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숙소 쪽으로 가다가 얼마 안 있어 일루지온과 마주쳤다. 그는 잠든 휴먼족 여자를 안고 있었다. 농밀한 꿈에서 깨어난 후 격하게 반응한 그녀를 어떡해야 할지 몰라 보스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인큐버스로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는지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일루지온. 무지 재미있는 얼굴이야 지금.”
시아는 아침 인사 대신 무덤덤한 한 마디를 맨 처음 내던졌다.
“미리 말하는데요, 나 평범하게 했어요.”
일루지온은 정색하고 단어 하나하나 정확하고 딱딱하게 발음했다. 인큐버스로서 보스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 정도로 했으니까 이 여자가 아지트 분위기를 통째로 뒤엎을 정도로 화를 낸 건 여자 탓이지 자기 탓은 아니라는, 긴 의미를 분명하게 강조했다.
“흐음-. 뭐, 넌 배를 채웠으니 손해는 아니지.”
“캡틴. 전 엄연히 파트너가 있는 인큐버스에요. 덜 떨어진 녀석들처럼 아무한테나 달려들어서 허기를 채우지 않는다고요.”
“아-, 그 귀여운 아가씨. 그래서 새로운 아가씨는 맛없다고 항의하는 거야?”
“캡틴! 난 여자아이들을 먹이취급하지 않아요.”
“인큐버스가 그런 말 해봤자 설득력이 없는걸.”
밀리엄은 끊임없이 일루지온을 놀렸다. 그 사이에 휴먼족 여자는 시아의 마법으로 공중에 둥실 떠서 시아와 마주보고 선 자세가 되었다. 여전히 수면마법에 취해 눈을 감고 고개를 비스듬히 떨궜지만 이목구비가 대강 보였다. 시아는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밀리엄의 멱살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적당히 해. 일루지온은 성(姓)은 없지만 엄연히 바르베리트 계열 하급악마야.”
“미안, 보스.”
말로만 ‘미안’해 했다.
“보스. 이 여잔 누구에요? 명령대로 하긴 했지만, 세나랑 닮아서 내내 찝찝했다구요.”
일루지온의 말에 시아는 퍼뜩 놀랐다. 밀리엄을 세게 밀치고 휴먼족 여자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 잡은 채 이리저리 돌리며 샅샅이 살폈다. 디레스의 애제자이자 시아도 인정하는 귀한 인재, 가디안스 모두에게 사랑 받는 키메라와 정말 많이 닮았다. 시아는 그녀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더니 팔짱을 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세나랑 닮았어. 아주 많이. 왜 눈치 못 챘지?”
“진짜네. 낯설지 않다 싶더니 세나랑 닮아서였군.”
밀리엄도 신기하다는 듯이 휴먼족 여자를 찬찬히 훑어봤다.
“일루지온. 아까 했던 말 전부 취소할게. 진짜 미안.”
이번에는 진심이 깃든 ‘미안’이었다. 일루지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세나랑 혈연이려나?”
“그러면 지원이도 알겠군. 사촌이지? 둘 중 빨리 돌아온 쪽에 물어보지 뭐.”
“본인을 깨워서 물어보는 게 더 빠르잖아.”
시아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수면마법을 해제했다. 일루지온이 건 마법이지만 하급 몽마가 건 수면마법 쯤이야 마법을 어느 정도 구사할 줄 아는 실력자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해제할 수 있다.
휴먼족 여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신음소리도 없이 얌전히 깨어나더니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런데 감각이 이상했는지 반만 떴던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휙휙 돌렸다. 휴먼족 여자아이와 엘프 같아 보이는 남자와 자신에게 수치심을 준 몽마가 자신을 보고 있단 걸 깨닫자마자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 싶었다. 그런데 몸이 공중에 떠 있어서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인상을 확 구기고 소리를 질렀다.
“당신들 뭐야? 인신매매집단? 이거 얼른 풀어!”
“목소리까지 판박이야.”
밀리엄이 휘파람을 불며 감탄했다.
“너, 너, 내 몸에 손댄 거 절대 용서 안 해.”
“그러니까 몸은 무사하다니까.”
“악마 따위가 하는 말 누가 믿을 것 같아? 더러운 자식!”
