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각성
농성전. 그것은 요새를 사수하며 외부의 적을 안으로 들이지 않는 전법이다. 요새 안에 비축된 식량과 물의 양으로 농성전의 승패가 갈린다.
단순 수비전. 외부의 적을 적극적으로 상대하면서 요새가 무너지지 않게 지키는 전법이다. 식량보다는 무기의 양과 성능으로 승패가 좌우된다.
소수 정예로 뭉친 길드 가디안스에게는 정통 전법이 어울리지 않았다. 아지트가 부서지건 말건 싸움을 걸어온 상대는 반드시 그에 응당한 보복을 할 따름이었다. 건물 한두 개는 얼마든지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자존심은 회복할래야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벌써 사흘째다. 소형 헌터 일족이 둘 셋씩 무리를 이뤄 가디안스의 하나밖에 없는 아지트를 침범하려고 했다. 갖은 역경을 딛고 수많은 기술을 익힌 헌터라고 해도 순혈 인간이나 엘프에 불과했다. 두 종족이 뒤섞여 각성에 따라 힘이나 능력이 확연히 달라지는 키메라 앞에서 지상의 약성(弱性) 순혈이 얼마나 버텨낼까? 키메라는 상식적으로 오리지널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플러스를 고른다. 그러니 각성을 적절하게 오가면 순혈이 아무리 뛰어나도 키메라 혼자서 순혈 무리를 제압하는 것 따위 일도 아니다.
길드 가디안스가 소수 정예면서 특수 부대를 나눴다지만, 그들은 전원 기본적으로 우수한 전투요원이다. 키메라로서 극복하기 어려운 1차 관문, 체인급을 길드원 전원 넘겼다. 그만한 능력을 가진 순혈들도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국가급 전력이 이들을 덮쳐도 위협거리도 못된다.
“오늘은 팡제브 가랑 제 족이네요.”
민이 시아에게 따뜻한 레몬티를 한 잔 내밀었다. 바닐라를 두 방울 떨어트려 향부터 달콤했다.
“그러게. 엘프 순혈 집단이랑 인간 순혈 집단이 합공하는 모습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야. 아주 처절하게 덤벼드는 모습이 가관이야.”
블랙-레드 오드아이가 아지트 옥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봤다. 지면을 밟으며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적들을 천한 노예 보듯 했다. 그리고 일부러 옮겨놓은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로 꼬아 올리고, 제 1천왕이 손수 탄 차를 마시며 거만한 포스를 한껏 풍겼다.
“죽어라, 인간의 수치 진 시아!”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두두두두]
군용 4인승 헬기가 멀지 않은 상공에서 귀한 백금 탄환을 수십 발 연사했다. 하지만 시아에게 닿지 않았다.
“너 같은 놈이 보스께 접근하는 건 100년 빨라.”
오늘의 보스 수비 담당은 인간-미노타우르스 키메라인 지원이었다. 미노타우르스의 뛰어난 육체와 드워프 특제 양날 도끼는 전전날 담당과 전날 담당 못지않게 완벽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움직이는 견고한 수비요새 겸 공격요새가 되어 적의 공격이 보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일절 허락하지 않았다.
[서걱]
[펑!]
헬기는 공중에서 두 동강이 나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안에 있던 제 족 두 명은 탈출에 실패했다.
“오늘도 착착 이기고 있네요.”
“강 족 수장은 의외로 머리가 나쁘나봐. 이런 식으로 백날 덤벼봤자 우리 쪽 스태미나는 안 깎이는데 말이야.”
“일족 내의 키메라를 업신여기던 자에요. 인간 순혈과 키메라의 절대적인 차이를 모르는 게 당연해요.”
민은 접시 위에 아몬드 쿠키를 먹기 좋게 담아왔다. 그리고 접시를 든 채 가만히 시아의 옆에 서있었다.
길드 가디안스의 아지트는 부지가 왕곡의 중심왕성만큼 넓다. 그리고 한 층 당 높이가 5m인 3층짜리 요새다. 상공에서 사선으로 내려다보면 질릴 정도로 넓고 두툼한 정방형 토스트 같이 생겼다.
