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각성
등 뒤로 길게 땋아 내린 금적색 머리칼을 풀어 곱게 빗질하면 그 끝이 무릎까지 닿을 것이다. 게다가 머리카락 무게만 해도 체중의 1/3은 되지 않을까? 6-7세 정도의 소녀는 무거워 보이는 머리칼을 살랑살랑 흔들며, 자기 주먹만 한 금종을 두 손에 꼭 잡고서 넓고 긴 복도를 총총총 뛰어다녔다. 가루다 순혈이라 맹금류의 상징인 날개와 날카로운 눈동자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손바닥만 하게 크기를 줄이고 다녔다. 전부 감출 정도의 실력은 되지 못했다.
길드 가디안스의 아지트는 벽, 바닥, 천장 모두 웬만해선 깨지지 않는 화성암이다. 원래 투박하고 거친 바위지만 유명한 석공이 손질해서 겉에 보이는 표면은 유리처럼 매끄럽다. 그래서 혹시 모를 어처구니없는 사고에 대비하여 바닥에는 회색 카페트가 깔려 있다. 그런데 고압축식 카페트라서 넘어지거나 엎어졌을 때 전신을 휘감는 통각은 그냥 바닥에 엎어진 것보다 아주 조금만 적을 뿐이다. 어디까지나 미끄럼방지용이지 쿠션용은 아닌 셈이다.
[쿵-]
그래서 카페트 위에 묵직한 것이 떨어지면 이런 울림이 생긴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나면 으레 말소리도 공기를 타고 같이 울려 퍼진다.
“보스- 배달입니다.”
제2천왕 디레스 엑서스엘이 전신에 사슬이 감겨 있는 휴먼족을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쳤다. 디레스는 편의상 휴먼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본래 레드 드래곤 순종이라 발휘하는 힘이 보통이 아니다.
“디레스, 아프잖아.”
제1천왕이 지휘하는 특수전투부대에 소속되어 있는 휴먼족-미노타우루스 키메라, 강지원. 가디안스에 들어오기 전에 보스 진시아와 마주쳤던 적이 있는 그인데, 무사히 3단계로 각성하고 나서 사촌 여동생 박세나를 데리고 아지트에 다짜고짜 찾아왔던 ‘과거 괴짜 신인’이다. 지금은 1년이나 지났고 특별부대의 대원으로 박탈됐을 만큼 인정받고 있다.
“다녀오셨어요, 사부님, 오빠. 보스는 아직 주무세요.”
세나도 3단계 각성이 가능한 키메라다. 전에 보스와 제1천왕의 눈앞에서 지원을 데리고 도망간 네레이드다. 오리지널은 휴먼족이지만 플러스인 네레이드에 더 가까워서 네레이드 순종과 흡사한 실력으로 고유기술을 다룬다. 그래서 디레스가 지휘하는 특별부대, 수색부대와 정보부대 양쪽 모두에 소속되어 있다.
[탁탁탁탁탁탁]
지면을 가볍게 튕기는 듯한 발소리가 그들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세나의 등 뒤에서 멈췄다. 소녀가 들고 있는 금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특별한 종이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려도 조용한 게 당연했다. 만약 그녀의 종에서 소리가 나면 아지트 안에 있는 길드원들이 한 명도 남김없이 전투태세를 취할 것이다.
“디레스 아저씨, 안녕.”
소녀는 세나의 등 뒤에 숨은 듯이 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디레스와 세나는 잘 따르면서 지원은 여전히 어려워했다.
“안녕, 멜로즈.”
“여전히 건강해 보이는군, 공주.”
‘멜로즈’라고 불리는 소녀는 길드 가디안스의 신변보호 대상자로서 가루다 왕가의 단 하나뿐인 직계혈통이다. 직접 의뢰를 받은 건 제4천왕 크리세이스 하갈이지만 신변보호를 이유로 좁은 곳에만 두기엔 가엽다고 판단하여 길드원처럼 자유롭게 놓아주고 있다. 그래서 다들 처음에는 그녀를 ‘왕녀님’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편하게 이름으로 부른다. 디레스나 실버 드래곤 순종인 엘더 피스크는 정중함 반 장난 반으로 ‘공주’라고 부른다.
“응. 아저씨가 없었던 4일 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가디안스는 건재해.”
그녀는 다시 세나의 뒤에 쏙 숨었다. 오른손으로 종을 가슴 쪽으로 꼭 끌어안고 왼손으론 세나의 웃옷 밑자락을 움켜잡았다.
“하-.”
