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는 민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후에 서랍에서 봉투를 한 개 더 꺼냈다. 이것도 입구가 단단하게 봉해져 있었다. 다만 봉투에 적힌 ‘루시퍼 공작 귀하’라는 문구는 상당히 깔끔한 문체였다. 작성자는 다름 아닌 시아였다.
“사태를 가장 빨리 수습하려면 이 수가 가장 좋긴 하지. 적룡왕에게는 일찍이 서신을 보내놨으니까……. 대답이 아직도 안 와서 문제지만.”
그녀는 등을 등받이에 바짝 붙이고 고개도 뒤로 쭉 젖혔다. 그리고 봉투를 가진 오른팔을 위로 곧게 뻗어 올렸다. 그녀의 시선은 봉투에 적어 넣은 검정 글자들에 고정됐다.
악마계로 보내야 할 편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는가? 수많은 악마를 거느리는 후작 나리가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를 걱정한다면 비웃어줄 일이다.
그녀가 준비한 세 개의 서신 중에서 가장 늦게 전달할 이것이 가장 먼저 답신이 오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망설였다. 그녀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루시퍼 공작이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무리한 일이라도 전부 선뜻 받아줄 것이다. 그래서 거 호의를 악용하는 것은 아닌지 양심상 고민이 생겼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뭐든 이용한다는 악마계의 철칙을 따르는 것이 그녀의 본능적인 행동이겠지만, 본인 휘하 악마들이 루시퍼 공작가 휘하 악마들의 원조가 필요할 정도로 부족하던가 하는 자존심 걸린 고민이 그 본능에 제동을 걸었다.
“으음. 루시퍼 공작께만 부탁하면 나중에 베르제바브 공작께 불평을 듣겠는데?”
생각하는 도중에 문제가 하나 더 생겼다.
[스르릉-]
마침 집무실 출입구 위치에 맞춰 나타난 워프가 시아의 생각 고리를 끊었다. 워프에서 새어나오는 냄새는 너무 익숙해서 무시하기 쉬운 냄새였다.
“찾아 계십니까? 주군.”
키가 180cm를 훌쩍 넘는 장신의 악마가 워프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왔다. 상체에는 붉은 색 홑겹 조끼만을 입었고, 하체에는 질겨 보이는 흑색 가죽바지를 입었다. 그 보다는 우선, 왼쪽 팔뚝에 새긴 두 송이의 자이와 얇은 사브르 문장은, 그가 바르베리트 계열의 악마라는 증거. 성이 없는 하급 악마와는 격이 다른 귀족이면서, 바르베리트 계열의 최고 수장인 바르베리트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라는 뜻을 갖고 있다. 문장을 새긴 물건을 소지해도 되지만 제 몸에 직접 새기는 것은 절대불변의 충성을 의미한다.
“리코르 바르베리트 백작의 아들, 테트 바르베리트.”
시아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리 깔렸다. 목소리 자체가 그녀의 위엄이었다.
“지금 돌아가도 될 만큼 나의 성은 무사한가?”
“물론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시아가 자신이 필요한 악마를 불러내는 일쯤이야 숨 쉬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귀족급 악마의 문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급 악마 군단은? 하급이 상급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는 것은 악마에게 상식이 아닌가.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 덜컹!]
테트 바르베리트가 만든 워프에 시아의 마력이 침투하자 거대한 철문이 만들어졌다. 바르베리트 후작의 성으로 통하는 피의 철문이었다.
악마계라는 이질적인 공간 안에서도 드래곤의 레어에 비견되는 특수한 공간-대개 귀족의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적합자’와 ‘문’이 필용한 법이다. 적합자만이 문을 열 수 있고 문의 열쇄가 바로 적합자다. 하지만 적합자는 상황에 따라 범위가 변하기도 한다. 지금 바르베리트 후작의 성으로 통하는 문을 두고 설명하면 이야기가 편해진다. 바르베리트 계열 귀족급 악마라면 후작의 허락이 있는 자에 한해서 악마계 내에서 후작의 성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기 쉽지만, 악마계 밖에서는 오로지 후작만이 만들 수 있다.
문이 열리고 시아와 그녀의 가신은 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사라졌다.
