑같이 읊었다. 잭 아래에서 수련하던 과거에 스스로에게 한 다짐을 조금 변형한 것이었다.

샤샤는 평범한 소년이다. 테스탈로차의 새카만 머리칼과 리벤의 코발트 색 머리칼을 반반씩 섞은 듯한 어두운 청색 머리칼과, 그 색을 고스란히 머금은 눈동자가 뽀얀 피부와 함께 앙증맞으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7살치고 키가 조금 작아서 인형 같은 느낌도 난다. 그와 꼭 닮은 쌍둥이 여동생, 네리와 나란히 있으면 아주 진경이다.

포르포냐 쌍둥이는 7분의 시간차를 둔 이란성 쌍둥이로, 먼저 태어난 샤샤는 평범하지만 네리는 세계의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샤샤가 왕궁 기사가 되기를 원하고, 네리는 죽은 테스탈로차의 뒤를 이어 약제사가 되기를 희망했다. 리벤은 아이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네리가 쥬엘 나이트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어차피 외부와 연락을 끊어서 상관없지만), 샤샤를 쥬엘 나이트에 뒤지지 않는 기사로 키우기 위해 매일 단련시켰다.

“상대를 똑바로 쳐다봐야지. 반사 신경 못지않게 동체 시력도 중요해.”

[탁 탁 따악 따악 탁 탁 탁 딱]

리벤은 샤샤가 전신의 근육을 모두 사용하고 여러 가지 자세를 취할 수 있게 곳곳을 노렸다. 샤샤가 몸을 비틀거나 목검을 휘두르는 시간을 감안해서 공격을 넣었기 때문에, 샤샤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와 위력으로 리벤의 검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받아낼 수 있었다. 그래도 마 홉마다 최대 역량을 발휘해야 해서, 한창 성장기인 샤샤는 시작 후 2, 30분이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되고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도록 지쳤다.

“잠깐 쉬자.”

근육과 뼈가 연한 어린 아이가 한계를 넘어 수련하면 금방 부상을 입고 성장에 장애가 생길 수 있다. 리벤은 제 아들의 상태와 이상 징조를 금방 알아챌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선을 그었다.

“둘 다 수고했어.”

빛의 정령 윌-오-더-위스프(이하 ‘윌’)가 리벤과 샤샤에게 물통을 하나씩 건네줬다. 이름을 보고 알아챈 이도 있겠으나, 그녀는 키가 1m 될락 말락한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엄연히 상급정령이다. 덧붙여, 라피스라줄리를 매개로 리벤과 같은 모체에서 태어난 리벤의 탄생정령이다.

[콰앙!]

“쉴 겨를이 없네.”

리벤은 서둘러 폭발음이 난 곳으로 달려갔다. 샤샤와 윌이 그 뒤를 따랐다.

그들이 다다른 곳은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실험실이었다. 테스탈로차 사후, 네리를 위해 리벤이 만들어 줬다. 그곳은 네리가 직접 모은 약재와 다양한 비율로 만든 시료로 가득하다. 가연성 물질이 많으면서, 네리가 워낙 이것저것 실험해 보는 탓에 크고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콜록콜록, 콜록콜록, 콜록!”

네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짙은 갈색 연기가 뒤따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네리. 다시는 L시료랑 Q시료를 섞지 마요.”

“응. 그래야겠어요.”

네리의 탄생정령, 바람의 하급정령 실피드가 어느새 네리의 옆에 다가와서 같이 숨을 헐떡였다. 그녀도 폭발에 휘말리는 바람에 실험실 환기는 잠시 뒷전이 됐다. 연기의 농도가 짙고 냄새도 심하게 고약해서 연기를 빼내는 일이 꽤 곤욕일 것이다.

“오늘 만든 연기는 아주 특이하네요.”

“연기가 아니라 약을 만든 거예요.”

네리는 들이 마신 연기를 내뱉는 중에도 자신에게 걸어온 말은 전부 대답했다. 샤샤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연기의 악취를 참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줬다. 그녀는 실험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데려가면 좋으련만, 그녀가 폭발 때문에 놀란 나머지 다리의 힘이 풀려 더 이상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던 중 네리가 실험실을 향해 고개를 잽싸게 돌렸다.

“큰일이다!”

“왜요?”

“B시료 뚜껑을 열어놨었는데……. 연기 때문에 시료가 엉망이 됐을 거예요. 그거 만들기 힘든 거라고요.”

“이런…….”

샤샤도 같이 난처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리가 실험실을 정리하고 부족분을 채워 넣기 위해 부랴부랴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네리는 2년 전에 타계한 아버지와 성격이 똑같아서, 복구를 끝낼 때까지 잠을 건너뛰며 무리할 것이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뭐든 할게요. 손이 많을수록 빨리 끝나잖아요.”

“으음……. 도와줘요.”