지원은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그리고 숫기 없는 작은 아가씨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양 볼을 길게 잡아당겼다.
“멜로즈, 나한테 인사는?”
“아, 안녕.”
“그래, 안녕.”
그는 붉은 빛이 도는 볼을 손바닥으로 반죽하듯이 문질렀다. 멜로즈는 이제야 긴장을 풀고 그를 향해 두 팔을 높이 길게 뻗었다. 그는 기꺼이 그녀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왼팔에 걸터앉을 수 있게끔 안았다. 그녀는 금종을 두 손으로 꼬옥 감싸 잡고 그에게 편하게 기댔다. 세나의 등 뒤에서 낯을 가리던 꼬마 아가씨는 온데간데없었다.
디레스는 삼촌 조카 같은 모습을 지켜보다가 제자 세나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원에게 끌려 길드에 막 들어왔을 때는 불안함과 온갖 걱정을 다 가진 표정이라 항상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웃을 줄 알았다.
“보스는 어제 뭘 했는데 이 시간까지 자는 거야?”
태양이 하늘 제일 높은 곳에 뜬 시간이었다.
세나는 조금 곤란하다는 듯이 씁쓸한 눈웃음을 지었다. 스승이자 직속상관인 디레스에게 숨길 것이 없어야겠지만 보스에게 철저히 입단속을 당한 모양이었다.
“말 안 해도 대충 알겠다. 우리가 크루세이더랑 맞붙는 동안 혼자 다스 엔데에 다녀왔지?”
으레 있는 일이라서 일일이 따지는 쪽이 에너지 낭비였다. 시아의 성격을 다 알면서도 그녀를 보스로서 모시고 있는 자신에게 한숨 쉴 뿐이었다.
“거기 다녀온 지 얼마나 됐다고. 하-. 민이 있었으면 분명히 말렸을 텐데 녀석도 자리를 비운 거야?”
“민 캡틴도 주무시고 계세요.”
“같이 갔다 왔어?”
디레스는 넓은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뻑 소리 나게 쳤다. 지끈거리는 두통을 가볍게 날려버리고 다시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우리 보스가 멋대로 가겠다고 하니까 민이 말리다 못해 따라갔다면 평소와 똑같은 거고, 순순히 따라갔다면 얼마 전 항쟁에서 뭔가를 발견했던 거고, 둘 다 아니면 그냥 콧바람 쐬러 그 멀리까지?”
“저는 한낱 길드원이라서 보스와 캡틴의 속은 알 수 없어요.”
세나는 가볍게 웃어넘겼다. 멜로즈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나도 몰라’라고 세나를 거들었다. 이들의 관계를 냉철하게 따져보면 세나와 멜로즈는 보스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도 간부와 길드원 사이의 소통이 원만하게 활발한 가디안스인데, 보스에게 허물없이 가까이 다가가고 보스에게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이 두 숙녀분들이 ‘모른다’고 대답하는 것은 수상하다면 수상한 일이었다.
“디레스. 지혜롭고 용맹한 드래곤이 아가씨들을 괴롭히면 보기 흉해.”
시아가 디레스의 등 뒤에 워프를 열고 나타났다. 오른손을 그의 왼쪽 어깨에 탁 소리가 나도록 얹더니 왼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시원하게 하품을 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응. 잘 잤어. 곤히 자고 있었는데 이 아저씨 때문에 깼어.”
그녀는 지원, 세나, 멜로즈의 형식적이지만 귀에 즐거운 인사에 환한 웃음으로 답했다. 그래도 아직 덜 깬 듯 디레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살포시 감았다. 디레스는 피하지 않았다.
“나 때문에 깼다니?”
“드래곤 한 마리가 강림했는데 자는 중이라도 눈치 못 채면 바로 황천길이잖아.”
“그건…… 일반적으로 상식이지만 여기선 아니잖아.”
디레스는 시아의 장난이 섞인 억지를 겸연쩍은 웃음으로 되받아쳤다. 시아는 그에게 기댄 채 키득키득 웃었다.
“어제 펜타곤의 단서를 한 개 더 찾았는데 해독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마엘하고 제1기사가 기둥을 박살냈어.”
웃는 얼굴로 풍기는 살기는 동료 입장에서도 소름이 끼쳤다. 시아가 몇 단계까지 각성해서 길드 크루세이더의 보스와 한 판 거하게 했을지, 상상하는 것부터 살이 떨렸다. 아지트에 돌아오자마자 시아와 민이 나란히 쓰러져 잠들었으니 절대 보통은 아니었을 것이다.