이렇게 거대한 마력이 활성화 됐는데도 길드 내 누구 하나 집무실로 들어오지 않았다. 시아가 밀리엄과 솔리를 통해 아지트 내 전원에게 전달한 명령-딱 한 번 거대한 마력이 나타날 테니 기죽지 말고 무시할 것- 때문이었다.
“여전히 혈기 왕성하군.”
성 안의 독기가 시아를 순식간에 덮쳤다. 인간 상태였으니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시아는 눈 깜짝할 새에 와인드급으로 각성했다. 그녀의 가신 테트마저 각성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와인드급 각성기는 전신에 굵은 사실이 꼼꼼하게 휘감기고 검․대못․창 등이 사정없이 관통하는 모습이다. 그 모두를 완력으로 극복해야만 와인드급 키메라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소울 테이커급인 시아에게 와인드급 각성기는 애들 장난보다도 쉬운 것이란 말인가. 아무리 상급 각성자라도 하급 각성기를 개고 각성하는데 힘과 시간이 필요하다. 실력에 따라 차이가 있고 쉽게 깰 수도 있지만, 상대가 알아차릴 만큼의 시간은 걸리기 마련이다. 어쩌면 시아는 소울 테이커급이라 해도 훨씬 웃도는 경지에 이른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군. 귀환을 경하 드립니다.”
시아의 마력을 느낀 악마들이 발 빠르게 모여들었다. 후작의 성 출입을 허락받은 귀족급 악마들 중에서 시아의 부재를 메우기 위하여 성을 지켜온 자들이었다. 전원 신체 어느 한 부위에 바르베리트 문장을 새겼다.
“아, 그래. 6부대 장군 전원과 여섯 원로들을 회랑으로 불러.”
테트를 포함하여 다섯 악마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시아는 회랑으로 가는 길에 악마의 상징이기도 한 순흑의 커다란 날개를 단 한 번도 퍼덕이지 않았다. 발걸음에서 바닥을 디디는 소리도 지독한 독기를 내쉬는 숨소리도 없었다. 그녀 자신은 고요 그 자체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성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존재감이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후작께서 돌아오셨다.”
“후작께서 돌아오셨다.”
“우리의 후작께서 왕림하셨다.”
“우리의 후작께서 왕림하셨다.”
성의 독기에 기생하는 악령들이 참새처럼 재잘거렸다. 간혹 귀청이 찢어지도록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시아는 아주 약간의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시아가 자신에게 기생하는 비천한 것들을 일일이 상대하는 가벼운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건 당연한 행동이다. 그런데 만약 시아의 가까이에서 알짱거리는 대담한 녀석이 있었다면 시아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악마의 불꽃으로 파랗게 타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주군.”
회랑의 13의자 중 12의자에 6장군과 6원로가 앉아 있었다. 입구에서 저 멀리 보이는 위압감 강한 의자까지 검붉은 카펫이 길게 깔려 있는데, 시아가 그것을 따라 걸어가며 오른쪽에 길게 앉아 있는 여섯 명이 6장군이고, 왼쪽에 길게 앉아 있는 여섯 명이 6원로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시아를 포함하여 이 열세 명이 바르베리트 계열 악마들을 이끄는 중추다.
“갑작스런 호출에도 용케 전원이 모였군.”
“후작께서 부르시는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6월로 중 시아로부터 두 번째에 있는 자가 진지하게 응했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아첨이 아닌 관록과 충성심이 배어 있었다.
“흐응-. 실은 말이야, 내가 굉-장히 사적으로 바르베리트의 군사를 사용하려고. 대부분은 인간계의 에졸로페에서, 나머지는 악마계에서. 후후. 요새 내가 운영하는 길드가 성가신 외부인들 때문에 삐거덕거려 골치거든.”
시아의 말투는 후작으로서의 위엄과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잠재되어 있었다. 시아의 말을 거절했다간 지독하지는 않아도 충분히 꺼림칙한 일을 당할 것 같았다.
“얼마나 대단한 상대입니까?”
6장군 중 시아로부터 네 번째에 있는 자가 눈에 불을 켰다. 호기심을 보이는 건 다른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아가 후작이 된 후로 큼지막하게 싸울 기회가 없어 지루하던 중에, 후작이 직접 흥미로운 일을 가져왔으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대단하다면 대단하지. 유명 헌터 일족인 강 족을 필두로, 파우스트 가, 노스마이어 가 등이 모인 헌터 연합이야. 그리고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불리해지면 간다르바 일족이 지상으로 강림한다더군.”
