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에 앉아 입가에 미소를 여리게 띠고 예전 일을 떠올리다 보니 거리에 어둠이 더 짙게 내려앉았다. 마침 새하얀 가면의 그를 길드에 들이는 부분까지 기억을 되짚는 중에 인기척을 느꼈다.
“보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밤산책 금지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짙은 다홍색과 선명한 황색으로 불사조의 날개를 본 뜬 그림이 얼굴의 오른쪽을 가린 흰 가면에 꽉 채워져 있었다. 그의 새 가면은 디레스의 동생이자 적룡왕의 차남, 플릿의 역작이었다.
“케른. 마침 네 생각 중이었어.”
“여기가 4년 전 그곳이니까요.”
케른 지프트필츠. 지금은 제3천왕 밀리엄 휘하 진격부대에 속해 있다. 그가 부리는 꼬꼬마 반시 다섯 명은 아지트 안에서 잡무를 도맡고 있는데 여간 쓸만한 게 아니다. 집 지키는 요정 브라우니가 질투할 정도로 후딱후딱 능숙하게 해낸다. 그러다가도 케른이 장기 출장 후 돌아오면 이산가족 상봉하듯이 눈물을 휘날리며 달려가 반긴다. 덕분에 케른의 별명은 ‘다섯 쌍둥이 아빠’다.
“벌써 4년 됐구나.”
“보스와 캡틴 류의 키가 훌쩍 큰 세월입니다.”
“난 그래봐야 4cm 컸어. 민이 20cm 넘게 어마어마하게 자랐다고.”
“그 때 보스가 2~3cm 더 컸었죠.”
시아는 플러스로 변하면 종족 영향으로 168cm가 된다. 그런데 휴먼족일 때 166cm라서 별 차이 없어 보인다. 민 역시 휴먼족일 때나 뱀파이어일 때나 186cm인데, 190cm에 달하는 디레스와 나란히 있으면 눈이 호강하는 경치가 완성된다.
“암만 커봤자 너만 하겠어?”
케른이 플러스로 변해서 체형을 조절하지 않으면 6m에 달했다.
“그래봤자 드래곤은 못 따라잡습니다.”
“드래곤인걸. 몸집과 위엄이 비례하는 종족이라고, 그들은.”
“캡틴 엑서스엘과 피스크 고문관이 맞붙었을 땐 장관이었습니다.”
“그 무식한 덩치들! 그 땐 아지트가 아작나는 줄 알았다고.”
디레스 엑서스엘이 연상이나 여전히 제2천왕 자리를 지키고 있고, 엘더 피스크는 제3천왕 자리를 제자 밀리엄 브롤에게 내준 후 고문역을 맡고 있다. 제4천왕이던 밀리엄이 제3천왕이 됐으니 그 빈 자리를 크리세이스 하갈이 채우게 되었다.
“피스크 고문관이 연하인데도 은룡왕이고 캡틴 엑서스엘은 그냥 적룡왕의 장남인 것도 묘한 밸런스입니다.”
“응? 난 바르베리트 후작이야. 나이와 능력치, 신분은 아-무 상관 없어. 왜 이래.”
“실례했습니다.”
케른은 가면을 향해 날아드는 작은 돌멩이를 스윽 피했다. 그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지금 적룡왕은 아직 팔팔해서 전쟁이 일어나면 선두지휘를 화려하게 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 디레스의 나이가 되기 100년 전에 디레스의 아버지가 됐으니 왕들 중에서 젊은 편이었다. 그런데 전 은룡왕이 휴먼족만 감싸 안다 보니 후사가 없어서 왕족의 피가 흐르는 엘더를 입양해 후계자로 삼고 10년을 못 넘긴 채 숨을 거뒀다. 툭 하면 현 은룡왕의 자질 문제가 거하게 터지는 건 어쩔 수 없다.
“하긴 그 때 보스께서 주먹으로 한 방씩 후려친 덕분에 이성줄 끊어진 드래곤 두 마리가 얌전해졌죠. 과연 최강자십니다.”
“쓸데없는 아부는 집어 치워.”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케른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를 낮췄다.
“괜히 여기 온 게 아니었군.”
“혹시 사이렌 블러드를 실제로 본 적 있으십니까?”
