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Mutation-Kimera(리메이크)

Mutation - Kimera : #제2장 (1)

★은하수★ 2015. 5. 4. 14:23

#2각성

 

간밤에 소소한 소동이 있었어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침이다. 해가 뜨기 직전에 반시들이 아지트를 깨끗하게 청소하기 때문에 아침해와 함께 눈을 뜨면 아지트의 가장 깔끔한 상태를 볼 수 있다. 몇 시간 만에 엉망이 될지 내기를 하는 심술궂은 길드원이 더러 있으나, 아침에 일어난 순간 눈에 보이는 풍경이 상쾌하면 기분 역시 그에 따르는 법이다. 이후 첫 모습이 무너져버린다 해도 여긴 그런 곳이니까 일일이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정도가 심하면 반시들의 잔소리를 5중주로 들을 것이다.

시아는 통기성이 좋은 얇은 여름용 커튼만큼 가벼운 실크소재 실내가운을 걸치고 침대 위에서 뒤척였다. 어엿한 야행성에게 있어 저녁 일찍 잠들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생활은 곤욕이었다. 특히 시아는 야행성다운 생활에 충실하게 따른다 해도 잠투정이 심한 편이라 아침기상이 말도 못하게 괴롭다. 민이 그녀를 일으켜서 가운 매듭을 고쳐주고 레모네이드를 한 잔 대접해야 겨우 눈을 뜬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민이 없다.

시아의 왼손이 이불 위에서 더듬더듬 움직였다. 폭신폭신하고 커다란 베개의 앙증맞은 모서리가 손 끝에 닿자 가슴 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시아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잠들었다. 아주 잠깐.

히잉-.”

베개를 한껏 끌어안았다가 놓아주고는 슬금슬금 기어서 겨우 침대에서 내려갔다. 이부자리를 정리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방에 딸린 작은 욕실에 들어가 완전히 잠에서 깨고 나오는 것이 우선이었다. 욕실에 비몽사몽인 채 들어가는 게 얼마만인가 싶었다.

레모네이드가 없는 아침. 식욕이 나지 않아서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도중에 금종을 들고 종종 걸음으로 돌아다니는 멜로즈를 발견했지만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만 확인하고 말없이 지나쳤다.

집무실 문 앞까지 다섯 걸음을 남기고 멈춰섰다. 저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인물이 왠지 달갑지 않아 망설였다.

멜로즈 데리고 외출이나 할까? 오랜만에 학교에 가는 것도 괜찮겠고. ……. 어쩐담?”

가벼운 번뇌를 하는 중에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안에서 마중 나온 이는 밀리엄이었다.

보스. 나 방치 플레이 안 좋아해.”

시아는 짧고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타박타박 들어갔다. 다른 간부들이 타임 리미트를 꽉 채우지 말고 빨리 돌아오길 간절히 바랐다.

어제 인형술사는 수면마법으로 한 번 더 재워놨어. 방치하면 꼬꼬마들이 또 불평할 테니 구속 플레이라는 수치스런 기억을 주느니 재우는 게 낳을 것 같았거든.”

일루지온은?”

한 시간 전에 돌아왔어.”

간밤의 일은 이것으로 끝났다. 이 이상 왈가왈부할 가치가 없었다.

아지트 주변 동태는?”

이 일대 관할구역 전부 보고 있는데 아직까진 이상 없음. 평범하고 평화롭고 시끌벅적해.”

처음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가 퍼질 때도 그랬어.”

잘 알아. 다들 경험자라고.”

1년 전에 시작해 반년 간 지옥을 경험하고 반년 걸려 안정을 찾아가려는데, 아직 그 때의 후유증이 잔류한 채 또 다른 지옥을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전에는 가디안스와 밀접한 순종들(악마, 드래곤, 엘프)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서둘러 사태를 제압할 수 있었다. 또 그들의 손을 빌리는 건 사절이었다. 그들은 빚이라 생각하지 말라면서 기꺼이 호의를 보여줬으나 1년도 안 되어 비슷한 일로 그들에게 또 손을 빌려달라고 부탁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당연히 마음이 불편했다.

다른 길드들은 이걸 알아? 아니, 모르면 알려야지. 새로운 독약이 활보하게 둬선 절대 안 돼.”