보스와 제 2천왕이 옥상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을 때 나머지 4천왕은 2층 테라스에서 인간-네레이드 키메라인 세나에게 차 대접을 받고 있었다. 싸움 앞에서는 몸이 근질거리는 S프린세스 크리세이스마저 느긋하게 티타임에 동참했다.
“보스가 레드 드래곤하고 바르베리트 계 악마하고 가이스 계 배파이어 쪽에 원군을 요청할 필요가 없었던 거 아냐?”
밀리엄이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꼽았다.
“강 족이나 길드 에덴이 직접 나타나면 보스께서 준비하신 문으로 바로 올 거라는데?”
크리세이스는 새침한 표정으로 스콘을 베어 물었다.
“마침 전원이 스트레스를 풀 구석이 필요했는데 잘 됐잖아. 봐, 다들 맘껏 발산하고 있다고.”
디레스도 200명에 가까웠던 적이 반 이하로 순식간에 줄어드는 광경을 유유자적하게 즐겼다.
“헌터 일족도 강 족이나 파우스트 가를 제외하면 100명 이하 소수 일족이잖아. 그런데 겨우 하나나 두 일족씩 방문하다니 무모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어머. 바보 밀리엄이 똑 부러진 소리를 다 하네.”
“임마. 이건 꼬맹이라도 알아.”
제 3천왕과 제 4천왕은 사소한 한 마디에도 곧바로 맞부딪혔다. 중재역인 솔리만 없다 하면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우리 고문들은 어디 가셨나? 어제도 그제도 싸움만 시작했다 하면 코빼기도 안 보이는군.”
“엘더 어르신하고 휴 어르신은 뒷마당에서 테니스를 치고 계세요.”
“푸하하하하! 어지간히 심심한가 보군.”
“응원용이라면서 후방지원 부대 전원을 데리고 가셨는데 괜찮으려나요?”
세나의 순진한 한 마디에 디레스의 웃음이 딱 멎었다. 그는 고개를 빼고 싸움을 슥 훑어봤다.
“어쩐지 애들 수가 적다 싶더니만 그것들이 빼돌린 거군.”
아지트 앞마당에서 한창 전투 중일 때 고문이라는 작자들이 황당한 일을 벌였지만 제 2천왕은 이 정도 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후방지원 부대가 빠졌다고 해서 인원 부족으로 밀릴 가디안스가 아니었다.
“한 명당 둘 셋 씩 상대하기 딱 좋잖아 뭐.”
크리세이스가 양 팔을 높이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마침 지상이 점차 조용해졌다.
싸움이 시작되고 겨우 30분이었다. 신경전과 선전포고까지 하벼서 30분이다. 순수한 싸움 자체는 10분도 안 걸렸다. 무기를 가진 인간이나 엘프가 무기를 사용하기 전에, 성가신 개인 공방전이 되기 전에 전투력이 우월한 종족의 힘으로 제거하는 전법으로 통일한 덕분이었다.
“이건 식후 운동 수준인데?”
“키메라의 자존심을 걸고 나약한 종족을 상대로 시간이 걸리는 일 따윈 있어선 안 돼.”
밀리엄은 크리세이스의 말에 동의하는지 부정하는지 애매한 웃음 소리를 냈다.
옥상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시아가 지상이 조용해 진 것에 맞춰 티타임을 마쳤다. 오후의 여유는 여기까지였다.
“오늘도 생존자 제로……. 어제 잔여물까지 깨끗하게 청소하라고 해.”
“Ja, für Sie meine Boß."
시아는 워프를 통해 집무실로 돌아갔다.
“학교 다니랴 추적자들을 내쫓으랴. 너무 정신없게 사는 거 아니야?”
집무실에 손님이 와 있었다. 펜타곤 중 장미 마녀라고 불리는 플루가 학교에서 유지하는 모습에서 의외의 복장을 하고 집무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상체에 딱 달라붙는 선홍색 탱크탑과 펑키한 검정 반바지 그리고 무거워 보이는 메탈 벨트. 진한 흑장발을 길게 늘어트리기까지 해서 전체적으로 날씬해 보였다. 일부러 그런 외모를 선택했다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말이다.