“바보 같은! 사이렌 블러드의 주가(呪歌)로 켄타우루스 무리를 부리고 있다고?”
어둠을 틈 타 아무리 철저하게 매복하고 있어도, 어둠 속에서 진가를 발휘하는 악마들에게는 훤히 보였다. 위치와 세밀한 움직임을 보아하니 케른이 인적이 드문 이곳으로 유인한 듯했다. 대략 30에 가까운 숫자였다.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휴먼족 순종이 홀몸으로 오겠습니까? 그런데 혼자란 말입니다. 더욱이 켄타우루스 순종을 노래로써 복종시키는 대담한 자입니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짧아서 셀키는 봤어도 사이렌은 아직 못 봤거든. 하물며 사이렌 블러드……. 그런데 휴먼족한테만 힘이 통할 정도로 약하잖아.”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렇습니다만, 저도 실제로 본 건 처음이라 상당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두 악마의 눈이 순식간에 번뜩였다. 달빛을 받고 반짝이는 화살촉이 자신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시아는 만에 하나를 위해 제2단계로 각성했다. 그리고 찢어지기 쉬운 날개를 가진 케른을 대신해 어둠과 동화될 정도로 순흑을 자랑하는 날개를 펼쳤다. 드래곤을 상대하면서 단련한 자만할 만한 방패가 고작 켄타우루스의 화살에 옅은 생채기 하나 나겠는가. 시아는 ‘악마의 날개는 어둠의 장막’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날개를 넓게 펼쳐 자신과 케른을 감쌌다.
[탁 탁 타다닥탁 탁 타다닥 탁 탁]
켄타우루스의 머릿수와 똑같은 수의 화살이 시아의 날개에 부딪히고 무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래가 밤공기 대신 주변을 싸늘하게 채웠다. 시아는 날개를 거두지 않았다. 대신 마법으로 제3의 눈을 만들어 밖으로 내보냈다. 귀족급 악마라면 거뜬히 할 수 있는 잡기술이었다.
“휴먼족 순종. 여자. 여자? 인질이군. 그 뒤에 남자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손에 들고 있는 보석은 아이롤라이트(Iolite) 중 페리도트. 어쩐지 휴먼족 치곤 솜씨가 좋다 했어.”
“증폭 아이템이 있었습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입니다.”
“제대로 제련한 상품이야. 마법 시전자가 원체 힘이 약하니까 평생 써도 안 깨질걸?”
[탁탁탁탁탁 타다다다다다닥닥 탁탁 타다다다다닥닥 탁탁탁탁]
켄타우루스들이 머리 하나당 화살을 서너 발씩 계속 쐈다. 그래봤자 후작의 고귀한 날개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적어도 미스릴이면 모를까 그들이 사용하는 화살촉은 납과 주석의 합금이었다. 리자드맨에게나 통할 것이다.
“인질이 있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네가 끌고 왔잖아.”
“그러면 다 태워 죽여도 됩니까?”
시아는 아주 조금 고민했다.
“그럴까?”
케른은 어색하게 하하하하 웃었다. 눈은 그대로, 입만 벌려서 웃음소리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지성이 없는 하급 켄타우루스는 그냥 짐승이잖아. 다른 데로 옮기기 귀찮으니까 그냥 깨끗하게 없애자고.”
시아는 생긋 웃더니 오른손에 주먹 두 개 크기만한 불공을 만들어냈다.
[퍽!]
일순간 생뚱맞게도 시원하게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서둘러 제3의 눈을 움직였다. 지금은 낭인족의 모습을 하고 있는 키메라가 켄타우루스 한 마리를 때려눕힌 후 다른 켄타우루스를 또 걷어차려고 했다.
“우린 길드원들은 성실하게 일하는구나.”
“누굽니까?”
“실러.”
낭인족-소울셰이든인 실러 그라함도 케른과 같은 진격부대 소속이다. 순찰 중에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바로 달려온 게 틀림없었다. 낭인족 특유의 뛰어난 후각과 청각 그리고 발달한 다리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 켄타우루스가 일어나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좀비 같아. ……. 좀비군. 테워!”
