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9 어제를 꿈꾸는 보석
클라마 왕국 트루마이어 왕조의 제 1왕자이자 왕위계승서열 3위인 레이먼드 피벗 트루마이어가, 자신의 아버지이기도 한 클라마 왕국의 국왕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러나 이것은, 레이먼드가 직접 ‘빠른 시일 내에 당신의 목을 따고 내가 옥좌에 앉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극소수의 인물이 알게 된 것이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 후 충격에 휩싸인 자들이 레이먼드를 조사했다. 그러나 나온 꼬투리는 아무 것도 없었다. 후궁의 아들이라 해도 일국의 왕자를 뚜렷한 증거 없이 처분할 수 없는 노릇이라, 일단 레이먼드의 선언을 직접 들은 고위층 극소수만 알고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레이먼드는 왕궁 내에서 평소대로 생활했다.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온화했다. ‘반역’이 될 수 있는 ‘혁명’을 꿈꾸는 자라는 사실을 도무지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서자의 허세다.
아무리 조사해도 나오는 게 없자, 국왕, 에드워드, 헤르겔을 제외한 모든 자들이 레이먼드의 선언을 믿지 않게 됐다. 어릴 적부터 ‘천성이 참한 아이’였던 터라, 그의 나이 30인 지금까지도 옛 인상이 고정관념처럼 남아 있었다.
그를 가장 의심해서는 안 될, 그와 가장 가까운 인물들이 도리어 그를 의심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의 뒤를 캤다. 결국 찾아냈다. 알아냈다. 레이먼드는 정말로 나라를 통째로 뒤엎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증거들은 레이먼드가 ‘반역’을 일으킬 것이라고 가리켜도, ‘레이먼드’의 짓이라고 가리키지 않았다. 그래서는 반역을 열심히 막아도 레이먼드에게 손댈 수 없었다.
-레이먼드가 먼저 반역을 결심하고 측근을 모은 것일까? 전부터 지인으로만 있던 현재 측근들이 레이먼드에게 반역을 권한 것일까? 반역 계획은 레이먼드가 짠 것일까? 계획을 구상한 자가 따로 있을까?
풀리지 않은 의문이 수 가지다. 그래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레이먼드가 가진 군사력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국가 대 국가’ 규모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끈덕진 비밀조사 끝에 알게 된 레이먼드의 측근들이 의외의 거물인 점도 주의해야 한다. 아마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들을 주축으로 암살행각이 벌어질 것이다. 표적이 될 자들은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뻔하다.
“드디어 끝났네요.”
“한 달에 한 번씩 손질하는데도 매번 이만큼이에요.”
쌍둥이들은 나무 밑에 쌓아둔 풀 더미를 질려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 풀 더미는 테스탈로차의 무덤을 손질하면서 쌓인 것이었다. 페리아 숲 북쪽 어두운 곳에 그의 무덤이 있는데, 식물이 무성한 숲이라서 그런지 음지에 가까운 곳인데도 풀이 빠른 속도로 듬뿍듬뿍 자랐다. 그래서 매단 그믐날에 벌초를 했다.
이번 그믐까지는 나흘 남았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이야기를 듣고 트리오로서 국가비상사태를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 번 나가면 언제 다시 숲으로 돌아올 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수도로 가기 전에 미리 벌초를 한 것이다.
“샤샤, 네리. 손 내밀어.”
물의 상급정령 네레이드가 쌍둥이의 흙투성이 손을 씻어냈다. 그녀는 리벤의 계약정령 중 하나다.
“1년하고도 8개월. 햇수로는 2년.”
테스탈로차가 죽은 직후부터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리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영혼을 빼앗긴 텅 빈 눈동자와 스스로 몸을 곧게 유지하지 못하는 무기력증. 천하의 리벤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쌍둥이가 있는 덕분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리벤은 비석의 윗부분을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언급한 시간이 흘렀어도 마음의 공허함이 줄지 않았다.
“샤샤와 네리는 이제 아버지가 기억나지 않겠구나.”
“얼굴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성격이나 특징은 기억해요.”
“무지 엉뚱하면서 엄청 상냥한 분이셨잖아요.”
“그 정도 기억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쓸쓸해하지 않을 거야.”
리벤이 쌍둥이를 두 팔 가득 꼬옥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 리벤 자신이 살아 있는 몸이라는 것과 쌍둥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였다. 리벤은 테스탈로차가 죽은 후, 그를 계속 끌어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체온이 점점 내려가는 것을 직접 느꼈다. 그래서 따뜻한 체온에, 집착까지는 아니더라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밤하늘에 구름이 껴서 별이 보이지 않았을 때, 즉석으로 화약을 조합해서 폭죽을 만들어주셨죠.”
“여러 가지 색 불꽃이 하늘에서 번쩍번쩍. 정말 예뻤어요.”
