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 7 각성 ⑧

★은하수★ 2010. 12. 31. 16:30

 

시아가 악마계에서 오랜만에 자신의 영지를 둘러보고 있을 시각에, 민은 가이스 공작가에 도착하여 예상 외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한 마디 예고도 없이 찾아오면 어떡하는가. 환영 준비를 이것 밖에 못해서 민망하지 않은가.”

산뜻하게 커트한 금발과 피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눈동자. 인간으로 치면 30대 중반으로 보이나, 엘프가 패배감을 느낄 만큼 새하얀 피부와 수려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 나이를 판단하기 어렵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끝이 각진 귀를 보아하니 보이는 나이와 실제 나이가 판이하게 다른 종족이요, 보이는 것만으로 나이를 알 수 없다 하여 그의 나이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영지 입구에 발을 들이자마자 파수꾼이 사라지고, 1분도 안 되어서 심부름꾼들이 몰려와 저를 이리로 데려오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눈앞에 진수성찬이 깔렸어요. 굉장한 환대가 아니면 뭔가요?”

민은 자신의 최고 각성인 와인드급으로 각성한 상태였다. 드문드문 진보라색 틴트가 보이는 은발과 햇빛 한 번 쪼이지 않은 것 같이 고운 피부, 그리고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야들야들한 몸매를 가진 10대 소년은 같은 뱀파이어도 흘릴 만큼 페로몬이 강렬했다.

“드래곤의 양자로 들어간 후 처음이지 않은가. 이 정도로는 한참 부족해.”

“비린내 나는 생고기로 이만큼 다양한 요리가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그런데 이왕에 환영파티면 제가 오리지널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 주셨으면 해요. 레드 와인이 아니었으면 비린내 때문에 일찌감치 기절했을 거예요.”

“심부름꾼과 가이스 공작에게 이끌려 진수성찬 앞에 앉은 후로 레드 와인만 세 잔째였다.

미소년의 투정이 어찌나 귀여워 보이는지 심부름꾼들은 민이 말을 마치자마자 주방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상을 차리는 자들도 비린내가 덜 나는 요리를 손 빠르게 민 쪽으로 바꿔 놨다. 그리고 빈 잔을 다시 레드 와인으로 채웠다.

“그래도 생피를 섞지 않은 순수 와인을 대접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것만으로도 멋진 배려에요.”

가이스 공작은 너무 놀라서 표정을 정리하지 못했다. 말만 걸면 화를 내거나 무시하는 둥 소위 못된 성격에 찌들었던 민이, 잘 교육받은 귀족가 자제처럼 부드러운 미소를 짓는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옛날에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부드럽고 품위 있는 표정이, 지금은 몸에 밴 마냥 자연스럽게 연출되었다.

“엑서스엘 경에게 감사해야 하는가, 바르베리트 후작께 감사해야 하는가.”

귀여운 애완동물을 보는 마냥 눈에 ‘사랑스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민은 가이스 공작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새로 나온 스테이크와 레드 와인을 천천히 즐겼다.

새로 나온 음식들은 전부 잘 익힌 고기 요리나 생선 요리였다. 심부름꾼들이 주방에 들어간 것 치곤 음식이 빨리나왔다. 민이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처음부터 익힌 움식들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익힌 음식을 내놓는 데는 당연히 시간이 걸릴 테니 생고기 음식이 먼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입맛에 맞으십니까?”

익힌 음식을 만든 요리사가 흰 모자를 벗고 민에게 다가왔다. 그는 생피를 주기적으로 마셔야하는 중급 뱀파이어였다.

“네. 아주 맛있어요. 먹기 딱 좋아요. 고마워요.”

“영광입니다.”

요리사는 재빨리 그 자리를 피했다. 민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이야-. 정말 놀라워. 많이 변했어.”

“드세고 제멋대로인 보스의 비서로 있으려면 이 정도 사교 기술은 있어야 하더라고요.”

“정말 놀라운 발전이야. 날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던 아이와 나란히 밥을 먹는 날이 올 줄 꿈이라도 꿨겠어?”

