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분위기가 단번에 싸늘해졌다. 강 족과 맞붙을 날을 고대하는 열기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찬물을 끼얹었다는 표현이 우스울 정도로 뛰어난 냉각효과였다.
시아는 미간을 좁힌 얼굴론 민이 갖고 있던 서류를 난폭하게 낚아챘다. 협박장이야 길드를 운영하면서 여러 번 받아봤지만, 이번에는 시기나 주변 상황을 봐서 감이 좋지 않았다. 파일 안에 꽂혀 있는 단 한 장의 종이. 그리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단 한 문장. 시아는 파일 채 협박장을 북- 찢었다. 그리고 살기등등한 분위기로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갔다.
화타는 시아가 바닥에 내던진 것들을 주워들었다. 글자가 잘렸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안 나오면 날려버리겠다. 독고 린?”
“지금 당장 밖으로 안 나오면 아지트를 날려버리겠다는 뜻이에요.”
“‘독고 린’이 누군데?”
“슈튀크 플루에요. 현재 학교에서 쓰는 이름이죠.”
화타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러면서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헛헛헛 웃었다. 다른 길드원들도 각양각색으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아지트 밖에는 인간 소녀의 모습을 한 플루가 유유자적하게 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당하게 교복까지 입었다. 키메라는 모두 펜타곤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지만, 지금의 플루에게서는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니 누가 봐도 평범한 인간 학생이었다.
“어쩌자는 거야?”
“인사부터 해야지.”
플루는 여유롭게 눈웃음을 지었다. 시아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만 하루하고도 반나절 만에 보는군.”
“음. 성실한 듯 불성실한 인사-. 뭐 그 정도면 됐어. 그 사이 별 일 없었지?”
“있었어.”
“우와, 즉답. 안 물어보는 게 예의겠네.”
“상관없어.”
시아는 속을 가라앉히고 냉담하게 대응했다. 플루가 별안간 등장해서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지만, 민감하게 굴어봤자 자신만 손해 본다는 사실을 아니 금방 진정할 수 있었다.
“좋지 않은 분이기야. 문제아들이 나의 시아에게 열심히 폐를 끼쳤나보군.”
플루는 페라이와 달랐다. 같은 대사라도 페라이가 말했으면 시아는 복창이 터지도록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플루는 무표정에 담담한 말투로 아무런 감정 없이 말했다.
“그래도 방관할 거잖아.”
“에덴은 스피가 만들었으니까 함부로 손댈 수 없어.”
분해도 어쩔 수 없었다. 펜타곤이 제멋대로 날뛰는 존재라도 자기들끼리 지켜야할 선이 있었다. 시아는 키메라이기에 이 사실을 뼈저리게 잘 알았다.
“하-. 용건은?”
“약간의 충고를 하러 왔어. 페라이가 오거든 상대하지 마. 암만 벡터스의 이름과 에덴을 들먹여도 무시해.”
“한낱 키메라보고 펜타곤에게 대들라는 말이야?”
“내 이름을 대면 되잖아.”
플루는 엄청난 일을 선뜻 쉽게 말했다. 시아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그냥 피식 웃었다. 간단하지만 자극적인 한 마디를 아무렇지 않게 툭툭 내던지는 점이 왜지 모르게 비슷했다. 어쩌면, 시아가 페라이와는 투닥거려도 플루와는 별 마찰이 없는 이유가 ‘서로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아는 어렴풋이 이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고 보니까 페라이가 에덴…의 보스한테 민감하게 반응하던데?”
“어른의 사정이야.”
“묻지 않는 것의 예의……. 그 충고 감사히 받지.”
플루는 대꾸 없이, 짧은 용건을 마치자마자 사라졌다. 이것 또한 페라이와의 다른 점이었다. 페라이라면 쓸데없이 일을 벌이며 자신이 질릴 때까지 끈적끈적 붙어 있었을 것이다. 산뜻함이라곤 모르는 위인이다.
“생각보다 빨리 돌아갔네요.”
“응.”
