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1장 (2)

★은하수★ 2013. 12. 15. 20:42

 

 

집무실에 있는 전신을 비출 수 있는 커다란 거울이 새카맣게 변하며 귀족 악마가 한 명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순흑발과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바르베리트 후작가의 증표라면, 검보라색 머리칼과 보랏빛이 짙은 붉은 눈동자가 루시퍼 공작가의 일원임을 증명했다.

“공작의 막내아들, 델테 루시퍼. 이 바르베리트 후작에겐 무슨 일이신가?”

참고로 시아의 대부 레리 바르베리트가 바르베리트 후작가는 물론 그 아레 바르베리트 계열 악마들을 통솔하는 후작이었다. 그녀가 전 후작의 양녀라는 사실은 정식으로 공표되어 일찍이 바르베리트 후작가의 유일한 영양으로 인정되었다. 그런 중에 그녀가 전 후작의 심장을 먹고 바르베리트 후작가의 순수 혈통의 힘을 가진 키메라가 됐다. 그래서 그녀가 전 후작의 뒤를 이어 바르베리트 후작이 되는 데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악마가 원래 키메라에 비교적 우호적인 종족이기도 했지만 평범한 휴먼족일 때부터 그녀의 영특함과 유일하다시피 한 후작가 순수 혈통을 잃을 수 없다는 갈망이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에, 바르베리트 계열 악마들뿐만 아니라 다른 고위 귀족 악마들도 그녀를 받아들였다.

악마계 4대 공작가―베르제바브, 루시퍼, 아스모데우스, 레비아탄― 중에서 특히나 베르제바브와 루시퍼는 시아에게 우호적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베르제바브 공작은 1남 2녀 중 막내딸 엘리제 베르제바브를, 루시퍼 공작은 3남 중 막내아들 델테 루시퍼를 바르베리트 후작 전용 사신으로 정했다. 그래서 시아는 후작이 되자마자 양쪽에 공작가 두 가문을 검이자 방패로 두게 됐다. 그렇다 해도 그녀 본인이 귀족간 권력 저울질에 흥미가 없어서 사신들이 매우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만 있다.

“후작께서 후작으로서의 의무를 잊으신 듯하여 왔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소먼이 오는데 뭔 소리야? 그것보다 왜 갑자기 경어? 아― 엘리제도 오는군.”

델테는 포기한 듯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시아는 짓궂다 싶을 정도로 마음껏 배실배실 웃었다. 평소엔 자기 잘난 포스를 풍기며 남을 내리 까는 델테가 엘리제에겐 꼼짝 못하는 모습이 실로 볼만한 유흥거리이기 때문이었다.

순수한 어둠을 상징하는 순흑발 순흑안. 무릎까지 내려오는 밝은 와인색 플레어스커트를 감질나게 살랑거리며 엘리제가 모습을 드러냈다. 레이스로 귀여운 분위기를 강조한 흰 블라우스에 스커트와 같은 밝은 와인색 리본을 넥타이 대신 맨 모습이 위아래 완벽하게 정장을 갖춘 델테와 비교되면서 ‘심부름을 가장한 나들이’를 나온 듯했다. 악마계 밖이라면 어디든 즐길 줄 아는 이 아가씨가 공작에게 심부름도 받지 않았으면서 시아의 이름을 팔고 외출할 기회를 손에 얻은 것이리라. 델테는 보나마나 엘리제에게 붙잡혀 강제로 따라왔을 것이다. 이들이 시아를 찾아오는 경우의 8할은 이런 식이다.

“오랜만이에요, 후작님.”

제멋대로인 성격이라도 시아를 상대할 땐 언제나 경어를 사용했다. 공작가 영애로 태어났어도 어리광쟁이 막내인 자신과, 아주 어린 나이면서도 당당하게 작위를 가진 바르베리트 후작은 격이 다르다고, 언젠가 그녀가 말한 바 있다.

“두세 달 만인가? 내가 선물한 리본을 해주다니 영광인데?”

“역시 알아보시네요. 그럼요. 후작님의 빛나는 붉은 눈과 닮은 색인걸요. 이 엘리제에게 이 리본은 보물이라구요.”

엘리제는 시아의 왼쪽에 있는 소파에 차분히 앉았다. 시아는 저절로 엘리제의 목에 시선을 뒀다.