앙칼진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시아는 오른쪽 귀를 잠시 만지작 거리다가 휴먼족 여자의 멱살을 쥐어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의 등이 ‘퍽’ 소리가 나도록 세게 부딪혔다. 반동으로 두 팔 두 다리가 살짝 흔들렸다.
“그 얼굴에 그 목소리로 험한 소리 지껄이지마.”
낮게 깔린 목소리가 심장을 직접 자극할 정도로 오싹했다. 휴먼족 인형술사는 시아가 단순한 휴먼족 여자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입을 꾹 다물었다.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마력과 실기지만 이건 그저 맛보기. 말도 안 되게 무서운 존재가 아닐까 의심했다.
“재주가 아무리 좋아도 고작 휴먼족 순종이 위험구역에서 일을 벌이는 건 자살행위야. 우리한테 먼저 걸린 걸 감사하라고.”
시아는 그녀에게 걸었던 공중부양마법을 풀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밀리엄과 일루지온은 마치 세나가 쓰러진 것처럼 보여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휴먼족 인형술사는 시아를 날카롭게 쏘아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고작 휴먼족 순종이 위험구역에서 반 년 넘게 혼자 살고 있는데? 그것도 어떤 길드의 보호도 없는 무법지대에서. 자, 더 지껄여 보시지. 솔직히 죽는다 해도 무서울 거 없어. 비열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얼마든지 괴롭혀봐. 빈틈만 보이면 바로 내 인형으로 만들 테니까.”
죽지 직전의 발악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그 실력 자체를 자존심으로 삼고 있는, 무모하지만 당당한 내세움이었다. 아마 인형술사로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누구에게도 머리를 숙이지 않았을 것이다. 전신에 독기를 품고 살벌한 태도를 고수하는지 알 법 했다.
“후우-.”
시아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 얼굴에 그 목소리로 험한 말은 그만 두라고. 세나는 그런 말 안 해.”
“세나? 세나?”
시아가 일부러 흘린 이름에 휴먼족 인형술사의 두 눈이 흔들렸다. 분위기가 수그러드는가 싶더니 다시 살기등등해졌다.
“뭐야. 너도 가출 청소년? 가출한 키메라끼리 잘 먹고 잘 사나봐?”
[퍽!]
주먹으로 벽을 내지르는 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시아가 천천히 돌아봤다. 일루지온이었다. 싸움터에서조차 여자가 상대일 땐 절대 거친 수단을 안 쓰는 그다. 언제나 상냥한 그가 일상에서 보란듯이 거친 행동을 하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계집. 보스와 세나를 욕하는 건 그냥 못 넘어가.”
“이런, 이런. 선수를 빼앗겼군.”
밀리엄은 양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삐딱하게 서있었다. 이마와 관자놀이를 지나가는 핏줄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이봐들.”
정작 시아는 평상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나까지 험담을 들은 건 분하지만 예상 범위 내 반응이라서 슬쩍 넘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사람 좋은 두 명이 그 틈을 못 참고 발끈할 줄이야.
“있지. 이것들도 키메라야. 더욱이 둘 다 플러스가 실버 드래곤이란 말이지. 뭐, 충분히 제압할 수 있지만 그래도 귀찮거든. 짜증나는 주둥이 닥치고 묻는 말에 대답만 해.”
말이 거칠기는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험한 세상에서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일까. 분명 아니다. 시아는 독한 말을 고르기보다 반박할 수 없는 논리로 상대를 지긋이 함락시키는 편이다. 지금은 폭발하기 직전의 길드원 두 명이 바로 옆에 있어서 급하게 일을 끝내려는 것뿐이다.
“보스. 그냥 버려.”
“네. 보스와 세나를 모욕했다구요.”
밀리엄과 일루지온은 더 이상 못 참겠는지 언성을 높였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예의바른 규수, 박 세나. 오리지널이든 플러스든 겉모습은 마냥 여린 소녀지만, 위기에 처한 길드원을 척척 구해내는 숨을 실력자로, 가디안스 내에서 4천왕 못지않은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다. 사촌 오라비 지원도, 사부 디레스도 한 명의 귀재로서 그녀를 아낀다. 가끔 지나치게 감싸 안는 경향도 있지만 다 애정에서 나오는 과보호다. 여하튼, 밀리엄과 일루지온이 세나와 닮은 얼굴을 갖고 세나와 비슷한 목소리를 내면서 정반대의 언행을 분출하는 휴먼족 순종 여자를 격하게 거부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조건반사다.