바깥에 있는 길드원들이 맡기로 했어. 이미 소문이 퍼졌을 거야. 이런 건 정보력을 중시하는 길드사회에서는 그야말로 삽시간에 끝나잖아.”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다른 길드에서 온 연락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분명히 가디안스가 거의 맨 처음으로 알아차린 것이리라. 길드 크루세이더의 일이다. 쉽게 금방 알 수 있다면 굳이 가디안스가 크루세이더를 향해 공식적으로 대적선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가디안스와 크루세이더가 철저하게 등을 지고 사사건건 여기저기서 부딪히고 있다. 이번에도 다른 길드들이 보조역으로 가담한다 해도, 가디안스 vs 크루세이더 구도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새로운 독약이 발견됐다고 했을 때 녀석들 표정 굉장했어. 짜증과 분노가 절묘하게 섞인 야차상이었다구.”

눈에 선하다.”

흥미로운 실험을 사랑하는 화타조차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에는 치를 떤다. 전선에서 현역으로 지옥을 경험했던 길드원들이 어찌 과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겠는가.

보스. 진짜 진-짜 전부터 궁검한 게 있는데.”

밀리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보스 실력이면 클러치 사마엘을 죽일 수 있잖아. 왜 여태껏 살려두고 있어?”

시아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눈썹이나 입술이 작게나마 반응하는 것조차 없이 평소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이었다.

일찍도 물어본다. 이 얘기, 지원이하고 세나한테도 해줬었어. 그 전에, 다른 4천왕들은 눈치 챘는데 너만 아직도 백치 아우라를 풍기고……. 솔리 외엔 아무한테도 관심 없지?”

새삼스럽게 왜 그래. . 다들 아는구나. 무지하게 부끄럽지만 그래도 궁금하니까 질문 철회는 안 해.”

밀리엄은 아주 당당했다. 그리고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고 시아의 말을 기다렸다.

그래, 그래. ……? 그러면 너 클러치 사마엘이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랑 전혀 관계 없다는 것도 몰라?”

한순간에 밀리엄의 표정이 무너졌다. 초반부터 예상을 제대로 빗나가서 얼이 빠져버렸다.

대답하지마. 그 얼굴로 충분하니까. 으음. 내가 항상 그랬잖아. 녀석이 크루세이더를 만든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 녀석, 길드원들은 물론 12기사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이름만 보스. 펜타곤의 뒤를 쫓는 데만 열심히라고.”

길드 가디안스의 보스 이하 최고간부를 4천왕이라 칭하는 것에 비해, 길드 크루세이더의 최고간부는 12기사라 부른다.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대형집단답게 최고간부의 수도 가디안스의 세 배에 달한다. 실제 길드원 수는 10배를 웃돌기 때문에 하위 간부조직도 복잡다양하다. 참고로, 아주 흥미롭게도, 가디안스를 배신한 강 솔리가 지금 크루세이더에서 제4기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저기, 보스. 그러면 이번에 발견한 새로운 독도 녀석은 모르겠네.”

“99.99% 그러겠지.”

하나 더. 가디안스랑 크루세이더가 대치하는 이유는 일련의 사건 때문이고, 보스랑 클러치 사마엘이 대치하는 이유는 펜타곤 때문이야?”

그 머리가 장식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4천왕을 또 개편해야 하나 걱정했다고.”

“4천왕 체계를 만든 초기부터 줄곧 4명 안에 들었던 나야. 바보짓 하고 돌아다녀도 바보는 아니라고.”

밀리엄은 배실배실 웃고 있는 시아를 향해 섭섭하다는 투로 마주했다. 주인의 귀여움을 받고 싶어 하는 강아지와 비슷한 슬픈 눈, 그리고 입을 굳게 다물고 아랫입술을 위로 쭉 밀어올린 표정은, 그가 하이엘프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 깎아내리는 밀리엄 전매특허 한심표정 제2호였다.

내가 또 다시 일일이 설명할 수고를 덜어줘서 고마워. 아직까지 4천왕 중 한 명인 밀리엄 브롤.”

- -.”

조금만 더 괴롭히면 안쓰럽도록 슬픈 눈에 눈물방울이 맺힐 것 같았다. 하지만 시아는 그렇게까지 심술궂지 않았다.

이제 또 물어볼 건?”

이 한 마디에 밀리엄의 표정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얼굴 근육이 너무 잘 발달해서 매순간 질릴 틈이 없었다.