펜타곤. 종족을 초월한 절대 키메라 5인을 칭한다. 태고적 신들이 여러 종족을 뒤섞어 만든 최초의 인위적인 생명체로 키메라의 시초라 한다. 게다가 이들이 대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태어나, 대자연의 법칙을 무너트리며 활보한 탓에 뮤테이션(돌연변이) 3종-키메라, 크로스, 눌-이 태어났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다. 단순히 순종들이 키메라 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설’인지, 다스 엔데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진짜 ‘사가(saga)’인지는 알 수 없다. 정작 중요한 5인이 실존하는지 자체도 지금으로써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다스 엔데로 가는 길을 볼 수 있는 종족이 키메라뿐이며, 순종이 아무리 잘났어도 키메라의 도움 없이는 진짜 사가에 접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한 만큼, 키메라도 엄연히 신에 의한 피조물이고 순종이 키메라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이상해.”
멜로즈는 고개를 왼쪽으로 살포시 갸웃거렸다.
“크루세이더도 펜타곤을 찾고 있잖아. 왜 기둥을 부숴?”
“우리가 먼저 펜타곤에 가까워지는 걸 방해하려는 거지. 어차피 다스 엔데는 진짜 사가가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 기록되는 신성한 장소야. 암만 때려 부숴도 다른 곳에 똑같은 기둥이 생겨나지. 아으-. 어떻게 찾아낸 건데.”
시아는 디레스에게 머리를 기댄 채 좌우로 비볐다. 디레스는 말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여줬다. 그런데 그의 손이 허공에서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그녀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눈을 살짝 치켜 올리며 자신의 눈을 빤히 쳐다봤기 때문이다. 이럴 땐 눈치껏 그녀가 묻기 전에 그녀가 원하는 말을 해야 했다.
“우리쪽 ‘보고’말이지? 여기서 해?”
“굳이 집무실로 갈 필요는 없잖아.”
“갔으면 하는데.”
“재주껏 짧게 끝낼 얘기가 아니라면 굉장히 성가신 일이었나보군.”
멜로즈와 손장난을 하고 있던 지원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Gifte von Kreuzzug)…… 입니다.”
순간적으로 시아의 표정이 굳고 세나와 멜로즈 역시 입을 꼭 다물었다. 긴장감이 스민 정적이 스멀스멀 짙어졌다.
“보스.”
디레스가 시아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미안. 그 불쾌한 단어를 오랜만에 들어서. 가서 얘기하자.”
시아가 앞서 보스 집무실로 향했다. 멜로즈도 따라가고 싶어 했으나 지원이 반강제로 그녀를 세나에게 맡겼다. 세나는 차후 직속상관인 디레스에게 듣거나 회람을 통해 알게 될 테니 지금은 어린 공주의 정신적 건강을 우선으로 챙겼다.
“캡틴도 부를까요?”
지원은 뒤를 따라가다가 또 한 명의 늦잠꾸러기를 떠올렸다.
“이미 깼어.”
보스가 일어났는데 제1천왕이자 보스의 비서를 자칭하는 자가 일어나지 않았겠냐는 투였다. 그도 분명히 디레스의 숨길 수 없는 드래곤 포스 때문에 본능적으로 눈이 떠졌을 것이다.
“밀리엄하고 크리세이스는?”
“낸들 알아? 어디서 뭔가를 하고 있겠지.”
겨우 제3천왕과 제4천왕이 언급되는가 싶더니 시아는 무심하게 흘려넘겼다.
“보스. 크리세이스는 그렇다 치고, 밀리엄은 너무 풀어주면 못 써.”
“알아.”
“일부러 풀어두는 것 같아서 그래.”
“음-, 뭐.”
“역시나.”
제4천왕 크리세이스 하갈은 멜로즈의 호위를 부탁받은 몸이지만 워낙 홀로 전장을 누비는 걸 즐기는 탓에, 멜로즈를 길드 아지트에 남겨두고 밖에 나돌아 다니는 것이 일상이다. 하지만 보스가 부를 땐 착실하게 길드로 돌아와 소임을 다한다. 그리고 언제나 꼬박꼬박 자신이 있는 곳과 앞으로 갈 곳을 보고하기 때문에 믿고 밖에 두는 것이다. 제3천왕 밀리엄 브롤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1년하고도 반 년 전에 약혼녀가 가디안스를 배신하고 크루세이더의 간부가 된 후로 가끔씩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가뜩이나 오리지널이 하이엘프라서 상대하기 껄끄러운데 플러스(실버 드래곤)로 각성하는 때에는 시아가 친히 때려 눕혀야 사태가 진정된다. 그럴 때마다 밀리엄은 길드 내 반성실에 일주일동안 갇히고 민과 디레스가 교대로 감시한다. 시아가 중간에 빼내 주다보니 실제로 5일조차 채우지 못하지만 말이다.