“역시 악마……라고 하면 이상하겠지. 상처, 흔적도 없이 다 나았군.”

“네.”

엘리제는 발랄하게 대답했지만 그날의 아픔이 기억났는지 왼손으로 목 오른쪽을 살며시 매만졌다. 그래도 표정은 시아를 위해 미소를 지켰다.

“수작. 엘리제가 준비한 소소한 선물입니다.”

델테는 엘리제의 눈치를 보며 화이트 와인 한 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안 쓰던 경어를 억지로 쓰려니 얼굴 근육과 혀가 마비되려는 모양이었다. 시아는 엘리제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이 실로 재미있으나 웃음을 꽉 참았다.

“나 미성년자야.”

“이건 무알콜이에요. 그래도 잘만 드시잖아요?”

“음. 악마계에서는. 여기선 민이 감시하니까 안 돼.”

“융통성 없지만 착실하고 능력 있는 분이죠. 저 바보가 그분의 반이라도 따라가면 좋을 텐데 말이죠.”

델테는 엘리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반응했다.

“착실하고 능력 있잖아.”

“어머, 네가? 요새 자기 과신이 늘었다더니 정말 한심할 정도로 바보가 됐구나. 이런 친구를 둬서 죄송해요, 후작님.”

엘리제는 가벼우면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아는 더 이상 무리였는지 있는 힘껏 소리 내어 웃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야,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오, 배랑, 큭, 턱이랑, 푸하하하하하하하!”

델테는 고개를 획 돌려서 짜증 가득한 얼굴을 감췄다. 엘리제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시아가 이토록 쾌활한 모습을 보이니 아무렴 어떠냐는 식으로 방긋 미소 지었다.

“콜록, 하핫, 큭큭, 굉장해, 엘리제. 어마어마하게 성가신 일이 터져서 방금 전까지 기분 별로였는데, 딱 좋은 때에 날 즐겁게 해줬어.”

“어머. 후작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기 그지없어요.”

엘리제는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시아는 그녀가 한참 연상이지만 멜로즈를 대하듯이 머리를 쓰다드었다. 엘리제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졌다.

“아이, 참. 저, 이 근처에서 조금만 놀다 돌아갈게요.”

그녀는 부끄러운 나머지 벌떡 일어나서 곧바로 거울로 들어갔다.

“귀여워, 귀여워. 넌 절대 동의하지 않겠지만.”

“닥쳐, 꼬마 후작.”

아니나 다를까 델테의 말투가 곧바로 원래대로 돌아갔다. 줄곧 엘리제의 뒤에 서 있다가 지금이 되서야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털썩 앉았다. 오른 다리를 왼 다리에 꼬아 올리고 등을 거만하게 젖히며 짜증 가득한 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엘리제의 신변을 지키는 조건으로 같이 온 거 아니었어?”

“썩어도 공작가 악마야. 다치기야 하겠어? 그리고 난 진짜로 심부름이 있다고.”

“흐음―. 엘리제, 다쳤었는데― 최근에.”

시아는 특유의 무표정으로 델테를 흘겨봤다. 그는 그날이 떠올라 순간적으로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바꿨다.

“이거. 아버지께서 너한테 주라고.”

엄지 두 배 굵기에 손바닥 길이 되는 은빛 크리스털. 라티카. 마력이 희소한 종족이 사용하는 오르골은 마족 전용의 라티카를 응용해서 만든 개량 아이템이다. 크리스털의 크기 차이며 정교한 마법 구사를 요구하는 만큼 라티카의 성능이 몇 십 배 더 좋은 것은 당연하다.

“레젠(lesen=read).”

주문을 외자 크리스털 주변에 붉은 빛의 아우라가 생겼다. 그리고 루시퍼 공작의 메시지가 시아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임무를 마친 라티카가 악마의 푸른 불꽃으로 흔적 없이 타버리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델테는 고작 이 짧은 순간을 위해 악마계와 물질계를 오가는 것이다. 시아가 편한 통로를 만든 덕분에 귀찮은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지만 일 자체가 성가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델테. 루시퍼 공작가의 어마어마한 정보력은 매번 감탄스러워.”

지금의 시아는 바르베리트 후작보다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델테는 부친이 일족을 동원해서 가디안스를 지원해주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시아의 미묘한 분위기 변화를 그러려니 하고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네가 휘하 악마들을 방치하고 자력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게 안쓰럽다고 걱정하시는 그 분이 뭐라셔?”

