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2장 (3)

★은하수★ 2015. 5. 18. 13:51

세희는 말려들었다고 자각했지만 이미 엄청난 말을 내뱉은 후였다. 그래도 속 시원했다. 소문만으로 접했던 길드 가디안스에서 지식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니 이 얼마나 놀랍고 멋진 일인가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휴먼족 순종이라 안 될 것이라던 고민이 정말 쓸모없는 걱정이라는 것도, 이 세상 어딜 가도 마주치기 힘든 소울셰이드에게서 그토록 바라던 네크로맨서 기술을 직접 배울 수 있다는 멋진 혜택도, 다시 생각해보니 시아의 제안을 두고 한참 망설인 자신이 바보 같았다. 평소처럼 배짱 두둑하게 제멋대로 굴면서 덥썩 받아 챙겼어도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었다.

…….”

시아는 생글생글 웃다가 집무실 문 쪽을 응시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똑똑]

보스!”

대답하기도 전에 밀리엄이 멋대로 들어왔다.

우리가 지금 좀 바쁘달까 성가신 일이 생겨서 비상중이거든. 구체적인 이야기랑 소개는 조금 나중이 될 거야.”

시아는 오묘하게 인상을 찌푸리고는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 밀리엄을 잠깐 방치했다. 세희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역시나 먼저였다.

“500m 전방에서 산만한 살덩어리가 오고 있어.”

그렇게 가까워질 때까지 마력이 안 느껴진다고? .”

밀리엄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시아는 어이가 없어서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속박마법 정도는 너도 쓰잖아. 붙잡아 둬.”

안 그래도 200m 전방에 함정을 쳐뒀어.”

그러면 가서 대기해. 나도 곧…… 화타를 데려가지.”

보고를 마친 밀리엄은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올 때는 인기척 대용으로 보스에게 미리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몇 보 앞에서부터 발로 직접 지면을 달렸지만, 지금은 발소리 없이 고속이동술을 사용했다. 아지트 안에서는 전용 게이트 없이 워프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하지만 내부로부터의 적습을 방지하기 위해서라 감내해야 한다. 규모 있는 길드라면 아지트 내 직접워프 불가는 필수다.

구경해도 돼?”

세희가 선수 쳤다.

여기서 기다리라고 할 참이었는데. 마음대로 해.”

새 훈련생이 위험에 말릴 일은 없을 거라는 자신이라면 확실했다. 세상사 험난하다는 것쯤은 이미 경험했으니까 데려가도 이상한 풍경에 일일이 놀라지 않겠거니 생각했다. 멜로즈라도 사건 하나하나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다. 불친절한 세상에 익숙해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시아는 세희가 제대로 쫓아오는지 신경 쓰지 않고 화타가 있는 연구실로 갔다. 거의 왼쪽 어깨 위에 있는 작은 원숭이가 화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크루세이더에서 기대대로 직접 살덩어리를 보냈단다. 아지트 바로 앞까지 왔어.”

호오?”

마력이 안 느껴져.”

호오!”

화타는 말로만 감탄할 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성가셔 죽겠다고 표정으로 말했다.

물리력은 안 통한다고?”

밀리엄이 속박마법으로 붙잡고 있어. 내가 소멸시킬까? 가서 네가 직접 수집할래?”

메이린, 보스가 나날이 교활해지는구나.”

화타는 시아를 독하게 쏘아보고는 연구실을 나섰다. 아지트 주변에 수상한 마력은 없지만 밀리엄의 마법이 큼직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거길 향해 가면 될 일이었다. 마력과 영력이 희미할 대로 희미한 종족이 아무리 수백 수천 모여도 인기척 말고는 어떤 낌새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아지트 주변은 아군의 마력만 짙고 넓게 산재했다. 직접 눈으로 봐야 불청객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산 그 자체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커다란 걸 몰랐다고? 저 덩치만으로도 존재감이 엄청나잖아. 누가 순찰 돌았어?”

시아는 거대한 살덩어리를 보자마자 밀리엄의 멱살을 잡았다. 유쾌한 화타 역시 처음엔 어이가 없어서 단조로운 헛웃음만 뱉었다. 밀리엄은 변명 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서둘러 자신이 본 것을 짧게 설명했다.