“네 인간형도 미인형이면서 왜 굳이 하프엘프형으로 다니는 거야?”
시아는 플루가 집무실에 있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플루가 워낙 예고 없이 곳곳에서 나타나는 터라 일일이 지적했다간 피곤하기만 할 뿐이었다.
“엘프가 인간보다 아름답잖아. 이목을 끌기도 쉽고. 그래도 귀 모양 때문에 백 보 양보해서 하프엘프로 고른 거야.”
“그 배려에는 백 번 감사히 생각할게. 용건은?”
“스피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았어.”
펜타곤끼리도 서로의 거처라든지 동향을 철저히 숨겼다. 이름값 한다고,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자취를 감추면 펜타곤 중에서 가장 윗서열이라는 플루도 숨은 자를 파악하기 곤란했다.
“스피는 자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야. 마지막까지 자고 있던 건 토드거든. 우-연히 스피가 토드를 깨우는 걸 보고 뒤를 밟았지.”
“천하의 플루도 뒤를 밟는 짓을 하는구나.”
“내가 무슨 절대자도 아니고, 알고 싶은 게 있으면 그에 맞게 움직여야지.”
플루는 집무실에 단 하나뿐인 화병을 감상하다가 피식 웃었다. 시아를 자신의 ‘장난감’으로 찍은 ‘자칭 주인’답게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든지 무한히 귀여워했다.
시아는 플루가 어떻게 나오든 이제 그러려니 포기했다.
“숨어 있는 곳만 알아내고 에덴을 어떻게 할 지는 안 물어봤지?”
“말 걸기 전에 내 기척만 느끼면 도망갈걸?”
“작작 괴롭혀. 오죽 무서우면 펜타곤씩이나 되는 존재가 같은 펜타곤한테 겁을 먹어?”
“실례야. 내가 괴롭히는 건 페라이랑 토드야.”
“지금 그 발언에 태클 걸어도 되?”
“하지 않는 편이 신상에 좋아.”
플루의 미소에 무서운 여유가 흘렀다.
시아는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다. 페라이를 상대하는 것보다 플루를 상대하는 편이 확실히 편하지만, 플루랑 있다 보면 항상 플루의 페이스에 휘말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도, 플루가 원하는 대로 끌려 다니는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휘말린 기분이었다.
“스피가 직접 에덴을 처리하는 편이 가장 빠른데.”
대화가 다시 펜타곤 중 스피 중심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만든 장난감 병정단을 제 손으로 부술 정도로 천진하게 독한 녀석이 아니야. 아무리 장난감 병정단이 이질적으로 변했어도 옛 정 때문에 절대 손 못 대. 그런 녀석이야. 스피가 에덴 때문에 밖으로 나타난다면 필시 지키기 위해서일 거야.”
“우-. 스피가 나서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하는 거야?”
“이미 나랑 페라이가 얽혔으니까 스피가 등장할 일은 없을 거야.”
“이럴 때 보면 네가 내 편이라 정말 다행이야. 무지 듬직해.”
장난기가 다분히 섞인 아부성 말이었지만 진심이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히 컸다. 강 족과 에덴을 상대하기 위해 여기저기에 원군을 요청했지만 어느 쪽도 플루 한 명보다는 못했다. 플루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천천히 상황을 구경하고 있는 것일 뿐, 조금만 지루해지만 본인이 직접 나서서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진 외경의 존재가 자발적으로 제 편이 되어줬는데 시아가 자신이 불리해질 것을 걱정할 리 없었다. 길드원들이 사건에 휘말려서 부상당할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은 끊임없지만, 최종적으로 길드 가디안스가 길드 에덴에게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참. 할 말이 하나 더 있었지. 페라이가 새 장난감을 찾았더라.”
“클러치 사마엘은 정말 버려진 거였어? 단순 심술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뒤통수 맞은 기분이야.”