“우리는 사정이…… 됐어. 뭐, 레비아탄 공작이 클러치 사마엘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으셨대.”

베르베리트 계열 악마는 현재 눈에 띄게 쇠퇴하여 후작급 악마는 시아가 유일하고, 나머지 자작 및 남작급도 몇 없다. 시아가 가디안스의 보스로서도 열심이지만 후작으로서 소임에도 정성을 쏟는 덕분에 지금 선에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되도록 바르베리트 계열 악마들을 키메라의 생존전쟁에 가담시키지 않고 있는데, 그들은 충의를 보이기 위해, 실로 충의롤 가지고 그녀에게 자신들을 써 달라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미묘하게 피가 이어진 가족들을 휴먼족의 친 가족들처럼 안전하게 지키고 싶을 따름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델테는 부친이 남긴 메시지가 탐탁지 않은 듯했다.

“공작이 일부 하급 귀족을 지원하는 일이야 평범하잖아.”

“클러치 사마엘이 길드 크루세이더의 보스가 된 시점부터 레비아탄 공작의 동선이 이상해졌다는 점이 걸렸거든. 그리고 레비아탄 계열 악마들 중 일부가 좀비 쇠퍼(Zombi Schöpfer=좀비 메이커 Zombi Maker)를 만든다는 소문도…… 사실이래. 그 내용도 있었어. 실은 이게 그 결정적인 증거지만.”

“하핫! 같은 악마지만 미쳤군.”

루시퍼 공작가와 레비아탄 공작가가 은근 슬쩍 대립관계를 이어가는 중에, 이번에 루시퍼 쪽에서 찾아낸 정보는 레비아탄을 철저하게 규탄할 소재가 될 것이다. 분명 베르제바브는 루시퍼의 편을 들고 아스모데우스는 중립을 주장하면서도 이득을 계산하지 않을까. 새로운 대공을 정하는 시기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언제나 보다 더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공․후작 중에서 대공을 정한다는 규율에 의해 시아를 지지하는 베르제바브와 루시퍼, 스스로 대공을 노리는 레비아탄, 현 대공이 속한 아스모데우스. 이하 귀족들도 바르베리트와 레비아탄으로 반씩 갈린 상황에서, 시아가 그토록 악마계에 가는 것을 꺼리는 이유가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정도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델테. 레비아탄 공작이 숨기고 있는 손님에 대해선 너한테 들으라는데, 무슨 말이야?”

“아, 그거. 약간의 의문거리?”

그는 라티카를 한 개 더 꺼냈다.

“내가 본 거야. 아무래도 이상해서 키메라의 눈으로 확인해줬으면 해.”

“기억에 의한 간접적인 장면은 키메라의 눈도 소용없다고. 레젠.”

시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아주 작은 정보라도 소중한 형편이라 일단 라티카를 읽었다.

“어?”

라티카가 소멸하고 동시에 적잖이 동요했다.

레비아탄 공작의 비밀 손님이라는 나이트메어. 고작 요정급 존재가 공작에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이상하다면 이상하다. 휘하 백작급 악마가 공작 몰래 손님을 해코지 할만하다. 그런데 갑자기 손님이 레드 드래곤으로 변했다. 수갑과 완갑을 거뜬히 풀고! 그런데 변신 마법에 잔재주를 썩으면 얼마든지 키메라인 척 할 수 있다. 그래서 키메라의 눈이 중요한 것이다.

“백작급 악마를 먹어치우곤…… 왜 그리폰이 됐지?”

“그 그리폰 양팔에 구속체가 생겼다가 바로 소멸된 건 봤어?”

“봤으니까 이상하지. 오리지널이 그리폰. 하지만 그리폰은 변신마법을 쓰지 못해. 나이트메어가 될 수 없어. 그런데 나이트메어가 구속체를 끊고 레드 드래곤이 됐고, 그리폰으로 변한 후 구속체에서 해방되었다고?”

시아는 이해하기 힘든 그 장면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되짚었다. 같은 의문만 덧씌워졌다.

“키메라는 원래 오리지널에 플러스로 딱 한 종족만 더해지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머리 굴리고 있잖아.”

