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당신은 사랑하는 가족의 모든 것을 안다고 자부합니까? 정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에졸로페 왕국의 휴먼족 구역에 요새 이런 선전문구가 나돌아 다니고 있다. 아무런 그림 없이 흰 종이에 검은 글씨로, 아니면 시커먼 종이에 새빨간 글씨로 큼지막하게 쓰여선 곳곳에 붙어 있다. 가게 유리문, 건물 벽, 담 등등.
“20년쯤 전에도 유행했었지.”
어둠을 두른 듯 전신에 순흑색 옷을 입은 악마가 좁은 골목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을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내려다보는 12세 소녀를 천천히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녀는 순순히 그에게 안겼다. 그는 성한 곳이 없다는 말이 딱 맞게끔 심한 부상을 입어 피비린내를 사방에 퍼트렸지만, 그녀는 그를 위해 울며 기꺼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건 휴먼족 순종이 키메라를 말살하기 위해 만든 광고야.”
그는 벽을 짚으며 걸으면서 손에 걸린 종이를 차례차례 뜯었었다. 그 일부를 골목 시궁창에 가볍게 던지고 두 팔로 힘껏 소녀를 안았다. 마지막이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더 바짝 끌어당겼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의 딸. 살아라. 끝까지 살아라.”
후작급 악마가 휴먼족 순종 소녀를 딸이라 불렀다. 양부? 대부? 어느 쪽이든 이 세계에서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쿠광!]
골이 흔들릴 정도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무능한 녀석들. 벌써 여기까지 밀렸단 말이야?”
고통으로 찡그린 그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쩍 거렸다. 하지만 전신이 너덜너덜해서 그 빛은 한 순간뿐이었다.
“크읏. 바르베리트 가에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것도 걱정이지만 네가 더 걱정이다. 미안하다, 시아.”
그는 악마족 중에서 바르베리트 계열 악마들의 우두머리인 레리 바르베리트 후작이었다. 혈통으로 치면 4대 후작 중에서 가장 상위에, 실력으로 치면 4대 공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유능하고도 유명한 자다.
그에게 안겨 있는 소녀의 이름은 진 시아. 그녀의 부모가 한창 취재에 열을 올리던 중, 켄타우루스 구역과 묘인족 구역 경계의 분쟁지역에 있을 때 우연히 그곳에 있던 후작에게서 그의 우연한 변덕 덕분에 화를 면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 시아를 임신하여 만삭이던 그녀의 모친이 후작의 또 한 번의 변덕에 의한 호의 덕분에 안전한 곳에서 그녀를 낳을 수 있었다. 그리고 후작의 세 번째 변덕. 시아의 부친이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진 한 마디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12년 동안 시아의 대부로 성의껏 행동했다.
“너에게 자랑스러운 아버지였을까?”
생명력이 떨어지는 만큼 목소리가 작아지고 발음이 조금씩 샜다. 시아를 안은 두 팔도 점차 느슨해졌다.
시아는 그가 죽는 것이 두려워 그 대신 자신이 세게 그를 끌어안았다. 얼굴과 옷이 그의 피로 붉게 물들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12세의 소녀가 가족의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바들바들 떨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것은 자연스럽다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소리 내어 울 수 없었다. 가까이에 자신들을 습격한 적이 있기 때문에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됐다.
죽지 말라고 떼를 쓸 수 없었다. 그가 왜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똑똑히 봤기 때문에 그가 비록 후작급 악마라도 버티기 힘들다는 사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여야 했다.
“시아. 살아라. 내게 자식이라곤 너 하나지만, 너에겐 부모도 동생들도 있잖아. 친구들도…….”
“레리 아빠.”
시아는 뒷말을 잇지 않고 이를 악 물었다. 가슴 속을 무언가가 무겁게 뭉글뭉글 휘저었다.
[쿠광!]
[후두두두둑]
가까운 상공에서 폭발음이 들리더니 뒤이어 살덩어리 몇 조각이 지면으로 처절하게 떨어졌다. 적이 벌써 코앞에까지 왔다.