가이스 공작은 고인이 된 친구가 이 모습을 보면 까무러칠 거라면서 친구의 아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민은 옛날 생각이 나서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부드러운 미소로 얼굴 전체에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아직 가이스 공작에게 품은 적의를 잃지 않았다. 평생 떨쳐내지 않을 것이다.

“용건을 말하죠. 보스의 심부름으로 왔어요. 그곳을 오래 비울 수 없어요.”

민은 심부름꾼을 통해 가이스 공작에게 디레스가 쓴 시아의 서신을 전달했다.

가이스 공작은 디레스가 휘갈겨 쓴 글자를 해독하느라 애 좀 먹었다. 그 사이에 민은 자기 몫의 식사를 마쳤다.

편지를 다 읽은 가이스 공작의 얼굴은 무표정으로 딱딱해졌다. 왼손 손등으로 가볍게 턱을 받치고 깊게 고민했다. 슬쩍 민을 흘겨보기도 하고 편지를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민에게 말을 걸 때까지 신중하게 생각했다.

내용을 모르는 민으로서는 가이스 공작이 답신을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시아가 문제를 일으킬 것을 염려하니 공작을 재촉하지 못했다.

“민아.”

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이스 공작의 표정이 진지했다.

“아직 지식전승을 다 못 받았지?”

“네.”

“받을 생각이 있느냐?”

민은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했다는 듯이 두 눈에 힘을 줬다.

“필요합니다. 해주세요.”

가이스 공작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시아가 보낸 서신을 봉투와 함께 촛불로 태웠다. 거절이나 모욕이 아니다. 받는 이 말고는 누구에게도 보여선 안 되는 중요한 내용이라는 뜻이다.

“지식전승이 끝나면 바로 보내주마. 바르베리트 후작에게는 ‘이미 충분히 보답을 받았으니 기대에 충실히 부응하겠다’고 전해줘.”

“역시 보스께서 저 모르게 뭔가를 꾸미시는군요.”

“아. 추신에 이렇게 써 있었어. 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주라고.”

“흐응-.”

민은 약간의 소외감과 서운함을 느꼈다. 그래도 ‘보스의 말씀이라면’이라는 충성심이 더 강했다.

가이스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널 위해서야. 감사하게 생각해.”

공작의 눈에 과거를 떨치지 못한 씁쓸함이 서려있었다. 민이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것이 기쁘면서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복잡하게 섞였다.

성 안 깊숙한 곳에서 지식전승을 치렀다. 드래곤과는 다른 분야로, 뱀파이어만의 풍부한 지식이 민의 머리에 담겨졌다. 당장은 그 방대한 지식을 인식할 수 없지만, 지식과 관련된 것과 얽히면 지식이 자동으로 분수처럼 뿜어져 나올 것이다.

민은 아지트에 돌아와서 시아에게 가기 전에 자신의 집무실에 우선 들렀다. 집무실이라 해봤자 거의 대부분 빈 방 신세고, 암살 부대나 특수전투 부대의 대원이 보고 차 들렀을 때나 온기가 조금 차는 정도였다. 극비임무를 수행하는 부대 특성상 적합한 비밀방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캡틴이셨군요. 홀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캡틴의 마력이 느껴져서 곧장 왔어요.”

지원과 솔아가 같이 들어왔다.

“보스도 안 계셔서 두 분이 같이 나가신 줄 알았습니다.”

“보스가 안 계셔? 아, 잠깐 어디 다녀오신다고 했지. 아직 안 돌아오셨어?”

“네.”

민은 긴 손톱으로 목 뒤를 살살 긁었다. 아직 플러스 상태였다.

“저-기, 캡틴.”

솔아는 볼을 붉게 물들이고 지원의 등 뒤로 몸을 가렸다.

“이제 그만 오리지널로 돌아가 주세요.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컨디션이 좋아서 좀 더 이 모습으로 있을 생각인데.”

“우우. 심술 맞으셔요.”

솔아의 얼굴이 더 빨개지고 지원의 옷을 붙잡은 손에 힘이 최대로 들어갔다. 민이 뱀파이어의 모습인 경우가 드물어서 면역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인간으로 버티기 힘들면 블러드 셰이드로 변하면 되잖아.”