민이 아지트 입구를 경계로 한 발짝 안에서 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스. 자신이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라는 사실을 자각해 주세요. 아무리 플루가 보스의 편이 되겠다고 선언했어도 혼자 몸으로 돌아다니시면 보스를 보는 저희 쪽이 불안해져요.”
“그 말 플루 앞에서 해봐. 뼈도 못 추려.”
“저도 제 목숨 부지하고자 눈치껏 살고 있……. 지금 말하고 있는 거랑 논점이 살짝 다르지 않아요?”
“요새 정말로 눈치가 빨라졌어. 아니지. 주변 파악을 잘 하는 건 성격 나빴던 옛날부터였지.”
“보스. 지금 괜히 저한테 심술부리시는 거죠?”
“알면 묻지 마. 확인사살당하는 쪽이 더 괴로워.”
시아는 민을 희롱하며 유유히 집무실로 들어갔다. 의무실에 한 번 더 들를까 했지만, 환자들이 편히 쉴 시간을 뺏는 격이 될 테니 그만 두기로 했다. 듬뿍 신뢰하는 부하가 있으니까 신뢰하는 만큼 자신이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솔리는 어떻던?”
“지금은 미스터 브롤과 같이 외출했어요. 해지기 전에 돌아온댔으니까 의외로 침착하다고 봐야겠죠.”
“과연 침착한 걸까?”
“강 족 이야기를 듣자마자 날뛰지 않은 것만으로도 침착한 거죠.”
민은 여러 길드원들에게서 받은 서류를 종류별로 보기 좋게 모은 후에 시아에게 넘겨줬다. 시아는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에 관련된 것부터 타 길드 간의 충돌 사건까지 고속으로 살펴봤다. 아직 가디안스에 새로이 자극적인 일은 없었다. 평소와 비슷한 범위에서 비슷한 수준의 사건이 전부였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롭다거나 무미건조하다는 것이 아니다. 서류 중에는 가디안스로서 해결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었다. 그저 상시 대비한 만큼 수고를 끼치면 될 일이었다.
“아……. 민아.”
“네, 보스.”
제 1천왕은 한창 홍차를 끓이는 중이었다.
“솔리가 어디로 갔는지도 알아?”
“그것까지는 몰라요. 약혼자끼리 갔으니까…….”
“호텔에 갔을 지도 모른다는 저급한 농담은 하지 마라.”
시아는 민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 시원시원하게 단어를 읊었다. 눈과 손으로는 무수한 서류와 씨름을 하고 귀와 입으로는 민을 상대하고 있어서, 굳이 갖다 붙여 표현하자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보였다.
민은 결재가 끝난 서류를 집무실 가운데에 있는 탁자로 옮겨두고, 시아의 책상 위에 생긴 빈자리에 따뜻한 홍차가 담긴 찻잔을 올려놨다. 얼마나 다소곳이 다뤘는지 홍차의 수면이 파문 없이 고요했다.
“어딜 다녀오든 무사하면 그만이잖아요.”
“하긴. 솔리가 쉽게 바보짓 할 아이가 아니지.”
“미스터 브롤이 옆에 있으니까 얌전한 거예요.”
“아니지. 밀리엄이 문제지. 그 녀석은 쓸데없이 사고를 쳐서 골치야. 솔리가 녀석의 보호자라니까. 녀석이 얼마나 솔리를 챙길 수 있을 지가 걱정이야.”
가디안스의 보스는 나머지 서류들까지 싹 처리한 다음에 편한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어깨와 허리에 단단하게 뭉친 근육이 슬슬 풀렸다.
“그래도 모르죠. 그 두 사람의 관계는 특이하잖아요.”
“그래. ‘특별’보다는 ‘특이’에 가깝지. 희귀한 것들이야.”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쳐 보이지 않았고 말투도 무뚝뚝해서 시아가 빈정상했는가 오해할 수 있겠지만, 그녀는 단순히 무미건조한 감정 표현을 선호할 뿐이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진짜 감정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아직 ‘풋내기 가디안’이라는 증거다.
[드드드득]
만년필 꽂이 옆에 놓아둔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시아는 잠시 기다렸다가 휴대폰에서 더 이상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M도넛에서 뭉치자. 라는데? 유리가.”