진지함으로 인해 시아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 살짝 주름진 미간과 빛나는 눈동자.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하고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자만하는 델테라도 이런 시아 앞에서는 경외심이 생겼다. 과거 그의 발언을 살짝 빌리자면, 아버지를 우러러보던 어릴 적 자신으로 돌아가는 감각이라고 한다. 처음엔 꼬마 후작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사신 일이 지금은 나름 진심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그리폰…… 그리폰…… 나이트메어와 레드 드래곤. 그리폰…… 그리폰…….”

시아는 놓친 것이 있을까 최선을 다해 기억을 되감았다. 역시 처음과 똑같은 의문만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짜증과 불쾌함으로 화가 날 법도 하나 특유의 냉정함 덕분에 평정심을 유지했다. 금방 욱하고 민감하게 굴면 어디 만인의 우두머리로 설 수 있겠는가. 강한 힘보다 타고난 성격이 그녀를 존경 받을 만한 인물로 세워 올려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폰…… 그리폰…… 그리폰?”

그녀는 델테를 향해 시선을 급하게 바꿨다.

“네 가설은? 공작의 반응은?”

“우리도 의아할 뿐이야.”

“공작이라면 가설을 세웠을 텐데 일부러 입을 다물었고.”

“날 보낸 후에 그랬을지도 모르지. 내가 여기 오기 직전까지도 ‘이상해’라고만 하셨어.”

델테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투였다. 시아는 등을 꼿꼿이 펴고 팔짱을 꼈다. 은근슬쩍 살기도 드러냈다. 그리고 미소.

“극소수의 키메라만 직감적으로 아는 게 하나 있어. 환상의 존재, 절대 키메라 펜타곤이 실존한다는 사실. 나와 클러치 사마엘처럼 마지막 5단계까지 각성하면 어느 순간 종족의 감으로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게 돼.”

“그래서 옛날부터 펜타곤을 살아 있는 신으로 숭배하는 집단이 있는 거라며.”

“아, 너한테도 얘기했었군. 맞아, 얘기했었어.”

시아는 흥분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살기도 조금 짙어졌다.

“펜타곤은 원래 오리지널이니 플러스니 할 게 없이 어떤 종족이든 될 수 있어. 이건 상식이니까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이기서부터는 가디안스 독점 정보! 그런데 어째서인지, 자기들끼리 구별하기 위해서인지 그냥 취향인지, 한 가지 모습을 유지하며 살았다고 해. 그리폰과 닮은 조두마인이 그 중 하나. 아, 솔리가 크루세이더에 붙으면서 독점정보가 아니지 이거.”

시아는 별 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을 이었지만 델테는 점점 눈을 크게 뜨며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순종이라 다스 엔데에 접근할 수 없는 그에게 이 정보는 그야말로 혁명이었다. 유레카를 외친다면 지금이고 싶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본 게 펜타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거야?”

“그러겠지. 솔직히 펜타곤도 구속체가 있는가는 좀 의심스럽지만, 키메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구속체를 구현했다면야……. 여튼, 절대 키메라라는 가설이 아니면 네가 본 건 대자연의 이치로써 설명이 안 돼.”

살기가 한 층 더 짙어졌다. 당장이라도 민이 무슨 일이냐며 달려올 정도로 깊은 어둠이 그녀의 흥분을 증명했다. 델테도 이 분위기에 물들어 심장이 조여드는 흥분을 만면의 미소로 드러냈다.

“그래도 추측일 뿐.”

냉정을 되찾은 시아는 서서히 살기를 거뒀다. 델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직접 봐야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비아탄 공작의 손님을 만나게 해줘. 소먼한테도 일러둘 테니 악마계에서 재미나고 의미 깊―은 일을 꾸며봐. 때가 무르익으면 불러. 지금 급한 일이 있긴 한데, 그 때면 꽤 정리될 법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유능한 인재들에게 아지트를 맡기면 그만. 자, 날 즐겁게 해주겠지? 델테 루시퍼.”

“사신 델테 루시퍼의 존재 의의가 바로 그거라고, 바르베리트 후작. 그자가 진짜 펜타곤이면 좋겠지만 설사 실망하는 결과가 나와도 레비아탄 공작을 희극의 주연스로 세울 수 있다면 얼마든지 후작을 위해 움직일 거야.”

“우와! 사악한 얼굴.”

델테는 흥분이 흘러넘쳐서 어쩔 줄 몰라 송곳니까지 보이며 미소를 한 가득 피웠다. 엘리제가 봤으면 천하다고 구박했을지도 모른다.