“저기……. 저도 좀 난감합니다, 캡틴.”

지원도 얼굴 한 가득 ‘난처’라고 적혀 있었다. 앞에는 민의 강력한 페로몬, 뒤에는 솔아의 의외의 아양. 이렇게 되면 이성의 페로몬에 취해 정신 못 차리는 솔아보다 지원이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냥 버텨. 이것도 수련이야.”

“잔인하시네요.”

“잔인하십니다.”

솔아와 지원이 동시에 반발했다. 민은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었다.

“이런 이런. 내가 피를 달라고 꼬시면 대뜸 목을 내밀겠어.”

“우우-.”

솔아는 급기야 지원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원의 넓은 등짝에 솔아가 완벽하게 가려졌다.

“다른 녀석들은 임무 중인가?”

“네. 그런데 귀환․대기 명령이 떨어져서 금방 돌아올 겁니다.”

“보스가 그 명령을 내렸을 땐 나도 아지트에 있었으니까 알아. 음. 내가 자리를 비운지 네다섯 시간이 됐는데도 아직 귀환한 녀석이 없는 거야? 그렇게 멀리 보냈던가?”

민에게서 악의 없는 살기가 느껴졌다. 지원은 멋쩍게 웃어넘기기만 했다. 민이 모를 리 없지만, 어렵고 껄끄러운 임무가 대부분인 암살 부대와 특수전투 부대가 빨리 돌아와 봤자 만 하루는 걸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루젠토A라번 임무는 솔리가 지원을 나가긴 했는데,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 걸릴지도 모른댔어요.”

솔아는 지원의 등 뒤에 숨은 채 솔리가 남긴 말을 민에게 전했다. 솔리․솔아 사촌은 임무가 아니면 말 섞을 일이 영영 없을 것이다.

“루젠토는 접근부터 어려운 곳이라서 꾀 좀 부리지 않으면 며칠 걸려도 못 들어가.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중도 귀환해야지.”

“중도귀환 명령에 따를 인재들이 아닌데요.”

동료들의 성격을 뼛속까지 파악하고 있는 솔아는 눈만 살짝 내밀며 민을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나 5초도 버티지 못하고 다시 지원의 뒤로 꽁꽁 숨었다. 가뜩이나 캡틴과 보스에게 약한데 오늘 제대로 시달리게 생겼다.

“보스 명령도 어기고 내 명령도 어기는 셈이니까 어쩔 수 없이 돌아올걸? 그리고 솔리가 갔다며. 그러면 걱정할 거 없어.”

민은 지원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는 솔아를 의기양양한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사이에 낀 지원이 적잖이 고생했다.

“꽤 큰일을 벌이실 건가 봅니다. 전원 집합은 드물잖습니까.”

지원은 뒤에서 계속 자신을 미는 것을 버티며 어색하게 웃었다. 솔아의 체중실린 힘이 어찌나 센지 자세가 자꾸 흐트러졌다.

“난 몰라. 보스랑 스승님이랑 미스터 피스크가 준비한 이벤트라나. 아무 것도 모른 채 심부름을 다녀왔는데, 사정을 설명해주겠다던 보스가 아직도 부재중이잖아. 마침 딱 좋게 너희가 솔선수범 화풀이 상대가 됐으니까 끝까지 버텨봐.”

뱀파이어 모습에서 가늘게 짓는 미소는 남녀노소 불문하고 심장에 나빴다. 솔아는 눈 가리고 숨어서 못 봤지만, 지원은 직격이라서 머리가 아찔하도록 현기증이 났다. 인생 최대의 위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음속으로 시아가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빌었다.

[벌컥!]

“캡-틴-! 웬일이야? 여기에 있고.”

새로운 페로몬 희생양이 나타났다. 낭인족인 그녀는 기척 없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서 다짜고짜 민에게 달려들었다. 페로몬에 취하기 전부터 민에게 푹 빠진 적극적인 여성이었다.

“캡틴-. 오늘따라 눈부시게 섹시해.”