플루는 오른손을 자신의 오른 뺨에 슬며시 대며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곤란한 듯 곤란하지 않은 듯, 염려하는 듯 염려하지 않는 듯, 그녀에게서 진지함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페라이가 무엇을 하든 플루가 일일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페라이가 워낙 금방 질리는 성격이지만 금방 바꾸는 일은 없었단 말이지. 이번에는 정말 의외야. 최단 기록 10년이 4년으로 대폭 갱신될 줄 몰랐어.”
시아는 장난감 하나를 4년 동안 가지고 노는 것도 충분히 오래 가지고 있던 게 아닌가 속으로만 생각했다. 계산해보면 자신이 플루의 눈에 든 지도 만 3년하고도 수개월이 됐다. 그런데 플루는 전혀 지루해하지 않았다. 긴 세월을 살아온 펜타곤에게 한 자리 숫자의 햇수는 찰나였던 것이다.
“하긴. 클러치 사마엘처럼 재미없는 장난감이면 나도 금세 질렸을 거야. 그래도 시건방진 면이 놀려먹기 딱 좋아서 금방 내치긴 아까울지도 모르지.”
“페라이는 자기 말을 고분고분 듣는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그건 아니야. 건방진 녀석을 자기 취향대로 길들이는 걸 좋아해.”
“지금 나 굉장히 마니악한 여왕님에 대해 들은 기분이야.”
“의심할 것 없이 사실이야. 우리 다섯 중에서 유일한 ‘사육사’야.”
플루는 지극히 자극적인 이야기를 일상대화마냥 아무렇지 않게 했다. 시아는 새로 안 사실이 예상 범주를 뛰어넘을 만큼 엄청나서 현기증이 밀물보다 빠르게 몰려왔다. 앞으로 페라이와 마주하는 것이 어려워질 듯했다.
“누군가의 장난감으로 찍혔다는 사실이 치욕스럽고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날 찍은 상대가 너라서 다행이야.”
“그럼그럼. 소울 테이커급을 노리는 페라이에게서 널 구제한 셈이라고. 하마터면 두 번째 장난감으로 낙찰됐을 거야.”
“싫어-. 완전 비굴해!”
플루의 말이 사실이건 아니건 현기증이 강력한 두통으로 바뀔 만큼 파격적이었다. 사마엘이 페라이의 눈에 들고 얼마 안 있어서 시아가 플루에게 찍혔기 때문에 페라이가 시아를 눈독 들이고 있었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설마 동시에 두 개에 욕심을 부릴까 싶었다.
“그래서 스피가 페라이를 싫어해. 우리 모두 ‘양육자’를 자처하는데 페라이만 ‘사육자’니까 도가 지나친 걸 용서하지 않아. 어쩌면 벡터스와 페라이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더더욱 에덴을 내버려두는 건지도 모르지.”
“어린애 수준의 심술이군.”
시아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두통을 안고 겨우 자기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서있으나 앉아있으나 통증은 변함없었다.
“그런데 페라이의 새 장난감이 누군지 안 물어봐?”
플루는 시아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당당하게 보였다.
“펜타곤 사이의 관계를 처음 들어서 신기해가지고 그걸 지나쳤어. 누구야? 내가 아는 인물?”
“잘 알다마다. 클러치 사마엘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신뢰하다가 이 세상에서 제일 의심하기 시작한 측근-.”
“……원 세훈?”
시아는 오장육부가 들썩거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한편으로는 납득했다. 정확하게는 길드 크루세이더가 클러치 사마엘과 원 세훈으로 세력이 나뉘기 시작한 것을 묘한 현상을 이해하게 됐다. 펜타곤의 힘을 노리는 조직에서 플루의 영향력이 보스에서 2인자로 옮겨졌다면 2인자의 하극상이 꾸며질 것은 불 보듯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조직 내부가 크게 요동칠 것이다.
“일이 엄청 재밌게 됐어.”
플루는 두 눈으로 만족스럽게 웃었다. 재미있는 일에 흥미를 가지고 자신이 만족할만한 결과를 기다리는 눈이었다.