안개랑 같이 갑자기 나타났다고.”

젠장. 저걸 워프로 보냈다고?”

경비가 소홀해서 독이 돌고 돌아 여기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그건 아니야!”

순순히 잡혀 있던 밀리엄은 화타의 도발에 발끈하며 시아의 두 손을 훅 뗐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멱살을 잡혔다. 이번에는 얼굴이 닿을 듯 말듯 가까웠다.

디레스랑 지원의 보고에 의하면 독을 마시면 바로 서로서로 살덩어리로 뭉친댔어. 여기서 저게 만들어졌대도 이상하지 않아. 인근 주민은? 확인했어?”

밀리엄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피부가 원체 흰 편이라 선명하게 티가 났다.

실러! 일루지온! 케른! 어정쩡하게 있지 말고 샅샅이 뒤져! 1km 이내 구역에 생존자가 있는지, 그리고 수상한 녀석이랑.”

보스. 물도 조사해. 독을 지하수에 풀었던 경우가 있었잖아.”

지금 세나가 없어. 제길!”

화타가 지적한 걸 시아가 모를 리 없었다. 과거에 크루세이더가 썼던 수법은 전부 기억하고, 특히 새 독에 대해 보고를 접한 후부터는 틈틈이 상기하고 있었다.

보스. 저 무지막지한 살덩어리는 내가 처리하지. 보스가 직접 물과 땅을 조사하면 금방 끝나잖아.”

화타는 제2단계로 각성했다. 휴먼족이던 그의 몸이 어둠에 뒤덮이더니 거대한 낫을 든 사신이 강림했다. 죽음의 요정 안쿠와 흡사한 모습이지만 그 풍채와 마력은 격이 달랐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나였다. 그가 플러스의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손에 꼽을 정도로 극히 드물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바짝 긴장했다.

조사는 빠르지. 만약 오염됐대도 정화는 못 해.”

확산을 막고 오염구역을 봉쇄하는 걸로도 충분해.”

, 그렇게 하지.”

시아도 수갑과 완갑까지 끊고 악마로 변했다. 그리고 자신이 제대로 화가 났음을 보여주려는 듯이 검디검고 큰 날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어둠의 정령왕과 상위 귀족급 악마. 끝내주는 조합이야. 이렇게 눈 호강하는 날도 오고, 장난 아닌데?”

세희는 양팔로 자신의 몸을 꽉 감싸 안고서 그들이 풍기는 무지막지한 마력을 견뎠다. 두 다리로 버텨 서서 숨을 쉬는 것이 이토록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조금만 방심했다간 육체와 정신에 동시에 충격이 와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렇다. 그들이 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 있을지 없을 의심스러운 신에게 감사하고 싶을 정도로 압박감이 심했다.

꼬꼬마들이 쇼크로 쓰러지기 전에 끝내자고.”

시아는 날갯짓 한 번으로 공중에 높이 날아올랐다. 살덩어리가 기어온 흔적을 따라 지상을 훑어보다가 아직 안개가 희미하게 남아 시야가 깨끗하지 못한 구역을 발견했다. 그녀는 곧장 그곳으로 날아가 사뿐히 착지했다. 길드원들이 곳곳을 수색하는 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니 이곳이 시작점인 게 분명했다.

시아는 자세를 낮춰 오른손 손바닥을 지면에 얹고 마력과 온 감각을 집중했다. 그녀가 있는 곳부터 살덩어리가 있는 곳까지 거리를 기준으로, 그녀 자신을 중심 삼아 빙 둘러 원형으로 공간을 잡았다. 반경 800m 조금 넘는 구역이 그녀의 한 손에 다 잡히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마력을 내보내며 지하 깊숙이 샅샅이 파악했다. 지하수가 흐르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고개를 갸웃했다. 좀 더 깊은 곳까지 탐색했다. 조그만 것도 놓치지 않도록 처음보다 정교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림자 속이나 그늘에 숨어 있던 어둠의 정령들이 왕의 기척을 읽고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화타는 관객이 늘어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왕으로서의 의무, 순도 높은 어둠을 하위 정령들에게 베푸는 일은 잊지 않았으나, 일일이 보듬으며 축복까지 하사할 여유는 없었다. 그는 살덩어리의 정면에만 검고 단단한 장벽을 세웠다.