집무실에 들어가니 민이 벌서 마실 것들을 깔끔하게 차려놨다.
“들어오자마자 시큼한 향기.”
“보스. 잠은 다 깨셨나요?”
“아-주 완벽하게.”
시아는 민 특제 레모네이드를 단숨에 절반이나 비웠다. 혀를 자극하는 산미와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탄산 따위는 신경 쓸 거리가 아니었다.
“자, 너희도 민의 성의를 쭉 들이키라고.”
“아무리 냉커피라도 일단은 커피라고.”
디레스와 지원은 한두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민이 심혈을 들여 만든 실론티 시럽으로 단맛을 가미한 덕분에 혀를 뒤덮는 듯한 커피 고유의 떫은 느낌을 쉽게 흘려 넘길 수 있었다.
“보스의 신경이 많이 날카로우신데 금세 무슨 일이 있었죠?”
민은 잠깐 레모네이드 병을 가지러 간 사이에 잔을 깨끗하게 비운 시아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디레스와 지원을 적잖이 날카로운 말투로 채근한 건 잔을 다시 가득 채운 후였다.
“아직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 밖에 언급하지 않았는데 이 정도십니다.”
“또 뭐 있어?”
지원이 도화선에 불을 제대로 댕겼다. 시아의 표정은 무뚝뚝했으나 짜증과 불만이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것처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눈빛에서 희미하게 살기까지 보였다. 이런 상태의 보스에게 보고를 계속할 순 없었다. 할 수 있다면 비교적 보스를 덜 두려워하는 4천왕뿐일 것이다. 결국 지원은 직속상관 민에게 도움의 눈짓을 보냈다.
“엑서스엘 씨.”
디레스는 민과 시선이 부딪히자마자 씨익 웃었다.
“우리가 뭐러 상대로 고전했는지 알면 화타 영감이 제일 좋아할 거야. 그러엄. 화타 영감이라면 그걸 싱싱한 상태로 곱게 모셔오라고 방방 뜰 테지.”
장난기가 만면에 그득했다. 하지만 곧 만사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것’과 악전고투하던 당시가 떠오르자마자 시아와 민을 일부러 애태울 기분이 깨끗하게 없어졌다. 그는 냉커피로 한 번 더 목을 축이고 본격적으로 보고를 시작했다.
“에졸로페와 마이아의 경계 어딘가에 크루세이더의 공장이 있다는 소문이 이번 임무의 계기였지.”
에졸로페와 마이아는 모두 3대 대국에 속한다. 나머지 한 곳은 텔테.
“정확하게는 ‘여전히 가동 중인 공장’이죠.”
민이 일부러 정정하면서 강조하는 것도 당연했다. 지난 1년 동안 크루세이더가 운영하는 공장을 철저하게 색출해서 터를 남겨두는 것조차 자비로울 정도로 험악하게 파괴했다. 크루세이더의 공장을 가장 경계했던 건 순종 중에서도 약체에 속하는 종족이었지만 그들이 크루세이더를 상대하기엔 벅차기 당연해서, 자발적으로 움직인 가디안스를 비롯한 의뢰를 받은 다른 길드들이 정보를 공유하며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길드 간 연합이 이루어진 것도 역사상 몇 없던 일이었지만, 특히나 이 사건은 뮤테이션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길드에 순종이 섞여 들어가기 시작한 계기기도 하다. 이전까지만 해도 순종이 섞인 길드는 가디안스가 유일했다.
크루세이더의 공장에서 만든 것이 보스 시아를 한 순간에 예민하게 몰아붙인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로, 풀어 말하면 ‘크루세이더의 선물’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크루세이더에서 붙인 이름이고, 세간에서는 일반적으로 ‘크루세이더의 독’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이 키메라가 되기 위해 거치는 엄격한 의식(3종류 중에 한 가지만 통과하면 된다)을 더럽히는 독약으로써 순종이 더욱 키메라를 경멸하는 기폭제가 됐다. 그렇다. 순종이 의식을 거칠 것 없이 독약을 먹는 것만으로 키메라가 되는 것이다. 가끔 순종이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 되서 키메라들에게 둘러싸여 강제로 키메라가 되는 의식에 내던져지는 범죄로 세상이 시끌시끌한데, 더 간단하고 순간적인 방법으로 키메라화가 된다니, 나약한 순종들은 거리에 나서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게다가 이 독약은 키메라가 먹을 시 한 단계 위로 쉽게 각성할 수 있다는 효능까지 갖췄다. 그래서 크루세이더의 타깃은 1, 2단계의 약한 키메라도 포함됐다. 다른 길드들이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순종의 안전보다 동료들의 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째서 ‘크루세이더의 선물’이 아니고 ‘크루세이더의 독’이라 부르는가?