시아는 미리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했는지 곧장 날개를 거뒀다. 그녀는 가벼워진 몸 그대로 사이렌 블러드라 추측되는 휴먼족에게 접근했고, 케른은 제2단계로 가볍게 각성하여 마음껏 불꽃을 방출했다.
“뭐야, 있었어?”
“좀비는 때려죽인다고 안 죽습니다, 실러.”
“좀비? 진짜? 생각할 틈이 없었어.”
실러는 케른이 움직이기 편하게 켄타우루스 무리에서 떨어졌다. 이런 일은 케른 혼자 맡는 것이 빨랐다.
삽시간에 새빨간 불바다가 넘실거렸다.
“좀비라면 휴먼족이라도 다룰 수 있지. 다만 네크로맨서 기술이 상당해야 하겠지만.”
시아는 인질 바로 앞에 마주보고 서서 수면 마법으로 재우고 동시에 범인이 가진 페리도트를 악마의 푸른 불꽃으로 태웠다. 눈치 빠른 실러는 시아에게서 인질을 받아 거리를 뒀다. 왜 보스가 지금 여기 있냐고 일일이 묻는 건 아마 눈치 없는 캡틴(밀리엄 브롤) 뿐일 것이다.
“휴먼족 순종 주제에 위험 구역에서 노닥거리다니 제정신이야? 네크로맨서 기술 좀 쓸 줄 안다고 좀비로 악마사냥? 정신머리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영혼을 꿰뚫듯 날카롭게 쳐다봤다. 범인은 궁지에 몰렸기 때문에 발악을 하는 건지, 정말로 자신이 이길 거라 생각했는지, 작위를 가진 악마를 앞에 두고 노래하기 시작했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 들릴 뿐 누구도 이상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자체 항마력이 높아서 휴먼족의 주가 능력이 통할 틈이 없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라면 당연히 통한다는, 세이렌과 셀키만 구사할 수 있는 귀한 주가가, 휴먼족 중 사이렌 블러드에게는 터무니없이 나약한 기술이 된다는 옛말이 진짜라고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상황 파악이 덜 된 실러는 범인이 미쳤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렌 블러드일 겁니다.”
“아―”
다시 악마로 돌아온 케른이 귀띔해 줬지만 역시 이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얼마나 무식하면 휴먼족이 악마 앞에서 통하지도 않는 능력을 쉴 새 없이 사용할 수 있나 하는 것이었다. 이건 케른도 마찬가지였다.
“------”
“목시 쉴 때까지 발악해 봐. 그런데 꼬맹이들 학예회 쪽이 더 볼만하겠다.”
시아는 팔짱을 끼고 무표정으로 구경했다.
“오랜만에 강림했도다, 냉정 보스.”
실러는 인질이었던 휴먼족 순종 여자를 계속 품에 안은 채, 적을 구석 끝까지 몰아넣는 시아의 솜씨를 구경했다. 케른은 조금 지루해지자 돌아다니면서 켄타우루스 좀비가 점부 남김없이 탄 것을 확인하고 불을 거뒀다.
“------. 읏. 악마면 당연히 복종해야지!”
“40 넘은 아저씨가 제대로 까막눈이군.”
시아의 무표정은 변함없었다. 비웃을 가치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데몬도 다루지 못할 능력으로 감히 귀족을 노려?”
어깨가 움츠러드는 위압감이 사납게 몰아쳤다. 범인은 중심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으면 넘어졌다.
“고스트나 스펙터는 다루려나? 좀비는 인형술사도 다루거든. 네크로맨서 전유물이 아니란 말이지. 어디 소환술이라도 써보시지.”
이번에는 살기가 중력을 따라 지면에 사정없이 쏟아졌다. 오로지 범인에게만 집중된 숨통조르기였다. 범인은 얼굴이 새하얘졌다가 새파래졌다가 연신 바뀌었다. 다만 표정은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 못한 듯했다.
“음. 케른. 난 이 여자를 아지트에 데려갈게. 도중에 깨면 집에 데려다주고.”
“덮치지 마십쇼.”
“누가!”
“전과범이잖습니까.”
“어이……. 아내 얘기는 그만 우려먹어.”
실러는 불쌍할 정도로 울상이 됐다. 당시에 동료들에게 실컷 질타를 당하고 지금까지 틈틈이 놀림거리로 떠오른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한단다. 물론 보스에게 죽기 직전까지 얻어맞았던 통증은 몸에 각인된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 괴롭긴 하다.