밀리엄, 속박을 풀어.”

함정에 붙잡혀 있던 살덩어리는 밀리엄이 손가락을 한 번 퉁긴 것으로 자유가 됐다. 하지만 장벽 때문에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마력으로 조밀하게 짜인 방어벽이라서 흡수도 못하고 그대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느릿느릿 무의미한 저항만 할뿐이었다. 벽을 돌아서 갈 수도 있는데 오로지 벽을 밀기만 했다. 지성 없는 본능의 집합체라는 사실 하나를 증명하는 셈이었다.

성가셔도 단순해서 좋군.”

[!]

화타는 거대한 낫의 밑 부분으로 지면을 내리쳤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깊은 어둠이 살덩어리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어둠의 종속들이 추구하는 순수하게 검은 어둠이 거대하기만 한 살덩어리를 추한 곳 어느 작은 부분도 보이지 않게 꼼꼼히 감쌌다. 거대한 구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구경 나온 훈련생이나 모여든 정령들이나 탄성을 내뱉었다. 어둠 중의 어둠이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니 경이로움이 절로 솟아났다.

메이린, 잠깐 내려가렴.”

작은 원숭이는 화타가 아르카나로 변해도, 암만 강한 자연력을 구사해도 그의 왼쪽 어깨에서 꼭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화타에게서 자발적으로 떨어지는 건 그가 허락할 때뿐이었다. 메이린은 화타의 등을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가 탁탁탁탁 작은 몸을 기민하게 움직였다. 훈련생들 사이로 들어가 자신의 안전이 확보됐다고 생각하자 멈춰 서서 가만히 화타를 지켜봤다. 훈련생들은 화타의 작은 원숭이를 밟지 않기 위해 조금씩 거리를 뒀다.

[-]

거대한 낫이 허공을 길게 가로질렀다.

[- - -]

화타는 머리 위로 낫을 두 바퀴 휘두르고 다시 한 번 허공을 길게 갈랐다. 그러자 낫의 살벌한 날에 베인 공간에 검고 가늘고 긴 선이 그어졌다.

[- - - !]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세 번 휘두르고 허공선의 시작점에 낫의 날카로운 끝을 힘차게 꽂았다. 화타가 두 손으로 자루를 꽉 잡고 큼직한 날이 전부 박혀 들어가도록 힘을 줬다. 허공에서 콰직하고 두꺼운 판자에 흠집 나는 소리가 들렸고, 화타는 그대로 미리 그은 선을 따라 낫을 긁었다.

[콰가가가가각!]

허공에 부서지듯이 틈새가 만들어졌다. 화타가 낫을 뽑아내자 곧이어 마치 눈을 뜨듯이 틈새가 벌어졌다. 슈바르체트라움(der schwarze Traum : 검은 꿈-아공간)이었다. 인위적으로 슈바르체트라움을 새로 여는 것은 정령 중에서는 왕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며, 대자연 속의 생명체 중에서는 신족, 유사신족, 정령에게만 허락된 능력이다.

화타는 왼손에 낫을 들고 오른손으로 살덩어리를 가둬 만들어 둔 구를 조종했다. 거대한 구는 그 크기가 절반까지 압축되더니 화타의 오른손이 가리키는 대로 슈바르체트라움에 들어갔다. 그리고 슈바르체트라움은 검은 구를 먹은 후 살이 에릴 만큼 찬 안개를 내뱉었다. 거센 냉기 때문에 모두 시선을 돌린 사이 슈바르체트라움의 입구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메이린, 이리 오련.”

작은 원숭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타를 향해 종종종종 달려갔다. 화타는 휴먼족으로 돌아가 수갑과 완갑이 생긴 탓에 딸과 같이 아끼는 메이린을 자유롭게 반기지 못했다. 하지만 메이린은 개의치 않고 화타의 몸을 타고 올라 지정석인 왼쪽 어깨에 안착했다.

여기도 나름 정리 됐군.”

보스. 어때?”

실로 깨끗해서 찜찜해.”

시아는 화타와 마주보며 사뿐히 착지했다. 그녀도 바로 오리지널로 돌아가서 양팔에 구속체가 생겼다.

깨끗해?”