폭주 부작용. 원래 순종이 키메라가 되는 순간, 키메라가 한 단계 위로 각성하는 순간 모두 폭주할 가능성이 있다. 자신이 얼마나 억제할 수 있는지가 잠재능력을 가늠하는 척도며, 자신보다 강한 타인의 도움으로 유연하게 극복할 수 있다. 물론 완전히 이성을 잃으면 죽음만이 있을 뿐이지만 확률이 10%이하다. 하지만 크루세이더의 독을 먹으면 십중팔구 폭주한다. 이성 따위 없는 순수한 괴물이 될 뿐이다. 이성이 약간 남아 있더라도 순종이 키메라가 된 일은 한 번도 없었으며 상위각성도 결국 실패로 끝났다. 몸에 닿는 대로 시야에 들어오는 대로 죽이고 부수는 괴물만 줄줄이 만들어져서 조용할 날이 없었다.
“공장은 부쉈지?”
“아-주 힘들게 부쉈어.”
디레스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이 손사래를 쳤다. 시아는 여전히 무표정 일색이지만 살기 가득한 분위기는 더욱 농후해졌다.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 외에 화타가 좋아할만한 것이 그렇게나 성가시단 말이야?”
“오오, 보스, 깔끔하게 정리를! 내가 한 단어로 더 정리해주지. ‘살덩어리’가 아주아주아주아주 성가셔.”
“살덩어리?”
시아의 살기가 휘리릭 날아가버린 듯했다. 무표정도 긴장이 풀려서 의심과 의아함이 섞은 묘한 얼굴이 됐다.
“에. 말 그대로 살덩어리입니다.”
지원이 한 번 더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좌우로 절래절래 흔들었다.
“독을 개량했는지 부작용이 추가됐더군.”
“먹은 녀석들끼리 멋대로 들러붙으면서 점점 거대한 살덩어리가 됐습니다.”
“생명체라 부를 수 없는 주제에 생명체라 부르는 것이면 닥치는 대로 흡수까지 해.”
“그래서 물리 공격은 자살행위입니다. 마법공격만이, 그것도 확실하게 소멸시킬 수 있는 소수의 마법만 통합니다.”
디레스와 지원은 고생을 떠올리며 사이좋게 번갈아가며 요소만 골라 설명했다. 덧붙여 표정도 역동적으로 일그러트린 채였다.
“괴이…… 하군요.”
“크루세이더 녀석들, 키메라만을 위한 세상을 만든다더니 괴물 이상의 괴물만 만들고 있잖아.”
“크루세이더만을 위한 세상을 만들 작정인가 보죠.”
“하아-. 클. 러. 치. 사. 마. 엘.”
시아는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숨을 끌어 올려 살기와 함께 뱉어냈다. 마침 오늘 마주쳤던 크루세이더의 보스를 떠올려 머리가 지끈거렸다. 악마계에서 귀족악마 대 귀족악마로 마주칠 때면 참 고분고분한 인물인데, 길드 보스 대 길드 보스로 보면 성가신 점이 한도 끝도 없었다.
“솔직히 아직도 의문이야.”
시아는 민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민은 말없이 레모네이드를 가득 채웠다.
“단체행동과는 거리가 먼 녀석이 왜 크루세이더를 만들었는지, 어째서 펜타곤에 비상하게 집착하는지.”
“2년 전부터잖아. 이제 와서 같은 의문을 곱씹어봤자 여전히 답은 안 나와.”
디레스는 오른 다리를 왼 다리 위로 꼬아 올린 후 소파 가죽이 삐그덕 소리를 내도록 등을 힘껏 뒤로 젖혔다. 그는 크루세이더의 보스가 되기 전의 클러치 사마엘을 모르지만 2년간 언뜻언뜻 지나치면서 시아의 의문을 이해하게 됐다. 신생 길드면서 순식간에 거대하게 급상승한 크루세이더와 클러치 사마엘은 어딘지 모르게 어긋나 보였다.