“가만히 있어. 하-. 인형술사 씨. 사정상 순서가 엉망이지만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을 가르쳐줄게. 여긴 길드 가디안스의 아지트. 난 보스 진 시아. 위험구역에서 반 년 넘게 살았다면 더 이상 설명 안 해도 감이 오지?”
인형술사에게 다짜고짜 물리력을 사용했던 시아가 이제는 길드원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성적으로 움직였다. 언제나 중화제 역할을 하는 민이 없다 보니, 오랜만에 스스로 하는 감정조절이 어색하다고 자각했다. 이제 겨우 평소의 냉정한 자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자. 현명한 판단을 기대하겠어.”
무표정과 담담한 말투가 은근히 압박감을 가졌다.
휴먼족 인형술사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가 싶더니 옷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선 독기도 사그라지고 표정도 한 결 가벼워졌다. 그래도 당당한 건 여전했다. 자신을 향해 적개심을 풍기는 두 남자를 무시하고 시아와 제대로 마주봤다.
“휴먼족 순종 인형술사 박 세희. 제멋대로 학교 때려치고 아무 말 없이 가출한 여동생을 찾는 중. 소문에 휴먼족-네레이드 키메라가 위험구역에 있다고 해서 목숨 걸고 언니로서의 의무를 다 하고 있음. 됐지?”
말투가 까칠하지만 처음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다.
“혈연일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긴 했는데……. 친자매였군. 그래, 겉모습만 쏙 닮은 자매. 응.”
시아 역시 여동생이 있기 때문에 인형술사 세희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매가 이렇게까지 성격이 다른가 싶어 내심 놀랐다.
“세나는?”
담담한 목소리가 시아를 비롯한 밀리엄, 일루지온의 기분을 풀었다. 누구든 갑자기 붙잡히면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하기 마련인데, 그걸 간과하고 그녀가 잘못했다고 몰아붙인 것이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지금 중요한 임무로 외근. 아주 유능한 인재야. 걱정 안 해도 돼. 음……. 지원이도 같이니까.”
“그게 더 걱정이야.”
“풉!”
인형술사 세희가 즉각 정확한 지적을 했다. 가디안스 3인은 1초의 망설임 없는 단호한 한 마디에 웃음이 터졌다.
“이젠 그 녀석도 쓸 만한 인재인데? 하긴. 처음엔 골칫거리였지.”
시아는 휴먼족 인형술사가 의심할 여지없이 지원과 세나의 지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내 방에 가서 얘기할까? 저 놈들은 빼고. 여동생이 있는 언니들끼리 세상 이야기나 하자고.”
“에- 보스-.”
“가서 순찰 돌아.”
시아는 단칼에 밀리엄의 응석을 잘랐다. 거기다가 일루지온이 밀리엄의 왼쪽에 서서 어깨동무를 했기 때문에 밀리엄은 더 이상 땡땡이를 칠 수 없었다. 그가 밖에 나가기 귀찮아서 시아의 집무실에 들렀다는 사실을 시아가 언제부터 알아챘는지는 나무도 모를 일이다.
“아, 잠깐.”
[뻑!]
인형술사는 일루지온에게 다가가더니 그의 왼쪽 정강이를 오른 다리로 힘껏 후려 찼다.
“지금보니까 몽마네. 그래, 꿈, 꿈이었지. 암만 그래도 기분 더럽거든. 솜씨라도 좋으면 몰라. 몽마라면 최음마법 정도 기본 아니야? 어쩜 그렇게 당당하게 맨 정신으로 사람을 내버려둬? 이거 트라우마로 남아서 나중에 남자 못 만나면 네 놈을 인형술로 속박해서 서큐버스 중 변태한테 팔아버릴 거야. 죽을 때까지 시달리라고.”
인큐버스의 자존심이 무너졌다. 일루지온은 밀리엄에게 더 바짝 붙어선 ‘저 여자 싫어요’라고 중얼거렸다.
“미안, 일루지온.”
시아는 그에게 세희를 맡긴 걸 꽤 후회했다. 그의 자존심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세희가 시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 보스의 명령이셨습니까?”