아주 어릴 적 기억은 뇌리에 박힐 만큼 인상적이지 않으면 몇 년 새에 잊어버리게 된다. 샤샤와 네리는 네다섯 살 때 난생 처음 본 불꽃놀이를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당시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가 불꽃놀이를 직접 준비하고 형형색색의 꽃무늬도 직접 연출했다는 것은 제대로 기억했다. 한 가지 더. 당시 자신들이 느꼈던 감동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아버지 실험실의 시약이 폭발해서 집 지붕이 날아간 건 정말 대단했어요.”
“정말 배꼽잡고 웃었죠. 그런데 아버지는 ‘어째서 집 안에서 하늘이 보이지?’하고 잠깐 의심하다 말았죠.”
“아, 맞아요. 한참 지나서, ‘지붕이 왜 없지?’하고 놀라셨어요.”
테스탈로차가 죽기 전까지 포르포냐 가는 웃음이 끊어질 줄 몰랐다.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즐거운 사건을 일으키는 것도 전부 테스탈로차의 몫이라서, 그가 없는 지금은 정신 빼놓을 만큼 웃는 경우가 확 줄어들었다. 7살배기 아이들이 있으니까 웃을 일이 많지 않겠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쌍둥이는 너무 조숙하고 지나치게 진지해서, 현실을 깨달은 어른처럼 행동했다. 가끔 어린 아이에 걸맞게 지나친 장난을 칠 때도 있지만, 그건 하품이 나올 정도로 지루할 때다. 매일 자기 수련 때문에 바쁜 아이들에게 하품 나올 정도로 지루한 날이 1년에 몇 번이나 있겠는가. 열 손가락을 꼽을 수 있을 만큼 밖에 되지 않는다.
“너희랑 놀겠답시고 숲 서쪽을 탐험하다가 혼자 늪에 빠진 적도 있었지. 목 중간까지 빠져서 빼내는데 고생했어.”
리벤도 옛 일을 천천히 하나씩 꺼냈다.
“너희가 막 기어 다닐 무렵에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했었지. 쌍둥이인 만큼 두 배로 신경을 써야 하니까, 너희를 잃어버리지 않게 너희 허리에 줄을 묶어서 둘이 꼭 같이 다니게 했단다.”
“허리에 줄을 묶어요? 우리 둘을?”
“서로 다른 데로 가려고 싸웠겠네요.”
“아니. 둘이 죽이 잘 맞아서 싸우는 일은 없었어. 그리고 내가 발견할 때까지 잠깐 동안만 묶여 있었거든.”
리벤은 테스탈로차의 무덤과 마주보며 흙바닥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그녀의 오른쪽에는 샤샤가, 왼쪽에는 네리가 각각 다소곳이 무릎을 꿇었다. 숲 속이기 때문에 큰 불이 날 수 있으므로 향은 피우지 않았다. 대신 테스탈로차가 곧잘 마셨던 독한 럼주를 새 병 통째로 무덤 앞에 들이 부었다. 리벤과 쌍둥이가 1/3씩 나눴다. 이제 일방통행 대화를 할 차례였다.
“우리 이제 수도에 갈 거야. 착한 제 1왕자가 반역자로 찍혔다더라. 트리오의 최고령자께서 소집명령을 내렸으니 안 갈 수가 있나. 그 늙은이, 관절염 때문에 자기가 못 나서니까 날 부르는 거겠지. 사람 좋은 레이먼드가 모은 인재들이 상대다보니 이래저래 긴장하고 준비해야 할 거야. 아아-. 이 푸른 사신……. 이렇게나 빨리 현장에 복귀할 줄은 몰랐어. 레이먼드가 이렇게 크게 뒤통수 칠 거라고도 전혀 생각 못했어. 역시 일은 당해 봐야 하는 법인가봐.”
쌍둥이는 조용히 리벤의 말을 들었다. 말 주변이 부족해서, 2년 전에 죽은 아버지에게 뭐라 말해야 좋을 지 막막했다. 벌초 때마다 리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다. 그래도 쌍둥이는 리벤처럼 술술 일방통행 대화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 테스탈로차가 살아 있는 것같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곧바로 숲을 벗어날 거야. 일단 나가기만 하면 에드워드가 준 스크롤로 단숨에 수도로 갈 거니까 긴 여행이 될 거라는 걱정은 안 해도 돼. 아이들 걱정도 하지 마. 우리들의 사랑스런 쌍둥이는 천하의 리벤 포르포냐가 꼭 지킬 거야.”
리벤은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두 주먹을 굳게 쥐었다. 테스탈로차의 무덤을 향한 일방통행 대화는 벌초와 마찬가지로 당분간 불가능하다. 수도에서 숲 속 집으로 가장 빨리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전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지금 당장 오늘 내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사적으로 시간을 너무 허비하는 것은, 수도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 욕심을 억눌렀다.
“슬슬 출발하자.”
“네.”
포르포냐 세 가족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각자 옷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간단하게 꾸린 각자의 가방도 잊지 않고 챙겼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인사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세 명이 동시에 우렁차게 소리쳤다. 만약 테스탈로차의 영혼이 지상에 있었다면, 이들을 향해 다정하게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그의 따뜻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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