“최근…… 아니 오늘 다스 엔데에서 펜타곤의 거점지가 새겨진 기둥을 찾아냈는데 서두를 해석하는 도중에 클러치 사마엘한테 당했어. 녀석 어쩌면 먼저 그 기둥을 해석했을수도. 그러니까 날 발견하자마자 기둥을 부쉈지. 평소 같으면 거래를 하거나 임시휴전이라고. 흐음―. 이렇게 된 이상 다스 엔데에서 그 기둥을 다시 찾아내겠어.”

시아는 슬며시 이를 갈았다. 안 그래도 사마엘한테 당하던 순간 심히 분했는데, 조금씩 정보 파편이 모이자 다시 분노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래도 일에는 순번이 있는 법. 크루세이더에서 새로운 문젯거리를 화려하게 터트렸기 때문에 다스 엔데에 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보스로서 당연한 처사였다. 그리고 서두르면 일을 망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천천히 조금씩 상대보다 앞서거나 상대의 목을 조를 때는 우아한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 악마의 미덕. 지금은 믿음직스런 이들에게 맡기고 다스 엔데에 그 기둥이 다시 생길 시간만큼 조용히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버지께서도 기꺼이 도와주실 거야. 형님들도 거들어주실 지도 몰라.”

“교묘한 책략이라면 역시 루시퍼지. 아무렴. 현 대공 이전에 5대 연속 대공을 배출한 것과 역대 대공의 7할이 루시퍼 출신인 건 엄연한 사실. 뛰어난 정보력과 그를 이용한 빛나는 책략은 강조하고 강조해도 부족해. 나의 찬사를 공작께 꼭 전해줘.”

“평소답지 않은 과장이지만, 나쁘지 않아. 후작의 귀한 말씀 저희 공작께 반드시 전하겠나이다.”

델테는 키득키득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시아도 오래 앉아 있다가 오랜만에 일어서서 두 팔을 높이 뻗어 기지개를 켰다.

“엘리제, 잘 데려가.”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그는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귀찮다거나 곤란한 것과는 다른 무언가였다. 그날이 다시 떠오르면서 순간 오감을 자극하는 걱정. 그리고 자책.

“매번 하는 말이지만, 하나 밖에 없는 동갑내기 소꿉친구를 소중히 하라고.”

“그 왈가닥. 플레어 누님처럼 여왕 기질이 있으면 모를까 새장 속 공주님의 전형이라고. 알잖아. 사신이 되는 걸 내가 적극 반대했단 거.”

“그래서 너한테만 엄격하게 굴면서도 너한테 유독 의지하잖아.”

시아가 엘리제를 연하처럼 대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델테는 단독행동이 많지만 엘리제는 언제나 델테 동반인 것도, 그가 그녀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보여도, 공작들의 부탁과 동시에 그 스스로 그녀의 보호자 대리를 자처했다고 한다.

“그날 그대로 네가 다쳤으면 엘리제가 사신 관뒀을지도.”

정곡이었다. 델테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 말 못하고 고개만 돌렸다.

약간의 침묵을 깬 건 시아였다.

“얼른 가.”

“그래야지. 베르제바브 공작께서 막내딸을 학수고대 하실 테니.”

“공작께서 그리 감싸니까 엘리제가……. 아, 왔다.”

이토록 적절하게 나타나는 것도 놀라운 재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델테는 바로 거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금 가려고 했어.”

“그 가게 오늘 쉰대. 그냥 성으로 돌아가자.”

엘리제는 적잖이 아쉬워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던 만큼 실망을 숨기지 못했다.

“조만간 또 올 거야.”

“응.”

“능숙하네―.”

델테가 엘리제의 머리를 쓰다듬기 전에 시아가 그를 놀렸다. 그는 어중간한 위치에서 멈춘 손으로 엘리제의 어깨를 잡고 거울로 들어가도록 그녀의 몸을 휙 틀었다.

“가보겠습니다.”

미묘하게 강조된 음성이 시아를 더욱 즐겁게 했다.

“후작님, 또 올게요.”

“얼마든지.”

시아는 엘리제에 맞춰 같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두 악마의 모습이 사라진 직후 그 손은 곧바로 수갑과 완갑에 구속되었다. 고작 모습만 변했던 것이기도 하고, 역시 5단계까지 각성한 키메라답게, 휴먼족으로 돌아가고 단 몇 초 만에 구속체들이 사라졌다.