“비꼬는 건 최고네. 맞아. 우리 구역에서 좀비를 데리고 설친 댁이 짜증났거든. 게다가 아지트 물건도 몇 개 부쉈고. 자업자득인데, 계속 물고 늘어질 거면 그냥 나가. 세나 못 줘. 그리고 비열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얼마든지 괴롭혀 보라며? 오히려 그 정도 수치심에서 그친 걸 감사해야지.”
시아의 강한 한 방이 효과적이었다. 세희는 ‘쳇’하고 혀를 차고 그 이상 아무 말도 안 했다.
“자, 자. 너네는 일 하고, 인형술사 씨는 나 따라오고.”
둘쭉날쭉 어수선한 분위기가 겨우 정리됐다.
시아가 세의를 데리고 집무실로 돌아가는 도중에 반시 두 명과 마주쳤다. 세탁을 끝낸 침대시트를 건조하기 위해 옥상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그들은 전날 로비에서 난동을 부렸던 세희를 알아보고 슬금슬금 피했다. 보스가 같이 있으니까 별 일 없겠거니 안심하면서도 세희 자체가 껄끄러워서 손님 대접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시아는 괜찮다는 듯이 생긋 웃어보였고 반시들은 그녀를 향해 꾸벅 인사한 후 종종 걸음으로 지나갔다.
“보통 브라우니를 고용하지 않나?”
“누가 하든 잘만 하면 돼.”
초면에 험한 분위기에서 마주한 탓인지 둘 다 자연스럽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투야 아무렴 어떠랴 싶었다.
“지금 대부분 밖에 나가 있어서 손님 대접이 변변치 않아.”
시아는 시판 주스를 유리잔에 적당히 따라서 건넸다. 세희는 독이나 약을 의심하지 않고 바로 한 모금 마셨다. 무모하지만 대담하게 살아온 경력을 사소한 행동 하나로 전부 증명하듯이.
“그래서 내가 그렇게 생난리를 쳐도 달려드는 이가 없었구나.”
“그래서 보스가 직접 나서는 꼴이 됐지.”
“어머나-. 덕분에 목숨 건졌어. 등은 아직도 아프지만.”
“정말 비꼬는 능력이 탁월해. 어떻게 이런 언니 밑에서 세나 같은 여동생이 나올 수 있지?”
“그야 입 싹 닫고 고이고이 아끼기만 했으니까.”
시아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견본이 가까이에 있지 않은가. 세나의 사촌인 지원도 타인 앞에서는 언행이 거칠지만 세나 앞에서는 끝없이 자상하다. 세희도 똑같을 게 틀림없다.
“겉은 세나, 속은 지원이군.”
“바보랑 동급 취급은 짜증나지만 그 표현은 정확하니까 넘어가겠어.”
말은 이렇게 해도 불쾌해 하는 기색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아를 상대로 고압적인 자세는 분명 위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세희의 말투를 지적할 만한 이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입장을 아직 덜 파악한 듯했다.
시아는 오히려 그것을 즐겼다. 밀리엄이 눈치 챘을지 모르지만, 시아는 은근히 세희를 노리고 있었다. 세나를 미끼로 세희를 가디안스에 들일 것인가, 순전히 세희에게서 가디안스에 대한 흥미를 끌어낼 것인가, 머릿속에서 갖가지 방법을 재빠르게 전개했다. 네크로맨서 기술을 조금 다룰 줄 아는 인형술사. 이 재미있는 소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침 전날 현장에 뒤늦게 등장한 실러가 네크로맨서다. 그에게 맡기면 얼마나 쓸만한 인재가 될 것인가 머리 근육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흥미로웠다.
“지원이를 바보라고 부를 정도면 세나랑 나이차가 좀 나나봐?”
사촌 오누이는 여섯 살 차이다.
“안타깝지만 바보랑 동갑이야.”
“둘 성격이 비슷한 이유를 알겠어.”
“실례야.”
시아는 지원처럼 실시간으로 즉각 반응하는 세희를 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세희는 시아가 웃는 이유를 눈치 채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동생을 너무 아끼는 나머지 무모하게 혼자 위험구역에 도전한 건……. 내가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 그렇다고 실력이 뛰어나다든가 운이 좋다든가 칭찬할 생각도 없어.”