오염된 곳이 없어. 개인개인에게 직접 독약을 먹인 거야.”

호오? 의심 없이 덥석 받아먹는 순진한 자들이 아직도 이 근처에 살고 있단 게야? 호오!”

이 근처니까 우리 길드의 누군가로 변장하면 속이기 쉽겠지.”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아니면 물의 정령이 크루세이더에 가담했거나.”

우리가 세나를 데리고 있듯이? 호오!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야.”

30-40초가 지나자 시아도 화타도 구속체에서 해방됐다. 고작 제2단계에서 각성을 그치는 것도 다 이 귀찮은 구속체 때문이었다. 3단계부터는, 아무리 각성에 익숙하다고 해도 몸 전체를 휘감는 구속체의 잔존시간이 부담스러울 정도라서, 고작 두 팔만 희생하는 제2단계가 평상시 대응에 적절하다.

보스. 혹시 배신자 아가씨는 아니겠지?”

화타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밀리엄이었다.

물론 솔리가 하프 운디네지만 넓은 지역을 단시간에 정화하진 못해. 운디네도 시간이 걸리는데 하프 운디네가 되겠어?”

하긴. 세나 같은 네레이드 정도는 돼야지.”

시아는 밀리엄의 등을 다독였다. 화타는 경솔한 발언에 미안해서 제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비비듯이 슬슬 만지작거렸다.

그건 그렇고. 화타. 슈바르체트라움을 쓸 수 없는 녀석들이 살덩어리를 소멸시키려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뱀파이어의 화계 마법이든 드래곤의 브레스든 밀집도 높은 공격력이면…… 마력을 최대한 응축시킨 공격이면 한 번에 하나씩 소멸시킬 수 있겠어. 대신 타들어가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

화타는 현장에 나간 민과 디레스를 간접적으로 언급했다. 그들이 직접 나선 만큼 그들이 친히 해치울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스가 타임 리미트를 정했다. 가급적 빠르게 효율적으로 처리하려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공작급 뱀파이어면 순수 소멸마법도 구사할 수 있으니까 주변에 폐 끼칠 것 없이 끝내겠지. 항마력 없는 당순한 살덩어리잖아.”

시아는 물리력이 통하지 않은 살덩어리를 직접 조우하고 나니 현장에 있는 길드원들이 어떻게 대처할 지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를 짤 수 있었다. 일반 길드원들은 주변 피해를 줄이기 위한 방어에 집중하고, 4천왕 세 명이 각자의 특화 마법으로 살덩어리를 집중 소멸시킨다. 화타와 생각이 같았다.

다들 제3단계 이상 각성할 수 있는 술사니까 적절히 인원수를 나눠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4천왕만 고생할 필요 없어.“

화타는 겨우 이 정도 일에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가볍게 말했다. 시아도 유능한 그들을 믿기에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그래도 마법보다 물리력에 의존하는 길드원도 더러 있어서 자칫 경솔하게 평소대로 움직이는 열혈 바보가 툭 튀어나올까 걱정됐다. 굳이 예를 들자면 강 지원.

보스, 보고 드립니다.”

주변 수색에 나갔던 길드원들이 돌아왔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충분했다.

생존자 제로(0)?”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예상 대로라지만 직접 확인하고 맞닥뜨리면 속이 쓰린 법이다. 시아는 희생자가 되어버린 인근 주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느끼며 짙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워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됐으니 독약의 침투 경로에 집중하면 되겠군. 그런데! 오염된 땅이 없어! 물도 멀쩡해! 호오!”

아무리 신지식을 추구하고 연구를 생활화하는 화타라도 크루세이더의 독약은 질색이었다. 생명을 유린하는 독약은 아름답지 않다나 뭐라나. 그는 자신의 미학에 어울리지 않는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런데 길드의 일이니까 보스의 명령이니까 싫어도 가담해야 했다. 진심으로 적의를 있는 대로 다 드러냈다.

시아는 화타를 내버려두고 길드원들을 상대했다. 그녀도 배알이 꼬일 만큼 분하지만 이성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때엔 누구보다 침착했다.

독약으로 보이는 건?”

약의 형태로 된 건 없습니다.”

크루세이더도 많이 교활해졌네.”