후작의 호흡이 옅으면서 불규칙하고 심장박동도 느릿느릿 약해졌다. 그의 가슴에 귀를 붙이고 있는 시아는 그가 죽어가는 과정을 피부로 민감하게 모조리 느꼈다. 무력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잇몸이 상하고 턱관절이 부서지도록 어금니를 꽉 깨물며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다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었다.
여러 마법이 난무하고 곳곳이 파괴되는 격한 상황에서, 대부의 죽음 직전에, 시아는 눈물범벅에 새빨개진 두 눈을 곧게 뜨고 후작과 마주봤다. 그는 의식이 흐릿해지는 중에도 장렬한 결심을 품은 눈을 보고 피식 웃었다.
[부시락]
시아는 배의 묵직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오른손을 뻗으니 ‘사람의 머리’로 추정되는 것이 만져졌다. 머리칼이 짧다면 십중팔구 막내 동생 호아다. 깨우러 왔으면서 깨우지는 않고 ‘자는’ 누나에게 응석부리는 중이었다. 숫자상으론 15살이라도 삼남매 중 막내다보니 여전히 다섯 살처럼 굴었다. 아마 누나들이 전부 받아주는 탓일지도.
“언니- 일어났어?”
리아까지 들어왔다. 그리고 시아가 말하기 전에 눈치껏 호아를 끌어내렸다. 호아는 배실배실 웃고 있었다.
“잠꾸러기 큰누나.”
“지금 몇 시야?”
“두 시.”
오후 두 시. 새벽 네 시에 귀가하자마자 침대 위에 엎어졌다지만 꽤 오래 잤다.
시아는 상체를 일으키고 두 팔을 높이 들어 길게 기지개를 켰다. 가늘지만 근육이 탄탄한 두 팔, 침대 위에 길게 뻗어 있는 두 다리, 10대 중반으로 훌쩍 큰 동생들. 자신이 17세 현실로 돌아왔다는 증거가 가득했다. 그래도 꿈에서 다시 겪은 그 날의 여운이 가슴에 남아있었다.
“실은 더 자게 두고 싶었는데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
리아가 투명한 크리스털을 한 개 내밀었다. 엄지와 비슷한 굵기와 길이에, 상하 양 끝이 뾰족하게 세공된 것으로, 깊숙한 안쪽에 은백색 소형구슬이 들어 있었다. 통칭 ‘오르골’이라 부르는 메시지 전달 아이템이다.
“어젯밤 일에 대한 뒷정리 보고라면 나중에 해도 되는데 말이지.”
“그건 아닐걸? 화타 할아버지가 가져왔거든, 이거.”
시아는 길드에서 온 연락이라니까 자신의 비서 노릇을 하는 제1천왕 류 민이 보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아주 뜬금없는 인물이 가져왔다고 하니, 같은 길드원의 연락이라도 편히 들여다 볼 엄두가 안 났다. 그 ‘구 화타’가 보냈다는데 멀쩡한 이야기는 아닐 거란 감이 척추신경을 저릿하게 자극했다.
“레젠(lesen).”
시동어를 말한 것과 동시에 크리스털 안의 은백색 구슬이 빨갛게 변했다.
“보-스-. 심각한 근육통과 경련에는 이 구 화타가 만든 특제 도마뱀 탕을 추천하겠어. 푸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삼남매의 귀를 괴롭혔다.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10초나 계속되더니 고의적으로 뚝 끊겼다. 그리고 앞선 한 마디와 아주 대조적인 무게 있고 진지한 말투가 이어졌다.
“보스. 내일까진 나오지 마. 그냥 푹 쉬어. 보스가 없어도 가디안스는 잘 돌아가니까.”
오르골은 여기서 끝났다. 구슬도 원래 은백색으로 돌아갔다.
시아는 악마의 푸른 불꽃으로 오르골을 흔적 없이 태우고 다시 드러누웠다. 아주 약간이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데 뭔가 생각났는지 누운 지 1초 만에 다시 일어났다.
“리아. 화타가 이걸 직접 집으로 가지고 왔어?”
“응. 그리고 바로 나갔어.”
리아는 두 손으로 호아의 얼굴을 감싸 잡고 반죽하듯이 볼을 이리저리 문질렀다. 호아는 멍하니 정신을 놓고 얌전히 당했다.
“녀석이 움직인다고?”