시아는 기자 생활 중에 갖은 위기를 겪은 부모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물론 지금은 평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부모에게서 과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언제나 잔소리를 하고 싶을 정도로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아까 그건 악바리로 한 소리지,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그러니까 세나 돌아오면 한바탕 쏟아낼 셈이야.”
오로지 동생을 찾겠다는 생각 하나로 얼마나 많은 위험을 감수했는지 알 수 있는 한 마디였다.
“그래도 막상 얼굴 보면 아무 말도 못 할걸?”
“……그러겠지. 잘 아네.”
세희의 목소리에서 힘이 한 풀 꺾였다. 그녀는 시아를 빤히 쳐다봤다.
“세나, 여기서 엄청 사랑받나봐?”
“아까 녀석들 반응 보면 감이 오잖아. 곱게 자란 귀족가 아가씨마냥 예쁘지 착하지 그러면서 실전에선 압도적이지.”
“다행이네.”
세희는 씁쓸하면서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입을 꾹 다물었다가 우물우물 머뭇거리더니 시아가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고 마른 침을 삼켰다.
“휴먼족이 키메라를 얼마나 경멸하는지 잘 알잖아. 세나도 지원이도 원해서 키메라가 된 게 아닌데 가족이라는 작자들은…….”
키메라들이 나약한 종족을 납치해서 키메라로 만드는 사건이야 더 이상 언급할 필요 없는 오랜 옛날부터 끊이지 않는 일이다. 시아는 지원과 세나의 사정을 이미 본인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키메라가 된 경위를 비롯하여 휴먼족이라면 흔히 있는 가정 학대까지 전부. 길드 가디안스에는 이들처럼 키메라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학대를 당한 휴먼족 출신 키메라가 더 있다. 다른 길드에도 물론. 굳이 휴먼족 출신이 아니더라도 키메라이기 때문에 어디에서든 멸시의 눈초리를 받는 것이 키메라다. 가족이나 부족 내에서 부당한 대접을 안 받은 키메라가 몇이나 되겠는가. 좀 더 정도가 심한 것이 휴먼족이지만 이에 대해 유열을 논할 가치는 없다.
“역시 우리 집이 특이하다니까.”
시아는 세희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최대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한테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간 건 너무하다고.”
“필사적이었으니까.”
세희의 표정이 굳었다. 역시 시아가 사정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면서도 그녀에게서 들을 것인가 세나를 기다릴 것인가 망설였다. 하지만 금방 결심했다.
“가족이니까 말 못하는 것도 있지. 당신이 가르쳐줘. ……. 가르쳐주세요. 부탁합니다.”
앉은 채 시아를 향해 허리와 고개를 숙였다.
“약삭빠르다고 해야 할지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해야 할지, 아까랑 완전 다르잖아.”
“처지분별 못하면 지금까지 못 살아남지.”
“생활의 지혜이자 잔머리군. 맞아, 현명해. 그런데 하나 물어볼게. 지원이하고는 어느 정도 친해?”
“쌍둥이 수준?”
세희는 별 걸 묻는다고 생각하는가 싶더니 손으로 제 무릎을 탁 쳤다. 왜 세나만 생각했는지 자기 자신의 허점이 한심스러웠다.
“여기서도 지원이가 다 말했어? 그래, 그 바보라면 나한테도 다 말해줄 거야.”
“역시 당사자한테 직접 듣는 게 좋아.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지내는 건 어때? 늦어도 이틀 후면 돌아오게 돼 있거든.”
시아는 다시 한 번 속으로 민이 타임 리미트를 꽉 채우지 않길 빌었다.
“어머나 고마워라. 그런데 제멋대로 구는 나라도 나름 규칙이 있거든. 공짜 숙식은 거절이야.”
세희는 다시 고압적인 태도로 돌아갔다. 시아는 기대한 대로의 반응이라 웃기만 했다. 잠깐 침묵이 흐르더니 곧바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실은 가능성을 가늠할 수 없는 도박이지만 눈 딱 감고 지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냥 여기서 살아.”