네리는 아직 연기가 가득한 실험실을 흘긋 보더니 과하게 울상을 지었다. 실험실 청소에 오염된 시약 처리며, 새 시약 보충 등 하루 이틀 사이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나도 도우마. 뭐니 뭐니 해도 네리가 안 다쳐서 다행이야.”

리벤은 딸과 마주보며 쭈그려 앉은 후에 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네리는 눈을 내리 깔고 가만히 있다가 리벤의 품으로 폭 뛰어들었다. 실험에 실패해서 분하기도 하고, 어머니와 샤샤에게 거정을 끼쳐 미안하기도 하고, 탁한 연기 속에 갇힌 순간이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이 복잡하게 섞인 감정을 리벤의 따뜻한 체온 속에서 천천히 풀었다.

“지붕이 안 날아간 것도 다행이에요.”

샤샤가 생긋 웃었다. 리벤은 멋쩍게 웃으며 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기억하는 거야?”

“네. 무지 큰 사건이었는걸요.”

아직 쌍둥이들이 잔디밭을 뒹굴며 노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던 시절, 테스탈로차가 집 안에 있는 그의 실험실에서 약 배합 실험을 하다가 폭발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가 시약끼리 섞어놓고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데, 급격하게 성질이 변형된 시약 혼합물이 중화제를 기다리지 못하고 에너지를 한꺼번에 방출한 것이다. 얼마나 파괴력이 컸는지, 집 지붕이 날아가 버렸다.

“폭발 소리를, 듣자마자, 전, 전속력으로, 달려, 왔는데, 휴-. 무슨 일이지? 리벤 스피… 아니, 포르포냐.”

말쑥하게 차려입고 귀티 나는 청년이 숨을 헐떡이며 나타났다. 포르포냐 가의 은거지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리벤은 그 얼굴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테스탈로차를 따라 페리아 숲에 들어오기 전에 작별인사를 나눈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굳이 정체를 밝히자면, 클라마 왕국의 제 2왕자면서 왕위계승서열 1위인 ‘에드워드 포비아 트루마이어’다.

쌍둥이들은 숲 밖의 사람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어서 에드워드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어머니의 이름을 알고 있고 지인들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니, 위험인물은 아닐 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리벤은 에드워드를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왕족이나 귀족이 쥬엘 나이트를 찾는 경우, 특히 왕족이 국사-트리오-를 찾을 때는 절대 좋은 일이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8년 만에 만났다고 반가워 할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가 아니었다. 도리어 앙금이 가볍게 쌓인 상대였다.

“윌, 저거 쫓아내.”

리벤은 급히 정색한 얼굴로 정령에게 명령했다. 마찬가지로 에드워드에게 좋은 감정이 그다지 없는 윌은 계약자의 명령을 신속하게 실행했다.

[훅]

정령이 물리 공격을 할 수 없다? 빛의 정령은 치유계다? 정령을 포획하고 사육할 수 있는 트라움 폰 눌에서 원소 속성 이외의 한계는 없다. 정령이라도 물리 공격, 마법 공격을 골고루 구사할 수 있고, 자신의 속성을 이용하는 마법이면 공격계건 방어계건 기타 어떤 부류건 익히는 대로 쓸 수 있다. 보석이 없으면 마법을 쓸 수 없는 인간을 대신하여 세계에 구현되는 마법을 쓰는 존재가 바로 정령인 것이다. 참고로 저주술, 강령술, 사령술 등은 주술식을 따르는 ‘술법’이지 마법이 아니다.

[휙- 훅 훅]

윌은 에드워드를 향해 발과 주먹을 쉼 없이 내질렀다. 조그만 체구의 소녀라도 공기를 갈라 바람을 일으키는 공격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에드워드는 자신의 정령을 부르지 않고 열심히 공격을 피했다. 싸움의 철칙 중 하나가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했던가. 에드워드는 윌의 공격을 피하면서 시선을 리벤에게 두는 바람에 다리가 꼬여 몸을 휘청거렸다.

“앗.”

[덥썩]

[털썩]

에드워드가 넘어질 무렵, 불의 상급정령 파이어 드래이크가 붙잡은 쪽은 윌이었다. 다행히 에드워드는 윌의 휘돌려 차기를 피할 수 있었지만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오랜만이야, 윌-오-더-위스프.”

길고 두꺼운 손톱으로 윌을 막은 거대한 화룡은, 점점 작아지면서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했다. 붉은 빛이 도는 금색 눈동자와 불이 나들어가는 듯한 새빨간 머리칼이 눈에 확 띄었다.

“건방진 이프리트……. 언제 파이어 드래이크로 컸냐?”

“작년쯤?”

“쳇. 멍청한 왕자가 그제서야 다르케스의 제자 몫을 한 거야? 한심하군.”