“걱정 마, 케른. 아내가 무서워서 바람 못 피니까.”
시아는 기절한 범인을 발로 툭툭 차면서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아니지. 난 아내만 보는 완벽한 애처가라고.”
“글쎄다. 호색한은 아닌데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실러는 시아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위가 쿡쿡 쑤시는 듯했다.
“케른, 케른. 보스 심술이 날로 늘어나는 것 같지 않아?”
“성장기 청소년이니까요.”
“으으- 먼저 아지트에 가 있을게.”
시아와 케른의 협공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건 어쩌실 겁니까?”
범인을 감질나게 여기저기 차는 발은 멈추지 않았다. 시아가 고민하는 동안 점점 강도가 세져서 늘어진 몸뚱이가 반대면을 보이며 뒤집어지는 것이 수차례였다. 그래도 케른은 지켜보기만 했다.
“먹을까?”
“불량식품입니다.”
제3자가 들으면 심장 철렁거릴 대화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어쩌면 너무 평범하게 말을 주고받아서 ‘못 먹는구나’라고 납득하고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역시 맛 없겠지?”
“배탈 날 겁니다.”
남자는 만약 정신을 차려도 이 대화에 다시 기절하지 않을까. 농담이라 하기엔 둘 다 말투가 진지했다.
“사이렌 블러드…… 인지 아닌지 화타 어르신께 부탁해 보는 건 어떠십니까?”
괜찮은 생각이었지만 시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매우 유감이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살덩어리에 정신이 팔려서 이건 그냥 폐기야.”
“하긴 그렇겠습니다.”
시아는 이제 차는 것도 질렸는지 손과 배를 자근자근 꾹꾹 밟았다. 휴먼족의 살은 두께가 있을수록 밀려들어가는 감촉이 밀가루 반죽에 가깝고, 반복해서 가지고 놀 수 있을 만큼 탄력도 있기 때문에 마족의 어린 아이들에게 장난감으로 내던져지는 경우가 간혹 있다. 악마도 마찬가지다. 시아는 휴먼족 순종이었다가 키메라가 된 경우지만, 휴먼족을 잔인하게 농락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다. 그녀가 악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또 성가신 짓을 할 텐데 그냥 버리자니 찝찝해.”
인질까지 데리고서 뭔 일을 벌였을지 모를 범인을 편하게 한 방에 죽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계속 생각하다보니 다시 발에 힘이 들어갔다.
“보스. 내장 튀어나오겠습니다.”
“아차.”
복부 한 가운데에 푹 들어간 발을 살포시 들어올렸다. 배가 다시 평평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범인의 의식도 돌아왔다.
“으으- 삭신 쑤셔.”
깨어나자마자 튀어나온 말은 지극히 평범했다.
“너, 뭐하는 놈?”
“흐익!”
휴먼족 순종이라면 당연히 보일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시아와 케른이 새삼 놀랄 정도로 그의 표정이 처음과 달랐다. 이전까지 시아 앞에서 지루한 재주를 부리던 대담한 그가 아니었다. 뭔가 씌었다가 해방된 듯 보였다.
“케-른.”
“네, 보스.”
“뭐지? 이 묘한 불안은. 아-주 찝찝해.”
시아는 휴먼족으로 돌아갔다. 눈앞에 있는 40대 아저씨에게 악마 모습은 자극이 심했다. 케른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이봐요, 아저씨. 휴먼족이 위험 구역에 오는 거 아니에요.”
“어? 어디? 여기가, 왜?”
술에서 깨다 만 주정뱅이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시아는 관심 없다는 무표정과 감정 없는 톤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는 위험구역이에요. 아저씨, 네크로맨서인 척하고 여기서 노래하고 춤추고 웃겼어요.”
진실 반 거짓 반.
“뭔 소리야? 난……. 아, 여자는? 그래, 그 여자가 나한테 술을 주고, 그런데 술이 아니었어. 바로 쓰러지고……. 지금 일어난 거야. 여자, 그 여자 어딨어?”