두 팔로 민의 목을 감아 안고 그의 무릎 위에 요염하게 앉았다. 아주 가까이에서 페로몬에 흠뻑 뒤집어 쓴 탓에 평소보다 10배는 더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가뜩이나 나날이 교태 솜씨가 진화하는데, 이성을 쏙 뺏긴 지금은 보기 민망하도록 몸을 꼬았다. 민이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민은 왼팔로 그녀의 허리를 살포시 감싸 안고 그녀의 응석을 다 받아줬다. 알 건 다 아는 나이다보니, 아니 그녀 이외에도 여럿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응법을 익혔다. 그 중에 육체관계를 가진 적이 제로라는 사실이 놀라움 따름이다.

“캡틴의 여자 꼬시는 솜씨는 세계야.”

“솔아 누님도 저렇게 해보시죠.”

“죽을래?”

“이제 좀 떨어지십쇼. 새빨간 거머리 같습니다.”

“닥쳐.”

솔아는 지원이 아무리 떼어내고 헛소리를 해도 그의 등 뒤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바짝 붙었다.

“존경하는 캡틴께 추태를 보일쏘냐.”

“라벤더 누님-. 솔아 누님이 추해 보인다는뎁쇼?”

“야! 강 지원!”

솔아는 지원을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지원은 한 발짝만 뒤로 움직이며 비틀 거릴 뿐 넘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넘어졌으면 솔아가 쿠션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이 유치한 장난을 하는 중에 라벤더라는 낭인족은 지원의 목소리가 모기 소리만큼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민에게 찰싹 붙어 안겨서 불규칙적으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민이 제어하지 않는 순도 100% 페로몬은 환각제 이상의 효능이 있었다.

“최음제를 마신 것 같습니다.”

“최음제였으면 벌써 캡틴하고 몇 번 했을 걸? 뱀파이어의 페로몬 중에 최음제 같은 것도 있다고 하는데 캡틴은 단순한 환각제야. 뭐, 최음제 틱한 힘도 있어 보이지만.”

지원과 솔아는 민과 낭인족 길드원을 집무실에 남겨두고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와서 문을 닫고 뒤로 도는 순간 숨이 탁 트였다. ‘살 것 같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그들은 자유롭고 상쾌한 바깥 공기를 맘껏 마셨다.

“캡틴은 언젠가 여자 문제로 골치 아플 겁니다.”

“조심성 많은 사람인데 설마 그런 일 있겠어?”

“라벤더 누님을 다루는 걸 보니까 아-주 능숙하셨습니다.”

“능숙할 만 하지. 그냥 인간일 때도 여기저기서 덮쳐오는 여자들이 산을 이루는데 실력이 안 늘겠냐? 그래도 캡틴은 보스만 보는 해바라기니까 여자 문제 같은 추문은 없을 거야.”

가디안스가 창설된 이래로 쭉 민을 봐온 솔아다. 민에게 안기려고 덤벼드는 여자는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지만 치정 싸움은 기미조차 없었다. 민이 선을 잘 지키기도 하고, 워낙 보스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터라 여자들이 그의 충성심을 뚫고 다가갈 틈이 없었다.

“만약인데, 만약 캡틴이 보스에게 연애감정을 가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단순한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그런데 솔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가능한 얘기로 가설을 세워줄래? 그거 은근히 호러야.”

“가능하다고 봅니다만. 단순히 충성심만으로 그렇게 열심히 보스의 옆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지 연애 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을 겁니다. 아, 자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군요.”

지원은 자신보다 어린 두 상관을 부지런히 관찰했다. 시아가 민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길드원을 대할 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민은 시아와 같이 있을 때가 제일 민감했다. 유별나다를 넘어서 극성인 면이 자주 눈에 띄었다. 부자연스러운 점이 너무 잘 보였다.

“으응. 널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다들 처음엔 긴가민가했거든. 나도 그랬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게 보이더라고. 보스랑 캡틴이 절대 서로에게 연애감정을 가지지 못하는 이유가 말이야. 처음부터 둘 사이에 ‘연정’이 누락됐다는 걸 너도 알게 될 거야.”

야사 냄새가 풀풀 나는 이야기를 숨기고 인과관계만 대충 둘러댄 느낌이었다. 아직 알 때가 아니라는 식으로 한 팔 멀리 밀어냈다고 해도 좋다. 지금 솔아가 자신이 지금 의심쩍을 정도로 어색하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 손으로 얼굴을 마구 매만지며 당황해 할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감정이 누락됐다는 겁니까?”