시아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뒤로 젖혀 방 천장을 노려봤다. 하지만 동생들이 깊이 생각할 틈을 주지 않았다. 리아는 손으로 시아의 두 눈을 가리고, 호아는 시아의 다리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아가들?”
“놀자!”
동생들이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직접 보지 않아도 목소리만으로 표정을 알 수 있었다. 기대감에 부풀어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으리.
“어머, 깼어?”
어머니가 세탁이 끝난 옷들을 두 팔 가득히 들고 방문 앞을 지나갔다.
“어제 그렇게 피터지게 싸웠는데, 우리 집은 어찌 이리 평화롭냐.”
“평범한 가정집이니까.”
리아와 호아는 마치 해답지를 읽듯이 토씨 하나 어긋나지 않고 입 맞춰 대꾸했다. 시아는 피식 웃고는 ‘그렇군’이라고 맞받았다.
진 가 삼남매의 부모는 시아가 태어난 후 종군기자를 그만 두고 일반 사회지 에디터로 직업을 바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세간에서 말하는 일반적이고 평범한 가정을 구렸다. 그리고 1년에 한 명씩 3년 연속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들을 위해 험한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대부가 있는 시아는 예외였지만 말이다.
“한 차례 전쟁 뒤에 휴가니까― 쉬고 싶어.”
“놀자.”
“더 잘래.”
“노올자아!”
리아는 목에, 호아는 허리에 매달렸다. 16, 15살의 나이에 앞자리 숫자 ‘1’이 빠진 듯이 투정부렸다.
“뭘 할 건데?”
동생들의 승리였다. 시아는 등근육이 욱신거리도록 피곤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동생들을 위해 시간을 쓸까 했다.
진짜 6살, 5살이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시아의 좌우를 한쪽씩 맡아 꼭 붙었다. 별다른 짐 없이 맨몸으로 나와-지갑 하나 정도는 챙겼겠지만- 거리를 천천히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시아가 길드 가디안스를 챙기느라 바쁘기 때문에 동생들에게는 그녀와 같이 지내는 시간 자체가 귀했다.
그녀가 원래 대부 바르베리트 후작을 따라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여러 인물들을 만나느라 집에 있는 시간이 적었지만, 5년 전 그 사건 이후, 길드 가디안스를 만들면서 더욱 바빠졌다. 그녀의 가족이 그녀의 방을 남겨두긴 했지만 실제로는 아지트에서 살았다. 가끔씩 조용하고 편한 곳을 찾아 본가에 들를 따름이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한 그녀 나름의 최선책이었다. 이 세사에 99.99% 순종들이 0.01% 존재하는 혼종-키메라-를 못 잡아 먹어 안달이니, 키메라인 시아가 휴먼족 순종인 피 섞인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급적 접촉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런데 보통의 순종들이 제 가족이라도 키메라가 됐다면 극단적으로 꺼리는 반면에,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여전히 장녀로 받아들였다. 애초에 그녀가 키메라가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결정이 지극히 그녀답다고 인정했다.
저녁 늦은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거리의 사람 수도 늘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우리도 아빠랑 엄마 부르자. 오늘은 외식. 응?”
호아가 시아의 손을 꼬옥 잡았다. 리아도 그렇게 하자면서 시아에게 팔짱을 끼고 더 바짝 붙었다. 동생들에게 약한 시아는 미소를 지은 채 가벼운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마음대로 해.”
OK사인이 나자마자 호아는 눈에 들어온 라인 부스(말하자면 공중전화. 90%이상이 마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혹은 텔레파시나 염사 등 연락계 마법이 빈약한 종족을 위해 만들어진 원거리 통신 아이템.)에 잽싸게 들어갔다. 상기된 얼굴로 즐겁게 재잘거린 지 대략 20초. 간단하게 통화를 끝내고, 다시 잽싸게 누나들에게 돌아왔다.
“아이라 아일리아에서 만나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아이라 아일리아. 이들 가족이 가장 오랫동안 애용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다.
삼남매는 방향을 틀어 약속장소로 향했다. 완전히 노을 졌던 하늘은 그 고요한 붉은색을 음미하기도 전에 차츰 밝은 빛을 잃고 어두운 밤하늘로 변해갔다. 몇몇 눈에 띄는 듯 사람들에게 묻히는 듯 존재감이 애매한 자들이 그 어둠에 기대기 위해 슬금슬금 거리로 나오는 시간이었다. 시아의 눈에는 그들이 더 도드라지게 보였다.