“헌터 일족들이 연합을 만들었다고?”
“간다르바면 그 유사 신족 간다르바인가?”
원로들과 장군들이 기이한 현상에 당황스러워했다. 시아는 웅성거림이 잦아들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하나의 헌터 일족이 단체로 움직이긴 해도 여러 헌터 일족이 연합을 만든다는 건 전대미문입니다.”
시아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장군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투로 의문을 제기했다. 시아는 웃지도 화내지도 않는 딱딱한 표정으로 12가신들을 훑어봤다. 모두 그 장군과 같은 의문을 갖고 있어 보였다.
“나는 불확실한 정보로 인력을 대량으로 움직일 만큼 허술한 위인이 아니야. 분명하게 말해두는데, 간다르바와 관련된 이야기는 변수가 심하게 크지만 헌터 일족 연합은 벌써 구성된 기정사실이야. 그리고 전대미문치고 규모가 굉장히 커. 합세한 헌터 일족이 열여섯을 넘어가. 유명세가 큼지막한 일족은 거의 대부분 가담했다고 봐도 좋아.”
“어떻게 그런…….”
“근본적인 이야기부터 하려면 너무 길어지니까 생략하지. 그들은 ‘연합’의 이치대로 뭉친 거야. 공통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이질성을 감수하고 하나가 된 것이지. 바로 ‘키메라 말살’이라는 대형 사업이야.”
“그건 말도 안 됩니다.”
시아에게서 가장 먼 곳에 앉아 있는 원로가 곧장 발끈했다. 원래의 험상궂은 얼굴이 미간주름, 입주름 등으로 더 흉악해졌다. 그리고 맹수에게 잘 어울리는 황금빛 두 눈이 그의 화를 절묘하게 나타냈다.
“대자연이 멸망해도 절대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을 종족이 키메라입니다. 키메라 말살이라니, 어처구니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요.”
“헌터란 본디 자신이 이 땅 위에서 가장 현명하고 강한 존재라고 자만하는 것들이잖아. 눈에 뵈는 게 없는 거야.”
어린 후작은 눈을 차분하게 내리깔고 가소롭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서 어렴풋이 살기가 드러났다. 그녀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주제도 모르고 회랑 근처를 배회하던 악령과 최하급 악마들이 지면을 따라 흘러오는 후작의 냉기에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공포’라는 중압감을 견디지 못하고 서둘러 회랑에서 멀리 떨어졌다.
“그건 그렇고 헌터 일족 연합은 싸움에 능숙한 인재들의 집합소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머릿수도 웬만한 길드를 능가하겠군요. 만약 그들이 또 다른 목적으로 움직이면 그 때마다 반향이 어마어마할 겁니다.”
시아로부터 세 번째와 네 번째에 앉은 장군들이 침착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배경이 되는 사정이 무엇이건 간에 지금 일어나는 일이 얼마만큼 위험한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셈을 하고 예상을 할수록 무지막지한 이야기가 만들어져서, 시아 몰래 헛기침을 하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그 어마어마한 녀석들의 첫 표적이자 중심 표적이 내가 이끄는 길드란 말이지. 소수 정예라서 본 실력을 발휘하기 전에 싹쓸이 당할지도 몰라.”
시아는 가능성이 높은 불길한 이야기를 남 얘기 하듯이 툭 던졌다. 하지만 그냥 가볍게 뱉은 말이 절대로 아니었다. 자신에게 패배의 불명예가 붙는 것이 싫으면 더 이상 따지지 말고 협력하라는 묵직한 경고였다.
“저희가 움직이는 것 때문에 길드원들이 불쾌하게 여기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건 내가 해결할 문제지 그대들이 걱정할 거리는 아니야.”
“후작께서 외부인에게 부정한 대우를 받으시면 저희가 못 견딥니다.”
끝에서 두 번째 자리에 앉은 장군이 확답을 받을 심산으로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시아를 곧게 쳐다봤다. 6장군 중에서 가장 우직한 성품을 가진 만큼 고집스러운 면이 강했다. 그를 상대로 은근슬쩍 넘어가기란, 나뭇잎을 떨어트리지 않고 나뭇가지를 내리치는 것보다 어려웠다.