시아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줄창 붙어 다닌 단짝이다. 길드간 항쟁이나 종족간 분쟁 등과는 전혀 관계없는, 평범한 인간 순종이다. 특기라고 말하기 애매하지만, 각각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친구들을 불러 모으는데 재주가 좋다.
“다녀오세요.”
“너 너무 선뜻 말한다.”
“오랜만이잖아요. 올해 들어 겨우 두 번째 아닌가요? 게다가 저번엔 일 때문에 못 나가셨고요.”
그녀가 꺼리는 건 모임이 아니었다. 5년 전 키메라가 된 직후부터 소꿉친구들과 천천히 거리를 뒀고, 2년 전 길드를 세운 후부터는 처음부터 몰랐던 사람처럼 대놓고 피했다. 학교에서는 고고한 이미지 때문에 학생들이 알아서 그녀에게서 한 걸음 떨어지지만, 그녀의 소꿉친구들은 그녀가 일부러 거리를 떨어트려도 단번에 가깝게 붙었다. 곤란할 정도로 다정한 아이들이었다.
“고 계집애들. 내가 집 나간 거 알고 있을 거야.”
이 말은,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알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래도 변함없이 보스께 문자를 보내잖아요.”
“크으. 이 위기감 없는 것들.”
휴대폰을 도로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는데 한 번 더 짧은 진동이 울렸다. 시아는 찝찝한 마음에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화면을 확인했다. 아주 짧은 한 문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안 오면 죽는다.>
발신자는 유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아가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몇 백 번도 더 불러본 이름이 이렇게나 부담스러워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가면 엄청나게 물어보겠지. 그리고 들은 것들을 리아랑 호아에게 알려주겠지. 그러면 날 키워준 그 사람들에게도 전해지겠지. 싫-다.”
시아가 자신의 혈족을 부르는 호칭이 확연히 달라졌다. 타인에게 제 동생들을 말할 때면 언제나 ‘여동생, 남동생’이라고 했지, 절대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부모를 일컫는 말마저 적대적으로 변했다. 이제 그녀에게 과거 가족들에 대한 것이라면 장이 꼬일 만큼 거북했다.
거부와 경멸.
키메라라면 누구나 한 번씩 겪는 일이었다. 시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견디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싸우다 얻은 부상과 고통을 견디는 것보다 몇 십 배 몇 백 배 어려웠다.
“안 가시려고요?”
“응.”
[드드드득]
세 번째 문자. 시아는 휴대폰 액정화면을 화면하기가 두려웠다.
<왜 대답이 없어! 이 화상아!>
예상 범위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었다. 그래도 무거운 한숨이 쏟아져 내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정말 안 가실 건가요?”
“내일 학교로 찾아와서 멱살을 잡지 않을까 싶다.”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군요. 가뜩이나 독고 린과 신 수진이 있는데 말이에요.”
“아아. 그것들이 있었지. ……. 갔다 올게.”
시아는 친구들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사이에 민은 깨끗하게 빈 찻잔을 치웠다. 그리고 서류를 최종 분류하다가 시아의 눈치를 살폈다. 두꺼운 포커페이스. 하지만 그 안은 무척이나 난처해하는 표정이리라.
약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시아는 의자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새카만 양복바지와 만만치 않게 까만 와이셔츠. 어깨에 걸친 민소매 롱코트는 어두운 와인레드 색이었다. 이동으로 워프를 사용한다지만 옷은 친구를 만나러 가는 사람치곤 좀 아니지 않나 싶었다. 그러나 시아는 짧은 머리칼(잊지 말자. 인간일 때는 목을 가릴까 말까 한 숏커트다.)을 슬슬 넘겨 정리할 뿐이었다.
“보스. 호위는 어떻게 할까요?”
“형식적인 질문이라지만 나한테 호위라니 거추장스러워.”
“뭐, 항상 저 혼자 따라다녔으니까요.”
그러나 오늘은 민이 따라 나설 수 없었다. 특수전투 부대의 훈련을 지도해야 했다.
약속 시각 정각. 시아는 워프를 열고 조용히 나갔다. 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세요, 보스.”