“언니 눈에는 세상이 다르게 보이니까 힘들겠어.”
리아가 손가락으로 시아의 볼을 부드럽게 찔렀다. 어느새 무표정으로 굳은 표정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시아는 전혀 문제없다는 듯이 생긋 웃어보였다.
“그 반대야. 보이기 때문에 편해.”
시아는 길드 생활을 하고 온갖 항쟁을 직접 겪었던 덕분에 온 감각이 예리해졌다. 본종(오리지널)은 인간이나 아종(플러스)이 악마라서 그 덕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키메라만의 눈도 있다.
―키메라의 눈에는 키메라가 보인다.
순종은 키메라가 본종에서 아종으로 혹은 아종에서 본종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지 못하면 존재 자체만으로 순종과 키메라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런데 키메라는 눈으로 감으로 구별할 수 있다. 곳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0.01%가 유일하게 99.99%의 부러움을 사는 것이 바로 이 능력이다. 키메라가 생존을 위해 끼리끼리 모여 비밀 길드를 결성할 수 있는 것도 서로 알아보기 때문이다. 오리지널-플러스 조합까진 알 수 없지만, 순종과 키메라를 구별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툭하면 키메라 몰살이니 시끄럽지만 순종이 이 구별을 못해서 결국 흐지부지다. 아직 순종에게 키메라를 판별하는 마법이나 도구가 전혀 없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다.
“혹시 있어?”
호아가 주변 사람들의 귀를 의식해 일부러 뺀 단어는 당연히 ‘키메라’다.
“없어. 그런데 휴먼족 구역 중에서도 타종족 혐오지대인 여기에 돌아다니는 바보들이 있어. 완충지대랑 분명히 분리됐는데도 여전히 겁 없는 녀석들이 있단 말이지.”
키메라 혐오가 전종족 공통이라면, 타종족 혐오까지 갖추고 있는 이기적인 종족도 있다. 휴먼족은 타종족을 차별적으로 혐오 혹은 선호하는 편이다.
“들키면 무진장 시끄러워지겠지?”
“아주 해로운 녀석들은 아닌데 여기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되겠지. 운 좋으면 구역추방이고.”
시아는 동정심도 혐오감도 없이 ‘그냥 그런 사실’을 대하듯 건조하게 말했다. 이미 자기 손으로 수많은 목숨을 꺾어봤기 때문인지, 자기 자신이 매순간 목숨을 위협받는 입장이기 때문인지, 그녀가 처벌을 가장한 살육 대해 여타 일반인들처럼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상이었다.
“여기가 독점지대(=타종족 혐오지대)니까 말 안 하는데, 우리는 완충지대에 살아서 다행이야. 아이라 아일리아도.”
키메라인 시아도 받아들였는데 타종족과의 공존을 받아들이는 일쯤이야 별 거 아니었다. 리아와 호아는 자신들도 휴먼족 순종이기 때문에 휴먼족의 뿌리 깊은 사고방식을 알고 그 사고를 이해하지만, 역시 자기들에게는 이해타산적인 이기주의로 보였다. 실제로 휴먼족의 기본사고방식에 회의감을 가진 휴먼족이 완충지대를 만들었으니, 그들의 사회가 얼마나 복잡다양 다사다난한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진 가 삼남매가 패밀리 레스토랑 아이라 아일리아에 들어가자마자 그들을 맞이하는 종업원이 어느 테이블을 가리켰다. 먼저 와 있던 양친이 그곳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재밌게 놀았어?”
“놀긴. 그냥 다리 아프게 돌아다녔지.”
시아는 미소 속에서 무심한 말을 뱉었다. 부친은 꽤 재밌었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듯이 후후후 웃었다.
주문한 음식이 테이블 위에 차려지고, 서로 알고 있는 이야기, 모르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중구난방 자유롭게 나눴다. 다섯 명 모둔 모인 것이 다섯 달 만이라지만 그 공백의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언제나처럼 시아는 듣거나 대답하는 역할이었다.