세나를 미끼로 던지지도 않았다. 세희는 아직 길드 가디안스에 대해 모른다. 시아가 걸은 건 자신과 세희가 조금이지만 통하는 구석이 있다는 희미한 가능성이었다. 민이 알면 100% 잔소리를 할 테지― 걱정하면서 세희가 거절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도 걱정이었다. 걱정대로 되면 아마 실망할 것이다. 재미있는 인재에게 보기 좋게 차이는 건 역시 슬펐다. 아이러니한 것은 누군가를 스카우트 할 때마다 이 심난한 마음을 반복한다는 사실이다.
“보스가 혼자 막 나가도 돼?”
“그건 댁이 걱정할 일이 아니지.”
“앞으로 걱정할까봐 무서운데? 으음.”
―의외였다. 딱 잘라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망설이고 있다.
“당신 재미있는 사람이야. 여기엔 세나랑 지원이도 있고. 그런데 난 휴먼족 순종이라고. 가디안스는 키메라로 구성된 길드 아니야?”
“순종도 있어. 20% 정도.”
“어머나, 꽤 되네. 그래도 휴먼족 순종은 없겠지.”
“응.”
시아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당신이 최초요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구태여 입밖에 내지 않았다.
“정말 무책임한 보스네. 다른 이들 마음고생이 심하겠어.”
“그거 찔리네.”
“나 꼬실 생각은 있는 거야?”
“포기하고 있었는데 입질이 왔으니 설령 놓친다 해도 보람은 느낄 거라 생각해.”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세희는 솔직한 발언에 자지러지게 웃었다. 시아는 여유만만한 포커페이스를 하고 있었지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조마조마한 상태였다.
“실컷 웃었다.”
―짧은 침묵
“정식 길드원은 무리지.”
세희는 자신의 역량을 알고 있었다. 그녀 역시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가디안스의 보스라는 자가 자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기대하면서도, 실력자 소수 정예 집단으로 정평난 가디안스에서 버틸 수 있을지 걱정됐다.
“지원이처럼 두들겨 패면서 가르치면 금방 전선에 나갈 수 있을걸? 그 피가 어디로 가겠어?”
“우와- 정말 무책임한 보스야, 당신. 가디안스가 왜 투 톱 중 하나인지 이해가 안 되기 시작했어.”
대개 신입들의 반응이 이랬기 때문에 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다. 4천왕이 이 자리에 있었어도 똑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시아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길드원 몇몇도 세희의 발언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보스를 감당할 수 있어야 가디안스의 일원이라고 수긍할 테니 말이다.
“당신 날 어쩔 셈이야? 가디안스의 구역에서 성가신 일을 벌인 것도 모자라 길드원들과 충돌도 있었다고? 세나랑 지원이를 생각해서 나한테도 선의를 베푸는 자비로운 인물로는 안 보이는데, 정말로 나한테서 얻을 게 있다고 보는 거야?”
세희는 피해자인 척 모르는 척 했을 뿐, 실은 주변 상황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유리한 부분에서만 약삭빠르게 이점을 챙기고 불리한 부분에서는 배짱 좋은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휴먼족 순종의 몸으로 혼자서 위험구역에서 살아올 만했다.
시아는 점점 세희가 탐났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어도 그것을 유용하게 다룰 수 있도록 머리가 따라주지 않으면 최전선 총알받이 밖에 더 되겠는가. 언제 어디서든 제 힘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무사히 귀환할 스페셜리스트를 추구하는 가디안스에서, 세희는 ‘적격’에 가까웠다. 갖고 싶다는 욕심이 솟구쳤다.
“네 인형술은 하급마족과 맞붙어도 대등할 정도라고 봐. 게다가 미력하나마 네크로맨서 스킬. 이걸 더 갈고 닦으면 인형술과 함께 걸작을 창조할 수 있을 거야.”
“그건 자각하고 있어. 하지만 네크로맨서 자체가 지식이며 관련자가 너무 없어.”
“내가 그 어떤 보장도 없이 말을 꺼냈다고 생각해?”
시아는 의도를 눈치 챘으면서 일부러 말을 돌리는 얌체를 살짝 흘겨봤다. 세희의 눈에서 기대와 흥미를 쉽게 끌어낼 수 있었다. 새로운 지식을 향한 순수한 욕망이 없어서야 어디 마법을 사용하겠는가. 시아는 가능성 높은 인재의 기본 자세에 높은 점수를 부여했다.