[다다다다다다다다]
복도를 질주하는 소리가 보스 집무실의 분위기를 뒤집었다.
[벌컥]
“보- 스-!”
얼굴 전체에 ‘행복’을 드러내고 있는, 쇼트 은발의 장신 하이엘프가 그대로 시아를 향해 달려왔다. 그의 목 앞부분을 팔뚝으로 과격하게 가로막은 것은 민, 그의 뒷덜미를 붙잡고 쭉 끄집어낸 건 디레스. 지원은 테이블이 흔들리지 않게 붙잡고 있었다. 시아는 그 사이에 잔을 또 깨끗이 비웠다.
“하이엘프로서의 고결함과 보스를 대하는 예의가 나날이 바닥을 치는군요.”
“밀리엄. 나잇값이라는 단어를 인지할 훌륭한 나이잖아.”
제1, 2천왕에 저지당한 하이엘프가 가디안스의 제3천왕 밀리엄 브롤이다. 최전선을 책임지는 진격부대의 캡틴 다운 저돌성이 가끔 이렇게 과해서 항상 혼난다. 그래도 보스의 자비를 믿고 반성은 안 하는 주의라, 아무리 다른 동료들에게 혼난들 기죽지 않는다.
“날 막은 걸 후회할 거야-.”
밀리엄이 두 팔을 휘적이며 민과 디레스를 뗐다.
“보스, 보스. 재밌는 도시괴담을 들었는데 확인하러 가보자.”
“일단 듣고 보자.”
시아는 밀리엄의 과한 호들갑에 전혀 휘둘리지 않았다. 일상에 하나하나 반응하는 과민한 성격이 아닌 덕분이었다.
“보스. 우리 아직 보고 중인대.”
“바보 디레스, 끼어들지 마.”
“지금 끼어든 게 누군데?”
“뒤에 따라오고 있는 S프린세스가 그 입 부숴버릴지도.”
디레스가 놀라서 돌아보니 진짜로 제4천왕 크리세이스 하갈이 하이힐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있었다. 전신에 불쾌한 기색이 넘실거렸다. 신 하갈의 피가 흐르는 갓 블러드인 만큼 돋보이는 미모가 S프린세스(사디스트 프린세스)라는 별칭에 의해 공포스럽게 보일 정도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하갈 양. 보스께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돌아오다니 별일이군요.”
민은 손으로 정중히 자리르 권했다. 크리세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민의 권유에 응했다. 기본적으로 민과 비슷한 성격이라 감정을 절제하면서 조용했다. 어디까지나 말과 행동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 편일 뿐, 지금 살벌한 분위기는 절제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감정의 편린이었다. 동료에게는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하는 것이 철칙. 만약 적과 대치하는 중이었다면 그녀의 사랑스러운 채찍, 로열 룬이 정열적으로 춤췄을 것이다.
“저기- 전 나가보겠습니다.”
4천왕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그저 길드원은 이유 없이 불안한 법이다. 그런데 시아는 지원에게 다시 앉으라고 손짓했다.
“화타까지 오고 있다고. 이왕 이렇게 된 거 너희쪽 보고, 다시 화타에게 해줘.”
“후후후후후후. 이 늙은이를 즐겁게 해줄 이야기가 또 있는 건가?”
머리칼과 수염이 모두 새하얗고 얼굴이며 손에 자글자글하게 주름이 가득하지만 걸음이 당차고 허리가 꼿꼿하여 신선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 상주하는 자그만 원승이 메이린 역시 그의 신선적인 분위기를 돋웠다. 오리지널은 분명 휴먼족이나 플러스가 무려 어둠의 정령왕 아르카네인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뭐야, 밀리엄. 그냥 놀러 다니는 줄 알았는데 착실하게 일하나봐?”
“크리스, 디레스 입 좀 어떻게 해줘-.”
밀리엄이 크리세이스를 향해 돌아보며 응석부렸지만 그녀는 꼼작도 하지 않았다. 대신 민이 중재로 끼었다.
“자, 슬슬 도시괴담을 빙자한 보고를 해주시겠어요?”
“아냐, 진짜 도시괴담이야. 아직 보고할 만한 분명한 건수는 아니야.”
“하지만 아주 구미당기는 일이지.”
화타가 밀리엄의 말을 뒤따르면서 배실배실 웃었다. 가디안스에서 ‘화타의 웃음=꺼림칙한 일’이 절대적인 공식이다. 먼저 집무실에 있던 4명이 일제히 표정이 굳었다.
“대체 뭐야? 화타가 너무 들떴잖아.”