“후우―. 일! 일하자, 일.”

바깥일은 유능한 인재들에게 맡겼으니 아지트에 남은 보스가 할 일이라면 서류업무밖에 더 있겠는가. 만 하루하고도 반나절 방치했다고 책상 위의 서류들이 멀미날 정도로 가득했다. 소수 정예 운영이라고는 하나 가디안스를 뒤에서 받쳐주는 이들과 가디안스가 지원해주는 이들이 무사할 수없는 숫자이기 때문에 나날이 서류업무가 늘고 있다. 이제는 소수 정예 길드가 아니라 대형 커뮤니티의 핵심조직 같기도 하다.

가디안스와 긴밀한 인연을 가진 레스토랑, 바, 만물상 등에서 보낸 영업보고 및 손님들에게서 얻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가디안스와 동맹을 맺은 소형 길드에서 보낸 소소한 주변 이야기.

가디안스와 제휴를 맺은 여러 종류의 연구소에서 보낸 중간보고 및 기타 사소한 이야기.

시아의 시선을 잡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평화로운 내용으로 가득 찬 서류를 다 읽고 나니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속독에 자신 있다고 자부하다만 벌써 여섯 시간이 훌쩍 지나다니, 만만치 않던 서류의 양을 다시금 실감했다.

“묘인족 구역에서 살덩어리의 실체를 보고 녀석들 어떤 반응을 보였으려나. 으읏차.”

계속 앉아있느라 굳은 근육을 기지개를 시원하게 켜며 풀었다.

“재미난 구경거리에 참가 못한 건 역시 씁쓸한 걸.”

시아는 발을 힘차게 굴러 회전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눈을 감고 앞머리가 휘날리는 정도의 바람을 느끼는 것도 무료한 시간 중의 자그만 유흥이었다. 속도가 차차 느려지면서 멈추고 나니 책상 뒤에 있어야 할 커다란 유리창이 보였다. 밖이 어두워진 탓에 거울처럼 보이지만 바깥 풍경이 흐릿하게 신기루처럼 시야에 잡혔다. 시아는 몸을 틀어 다시 책상과 마주봤다.

“타임리미트, 이틀하고 몇 시간인가? 이 지루한 시간을 뭐 하면서 보낼까? 크루세이더에서 살덩어리 무리나 광기를 뒤집어 쓴 키메라 부대를 보내준다면 이 울적한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될 텐데……. 뒤처리하기 귀찮으니까 될 수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도 하고.”

집무실에 혼자 있는 것이 벌써 지루해졌는지 누군가에게 말을 걸듯이 속말을 밖으로 끄집어냈다.

많은 길드원이 밖으로 나갔다고는 하나 여전히 아지트에 남아 있는 길드원도 있다. 4천왕 직속 각 특별부대에 소속되지 않고 수련생 내지 훈련생 취급을 받는 어중간한 길드원 다섯 명이 훈련실에, 화타 밑에서 연구에 매진하는 길드원 세 명이 화타와 함께 연구실에, 귀여운 공주 멜로즈가 자기 방에, 크리세이스 대신 임시로 아지트 경비를 맡은 밀리엄과 그 휘하 대원 몇 명이 교대를 기다리며 로비에.

마음 내키는 곳에 찾아가서 설렁설렁 돌아다녀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시아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바로 생각을 접었다. 한낮이면 보람찬 모습드을 볼 수 있지만 이 시간이면 대부분 긴장을 풀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전투를 준비해야하는 ‘길드’라지만 아지트는 ‘집’이나 마찬가지. 쉬고 있을 그들에게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달라고 투정부릴 수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야행성인 녀석…… 둘은 나갔겠군. 오늘 같은 그믐은 야행성들이 활개치기 딱이지.”

따지고 보면 플러스가 악마인 시아도 야행성이다. 그래서인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에 이마를 딱 붙이고 더욱 컴컴해진 밖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으응―.”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고개를 휙 들고 집무실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밤 산책!”