“마족 중에서도 상급 마족. 셰이드 중에서도 소울셰이드가 그 어떤 종족도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네크로맨서지. 우리 길드에 그가 있어. 그의 제자가 되서 착실히 수련해 봐. 자매간에 닮았다고, 너 역시 세나만큼 컨트롤이 좋아서 정식 길드원이 되기까지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세희의 눈동자에서 동요가 보였다. 처음부터 입단을 거절할 생각이었더라도 지금 제시한 조건이 심히 매력적이라 갈등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시아는 보채지 않았다. 세희가 달콤한 속삭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다.
“후우-.”
세희가 한숨까지 길게 내쉬며 고민해도 시아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지 않고 인내심을 발후했다. 침묵이 길어져도 신경 쓰지 않았다.
“세나가 무사하단 걸 알았으니까……. 하지만…….”
세희가 아무리 입을 가리고 조곤조곤 중얼거려도 시아의 청력을 빗겨갈 수 없었다. 시아는 세희의 갈등을 느긋하게 만끽했다.
10분, 20분…….
세희는 시아의 눈치를 몇 번 보더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리고 한 번 더 곁눈질로 눈치를 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 비열해서, 만족한 만큼 배우고 도망갈지도 몰라.”
“만족의 깊이가 옅은가 보군. 가디안스의 매력을 체험할 새도 없이 고작 그거 만족하게.”
“학습능력이 빠르다고! 어째서인지…… 난 그렇다고.”
“타고난 천재로 살아왔어도 휴먼족 사이에서 통할 얘기지. 감이 여기서 그걸 들먹여? 자만도 정도가 있어. 단순히 운이 좋아서 여태껏 살아 남았군. 그런데 그 운도 끝인데?”
무표정에 숨겨진 묵직한 한 방이, 세희를 방바닥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마냥 가소롭게 쳐다보는 시선이, 살기도 적의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쉽게 죽일 수 있다는 숨겨진 의도가 세희의 모든 감각을 자극했다. 눈치가 빠르기 때문에 시아가 왜 화를 내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마력을 다루는 자로서 자기 정진을 우습게 아는 것. 이것은 마력을 구사하는 모든 이에 대한 모독이자 배신이다. 대자연이 허락한 특권을 감히 가볍게 취급하다니, 진리를 탐구해야 할 의무를 저버리고 범인(凡人)으로 떨어지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배덕자나 마찬가지지 않은가. 세희는 자신의 경솔한 발언을 바로 후회했다.
“휴먼족 순종끼리 뭉친 허접한 길드가 아니고서야, 휴먼족 순종이 길드에 입단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방금 전까지 자기 과신에 넘치던 녀석이 왜 이제 와서 꼬리 말고 내빼는데?”
시아의 말투는 무미건조했다. 감정적으로 몰아세우지 않고 단순한 문답만 할 뿐이었다. 때문에 세희는 그녀를 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실을 아니까.”
“무능력하면 내칠 거야. 하지만 처음부터 입단을 막는 쪽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일단 쓸만하다 싶으면 시험해 보고, 기대 이하면 그때 떨궈내면 돼. 그게 싫으면 네가 내게 네 가치를 증명해. 종족에 속박된 바보는 능력까지 속박하지. 넌 ‘휴먼족 순종’이냐 아니면 ‘박 세희’냐? 어느 쪽? 내가 원하는 건 ‘박 세희’지 ‘휴먼족 순종’이 아니야. 자, 넌 뭐야? 네 존재가 무어라고 자신 있게 말해줄 테야?”
“난……! 인형술사 박 세희. 그래, 세나의 언니라는 걸, 바보 지원보다 쓸 만한 인재라는 걸 가디안스에서 가디안스에게 증명하겠어.”
걱정과 긴장이 뒤섞여 상기된 목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시아는 고막을 자극하는 기분 좋은 울림에 답하듯이 격앙된 흥분을 겨우 감춘 미소를 지었다. 쥐었다 폈다 힘 조절을 하다가 마지막에 서서히 손에 쥐어 드디어 제 것으로 만들었다. 이 쾌감이 커다란 만족감이 되어 아지트에 있을 수밖에 없는 무료함을 전부 날렸다.
*정식 연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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