약속 장소인 M도넛에서 가장 가까운 골목에 워프가 열렸다. 큰 길을 다니는 사람들 중 누구도 시아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가 골목에서 나와 가게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조차 시선 한 번 받지 않았다. 정신계 종족 특유의 존재감 감추기 기술이었다. 그녀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가게 안에서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부터였다. 평범하지 않은 복색과 무뚝뚝한 표정이 사람들에게 범상치 않은 인상을 심어줬다.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이었다.
“진 시아-. 여기, 여기.”
친구들 중 한 명이 빈 의자를 팡팡 치며 시아를 불렀다. 무리 중에서 키가 가장 크고 뚜렷한 이목구비 속에서 억센 성격을 과감히 내보이는 털털한 아가씨였다. 불모지에 던져 놓아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살아 돌아올 것 같은 이미지도 겸비했다. 이 세상 어딘가에 여전사들의 성지가 있다는데, 이 아가씨가 그곳의 적임자가 아닐까.
“다들 건강해보이네.”
시아는 웃지 않았다. 소꿉친구들 앞에서 가식 미소 따위 소용없었다.
“널 실컷 괴롭힐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
“우와. 뼈 있는 말이야.”
시아의 친구들은 과연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시아가 집을 나왔다는 것까지? 그녀가 키메라라는 것까지? 그녀의 플러스 종족이 악마라는 것까지? 어느 쪽이든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언급할 화제가 아니다.
“집 나가니까 속 편하냐?”
별다른 안부인사 전부 제치고 곧바로 핵심을 찌르는 친구가 있었으니, 시아는 갑작스런 직구를 피하기 위해 자리에서 실어섰다.
“일단 먹을 것 좀 가져오고 나서 얘기하자.”
시아의 앞만 텅 비어있었다. 그녀는 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도넛을 둘러보며 일전에 잘 먹던 것으로 세 가지 골랐다. 가운데에 구멍이 뚫리고 한 쪽 면에만 다크 초콜릿이 두텁게 발라진 것, 구멍 없이 보름달 모양에다가 속에 라즈베리 잼이 듬뿍 들어있는 것. 역시나 가운데 구멍이 없고 속에 슈크림이 들어있는 것. 덧붙여 레모네이드도 주문했다.
“너네 소식 참 느리다. 내가 집 나온 게 언젠데 지금 부른 거야?”
우선 슈크림이 들어간 도넛부터 한 입 가득 베어 물었다. 입술에 설탕가루와 슈크림을 묻힌 채 우물우물 복스럽게 먹었다. 시중에서 파는 도넛이라,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간 가게에 들러 사먹을 만큼 짧은 여유조차 없었다.
“네 년이 보고하지 않으면 평생 모른단 말이다. 이런 걸 성격 까칠한 리아한테서 전해 들은 기분, 네가 알겠냐?”
“한 탕 멋지게 비꼬았나보군. 괜찮아. 인신공격 수준으로 입이 험한 아이는 아니니까.”
“오-냐-. 네가 그 모양으로 키웠다 이거지?”
“잘 알잖아. 여기 셋 중에서 리아한테나 나한테 한 번도 안 당해본 사람 없으면서 새삼스럽게 왜 그래.”
시아는 넉살좋게 대화를 이끌었다. 친구들이 질렸다는 듯이 한숨을 쉬거나 도넛만 꾸역꾸역 먹어도, 미안하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화를 내고 훨씬 더 지쳤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가출은 필연이었어. 안 할 수가 없었어.”
“우린 그걸 탓하는 게 아니야.”
시아도 알고 있었다. 친구들이 화를 내는 이유도 모른 채 괜히 빈말만 늘여놓은 것이 아니다. 앞으로 만날 일이 없을 지도 모르는 소꿉친구들과 더 이상 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이들과 얽히는 것이 ―굳이 표현하자면, 귀찮았다.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두고 싶었다. 주변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지금, 이들은 성가신 꼬마들에 불과했다.
“가출뿐만이 아니야. 너…… 말하면 우리가 도망이라도 갈 줄 알았어?”