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재수 없는 목소리로 최대한 비아냥거렸다. 이 말이 비수가 되어 에드워드의 가슴에 사정없이 꽂혀들었다. 그는 일어서는 도중에 멈칫 거리더니 세상 다 산 눈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봐, 별 볼일 없는 이프리트였던 파이어 드래이크. 네 놈의 한심한 계약자를 데리고 썩 꺼져.”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이쪽은 일 없어.”

“와- 매정하다.”

“너희에게 베풀 친절 따위, 일찌감치 없어.”

윌은 자신의 몸을 빛의 입자로 분해하여 파이어 드래이크의 손에서 빠져나와 그의 등 뒤에서 다시 형상을 구축했다. 속성이 속성인 만큼, 눈으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였다. 윌 자신에게는 몇 단계에 걸친 복잡한 과정이었지만, 타인에게는 눈 깜짝 할 사이에 이루어진 순간이동이었다.

“저-기-. 리벤 포르포냐 씨. 스승님의 심부름으로 온 겁니다만.”

정령들끼리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에드워드가 멀리 있는 리벤에게 말을 붙였다. 리벤은 제 2왕자의 입에서 나온 인물이 국왕이 아니고 트리오 중 한 명이라서 귀를 움찔 거리며 반응을 보였다. 둘 사이를 가로 막으려던 윌도 한 발짝 떼다 말았다.

“헤르겔 다르케스, 그 노친네가?”

리벤과 윌이 상당히 아니꼽다는 식으로 표정을 확 지푸린 다음에 합창했다.

“스승님도 그다지 평이 좋지 않구나.”

“나잇값 못하고 여자와 술과 방탕을 사랑하는 사람이잖아. 내가 봐도 부끄러운 어르신이야.”

에드워드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헤르겔 다르케스. 트리오 중 한 명이자 나이 70이 훌쩍 넘은 최고령자다. 은거 생활을 하는 다른 국사들과는 다르게 왕궁에 거처하며 국왕을 보좌하고 제자를 키우고 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기사가 쥬엘 나이트를 포함하여 약 100명. 에드워드도 그 중 한 명이다. 헤르겔은 세계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으니 ‘무(武)’에 통달한 것은 당연지사요, 긴 세월을 살면서 수많은 지식과 학문을 접했으니 ‘문(文)’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렇기에 국사로 발탁된 것이지만, 현재 국왕이 왕자이던 시절부터 지금 왕자·공주들까지 가르치는 왕실 교사도 겸하고 있다. 다만, 에드워드의 말대로 쾌락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해서, 평판이 오르락내리락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표정의 변화가 적고 과묵한 잭 세스턴 홀과는 다른 의미로 속내를 알기 힘든 인물이다.

언제까지 스승을 부끄러워하며 작아질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리벤을 똑바로 쳐다봤다. 리벤은 쌍둥이를 등 뒤에 세워두고 에드워드를 불신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푸른 사신’의 서슬 퍼런 눈동자에 살기까지 고일 것 같았다.

“반역 무리 때문에 나라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어. 트리오의 힘이 필요해. 힘을 빌려줬으면 해.”

“어디서 유행 지난 시시껄렁한 대사를 지껄여?”

“촌스러, 촌스러.”

리벤이 토스를 올리자마자 윌이 혀를 비죽 내밀며 스파이크를 갈겼다. 에드워드는 정통으로 공격을 맞고 슬슬 도화선에 불이 당겨졌다.

“어떻게 말하면 얘기를 들어줄 건데?”

리벤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다가 왼팔을 옆으로 쭉 뻗어 나무 한 그루를 가리켰다.

“저 위에 올라가서 ‘나는 머저리다’라고 외친 다음에 공중 3회전 하면서 내려와.”

“하겠냐?”

“그럼 됐어.”

“리벤 스피어.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야.”

에드워드는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입에 익숙한 옛 이름으로 그녀를 부르고 말았다. 하지만 리벤은 결혼 직후 8년 만에 만났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머니의 예전 성이 ‘스피어’였었죠?”

“분명 ‘스피어’였을 거예요.”

“그러면 저 사람은 예전의 어머니를 아는 사람인가봐요.”

“핀 아저씨 같은 사람일지도 몰라요.”

샤샤와 네리는 리벤의 등 뒤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속닥거렸다. 쌍둥이는 실피드가 얇게 만든 바람의 장막 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가 에드워드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만약 에드워드가 이 대화를 들었다면 펄쩍 뛰며 놀랐을 것이다. 3년 넘게 행방불명인 그의 이름이 어린 아이들에게 언급되리라곤 상상도 못할 것이다.

“당연히 장난할 대가 아니겠지. 나와 나의 스승님을 그 노친네가 찾고 있다며. 10년 전하고 맞먹는 일이 아닌 이상, 천하의 귀공을 심부름꾼으로 쓰면서까지, 무리일 게 뻔히 보이는 수고를 하겠어?”

리벤은 이미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었다. 그리고 미약하게나마 다시 수도로 돌아갈 각오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