“그래. 그런 관계야. 설사 비슷한 감정이 생겨도 연애 쪽이 아닌 충성 쪽으로 급선회해. 으응-. 내가 일일이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아 그렇구나 하고 대충 이해하고 넘겨. 솔직히, 자세한 건 모르는 편이 나. 알고 후회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니까.”

솔아는 어설프게 대화를 마무리 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지원은 이 호기심을 포기해야 하나 싶었다. 보스와 제 1천왕 사이의 비사(숨겨진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 뭔 죄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직감적으로 그 비사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을 것이라는 기분도 들었다.

길드원들이 속속 모여들고 제 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는 중에 진격 부대 한 팀이 통째로 피투성이가 돼 돌아왔다. 그 중 한 명이 시아가 얼음의 대지에서 데려온 키메라였다. 살라만더-글라셰 키메라, 몰 코톤. 그는 빙결 마법으로 팀원과 자신의 상처를 임시 동결시키고 있었다. 덕분에 다들 부상 때문에 악화되지 않고 다친 당시 그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들을 처음 발견하고 화타에게 알린 자가 지원이었다. 갖은 생각을 하며 홀을 방황하던 차에 그들이 눈에 들어오자마자 온갖 생각이 깨끗하게 사라져버렸다. 머릿속에는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만 빼곡하게 채워졌다.

이 소식을 듣고 아지트에 있는 굵직한 간부들이 모였다. 시아는 아직 부재중이었다.

밀리엄은 자기 직속 부하들을 살펴보며 마음 아파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치료를 직접 도왔다.

“살덩어리 퇴치를 한 두 번 하는 것도 아니면서 이게 무슨 꼴이야?”

“헌터 일족이라고 자칭하는 녀석들이 매복하고 있었어. 아무리 인간 순혈이라도 엘리트 코스를 밟은 녀석들을 상대하는 건 힘들어.”

“얼마나 있었는데?”

“40명.”

몰의 딱 부러진 대답에 밀리엄이 할 말을 잃었다. 몰이 속한 팀은 그를 포함해서 3명이었다. 헌터 40명과 키메라 3명의 싸움이었다는 말이다. 피 튀기도록 살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 돌아와서 천만 다행이군.”

화타가 대신 그들을 위로했다.

정보 부대 3명의 사건이 최근에 있었기 때문에 간부들의 심기가 가히 불편했다. 이럴 때 보스가 없어서 야속한 마음도 들었다.

“소문을 듣고 강 족을 모방한 건가?”

“아니. 강 족이 시킨 대로 한 거야.”

디레스는 민의 혼잣말에 대꾸했다. 그는 역시 뭔가 알고 있었다.

헌터 일족 연합. 디레스가 독자적으로 조사하여 시아와 엘더에게만 알렸다. 강 족의 첫 번째 목표물은 길드 가디안스이나, 연합의 대부분이 드래곤 슬레이어라서 은룡왕인 엘더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드래곤 일족의 수장들은 연합의 존재를 알 수 있게 됐다.

“바보 같은…….”

“성가신 녀석들이 자존심을 버리고 뭉칠 줄도 안단 말이야?”

“세상이 살벌해지는 건 시간문제군.”

연합의 존재를 듣고 당황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엘프와 드워프가 친해졌다는 얘기보다 더 비현실적이야.”

“적절한 표현이에요, 미스터 브롤.”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다소 걸렸다. 그냥 황당한 정도가 아니니 당연한 일이었다.

[쿠구구구구구구]

굉음을 끼고 거대한 마력이 아지트 전체를 휘감았다. 그런데 누구도 긴장하거나 경계하지 않았다. 초짜 길드원이라도 이 마력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민은 보스의 집무실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벼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정령들이 부정을 걱정하지 않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곳이 이제 얼마나 남았으려나. 인간계에는 눈곱만큼도 남지 않았고 그나마 안전한 곳이 엘프의 낙원이라 하는데, 콧대 높은 엘프들이 정령과 사이가 틀어진 탓에 정령들이 머물 수 있는 장소가 갑자기 협소해졌다.