“하아.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야. 내 밑에 있는 녀석들 중에 내가 결정한 일을 반대할 녀석은 없어. 전부 보스밖에 모르는 바보들이니까. 그리고 적룡왕과 뱀파이어의 가이스 공작에게도 원군을 청한 상태야. 헌터 일족 연합을 상대하는 것도 성가시지만 정말로 간드르바 일족이 나서면 역사에 기록될 만한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시아는 진짜 간다르바를 모르지만 천상계에서 유사 신족의 능력과 힘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최악의 시나리오를 얼마든지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신들이 동요할 것에 대비하여 표정을 조금도 일그러트리지 않았다.
“신족이 대자연을 거슬러 키메라를 만든 것은 중죄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족이 만든 키메라를 통째로 죽여도 되는 건 아니지. 신족이 아닌 자가 신족의 것에 손을 대는 것 또한 중죄. 어리석은 이치론으로 키메라에게 마수를 뻗는 자는 ‘언젠가’ ‘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벌을 받을 것이야. 그러니 그대들은 바르베리트 가의 충실한 가신으로서 나, 시아 바르베리트를 따라줘야겠어.”
처음부터 강제로 전력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힘으로 제압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미 나락 끄트머리에서 사는 악마입니다. 더한 나락을 겪든 뭐가 두렵겠습니까.”
“주군께서 확고하게 결정하신 일입니다. 저희가 감히 논해 뭐하겠습니까. 명령만 내려주십쇼.”
6원료와 6장군은 기꺼이 시아를 따랐다. 과장이라고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그녀가 후작으로서 자신들을 부른 것이 영광스러웠다. 그리고 드디어 가신다운 일을 할 수 있게 됐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구체적인 앞일을 듣기도 전에 흥분이 최고조로 오른 자도 있었다.
“이렇게 순순히 무조건적으로 따라주니까 명령하기 꺼려지는 거야. 상관으로서 부하복 터진 건 기쁜 일이다만 지나치면 되레 괴로워.”
시아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도 들릴까 말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행복에 겨운 불만이라서 대놓고 크게 말하기 민망했다.
순혈들은 생리적으로 키메라를 꺼린다지만 악마족은 예외다. 일부러 저급한 키메라를 만들어서 부릴 정도로 하나의 종족으로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제멋대로 키메라를 만들고 소유물처럼 취급하는데 어째서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냐고? 키메라가 본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점을 매사 의식하고 있으면 이런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다. 키메라는 키메라를 만드는 행위 자체에서 그 존재를 인정하는 셈이니 말이다.
다시 악마족과 키메라에 대해 이야기를 돌리겠다.
악마족은 정신계 종족 중에서도 가장 무형에 가깝다. 정령도 정해진 모습에 관계없이 자기만의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정령에게 중요한 것은 형태가 아니고 속성이다. 형태가 중요한 종족은 천사와 악마다. 그러나 악마는 독기에 심취한 종족인 만큼 형태가 곧잘 흐트러진다. 그래서 제 형태를 얼마나 견고하게 유지하는가에 따라 계급이 갈린다. 문제는 그 형태가 모든 악마에게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다. 정해진 생김새 없이 구현 가능한 형태라면 어떤 것이든지 골라 정형화한다. 그래도 볼품없는 괴물은 대개 최하급이다. 스스로의 몸을 제어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귀족에 가까울수록, 머리 하나․몸통 하나․팔 두 개․다리 두 개․박쥐날개 한 쌍을 유지한다. 어떻게 보면 정령처럼 정해진 모습이 있으면서 자기만의 형태를 가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주저리주저리 군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악마족 내부에 워낙 ‘잡스러운’ 자들이 많아 키메라에 거부감이 현저히 적다. 소위 ‘괴물’이라 부르는 기이하게 생긴 생물체들은 하급 마족이거나 종족 모를 괴물일 뿐이다. 악마는 단지 그 모습을 베낀 것. 그러니 두 개의 종족이 섞이어 각성에 따라 종족이 바뀌는 키메라를 꺼리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생김새는 괴물이 아니지 않은가. 일부러 거리낌 없이 키메라를 만드는 점을 보면-대개 하급 악마들의 장난이나- ‘우호적’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6원로와 6장군이 순혈이면서도 어떻게 키메라인 시아를 맹목적으로 따를 수 있는가 하고 의문을 가진 자들은 이쯤하면 그 의문이 풀렸으리라 본다.