“시아가 문제아면 학교에 불려가는 걸 핑계로 얼굴 한 번 볼 텐데.”
“엄마. 내가 문제아였으면 좋겠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시아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생긋 웃었다.
“내가 갑자기 전교등수가 10등 밖으로 밀려나면 학생-학부모-교사 3자면담이 있을지도.”
“그거 괜찮네.”
양친의 이구동성에 시아는 예상했던 대답이었는지 피식 짧게 웃을 뿐이었다.
에졸로페 왕국의 정중앙에 있는 수도를 기준으로 왕국을 반 접으면 시아의 본가와 길드 아지트가 딱 붙는다. 쉽게 말해서 본가는 동쪽 어드메에 아지트는 서쪽 어드메에 있다. 왕국이 주요 3왕국 중 하나일 만큼 워낙 거대해서, 시아의 가족들은 시아를 만나러 갈 염두를 못 냈다. 아지트도 왕국에 또 하나 있는 휴먼족 구역에 속하지만 맨몸으로 한없이 무력한 휴먼족이 타종족 구역을 넘고 넘어 다른 휴먼족 구역으로 가는 것은 웬만해선 무리다.
“내가 오랜만에 오긴 했구나. 재미없는 농담도 다 듣고.”
시아는 물이 1/3정도 들어 있는 유리컵을 들고 손목을 뱅글뱅글 돌렸다. 컵 안의 물이 그를 따라 작은 소용돌이를 이뤘다.
순간 그녀의 표정이 무표정으로 굳었다. 그리고 손장난을 멈추고 컵을 소리 나지 않게 테이블 면에 올렸다.
“밖이 보통 어수선한 게 아닌데?”
부친의 기자의 감은 정확했다. 곧이어 ‘보통’이 아닌 일이 가게 안에 들이닥쳤다.
[콰직! 챙그랑!]
유리창이 달려있던 가게 문이 완전히 박살났다. 거대한 트윈 배틀 엑스가 먼저 시야에 들어오더니 곧이어 미노타우루스가 거칠게 등장했다. 얼굴을 보니 감정조절을 못하는 것 같았다. 속된 말로 좀 맛이 간 상태였다.
“각성 후유증이군.”
시아는 미노타우루스가 키메라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키메라가 오리지널에서 플러스로 변하는 과정 ―각성. 락(Lock), 클로즈(Close), 체인(Chain), 와인드(Wind), 소울테이커(Soul-taker). 총 5단계 중에서 어디까지 가능한가에 따라 우열관계가 정해진다. 3단계 체인 이상은 0.01% 소수의 돌연변이 중에서도 극소수만 존재하기 때문에 순종들도 쉬이 손대지 못하고 경외한다. 그런데 자신의 한계 이상의 각성에 도전하다가 실패하는 경우 각성 후유증으로 이성이 날아가서는 그저 괴물이 된다. 같은 키메라라도 각성에 실패해 폭주하는 괴물은 동류로 취급하지 않는다. 역시나 같은 각성 후유증이라도 원래대로 돌릴 수 있는 경우와 제거해야만 하는 타락의 경지가 있는데, 전자라면 주변에서 어떻게 도와주느냐에 따라 그냥 원래대로 돌아가거나 상위 각성에 성공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론에 따른 경우의 수일뿐이지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상위 각성은 무리지만 완전히 맛이 간 게 아니니까……. 자비를 베풀어 볼까?”
시아는 얕은 볼에 반쯤 남아 있던 크림스프를 쭉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족들은 가게 안이 심히 어수선해도 시아를 믿고 요지부동 식사를 계속했다. 가게 주인과 종업원 두 명 역시 시아를 알기 때문에 평화롭게 보일 정도로 침착했다.
“성깔 끝내주는 군.”
그녀가 나서려는 무렵엔 이미 가게 입구 근처에 있던 테이블 두 개가 박살나고 바닥이 음식물 및 식기로 난장판이었다. 손님들 중에 다친 사람은 아직 없었다. 미노타우루스가 나타나자마자 가게 구석으로 신속하게 피신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심심하면 내가 놀아줄 수도 있어.”