직접 언급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막…… 그 당시는 12살이었어. 그리고 지금 이 나이에 말했어도 틀림없이 도망갔어. 제 3자를 통해 들은 것과 본인에게 직접 들은 것의 차이를 너무 모르는군. 세상물정 모르면서 막 말하지 마. 이건 순리, 섭리, 도리 등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까칠한 리아의 말솜씨는 분명 시아의 영향이리라. 시아의 말투가 영 곱지 않았다. 그녀를 타이르기 위해 모인 친구들에게 되레 그녀가 무지함을 질타하고 있으니, 친구들에게서 되돌아올 말도 절대 얌전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 그러세요? 그 동안 우리 장단 맞추느라 고생 많으셨겠네요. ……. 그래. 아-주, 아-주 잘 알았어.”
시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친구는 남은 도넛 2개를 단숨에 먹어치우고, 음료도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 덕분에 잘- 먹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먹는 행위로 풀어내는 체질이 틀림없었다. 자기 몫을 싹 비우는 데 순식간이었다.
“너 짜증나.”
“알아.”
“잘난 여왕님, 재수 없어.”
“알아.”
“은근 이기적이야.”
“알아.”
“너 혼자 그렇게 어른 행세하니까 우리를 깔볼 수 있어 기분 좋든?”
“말은 바로 해. ‘충고’하는 거야.”
친구는 건성 대답 속에서 진지한 한 마디가 나오자 입을 꾹 다물었다. 역시 시아를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소꿉친구 셋은 시아가 이렇게까지 상대하기 어려운 아이였던가 하고 넋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시아는 티슈로 입가와 손을 닦고 두 번째 도넛을 집어 들었다. 라즈베리 잼을 주입한 작은 구멍을 통해 투명하게 붉은 잼이 보였다. 냄새부터 달짝지근했다. 톡 쏘는 레모네이드로 입 안을 헹구고 도넛을 한 번 베어 무니,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달콤한 맛이 진하게 채워졌다.
“진 시아, 바보. 우리 얘기도 좀 들어줘.”
시아의 대각선 앞에 앉아 있는 친구가 곤란해 하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내 얘기 말고 다른 문제도 있었어?”
“실은 지수 때문에 널 부른 거야. 네 문제로 불렀으면 일찌감치 불렀어.”
“그런 거면 진작 얘길 했어야지.”
“가은이를 탓해랴.”
시아는 팔꿈치로 옆자리 친구를 세게 쳤다. 그 친구가 모두를 불러 모은 ‘유리’였다. 그렇다면 맞은편에서 고속 직구를 휘갈긴 ‘가은’이 시아에게 협박성 문자를 보낸 장본인이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야?”
“너니까 상담하려는 거야.”
정확하게는, 시아가 키메라이기에 말한다는 뜻이다. ‘지수’라는 친구는 말할 것을 생각하면서 두 손을 꽉 주먹 쥐고 불안해했다. 그러고 보니 딱 한 개 주문한 도넛에 손끝도 대지 않고 있었다.
“나, 사정상 제 5군에 있는 학교로 전학 갔는데, 전학 간 바로 이틀 뒤에 학교가 긴급 휴교했어.”
“요즘 한창 시끄러운 J고등학교지?”
“응. 역시 아네. 혹시 뉴스나 신문에 나온 대로, 방사능 물질 때문에 학생 78명이 죽었다고 알고 있어?”
“설마. 이런 정보에 어두우면 이 바닥에서 살아가기 힘들지. 게다가 그건, 내가 속한 조직에서 벌써 조사를 끝냈어. 뒤처리랑 피해배상 같은 일은 인간…… 나라에서 할 일이잖아.”
지수가 학교에서 겪은 악몽은, 이미 시아가 사흘 전에 정보 부대를 통해 입수한 사건이었다. 길드 입장에서는 별 거 아니지만, 무력하고 평범해 마지않는 여학생에게는 그 당시가 산지옥이었을 것이다.