민이 있었으면 휴먼족으로서 학업에 지장이 생긴다며 말렸을 것이다. 학기말 고사만 제대로 치르면 출석일수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초 자유분방한 학교이기 때문에 길드에 집중할 수 있지만, ‘가능하면 등교’를 주장하는 성실한 민 때문에 악마의 풍류나 마찬가지인 밤 산책을 매번 저지당하고 있다. 민도 야행성 종족 뱀파이어면서 밤 산책을 참고 있기 때문에 어린애처럼 응석부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본능에 충실한 시아는 몰래 나가서 후에 혼나는 것을 선택한 적이 다수.

아지트며 근처 바깥 모두 인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멀리 나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아지트에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눈치 채고 날아갈 수 있는 거리까지 느긋하게 돌아다니자고 스스로 제한을 걸고 아지트 밖으로 나섰다.

“후읍― 하아―.”

차갑게 식기 시작한 밤공기를 폐 깊숙이 담아보니 단번에 속이 개운해졌다. 고민하지 말고 바로 나올 걸 하며 가볍게 자신을 탓하면서도 나오길 잘했다며 곧바로 칭찬을 더했다. 기분이 풀어진 만큼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위험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깊은 밤. 휴먼족 여고생이 혼자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위험천만해 보이겠지만, 그녀가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라는 것을 알면 그녀 자체가 위험물이라는 사실도 더불어 깨달을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르고 당당하게 접근하는 자가 분명 있겠지만, 가디안스의 아지트가 위치한 위험구역(다수의 종족이 섞여 사는 구역)에서 시아를 모르는 자가 있겠는가. 설사 있다 해도 십중팔구 다른 구역에서 최근에 넘어온 겁 없는 양아치일 것이다. 그들의 배짱과 대담함을 치하하기 위해 그녀가 가볍게 상대해준 횟수가 벌써 열 손가락을 넘고 넘어 세기 귀찮은 정도가 됐다.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가 한창 확산되었던 시절엔 밤 산책이 아니라 야간 경비였지만, 다른 구역에서 독을 입수해 위험구역에 들어와서 사고를 치는 녀석들이 상당했다. 물론 낮밤 가리지 않고 광기로 폭주하는 키메라를 여기저기서 시시각각 발견할 수 있던 지옥의 시기였으니, 그 때 때려눕혔던 자들은 당연히 머릿수에 들어가지 않았다. 다만 혼란기를 틈 타 독약을 사용하지 않은 평범한 양아치, 조폭도 활개 쳤다는 것이 부수적인 골칫거리였다.

“이야― 그 때 낭인족 무리는 발정난 개떼 마냥……. 성가시고 짜증나기만 한 저급들이었지.”

마침 걷고 있는 길이 당시 낭인족이 20에 가까운 수로 무리지어 나타난 곳이었다. 휴먼족 여자아이가 이끄는 길드 따위 별 거 아니라며 패기 있게 침입하려 했으나 아지트에 당도하기 전에 마침 멜로즈와 산책 중이던 시아에게 걸려 광역마법으로 한 방에 빈사사태가 됐다. 정보 부족이 초래한 농담거리도 안 되는 해프닝이었다. 단 한 명의 여자아이에게 겁 없는 젊은이들이 떼 지어 세 번 더 달려들었으나 똑같은 결과뿐이었다. 시아가 악마 모습을 드러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이후 위험구역에 한 발짝도 들어오지 않았다.

“10년에 한 번 있는 발푸르기스의 밤에 예상대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터지기도 했지. 뭐, 어떤 질 나쁜 장난이라도 용서되는 날이니까 나도 동참했지만.”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성스러운 축제, 발푸르기스의 밤. 10년에 한 번 열리는 만큼 대륙 전체에서 성대하게 치른다. 그리고 악질적인 장난이 용서 되고 누가 더 유쾌하면서 질 나쁜 사고를 치는가 시합하기도 한다. 다만 이를 빙자한 범죄는 절대 용서 받지 못하며 발푸르기스의 밤에 참석한 자들에게 뭇매를 맞는다. 아니,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 발푸르기스의 밤에 범죄를 일으키는 것은 성스러운 축제를 더럽혔다는 죄도 더해지기 때문에, 마법을 구사하는 종족으로서의 자긍심이 하늘 끝까지 치달은 모두가 축제 분위기에 취한 채 범죄자의 죽음을 목청 터지도록 부르짖는다.

마침 4년 전이었다. 그리고 길드 가디안스를 만들고 만 1년하고도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다.

 

 

 

*정식 연재지
 - 현재 이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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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의 망상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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