미노타우루스는 배틀 엑스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는 듯 순간 정지했다. 제거해야만 하는 괴물로 타락하지 않은 덕분에 그녀도 자신과 같은 키메라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하지만 그녀를 알아본 것과 스스로를 멈추는 것은 별개였다. 눈앞에 있는 것이라면 뭐든 부수고 죽이는 파괴충동이 피를 타고 전신으로 빠르게 휘돌았다.
“죽어라, 계집.”
[부웅!]
“움직임이 쓸데없이 커.”
시아는 단 한 발짝만으로 여유롭게 피했다. 그녀는 아직 오리지널(휴먼족)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캉!]
미노타우루스는 고막이 터질 듯한 괴성을 지르며 다시 시아를 공격했다. 그런데 그녀를 철저하게 감싸고 있는 방어막에 보란 듯이 막혔다.
“드래곤 비늘 하나 못 떨어트리겠군.”
그녀는 방어막 밖으로 오른팔을 쑥 뻗어 올리더니 배틀 엑스의 자루와 양날머리의 이음새를 잡았다. 그리고 방어막을 해제하는 동시에 배틀 엑스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고, 그것을 균형축 내지 반동으로 삼아 미노타우루스의 명치를 휘돌려 찼다.
[쿵― 콰직 콰직]
파괴충동에 지배당해 세련된 움직임을 구사할 수 없던 미노타우루스는 그대로 뒤로 엎어졌다. 바닥에 산재한 음식물과 식기 파편이 등에 닿으면서 수북한 털을 통해 불쾌한 감촉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모욕감과 불쾌지수가 얽혀 충동감정이 더 켜졌다.
“계- 집-!”
[휙]
“큭.”
시아는 그가 일어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에게서 뺏은 배틀 엑스를 그의 목에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들이밀었다. 이 상황에서, 휴먼족 성인 남성이 두 손으로도 힘겹게 들 수 있을까 의심이 되는 것을 10대 후반 소녀가 한 손으로 거뜬히 다루는 것이 가장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휴먼족 주제에.”
“뭐야, 아직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야?”
“이게…….”
“닥쳐라. 이 하등한 것.”
시아에게서 풍겨 나오는 아우라가 미노타우루스를 제압했다. 그는 본능적 감각이 예민해진 만큼, 그녀가 자신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단번에 깨달았다. 섣불리 덤볐다간 말 그대로 한 순간에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하면서 파괴충동이 억제되기 시작했다. 상위 각성에 실패하고 폭주도 잠잠해졌기 때문에 구속체(각성할 때 오리지널의 신체 일부 혹은 전신을 휘감아 구속하는 것으로, 이것을 끊어야 각성이 진행되어 플러스로 변할 수 있다. 각성 단계마다 구속체가 추가된다.)가 그의 몸을 휘감았다. 양 손목을 구속하는 수갑, 양 팔을 붙여 구속하는 완갑(腕匣), 전신을 듬성듬성 휘감은 쇠사슬. 그에게 나타난 구속체는 3개였다.
“3단계 체인에 실패했군.”
그가 구속체에 감겨 오리지널로 돌아가자 시아가 들고 있던 배틀 엑스도 사라졌다.
“뭐야. 너도 휴먼족이잖아.”
시아는 꼼짝 못하고 바닥에 누워 있는 그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그의 어깨 옆에 쭈그려 앉았다.
플러스에서 오리지널로 돌아가면 각성 때 끊었던 구속체가 다시 생기는데, 플러스 상태에서 얼마큼의 힘을 사용하고 얼마나 오래 플러스로 있었는가에 따라 구속체 유지시간이 다르다. 그런데 자신이 그 각성에 익숙하거나 자신을 기준으로 별로 힘을 들이지 않았다면 구속체는 금방 사라진다.
미노타우르스였던 휴먼족은 상위 각성에 실패했기 때문에 한두 시간은 족히 구속된 채 있을 것이다. 전부 자기 탓이라서 이 때 공격받는다 해도 별 수 없다.
“나보다 나이가 위인 것 같은데 3단계 이상 키메라는 오리지널 상태에서도 플러스의 능력을 일부 끌어 쓸 수 있다는 걸 몰라? 이쪽 계통에 있으면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데 말이지. 정작 키메라 본인이 모르면 어떡해?”