시아와 화타는 동시에 길드 크루세이더를 비꼬았다. 밀리엄은 키득키득 웃으며 화타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메이린은 갑자기 옆에 다가온 밀리엄에 놀라 서둘러 화타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화난 기색도 겁먹은 기색도 없었다. 그녀도 엄연히 가디안스의 일원으로서 이런 일상적인 행동은 그러려니 하고 대담하게 받아들였다.

멋대로 가택조사를 해도 화낼 사람이 없으니까 다 뒤져보지 뭐.”

밀리엄.”

알아, 알아. 절대 가볍게 말해선 안 될 부분이라는 거. 하지만 보스. 이미 이렇게 됐어. 우린 그다지 감성적이지 않은 전사들이라고?”

누구 씨네 직속 부대가 경비를 소홀히 한 탓에 이 지경이 됐는데 잘도 말해.”

나중에 우리 캡틴한테 후려 갈겨 맞을 각오해.”

시아와 화타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연달아서 밀리엄을 구박했다. 참고로 화타는 제4천왕 크리세이스 하갈 밑에 있다. 원래 아지트 주변 경비는 크리세이스 직속 특별부대인 후방지원부대를 비롯해 디레스 직속 특별부대 중 수색부대 담당이다. , 화타가 말하는 캡틴이라면 크리세이스. 밀리엄이 채찍을 휘두르며 분노하는 그녀를 상상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크으…….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보스, 가택조사허가는?”

지금 당장 시작해. 의심되는 건 뭐든.”

보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밀리엄과 휘하 길드원들이 신속히 움직였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시아의 표정이 개운치 않았다. 아무리 철저하게 조사한들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전 독약은 한 번 먹은 것만으로는 미치지 않은 자도 있었기 때문에 피해자들에게서 몇 알씩 남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효능이 다르다. 한 알 만으로, 한 번 먹는 것만으로 끝난다. 그리고 전처럼 알약 형태로 일관된 것 같지도 않아서 더 불안했다.

간부가 들고 다니면서 먹이는 걸까? 주입하는 걸지도.”

시아는 가능한 방법이라면 전부 염두에 둘 셈이었다.

역시 보스도 지금 조사가 헛것이라고 생각하는군.”

직감상…… 그래.”

크루세이더의 12기사 중에는 어둠에 종속된 종족이 꽤 있으니까 밤을 틈 타 빠르게 일을 저지를 수 있지. 약효가 늦게 발현되는 거라면 도망칠 시간도 충분하고. 저번 독약을 제대로 개량하긴 했어.”

먹는 즉시 광기를 일으키는 것이 이전 독약의 유별난 특성이었다. 약이든 독이든 즉효성을 가진 것은 그만큼 섭취자에게 부담을 준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는 해독제든 중화제든 제조가 극히 까다롭다. 화타는 아직도 이 부분을 연구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독이 나타났다. 생명 자체를 사랑하여 의사이자 약학자가 된 그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어금니를 악 물었다.

작은 원숭이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화타의 번뇌와 고생을 접했다. 도로 그의 왼쪽 어깨로 내려가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작은 몸에 그 두 팔이 그를 위로한들 얼마나 통할까. 하지만 자그만 머리를 그의 귓가에 기대로 슬슬슬 비비며 화타를 진정시켰다.

착하구나, 메이린.”

시아가 다가가 작은 원숭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화타는 흠칫 거리더니 뒤늦게 눈치 챘다. 메이린의 위로도 보스의 존재도 무시할 정도로 자기감정에 푹 빠져있었다.

그 늙은 몸에 주체 못할 화는 피해야지.”

아르카나의 힘 덕분에 4, 500년은 더 살 수 있다고.”

곱게 늙은 할아버지 모습으로 그 정도 살면 완전 신선인데?”

도술 비슷한 마법을 쓸 수 있으니 신선이래도 말 되는군.”

화타는 픽 웃어 넘겼다. 그리고 평상시의 구 화타로 돌아왔다. 친척 할아버지로 따르고픈 따뜻한 미소와 살아온 시간만큼 축적된 카리스마. 메이린이 드디어 마음을 놓고 왼쪽 어깨에 배 깔고 걸친 자세로 잠들었다.

꼬꼬마에게 걱정을 끼치는 건 안 돼.”