시아가 밀리엄을 재촉했다.
“그게, 묘인족 구역에서 떠돌아다니는 도시괴담이야. 하룻밤 사이에 마을 하나 통째로 주민이 사라지는 사건이 속출하고 있대. 그런데 주민이 사라진 마을에는 항상 커다란 산이 생긴다는 거야. 단 하룻밤에. 좀 불쾌한 건…… 그 산이 완전 민둥산인데, 뭐랄까, 살덩어리처럼 우락부락한 살색…….”
“어어?”
디레스와 지원이 동시에 소리 질렀다.
“보스, 이거 아무래도 큰일인데요?”
“그러게.”
먼저 들은 보고 덕분에 시아와 민은 도시괴담을 덤덤하게 ‘사실’로 받아들였다.
“뭐야, 뭐야. 난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니야.”
밀리엄은 흥미가 뚝 떨어진 말투로 툴툴거렸다. 크리세이스도 의외였는지 불쾌한 분위기를 거두고 디레스를 빤히 쳐다봤다.
“역시 정보부대를 이끄는 제2천왕?”
“좀 달라. 다른 일로 어딘가 갔다가 그 살덩어리를 직접 조우했거든. 그저 도시괴담으로 이야기를 들은 거면 비위라도 덜 상하지. 직접 보고 겪어봐. 위장은 물론 소장까지 깨끗하게 게워낼 걸?”
디레스는 다시금 소름끼쳐 몸을 파르르 떨었다.
“봤다고? 봤단 말이지?”
“네, 어르신.”
지원은 화타를 향해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화타는 자그만 원숭이 메이린을 어깨에서 내려 두 손으로 그녀의 겨드랑이를 살포시 받치고 높이높이 허공에 올렸다.
“메이린! 도시괴담이 아니었어! 사실이라는 구나! 이거 아주 재밌어!”
메이린은 그에 대답하듯이 ‘큐큐’하고 즐거운 톤으로 짧게 울었다. 그러다가 시아가 유리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치는 소리에 놀라 후다닥 화타의 왼쪽 어깨로 돌아갔다. 그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디레스. 수색보대와 정보부대를 총동원해서 묘인족 구역 상황을 확실하게 조사해. 민, 특수전투부대를 그룹별로 한 명씩 붙여줘.”
오른쪽의 검은 눈과 왼쪽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밀리엄. ‘사건이 속출하고 있다’고 했지?”
“응. 들은대로 전한 거야.”
“역시, 보스.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군.”
“화타. 감탄만 할 때가 아니야. 그 살덩어리,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의 새로운 부작용이라고.”
뒤늦게 집무실에 들어온 세 명이 동시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역시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는 금기어로 취급될 만큼 언급되는 순간 파급효과가 컸다.
“호오- 호오- 호오-! 유쾌하지 않아. 기프테 폰 크로이츠크? 넌더리가 나는군. 하지만 해독제나 항생제를 만드는 게 내 일이지. 그렇지, 보스?”
화타가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보란 듯이 적나라하게 분노를 드러냈다. 크리세이스가 어금니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 덕분에 그의 목소리가 더 장엄하게 울리는 듯했다. 메이린은 이번에도 화타에 맞춰 성난 소리를 냈다.
“디레스 엑서스엘. 살덩어리 통째로, 통째로 가지고 와야 해. 그리고 퍼지고 있는 새로운 독약도.”
“살덩어리 통째는 무리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무조건! 이 화타가 완벽하게 연구할 수 있게 조달하란 말이야.”
“화타 말대로 해.”
“보스!”
불랙-레드 오드아이가 살기를 가득 머금고 번뜩였기 때문에 디레스는 이 이상 저항할 수 없었다. 풀릴 여지가 있는 본의 없는 살기와, 보스로서 진심으로 드러내는 살기는 질적으로 확연히 달랐다. 왼쪽 눈이 흑색에서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색으로 변한 지금, 세상에서 누구보다 잔인한 보스다. 악마계에서도 악명 높은 ‘블랙-래드 오드아이의 바르베리트 후작’이 직접 피바람을 일으켜 피바다를 만들기 전에 일을 착착 진행해야 했다.
“하갈 양. 후방지원부대도 한 명씩 지원해주셔야겠어요. 물리력이 통하지 않아서 마법을 세밀하게 다룰 수 있는 인재로 선발해주세요.”
민도 보스의 비서가 아닌 제1천왕으로서 부드러운 듯 강한 압박을 가했다.
“물리력이 안 통한다니?”