시아는 그를 한심하다는 듯이 내려다봤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아가씨가 최소한 3단계 체인 이상 각성한 키메라라는 사실을 깨닫고,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고개를 휙 돌렸다. 이미 그녀 앞에서 꼬리를 내렸으면서 연상자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나이를 아무리 높게 잡아봐야 23살? 올해 17살인 시아와 별 차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힘의 논리․힘의 우열이 절대적인 세계에서 나의 위아래는 장애거리 축에도 못 꼈다. 아무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보스. 이젠 여기 치워도 될까?”
가게 주인이 자루가 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다가왔다. 그 뒤에는 종업원 두 명이 각각 대걸레와 손걸레를 들고 대기 중이었다.
“이 녀석은 내가 치워줄게.”
“보스?”
시아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서 그의 가슴 쪽에 있는 체인 한 줄을 움켜잡고 그를 난장판에서 끌어냈다. 손걸레를 들고 있던 종업원이 그의 몸에 붙어 있는 여러 가지를 꼼꼼히 털고 닦았다. 그리고 그가 시아를 귀찮게 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그 사이에 대걸레를 들고 기다리던 종업원이 시아에게 간단한 보고를 했다.
“길드에는 제가 연락했습니다. 제1천왕께서 사람을 보낸다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녀석은 예의상 그렇게 말하고 본인이 직접 온단 말이야. 으아아…….”
시아는 오른손을 가로로 넓게 펼쳐서 엄지와 중지로 양쪽 관자놀이를 꽉 눌렀다. 민이 또 정중하고 침착하게 자신을 과보호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두통이 자동으로 생겼다. 눈 아래의 얇은 피부에 경련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분명히 말해둘게. 길드에 연락해도 되는 건 성가신 일에 휘말린 길드원이 혼자 수습 못 하는 걸 발견했을 때나 우리 도움이 필요할 때야. 그리고 이런 간단한 일에 헤맬 바보는 일단 가디안스엔 없어. 더군다나 보스인 내가 알아서 잘 해결할 텐데 왜 굳이 연락한 거야?”
한풀이 하듯 조목조목 늘어놓는 중에 가게 입구 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났다. 그녀가 곁눈질로 시선을 옮겨보니 확신했던 대로 그가 와 있었다.
“보스께서 직접 나설 필요 없는 사소한 일에 귀한 손을 쓰셨다면서요? 대신 처리하러 왔어요.”
길드 가디안스의 사천왕 중 제1천왕 류 민이 아주 상큼한 미소를 만면에 피웠다. 그 역시 휴먼족. 180cm를 거뜬히 넘는 장신에 상급사회 교양을 익힌 듯한 걸음걸이로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속은 키메라다. 당연히 3단계를 족히 넘은.
“그가 가게에서 소란을 부린 미노타우루스군요.”
민이 그를 향해 손을 뻗자 시아는 바닥을 흘끔 쳐다보곤 그를 자신의 뒤쪽으로 휙 던졌다.
[철퍽]
그가 난동을 부리지 않은 곳이었는데 바닥이 깨끗한 물로 흥건했다. 손님이 물을 엎었다고 하기엔 수도관에서 물이 샌 것처럼 양이 많았다.
“보스?”
“늦었어. 동료가 있나봐. 그를 데리러 왔어.”
시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넓고 얕은 물웅덩이에서 물의 상급정령 네레이드가 솟아나왔다. 그녀가 나타나서 그를 데리고 물속으로 사라지기까지 고작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마력 자취 역시 민이 파악할 틈도 주지 않은 채 깨끗하게 지웠다. 그녀의 존재를 일찍부터 눈치 채고 있던 시아라면 그들을 찾을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놓아줄 생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추적하지 않았다.
물웅덩이 근처에 있던 리아와 호아는 난생 처음 본 네레이드에 감탄 중이었다. 순식간이었지만 매끈한 생김새와 기민한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보-스-. 어째서…….”
“다친 사람은 없잖아. 그치, 오너.”
“보스의 말씀이 맞습니다.”
“들었지? 자, 얼른 돌아가.”
시아는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는 동물을 쫓아내듯이 손사래를 쳤다. 민은 양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한숨을 짧게 뱉었다.
*정식 연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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