보스는 클러치 사마엘이 왜 펜타곤에 집착하는지 알아? 5단계까지 각성한 키메라는 둘 뿐이니까 역시 대강은 알고 있지? 전에 보스가 그랬잖아. 5단계에 도달하면 싫어도 앍게 된다고. 신화와 전설 속의 펜타곤은 실존한다고.”

그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더 크게 뜬 채 시아 쪽으로 목을 길게 뺐다. 거북스러워 할 만한데도 시아는 평정심을 유지했다. 밀리엄이 이런 녀석이라는 것 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주 새삼스럽다. 다만 시아는 다른 이유로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펜타곤의 다섯 의식이 머릿속에 들어오니까. 그들은 제5단계에 도달한 펜타곤이 두 명이란 사실을 알고 있고 자신들과 같은 경지에 오르길 기대하고 있어. ……. 이것도 전에 이야기 했지. 그래, 그래서야. 그들의 의식이 들어오는 순간 아주 역겨워.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과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가 동시에 자아를 격렬하게 흔들어. , 이것도 얘기 했지.”

시아가 제5단계에 도달한지 어언 2. 길드 크루세이더가 생긴 직후였다. 키메라 중 클러치 사마엘이 제5단계로 각성하는 데에 성공하고, 과거 무법자 집단 신의 기사들을 포섭하여 길드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그녀를 강하게 자극했다. 그래서 4천왕을 비롯한 길드원들의 간곡한 만류를 전부 뿌리치고 니플하임의 슈바르체 트라움(der schwarze Traum : 검은 꿈 아공간)에 석 달간 잠적했다. 그녀가 가디안스로 돌아왔을 때는 모든 키메라가 경외하는 제5단계로 각성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마침 기프테 폰 크로이추크가 세상을 발칵 뒤집어 혼란이 겹쳐가는 시기였다.

난 정말로 펜타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아. 절대적으로 순수한 키메라 따위 되고 싶지도 않고. 그건 녀석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런데 잠깐만 방심해도 그들의 의식이 스며들어와. 파괴와 살생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아주 역겨운 그것들이 내 정신을 농락한단 말이지.”

밀리엄은 시아의 살기가 점점 짙어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이미 들었던 이야기지만 조용히 듣기만 했다.

굳이 다스 엔데에서 진짜 역사를 읽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겠어. 전설대로, 신화 그대로, 절대 키메라 다섯 마리는 살육을 일삼는 괴물에 불과해. ! ! ! 오로지 그것뿐. 부수고 부수고 또 부수고, 짓밟고 짓밟고,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고. 그들이 나에게 그걸 강요하고 있어. 클러치 사마엘한테도. 그래서 될 수 있으면 싸움을 피하고 싶어. 그들에게 자아를 먹힐까봐…….무서워. 그래. 할 수 있어도 제5단계로 각성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니까. 내가 전에 녀석과 거하게 한 판 붙었을 때 곧바로 제5단계에서 제4단계로 모습을 바꾼 이유녀석도 나와 같았지. 싫은 거야.”

시아는 짜증과 분노가 뒤섞인 표정 속에서 피식하고 입술 왼쪽 끝을 사선 위쪽으로 끌어당기며 냉소 지었다. 동시에 그녀의 주위를 사정없이 휘감던 살기를 잠재웠다.

싫어도 인정해야지. 신들조차 두려워하는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녀는 밀리엄을 흘끗 쳐다봤다. 그는 하이엘프 고유의 도도하면서도 차분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 밀리엄. 길드 크루세이더의 목표는?”

키메라를 위한 키메라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

갑자기 질문이 닥치면 머뭇거릴 만 하나, 그는 질릴 정도로 잘 아는 사실을 망설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하긴, 정식 길드원이 아닌 녀석들도 충분히 대답할 수 있는 상식 중 상식이다.

그래서 싫어도 펜타곤을 찾아내려는 거야. 그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클러치 사마엘은 자기 자신은 절대 키메라가 되고 싶지 않지만 키메라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하니까. 구역질나게 싫어도 참고 열심히 단서를 찾는 거지.”

시아의 눈썹이 잠깐 실룩거렸다. 전날 공작급 악마들이 가져온 정보-펜타곤일지도 모르는 수상한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스는 펜타곤을 찾으면 어떡할 거야?”

자칫 민감할 수 있는 화제였다. 그러나 밀리엄은 단순히 순수하게 호기심에서 툭 던졌다.