“원 세훈이 오죽 야망이 큰 작자여야 말이지. 그걸 길들이겠다고?”
“정성에 감탄했다고 할까? 페라이가 클러치 사마엘을 찍은 시점부터 원 세훈이 페라이에게 일부러 접근해서 이 시중 저 시중 다 들었다던데?”
“입 가벼운 페라이가 대놓고 그 두 명을 비교했겠네.”
“맞아. 그 둘의 우정과 유대는 그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거야.”
수십 년 동안 정성들여 쌓아온 사마엘과 세훈의 단단한 관계가 어째서 최근 몇 년 사이에 모조리 붕괴했는지 해답이 드러났다. 둘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눈치 채고 의심하던 시아로서는 의문이 풀려 속이 시원하면서도, 둘 사이에 낀 ‘이물질’의 존재 때문에 족잖이 찝찝했다.
“걱정 마. 난 네가 아끼는 것들을 부수지 않을 거야. 애초에 펜타곤은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냅다 때려 부수는 걸 좋아하지, 개개인을 이간질해서 찢는 건 취미 없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휘말린 아이들은 별 수 없지만 대놓고 키메라를 괴롭히지 않아. 키메라들의 정점인 우리가 키메라를 괴롭히면 어쩌자는 거야?”
플루도 페라이를 꽤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스피와 마찬가지로, 페라이가 벡터스에게 더 당하길 바라며 변질된 길드 에덴을 내버려두는 건지도 모르겠다. 옛날대로였다면, 아무리 스피가 만든 것이더라도, 에덴을 일찌감치 플루의 손에 의해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간다르바 일족이 동족의 복수를 위해 나서지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말이다.
“으음.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네가 내 편이라서 정말 고마워.”
“펜타곤에게 과감하게 반말 하는 꼬마를 너그러이 봐주는 이 자비로운 마음에도 감사했으면 하는데?”
시아는 순간 뜨끔했다. 첫 대면부터 겁 없이 굴었기 때문에 반말을 아주 당연하게 사용해왔다. 상대가 절대 키메라인 펜타곤이요, 슈튀크 디 페어츠베어플루흐라는 것을 상기하면서도, 과감하게 반말을 쓰고 무례한 언행을 자유롭게 날리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주변 인물들이 플루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진정 겁 없는 막무가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뭐, 터놓고 지내는 편이 나도 편하니까 이제 와서 의식하는 것도 웃기지. 어디까지나 너 한 명 한정이지만.”
“읏. 그건 정말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
아무리 잘난 소울 테이커급 키메라도 펜타곤 앞에서는 무력한 꼬마였다. 고분고분 따라야 할 때를 키메라의 본능으로 알 수 있었다.
“자, 자. 이야기를 다시 돌려서, 페라이가 원 세훈을 꼬드겨서 에덴을 칠 생각인가봐.”
“어차피 크루세이더 안에서 사마엘은 ‘시기를 보자’고, 원 세훈은 ‘어떻게든 대응해야 한다’라니까, 서로 잘 맞겠는걸?”
“가망이 문제지. 크루세이더의 키메라들이 무익한 피를 흘릴 거야.”
“나라면 좀비 메이커를 쓸 거야.”
시아의 말에 플루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책상에서 폴짝 내려갔다. 뒤이어 꿍꿍이가 100% 숨겨져 있는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를 냈다.
“키메라가 대자연에 대항하는 종족이라 대자연의 금기가 통할 리 없지만, 좀비창조에 관해서는 키메라에게도 금기란 말이지. 하지만 에덴을 상대하기 위해서라면 좀비가 가장 괜찮은 방법이야. 암. 승산 있는 싸움을 하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아야지.”
“우와-. 완전히 악역 대사.”
시아는 한껏 즐거워하는 플루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하프 엘프의 모습으로 어찌 그리 사악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길드 크루세이더에서 금기를 깨건 말건, 이젠 가디안스에서 자신들에게 피해가 없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시아는 크루세이더 외의 사소한 것에 신경이 쏠리는 것이 당연했다. 펜타곤과 같이 있으니 펜타곤에게만 집중할 수밖에 없기도 했다.