물론 ‘정령계’라는 이름의 정령이 태어나고 죽어 되돌아가는 고향이 따로 존재한다. 하지만 다른 종족과 주종계약을 맺은 정령은 계약자와의 계약에 의해 소환에 쉬이 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만약 계약자가 정령계의 문을 여는 소질이 부족하면 정령이 자신의 마력을 지불해서라도 소환을 완수해야 한다. 그래서 계약에 묶여 있는 정령은 가급적 계약자와 가까운 곳에 거처를 정한다.

정령과 계약하는 자는 대개 원소력이 부족한 자다. 그런데 원소력이 미흡한 종족이 사는 땅은 정령이 머물기 척박하기만 하다. 대자연이 태초의 정갈한 모습 그대로 숨 쉬는 곳이, 태초로부터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지금 얼마나 남아 있을까.

엘프들의 낙원 엘프하임이 정령을 거무하면서 정령과 계약자 간의 계약이 와해되는 일이 일어났다. 새로 계약하려는 자도 정령계의 문을 언제든지 열 수 있는 능력자로 한정되었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망가졌으니 종족간의 공생이 힘들어졌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나마 정령이 의지할 수 있는 땅은 드래곤의 레어 일부어 수인족의 땅이다.

길드 가디안스의 새로운 일원, 크림슨 카마엘과 사적인 문제가 있었고 그 때문에 길드 가디안스의 적으로 찍힌데다가 용족 수장 회의에서 징계를 받은 드래곤이 있으니, 수룡들의 우두머리인 수룡왕이다. 요새 존재 자체 때문에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헌터 일족 연합과 이 수룡왕이 꽤 깊은 관계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강 족의 수장과 수룡왕이 친밀한 사이일 따름이다.

수룡왕의 레어는 드래곤의 레어 중에서도 손꼽히는 청정지역이다. 대자연의 은혜를 듬뿍 받았다고 칭송받는 곳이다. 그래서 레어 곳곳에서 더부살이 정령을 목격할 수 있다. 대지의 정령이나 바람의 정령이 곧잘 보이는데, 수룡왕의 레어에서 가장 많은 정령은 물의 정령이다. 레어 서쪽의 호수에 가면 운디네, 네레이드 등 물의 정령이 하나의 마을을 이루고 있다.

“언제봐도 장관이군.”

긴 백발을 바람에 자연스레 맡기고 눈에 보이는 나이에 비해 허리가 꼿꼿한 노인이, 물의 정령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호수에 나타났다. 드래곤의 최강의 적이라는 강 족의 수장이었다. 아직 수장 자리를 유지할 만큼 강 족의 어느 젊은이보다 강하다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젊은 시절부터 탄탄하게 단련한 근육이 팔랑거리는 옷 안 쪽에 숨어 있었다.

그의 옆에 거대한 곰만한 바위가 있었다. 그 위에는 푸른 머리칼을 하나로 곱게 땋아 내린 청년이 주변 경치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서있었다. 그가 바로 수룡왕이었다.

“귀한 정령을 보호해주고 있는 자네가 근신이라니. 용왕들은 모두 어리석어. 그들은 자네를 시기하는 거야. 시기심에 눈이 멀어 자네를 내친 거야.”

70세 언저리의 노인은 학창시절을 즐기는 소년처럼 서스름없이 인상을 찡그렸다.

“부조리한 판단을 따를 필요 없네. 마음껏 밖을 날아다니시게. 그대는 하늘을 나는 것이 허락된 존재요, 수룡들의 우두머리로서 언제나 맨 위에 있어야 할 자가 아닌가. 용왕들의 어리석은 판결에 구애될 필요 없어.”

수룡왕은 강한 어조의 짧은 웅변을 가만히 듣기만 했다.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시고 자신보다 낮은 것들을 내려다보며 무엇을 생각하는가. 몇 십 년 알고 지낸 친우의 말을 제대로 듣고는 있는가.

“난 자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어. 드래곤 슬레이어인 내가 자네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닌가. 그대의 용맹함과 자비로움과 지혜로움과…….”