지금 있는 곳을 파악하기만 하면 돼. 직접 만날 생각일랑 눈곱만큼도 없어. 난 클러치 사마엘보다 한-참 어린 꼬맹이라서 인내심의 내공이 부족하거든. 이 역겨운 기분을 참고 그들과 직접 대면 못할 거야. 못 해. 클러치 사마엘을 방해하는 것만으로도 전력을 다하고 있단 말이지.”

거짓말쟁이.”

뭐야?”

한참 제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중에 밀리엄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간부 회의도 아니고 오래 참았다.

보스는 절대로 스스로 어린애 취급 안 해. 게다가 인내심이라고 하면 긴 세월을 누리는 어느 종족보다도 뛰어나다고.”

숨기고 있는 것을 얼른 털어 놓으라고 투정부렸다. 시아는, 실은 눈치가 빠르면서 일부러 바보를 자처하는 인재에게, 오로지 휴와 민에게만 털어놨던 사실을 아낌없이 드러낼 것인가 좀 더 자신의 마음을 지켜볼 것인가 고민했다. 한없이 신뢰하는 전 제1천왕과 현 제1천왕에게 말을 꺼낼 때도 상당히 망설였었다. 딱 한 번 터놓고, 그 후로 다시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의문이자 호기심이자 양자택일의 문제에 아직 답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됐어. 보스가 입을 다물 만한 일이라면 엄청 철학적이고 무지 파격적이고 그러면서 초단순할지도 모르는 복잡다난한 것일 테니까. 내가 들어봤자 모를테지.”

밀리엄은 아쉬워하지 않고 미련을 두지도 않았다. 시아가 처음 펜타곤은 실존한다는 사실을 길드원들에게 이야기할 때도 이처럼 혼자 생각을 거듭했었기 때문에, 그녀가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자진해서 말할 수 있게 되면 그 때 들어주자고 미뤄뒀다.

그래도 민은 알고 있지?”

……. 그렇지.”

그러면 됐어.”

그는 두 팔을 위로 높게 들고 힘껏 기지개를 켰다. 시아와 11로 진지하게 독대하는 일이 웬만해선 없는 터라 살짝 긴장하고 있었다. 생각만큼 힘들지 않지만 일부러 무거운 주제를 들고 찾아와 보스의 속을 떠보려 했던 만큼 피로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아.”

시아는 이제 눈치 챘다.

그래, 그래. 이런 녀석들이었지. 알고 있으면서 확인사살 제대로 하는 철저한 녀석!”

실은 눈치가 빠르면서 일부러 바보를 자처하는 인재. 그것이 밀리엄 브롤이다.

. 내가 알고 있는 건, 보스가 유용한 인재의 덧없는 죽음을 아까워한다는 것, 클러치 사마엘이 길드의 사업에는 무관심한 보스라는 것, 보스가 클러치 사마엘 못지않게 펜타곤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아직까지 클러치 사마엘하고 진심으로 싸운 적이 없다는 것.”

밀리엄은 난 고작 이것 밖에 모른다는 얌체 같은 투로 손가락으로 꼽아가며 하나하나 또박또박 나열했다. 무표정 속에서 눈매만 사납게 변한 보스의 얼굴은 일부러 마주보지 않았다.

그러면 오늘 도전한 진짜 목적은, 내가 펜타곤을 싫어하면서도 왜 집착하는가, 이거군.”

유도 질문에 실패했으니까 됐어.”

시아는 눈에서 힘을 풀었다. 지금은 선뜻 포기한 밀리엄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구태여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아직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말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스스로 됐다고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정말 가끔이지만, 네가 작정하고 물고 늘어지면 오싹해. 그 재능을 정보부대에서 사용하면 딱인데 왜 진격부대냐고.”

물고 늘어지다니 실례야. 서서히 죄어들면서 진실에 접근하는 거지.”

밀리엄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했지만 보스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실실 웃었다.

정보부대는 어디까지나 물밑 작업이잖아. 현장에서 알짜배기를 잡아서 고문 이상의 기술로 지금을 알아내는 것. 이게 진격부대의 매력이란 말이지.”

역시 4천왕 중 한 명이라고 인정할 만했다. 시아는 알고 있으면서도 새삼 다시 보이는 재능에 속으로 연신 감탄했다. 엘더 피스크가 제자라면서 소개한 것을 시작으로 맺어진 인연이 예상 이상으로 귀중한 것이었음을, -주 가끔, 지금처럼 아-주 가끔씩 자각하곤 한다. 평소의 바보스러운 면모를 전부 용서하고 못 본 척할 만큼 그가 중요한 인재라는 사실이 가슴에 쿡 박혔다.