길드 크루세이더가 만든 약 때문에 미친 키메라가 물불 안 가리고 폭주하면서 보이는 대로 때려 부수고 죽이고 잡아먹고 하는 건, 시아에게 있어 일상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내동댕이쳐진 시체와 흥건한 피, 이리저리 찢겨서 볼품없게 망가진 시체와 핏덩어리에 얽힌 내장들. 속 뒤집히는 썩은 내와 본능을 자극하는 피비린내. ―이것들이 평범한 인간 순종들이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연출되었다면, 분명 엄청난 아수라장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거 방사능 아니었어?”
“나라에서 쉬쉬하고 언론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이면, 90%이상이 다른 종족하고 생긴 문제지.”
“우리(에졸로페)는 텔테나 마이아에 비해 다른 종족하고 교류가 있는 편이라서 종족 외교 문제에 민감하잖아.”
유리와 가은이 대각선으로 쑥덕거렸다. 지수가 학교에서 있었던 참극 때문에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이 잠깐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아가 헛기침을 해야 대화를 끊었다.
“쿼터 엘프-웨어울프 혼정이라서 희생된 78명은 아주 역겹게 분해되었다더군.”
유리는 도넛을 씹으려다가 멈췄다. 그러나 시아는 아무렇지 않게 자기 몫을 깨끗하게 다 먹었다.
“아……. 시아에게 말한다는 ‘그것’과 관련된 일이 학교 침입자에 대한 거였어?”
“침입자가 아니라 그 학교 학생이야.”
시아가 정확한 정보로 유리의 말을 고쳐줬다. 유리는 얼빠진 얼굴로 잠시 생각하다가 지수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지수가 지금 얼마나 패닉 상태인지 드디어 파악한 것이다. 그건 가은도 마찬가지였다. 얼굴이 순식간에 새파래졌다.
“만약에, 우리 지수가 그 녀석하고 같은 반이었거나 하면, 우리 지수도 78명 안에 들어갔을 거란 말이잖아.”
“학생 식당에서 일어난 일이라 학년 반 무시하고 닥치는 대로 당했다지.”
이번에는 가은에게 부가 설명을 했다. 가은은 ‘꺄!’하고 소리 지르더니 옆의 지수를 꽉 끌어안았다.
“시아. 정말 자세하게 아네.”
“이 정도야.”
시아는 길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말을 아꼈다. 친구들이 자세하게 파고들 인물들이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 깊게 들어오려 한다면 단호하게 내뺄 생각이었다. 애매모호하게 행동하면 호기심만 지극할 뿐이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뒷골목의 여왕님께서 왕림하셨잖아.”
실컷 비꼬는 말투는 신 수진이었다. 손에 도넛 10개들이 한 박스를 들고서 시아를 아니꼽다는 눈으로 내려 봤다. 표정이 도도함의 극치에 다다랐다.
“이건 또 뭐야? 시아한테 자리 뺏긴 여우잖아.”
유리가 대신 신 수진을 상대했다. 시아의 소꿉친구들은 시아와 신 수진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빠짐없이 알기 때문에(길드와 관련된 일은 제외), 그녀들 역시 신 수진에게 적대심을 갖고 있었다. 대놓고 경계했다.
“아무 힘도 없는 딱가리는 빠져.”
“뭐야?”
발끈해서 일어서려는 유리를 시아가 가로막았다.
“조용히 사라져라.”
“흥.”
의외로 순순히 물러섰다. 그녀의 보스 사마엘이나 제 1기사 원 세훈에게서 잔소리를 들었거나, 오늘은 변덕스럽게 내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유야 어떻든 현명한 판단이었다.
“신 수진도 나랑 같은 과야. 그렇지만 플러스도 소속된 조직도 전혀 달라. 확실히 적이야. 그러니까 가급적 성질 건들지 마. 저 녀석, 자기네 조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거든. 아, 보스까지 합치면 열한 번째구나. 아무튼 그렇게 세력자야.”
“말도 안 돼 진짜야?”
“난 숨기는 건 잘 해도 거짓말은 안 해.”
“끙-.”
신 수진의 짧은 등장이 이들의 분위기를 싹 바꿨다. 잠깐이지만 지수가 겪었던 큰 위기를 잊을 수 있었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충격이 지나치게 컸던 터라 쉽게 외면할 수 없었는데, 신 수진이 의도하지 않게 선행을 베푼 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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