범인으로 몰렸던 그는 허둥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어둠 속에서 마주 보고 있는 소녀를 제외하고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가 갑자기 시아를 매섭게 쏘아보며 일어서더니 머리채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시아는 일부러 피하지 않았다.
“뭐야? 뭐야 이거?”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춘 케른이 그의 손목을 굳게 붙들었다. 감히 보스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천한 것― 이라 중얼거렸지만 휴먼족 아저씨에게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내가 그 여자랑 한 패라고 몰아붙일 생각이었나요? 이래서 저급한 것들은 상대하기 싫다니까. 그래도 나이 많은 어른이라고 예의 차려 줬더니 돌아오는 건 행패야? 케른. 적당히 내던져놔. 어차피 쓸모없는 물건. 위험구역이니까 해 뜨기 전에 누군가 우리 대신 처리해 줄 거야.”
시아는 남자를 지나치며 아지트 쪽으로 걸어갔다. 케른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발버둥치는 남자를 별 힘 들이지 않고 끌고 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골목에 쓰레기봉투를 치우듯 휙 내던졌다. 곧바로 욕지거리가 섞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케른은 등을 돌려 시아에게 돌아갔다.
“그 여자야.”
“보스께서 수면마법을 건 여자 말입니까?”
“아무리 잘나봤자 휴먼족이니까 실러한테 해는 없겠지.”
교묘한 꾀에 그대로 넘어간 것은 분하지만 고작해야 휴먼족 순종이고 항마력이 거의 없을 정도의 실력이니 이 이상 성가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안심했다. 케른은 보스가 갑이라고 하면 갑, 을이라고 하면 을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이는 인물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아지트로 돌아가니 유쾌한 장면이 눈에 띄었다.
인질이 아이었던 진범이 마법으로 입과 양 손목이 구속된 채 로비 소파에 방치되어 있었다.
“케-른!”
다섯 반시들이 케른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그녀가 발버둥치는 바람에 로비에 장식해둔 꽃병이 두 개나 박살나서 그것들을 치우는 중이었다. 아지트에 있는 모든 것을 애지중지하는 꼬꼬마들이 아주 울상이 되어선 속상함을 마구마구 드러냈다.
“자 여자 나빠!”
“다 부쉈어!”
“실러 도망갔어!”
“괴롭히면 안 돼?”
“케른이 혼내줘!”
케른이 머리를 쓰다듬거나 등을 다독이며 반시들을 달래는 동안 시아는 진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다짜고짜 옆구리를 발로 찼다. 보스의 기척을 느끼고 실러와 밀리엄이 로비로 왔을 땐 이미 진범의 옷에 발자국이 네댓 개 찍힌 후였다.
“보스. 우린 폭력집단이 아닌데.”
“닥쳐. 집안 살림을 부수게 내버려두다니 제정신이야?”
실러는 낮게 깔린 목소리에 짙게 깃든 냉기를 심장에 직격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밀리엄이 풀 즉은 부하를 내버려두고 시아와 진범에게 다가갔다.
“꽤 하는 인형술사던데, 어디서 주웠어?”
“역시나.”
시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실러는 사이렌 블러드라느니 네크로맨서라느니 좀비라느니 경우 모를 말만 했는데, 이 여잔 아무리 봐도 인형술사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하기 귀찮은 잡무.”
“이야-.”
시아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귀찮음이 뚝뚝 흘러내렸다. 밀리엄은 호기심을 포기해야 했다. 이런 보스를 더 귀찮게 했다간 이 깊은 밤에 아지트가 진동할 만한 분노의 발차기가 날아들 것이라고, 경험을 통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 탓에 멜로즈가 깨기라도 하면 죗값이란 명목으로 한 방 더 얻어맞을 것이다.
“그래, 그래. 술사가 잠들었는데도 술법에 걸린 인형들이 여전히 제 역할에 충실했단 말이지. 그래- 그 실력은 가히 칭찬할 만 해.”
모든 흥미가 뚝 떨어져서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아주 잠깐 성가신 일에 휘멀렸던 것이 적잖이 귀찮았는지 시아는 밀리엄의 팔에 머리를 기댔다.
“하실 말씀이라도?”
“이 여자. 일루지온한테 줘. 맘대로 하라고 해.”
“보스! 그건…….”
시아는 뒷말을 무시하고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정식 연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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