“생명체가 닿는 순간 흡수해버립니다. 화타 어르신의 기대에 부응하려면 정말로 마법 센스가 좋은 대원이 현장에 가야합니다.”
지원이 대신 크리세이스와 화타를 번갈아 가며 시선을 맞대고 또박또박 설명했다. 디레스가 설명하지 않은 탓에 갈등이 생길 뻔했던 부분을, 조금 늦었지만, 핵심만 골라서 침착하게 풀어냈다. 덕분에 크리세이스와 화타가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을 누그러트렸다.
“헤에. 도시괴담의 진실은 아주 성가신 문제덩어리군. 그나저나 무력 부대인 우리는 아지트에 남아 있어야겠네.”
밀리엄은 화사하게 웃으면서 시아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살포시 앉았따.
“양동작전으로 살덩어리가 아지트에 쳐들어올지도? 실은 도시괴담이 퍼지는 방향이 이쪽이거든.”
“그건 얘기 안 했잖아.”
“먼저 얘기 했어야죠.”
크리세이스와 민이 동시에 시아보다 먼저 대꾸했다. 이들만이 아니었다. 시아를 제외한 전원이 밀리엄을 향해 무언의 불만을 드러냈다.
“네가 워낙 들떴길래 혹시나 했지.”
“역시 보스.”
무덤덤하게 응시하는 시아. 그리고 여전히 미소가 가득한 밀리엄.
“하아-. 신속하게 움직여야겠네요. 엑서스엘 씨, 하갈 양. 지금 당장 대원들을 소집해주세요.”
“아지트에도 마법에 능숙한 대원이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진격부대만 남으면…….”
“지원군.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민은 직속부하를 향해 피식 웃어보였다. 디레스와 화타도 키득키득 웃었다.
“있지, 있지, 진격부대는 현장에 나가봤자 쓸모없으니까 아지트에 남는 거야. 솔직히 남아 있어봤자 역시나 쓸모없고, 그저 보스만 믿는 거지.”
밀리엄이 두 손으로 짠 하고 시아를 가리켰다. 지원은 시아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 ‘아.’ 하고 짧고 강한 반응을 보였다. 마지막 5단계까지 각성한 단 두 명의 키메라, 그 중에서 한 명이 보스 시아인데, 자신과 디레스 둘이서 처치한 살덩어리 따위 얼마든지 그녀 혼자 처리할 수 있다. 물리력이든 마법이든 그녀에게 걸리적거릴 일 무엇 있으리오. 세넷 이상 무리지어 아지트가 포위된다 한들 그녀가 보스의 의자에서 일어설 일은 없을 것이다.
“크루세이더의 잔챙이들이 근처에서 시시덕덕 거리고 있을 테니 진격부대도 일단은 아지트 바깥을 제대로 확보하라고.”
“에? 뭐, 그래야지.”
크리세이스의 강렬한 눈초리에 밀리엄이 한 수 접고 뒤로 빠졌다. 디레스를 상대할 때와는 태도가 전혀 달랐다.
“화타, 살덩어리 샘플을 둘 장소가 없으니까 하나로 만족해. 독약만 충분히 확보하면 되잖아. 디레스, 세나랑 같이 움직여서 직접 샘플 가져와. 나머지는 싸그리 없애.”
“보스의 명령대로.”
“다른 대원들은 편하겠군.”
조금 전까지 민감하게 부딪혔던 화타와 디레스가 시아의 중재로 깔끔하게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더 이상 보스가 직접 나설 일이 없는 고로 모두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굵직한 간부들인 만큼 치고 빠지는 눈치가 손발이 딱딱 맞았다.
“아, 사흘 동안 지루하면 나도 아지트 비울 테니, 잘 해.”
타임리미트 선언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한 건 민이었다.
“저도 현장에 나가야하니까 지긋이 기다리세요.”
“너도 나가니까 사흘 만에 끝내란 말이야.”
민은 깊은 한숨을 내수니 후 ‘알겠어요’라고 포기한 듯이 대답했다. 시아가 여러 가지 경우를 염두하고 타임리미트를 걸었겠지만, 한 자리에 지긋이 있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시아 스스로 타임리미트를 깰까봐 걱정됐다.
“불쾌한 손님…….”
시아가 작게 움찔거린 순간 집무실 안이 냉기로 가득 찼다. 악마계에서 손님이 왔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얼른 나가라는 손짓을 하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수갑, 완갑. 우선 가볍게 구속체 2개를 끊어 플러스(악마)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모두 집무실에서 나가고 문이 꽉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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