밀리엄.”

시아는 부끄러운 듯 난처한 듯 어려워하는 표정이었다.

클러치 사마엘이 왜 크루세이더를 만들었는지왜 키메라의 세상을 원하는지 알게 되면 나 자신의 의문을 풀 수 있을지도 몰라.”

역시 그 의문 자체는 가르쳐주질 않는군. 뭐 이젠 상관없지만. 알겠어. 청소년이여, 고민의 풍랑을 헤치고 질풍노도의 시기를 이겨낼지어다.”

밀리엄은 두 팔을 양 옆으로 활짝 펼치고 웅변조로 외쳤다. 시아는 멋없다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찬물을 끼얹듯이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지트 내 누군가가 기세등등한 살기와 함께 마력을 양껏 내뿜고 있었다. 훈련실은 방비시설이 철저해서 이런 것들이 새어나오지 않는다. 비상시에 아지트 안에서 교양 없는 행동을 하다니, 그것도 보스께서 버티고 있는데 감히 어린 아이들이 겁먹을 만한 위세를 부리다니, 가디안스의 길드원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생소한 마력이었다. 지금 아지트에서 누군가라는 단어를 구태여 언급할 만한 생소한 인물이라면, 시아가 일루지온에게 맡기라고 명령했던 문제의 인형술사 휴먼족 여자밖에 없다. 네크로맨서 기술을 조금 사용할 줄 알면서 주가를 쓰는 척 연기가 가능한 인형술사. 수면마법으로 잠들어 있어야 할 그녀가 어째서 이토록 살벌하게 날뛰는가 하면, 진격보대 소속인 일루지온이 인큐버스-실버드래곤 키메라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태였다.

보스가 일루지온한테 주라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오랜만에 먹이를 줬는지 일루지온이 좀 심하게 했나봐?”

그게 아니라 꿈에서라도 현실감 넘치게 이래저래 당하면 그게 정도가 심하건 아니건 상관없이 수치심이라든지, 그렇잖아.”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제 일이 아니니까 상관없다는 투였다. 마을에서 성가신 일을 벌이고 아지트의 물건을 부쉈으니 응당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그래서 일루지온한테 넘겼잖아. 몸을 고문하지 않고 꿈에서만 농락하는 정도면 많이 봐준 거야.”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수치를 저울 잴 수…… 없지 않아? 이미 저질러진 일이지만, 뒷감당이 성가신데?”

보스 집무실 근처에서 다섯 반시들이 겁먹은 멜로즈를 달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먹이는 공주나 달래주는 반시들이나, 꼬꼬마 모두가 보스의 집무실 근처를 배회하며 무서움을 달래고 있었다. 시아가 직접 해결하려 나서는 데 이보다 효과적인 이유는 없을 것이다.

, 잠잠해졌다.”

밀리엄이 시아의 뒤를 따라가다가 잠깐 멈춰 섰다. 그래도 시아는 집무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서로서로 부둥켜 안고 있는 꼬꼬마들이 바로 보였다.

보스!”

일제히 시아에게 달려들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시아는 그들의 키에 맞춰 무릎을 땅에 대고 허벅지와 허리가 일직선이 되도록 상체를 높힌 자세로 꼬꼬마들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다.

반시들은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차례대로 뽈록뽈록 고개를 들었다.

모르는 사람.”

침입자?”

마력은 그렇게 세진 않지만.”

그래도 무서워.”

살기! 살기!”

시아는 반시들이 귀여워서 다시 한 번 팔에 힘을 주고 꼬옥 안아줬다. 멜로즈는 가장 깊숙히 안긴 채 혼자 조용히 진정하고 있었다.

보스. 적당히 휴먼족 구역 경계 쪽에 던져두고 올까?”

아니.”

싱의 단호한 목소리가 밀리엄의 발을 묶었다. 그녀는 꼬꼬마들을 놓고 일어섰다. 무표정이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휴먼족 순종이면서 흔치 않은 실력자야. 뭐하는 녀석인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 얼굴이랑 마력 패턴이 낯설지 않아서 정체가 궁금하긴 해.”

?”

?”

시아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했다. 밀리엄도 그녀를 따라했지만, 그는 그저 왜 보스가 단순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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