보스는 꼬꼬마들에게 약해서 탈이야. 하긴, 메이린에 한해선 나도 할 말 없지.”

화타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의 끝부분으로 작은 원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메이린의 표정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로 자신을 진정시키고는 바로 눈매를 날카롭게 치켜떴다. 살덩어리를 조밀조밀 연구할 생각에 조금씩 흥분되기 시작했다. 미학에 반하는 성가신 일에 대한 거부감과 새로운 지식을 갈망하는 본능이 미묘하게 균형을 맞추며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형용할 수 없는 자극이 정신을 맑게 해줬다.

보스. 밖에 있는 녀석들이 새로운 살덩어리를 가져오면 말해. 역시 샘플은 많을수록 좋아.”

의욕이 생겼으면 이 이상 상관 안 할 거야. 마음대로 해. 어차피 한 개는 녀석들에게 말해둔 선약이잖아.”

역시 보스는 최고의 지원자야.”

단순 묵인인 걸.”

그게 가장 훌륭한 지원이라고.”

화타는 키득키득 웃더니 구경꾼 사이에 섞여 있는 조수들을 데리고 아지트로 돌아갔다. 그 많던 어둠의 정령들도 어느 샌가 흩어져 모습을 감췄다.

, . 너희들 나중에 또 오늘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멍 때릴 거야?”

훈련생들은 시아의 박수소리에 정신 차리고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아직 제3단계에 도달하지 못한 키메라들은 화타의 활약과 구속체가 1분도 안 되서 사라진 장면을 흥분조로 언급했다.

주변이 정리되고 시아 혼자 남았을 때 세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면 소재 윗옷이 살짝 축축했다.

식은 땀 흘릴 정도로 무서웠어?”

놀리는 듯한 대사지만 시아는 담담하게 던졌다. 세희는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입술을 굳게 닫았다.

적이 아니라도 그런 걸 가까이에서 직접 보면 역시 공포가 가장 먼저 느껴지겠지. 약자가 강자 앞에서 맥도 못 추는 세상이야. 당연한 현상이야.”

세희는 역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위험구역의 무법지대에서 오래 버텼다고 해도 고작 이거에 무서워하면, 결국 별 볼일 없는 녀석들만 상대해왔다는 뜻이야. 압도적인 상대를 만나보지 못한 채 살아남은 운 좋은 녀석이야, 너는.”

시아는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세희를 보고, 그녀에게 이 모든 것을 보여주길 잘 했다 싶었다. 그녀가 보겠다고 해서 내버려 둔 것이지만 말리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휴먼족 순종이기에 무력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할 뿐, 자기 자신이 실제로 얼마나 약한지 그리고 재주가 있어도 유용하게 쓸 줄 모르는 서투른 존재인지 몸소 겪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시아는 그녀와 대화하면서 그 미숙함을 알아챘다. 자신의 약함을 자각해야 성장할 수 있다. 시아는 자신의 노림수가 조금은 통한 것 같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 인형술이면 아까 살덩어리를 조종할 수 있었을까?”

지성과 이성이 없을수록 쉽게 통하니까 아마도?”

항마력도 없으니까 쉽게 술사의 낙인을 넣었겠군. , 본능으로 뭉친 덩어리라서 아주 쉽다고는 못하겠는걸.”

본능에 충실한 좀비도 다루는데?”

아아, 실례. 그랬지.”

위축되어 있던 세희는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완전히 시아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와아-. 사람 다루는 솜씨가 실로 대단해.”

들었다 놨다 장난 아니지?”

악질…….”

세희는 분하다는 듯이 시아를 노려보다가 금방 표정을 풀었다. 굉장히 개운했다.

욕심이 생겼어. 구경만 하던 녀석들보다 빨리 정식 길드원이 돼 보이겠어.”

그 정도 목표면 아마 꽤 빨리 달성할 수 있을 걸? 타고난 감이 좋거든.”

시아는 진심이었다. 특별한 재주 없이 그저 키메라에서 길드로 찾아온 지금의 훈련생들 보다는, 단연 세희의 가치가 더 높았다. 세희의 스승으로 점 찍어둔 실러가 그녀의 재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임시 입단이 정해지겠지만, 거의 확실하다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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