“주군. 무작정 군대를 몰아붙일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시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원로가 진지하게 물었다.
“적룡왕과 가이스 공작에게 원군을 청했다 하셨는데 그들이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쉽게 움직일 자들이 아닙니다.”
“가이스 공작은 확실히 미지수야. 하지만 적룡왕은 움직일 수밖에 없어. 귀여운 차남이 강 족에게 된통 당했고, 강 족의 뒤를 봐주는 자가 다름 아닌 용족의 수치로 전락한 수룡왕이거든. 적룡왕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빌려줄 거야.”
아직 적룡왕에게서 답신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전력을 보내올 것이라고 믿었다. 디레스가 ‘제 아버지는 그런 분’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는데 안 믿을 수 없었다. 솔직히 방금 시아의 말은 디레스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재탕한 것이었다.
드래곤 슬레이어 가문인 강 족과 수룡왕이 한 패라는 이야기는 꽤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12가신들의 표정이 미묘했다.
“믿건 말건 그대들 자유야. 직접 알아낸 부하조차 믿기 어려워했는데 전해들은 쪽은 어처구니없는 게 당연해.”
디레스가 레스에게 들었을 때, 시아가 디레스에게 들었을 때, 12가신들과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불가능한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의구심이 가장 먼저 들기 마련이다. 놀라는 것은 나중 일이다.
멀리서 두 번째에 앉은 원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주군. 강 족보다 먼저 움직이실 겁니까?”
“아니. 그들이 오길 기다릴 거야. 소수 정예 길드가 ‘원정’ 같은 힘 빠지는 일을 했다간 후사가 위험해.”
“그러면 저희는 군대를 모아두고 상시 대기해야겠습니다.”
“불편하겠지만 그렇게 해줘. 악마계와 인간계를 잇는 문은 내가 큼지막하게 준비할 테니까.”
시아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장군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출정에 흥분한 다른 장군들과는 다르게 차분했다.
“그런데 전력의 30%는 이곳 수비에 전념해 줘야하는데 그건 누가 할래?”
시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장군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항상 성을 비우시는 분이 무슨 바람이 부신 겁니까?”
“에?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그대들이 전부 이곳에 있으니까 믿고 비우는 것이야. 후-. 항상 수비가 탄탄하던 곳이 갑자기 약해지면 이곳을 노리는 자들이 단숨에 몰려들 거 아냐. 특히 나를 미워하는 레비아탄 공작이 이 기회를 놓치겠어? 클러치 사마엘을 통해 내 일거수일투족을 듣고 있는 그 자가 퍽이나 가만히 있겠다.”
“그러면 저 혼자 있겠습니다. 제 휘하 전력으로 최소 수비는 거뜬합니다.”
바르베리트 후작은 씩 웃기만 했다.
각 장군들의 특징에 따라 6개 군단의 기동성이나 전투 방법이 다른데, 혼자 수비를 맡겠다는 장군과 그의 군사들은 수비적 전투에 치중한 쪽이었다. 쉽게 말하면 후작의 근위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군단이 바르베리트 후작가의 최강 군대다. 시아가 공작보다 지위가 낮은 후작이면서 대공작 후보로 오른 탓에 곳곳에서 습격 기회를 노리고 있으니, 수비를 비약적으로 강화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대가 그렇게 자신만만한데 과감하게 맡겨야지. 여차하면 원로들과 그 사병들도 움직여주겠지. 그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희들의 사병은 주군의 군사입니다.”
거리끼는 기색을 보이는 이가 없었다.
시아는 이들의 변하지 않는 충성심이 만족스러웠다. 악마계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이 우월감이 뇌수를 자극하는 마약처럼 시아의 본능을 차츰차츰 깨웠다. 오리지널(인간)의 이성이 아니었으면 우쭐거리기만 하는 평범한 후작이 됐을 것이다.
“그대들이 바르베리트 가의 일원이라 다행이야. 자랑스러워.”
어쩌면 이런 한 마디가 가신들을 구속하는 주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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