“키메라가 좀비를 이요해서 순혈을 제압하는 장면이라……. 볼만하겠어.”
“확실히 장관일 거야.”
“앞날의 즐거움을 위해 내가 미리 나설 필요가 있겠어. 금기나 규율에 완고하게 구는 토드를 막아 놔야 크루세이더 녀석들이 마음껏 활개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마지막으로 잠에서 깼다는 슈튀크 데어 토드가 다시 한 번 언급됐다. 펜타곤의 이름이 마구 나오는데도, 시아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플루는 격하게 흐르는 상황을 만끽했다. 고도의 무관심과 고도의 흥미였다.
“토드가 엄격하구나.”
“지킬 것은 반드시 지켜야한다는 고집쟁이거든.”
“그러면 키메라 의식을 정해진 대로 하지 않는 것도 싫어하겠내.”
“토드한테 천벌을 받을 거야.”
시아는 슈튀크 데어 토드가 어떤 인물일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키메라의 철칙 그 자체가 아닐까 싶었다.
“난 개인적으로 파인이 에덴을 간섭했으면 했어.”
뜬금없이 또 다른 펜타곤의 이름을 시아가 겁 없이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말 되네. 마이아의 황제 노릇을 하고 있으니까 에덴이 눈엣가시일 텐데 말이지. 의외로 조용-하네. 아니지, 파인 입장에서는 크루세이더도 만만찮게 눈엣가시니까 둘이 동시에 망하는 걸 보고 싶은 건지도 몰라.”
“그럴지도 모르겠네. 설득력 높아. 하-.”
시아는 책상 위로 엎어졌다. 서류 더미를 베개 삼아 머리를 맡기고 전신에서 힘을 뺐다. 물에서 건져낸 봉제인형처럼 몸이 축 쳐졌다.
“키메라 길드에서 정점에 있던 에덴이 바보 같이 벡터스한테 침식당하니까 우리가 개고생을 하는 거잖아. 에덴을 만들고 방치한 스피가 전부 책임져야 해.”
“스피는 아직 페라이만 에덴과 관련이 있다고 알고 있어. 만약 내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꽤 많이 당황할 거야. 어떻게 움직일 지는 그 때 가봐야 알겠지만 지금처럼 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
플루는 절대 키메라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힘이 경외의 대상이지만, 플루의 진면목은 긴 세월에 걸쳐 발달한 두뇌였다. 끝없이 생각하고 주변을 보고 또 다시 생각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가장 많이 채워줄 수 있는 결론을 위해 움직인다. 물론 압도적인 힘이 뒤받쳐 주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일을 모두 쟁취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시아는 플루에 대해 점차 알아갈 때마다 그 보다 많은 흥미가 생겼다. 플루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주변이 공황상태가 될 것이 자명하다만, 그렇게 될 때까지의 과정을 제 두 눈으로 보고 싶어졌다. 플루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펜타곤에 대해 알게 될 때마다 호기심이 해소되기는커녕 몇 배의 호기심이 생겼다. 궁극적으로 펜타곤 내부, 슈튀크끼리의 맞대결을 보고 싶었다.
“내가 너한테 알려줄 건 다 알려줬으니까 이만 갈게. 혹시 페라이가 오거든 매몰차게 쫓아내. 내 이름은 언제든 팔아도 좋아.”
플루는 마지막까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라졌다. 시아가 배웅 인사를 할 겨를도 없었다. 계속 엎드린 채 배웅 인사를 할 생각조차 없었지만 말이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Mutation-Kimera(리메이크)' 카테고리의 다른 글
Mutation - Kimera : #프롤로그 (0) | 2012.04.30 |
---|---|
------Mutation - Kimera (리메이크)------ (0) | 2012.04.30 |
Mutation - Kimera : 제 7 각성 ⑧ (0) | 2010.12.31 |
Mutation - Kimera : 제 7 각성 ⑦ (0) | 2010.12.28 |
Mutation - Kimera : 제 7 각성 ⑥ (0) | 2010.1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