“그래서 내게 원하는 게 뭐지?”

수룡왕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무표정에서 나오는 분위기가 가히 무거웠다.

“어리석은 것은 자네야.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알고는 있는 거야? 난 천사를 품에 안았어. 그것도 아주 저급한 방법으로 괴롭히면서. 용왕들이 처벌을 내리지 않았으면 천상계의 율법에 따라 이 세상에서 소거됐을 것이야.”

수룡왕은 오른손을 가볍게 주먹 쥐고 욱신거리는 배 위에 얌전히 가져다 댔다. 실은 배보다 10배로 더 욱신거리는 가슴에 얹고 싶었다. 그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반짝이는 펜던트는 천상계의 주민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그가 무리하게 품은 천사가 타천사가 되는 바람에 박탈당한 증표였다.

“마음에 드는 처자를 안은 것이 뭐가 죄인가?”

“그 입 조심하는 것이 좋아. 어느 출신의 여인이건 멋대로 취하면 천벌 받아. 그런데 나는 천사를 안았으니 당연히 죽어 마땅해. 하지만 이렇게 살아있네. 내 목숨을 건져준 용왕들에게 이 마음 깊숙이 감사하고 있어. 당시엔 그녀에게 미쳐 주변이 보이지 않고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똑바로 보인다네. 난 평생에 걸쳐 속죄해야해.”

수룡왕을 감싸는 바람이 점점 부드러워졌다. 그에 따라 가슴의 통증이 심해졌다.

“타천사의 원한은 정말 속수무책이야.”

강 족의 수장은 태양빛 때문에 수룡왕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낮게 불어 닥친 돌풍 때문에 수룡왕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오랜 친우가 한 순간 멀게 느껴졌다.

“난.”

노인이 한껏 목소리를 높였다.

“자네에게 창피를 준 가디안스에게 복수할 걸세. 특히 버르장머리 없는 계집을 내가 친히 교육시킬 생각이야. 내 손녀들을 빼돌리고도 태연하게 내 적을 자청한 그 당돌한 꼬마를 자네 대신 나락에 떨어트릴 게야.”

흰 옷자락이 위에서 사뿐히 내려앉았다. 수룡왕은 강 족의 수장과 마주 볼 수 있게끔 바위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는 젊은 청년의 얼굴을 노인의 얼굴에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리고 노인이 뒤로 도망가지 못하게 두 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아무리 헌터라도 한낱 인간이야. 얼마 남지 않은 목숨, 죽음을 재촉하지 말아. 시아 바르베리트는 악마계 안에서도 손꼽히는 자야. 보통 내기가 아니라고. 그녀가 주변 영향을 무시하고 진심으로 힘을 발휘하면 신이 아닌 이상 그녀에게 대항할 자가 없어.”

“강하고 현명한 자네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가?”

노인은 장난감을 잃고 기운이 빠진 소년처럼 고개를 떨궜다. 두 눈동자의 초점도 흐트러졌다.

“나는 그대를 진심으로 아껴. 그러니 자네가 더 오래 살았으면 해.”

“나는…… 내 정의를 따를 걸세.”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무기를 처음 손에 든 그 날부터, 나와 오랜 인연을 함께한 사랑스러운 벗이여. 부디 내 말대로 해주게.”

수룡왕은 강 족 수장의 얼굴을 큼직한 손으로 감싸 잡고 자신과 눈이 마주치도록 했다. 긴 시간이 지났어도 처음 만났던 날처럼 탁하지 않은 눈동자가 안쓰럽게 보였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것을 알면서도 살려둔 그 날의 변덕은, 바로 이 청아한 눈 때문이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그대 역시 일족을 짊어진 수장이야. 모두를 죽음에 몰아넣지 말아.”

“되돌리지 못하네.”

“할 수 있어.”

“난 에덴과 손을 잡았어. 벡터스에게서 벗어날 수 없네.”

강 족의 수장은 조심스럽게 그리고 정중하게 수룡왕의 손을 뿌리쳤다.

“오랜 친우이자 마음의 어버이이자 영혼의 길잡이인 친애하는 수룡왕이여. 육신이 살아 있는 시간 중에 마지막 인사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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