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5 사라진 드렌필드!
깊게 자고 있어야 할 폴이 심장 부근의 가슴을 쥐어 잡으며 숲을 힘없이 방황했습니다. 나무 위에서 한창 화살과 크로스보우를 손질하던 저는 상태가 이상한 폴을 발견하고 땅 위로 내려갔습니다. 그 뒤를 졸졸 쫓아갔는데 평소 같으면 알아차리고 장난을 칠 녀석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제가 먼저 폴의 옷을 잡아 끌어당겼습니다.
“폴. 폴 나이티.”
원래 피부가 하얗지만 왠지 더 창백해 보였습니다.
“어디 아픈 거야? ……폴 나이티!”
“아. 어, 미안.”
소매로 땀을 닦아주려는데 손을 목 근처까지 올리기도 전에 제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는 동안에도 가슴에 대고 있는 손은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 느낄 정도로 꼭 부여잡고 있었습니다.
“괜찮지 않아. 꼴이 정상이 아니야.”
“으음, 아가씨. 말 좀 골라가면서 하라고.”
폴은 제 머리 위에 손을 얹으려다가 멈췄습니다. 가슴을 쥐고 있던 손이 움찔거렸습니다.
“방금 욱신거렸지?”
폴의 눈에서 잠깐이지만 생기가 사라졌었습니다. 괜찮아진 듯하자 피식 웃으며 숙소 쪽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잠깐 드렌필드에 다녀와야겠어.”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눈은 화난 것처럼 깊게 무서웠습니다. 주변은 조용하고 살기는 고사하고 수상한 기척 하나 없는데 눈동자 색이 붉어졌으니 폴이 얼마나 심중의 일에 신경 쓰고 있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음. 오래 걸릴만한 일이야?”
“가 봐야 알 거 같아. ……아쉬워? 잠깐 못 보는 건데, 그 사이에 보고 싶을 것 같아?”
“가, 제발 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붉게 변한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헛소리를 하니까 짜증나는 게 아니라 무서웠습니다. 폴의 언행은 이미 익숙하져서 받아치는 방법을 터득했는데 눈 색이 붉게 변하니까 그게 께름칙해서 어색하게 말을 잘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안 그래도 빨리 가야해. 일리안 쌍둥이한테는 아가씨가 잘 말해 줘.”
정말 다급한 일이라 제 대답을 듣기도 전에 텔레포트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워프를 열고 걸어 들어갈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시급한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었습니다.
폴이 다시 돌아온 건 서둘러 사라지고 나서 한 시간도 채 안 됐을 때였습니다.
굉장히, 엄청나게 화가 많이 난 폴의 옆에는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그린이 부축을 받으며 있었다고 합니다. 일리안 쌍둥이가 숙소에서 쉬고 있는 중에 돌아온 거라 그들이 그린을 받아 양쪽에서 부축하고 세계수까지 왔습니다.
“폴은 어쩌고 그린이 이 꼴이야?”
“폴은 다시 드렌필드로 갔어. 잠깐 정리하고 오겠대.”
“세계수 옆에 눕히라고 하더군.”
그들을 따라 세계수까지 같이 갔습니다.
그린은 줄곧 괴로워했습니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습니다. 피가 잘 통하지 않아서 피부가 옅은 검푸른 색을 뗬습니다.
“으…….”
신음 소리도 겨우 낼 정도로 지쳐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못 먹고 못 잔 것처럼 핼쑥해져서는……. 그래도 살아보려고 고통을 견뎠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싸워서 이런 게 아니야. 완전히 죽어가는 폐인이라고.”
“말 좀 골라가면서 해. 우리 중에서 제일 걸 한 거 알아?”
“그래도 성격은 너보다 나.”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시비 거는 거면 제대로 주먹으로 끝내.”
“둘 다 뭐하는 거야?”
치니비와 제가 각자 무기에 손을 대고 으르렁 거리자 패시가 단번에 둘을 제압했습니다.
“환자 앞에서 철없는 행동 하지 말고 각자 돌아가.”
패시가 그린 옆에 있기로 하고 저와 치니비는 그린이 나타나기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치니비와 주고받은 시선이 상당히 따가웠지만 서로 성가신 일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프레나 공주님. 아까 그 사람은 그린 디미누엘 씨 아닙니까?”
“아, 텍스트리터 씨. 네, 뭔지는 모르겠는데 꼭 중병환자 같아요.”
텍스트리터 씨는 저와 단 둘이 있을 때면 헤시리스에서 부르던 호칭으로 절 불렀습니다. 처음엔 그 호칭을 거부했지만 텍스트리터 씨가 너무 완고하고, 저도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져서 이젠 그러려니 하고 있습니다. (작가 주 : 엑시델의 풀 네임이 따로 있다. 헤시리스의 백성들이 엑시델을 부를 땐 ‘프레나 공주’라는 호칭을 쓴다. 헤케온 텍스트리터는 엑시델의 어머니이자 현 헤시리스의 여왕에게 충성을 바친 외부 충신-헤시리스 사람이 아닌 신하-이라 역시나 이 호칭으로 엑시델을 부른다.)
“그거 큰일입니다. 드렌필드에선 대표를 바꿔야겠군요.”
“폴이 오면 알게 되겠죠.”
근처에 있는 큰 바위 위에 걸터앉았을 때 텍스트리터 씨가 작은 종이 두루마리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뭐에요?”
“반역 가담 명단입니다.”
헤시리스에서 보낸 밀서였습니다. 물론 제게 보낸 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텍스트리터 씨에게 보낸 칠필 밀서. 헤시리스 내에서 움직인다고 될 일이 아닐 때 오고가는 것입니다.
“그걸 왜 제게 주시는 거죠?”
신분을 버렸다는 고집을 끈덕지게 부렸습니다.
“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이번 반역이 누굴 노리고 일어난 거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걸 말입니다.”
어머니의 외부 충신이 신뢰 가득한 눈으로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니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종이쪽지를 읽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선 내용을 훑어봤습니다. 수 명의 이름들 사이에 단 한 명의 이름이 제일 크고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아는 이름이 한 둘이 아닌데도 유독 그 이름만 그렇게 보였습니다.
“이번 반역은…… 외부인이 좀 있네요. 매수…… 같네요.”
텍스트리터 씨가 왜 보리고 했는지 단번에 감이 왔습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습니다.
“텍스트리터 씨는 어떻게 하실 거에요?”
“프레나 공주님의 명령에 따를 겁니다.”
“이건 어머니께서 보낸 거잖아요.”
“하지만 그 자가 지금 여기 있습니다. 이곳에선 일리안 쌍둥이와 공주님의 명령이 절대적입니다.”
윌랜드의 대표라는 신분이 그렇게 사용될 줄은 몰랐습니다. 뭐, 생각해보면 대표와 관련이 있거나 생명의 숲 내에서 일어난 일은 대표의 판단으로 좌지우지되기 때문에 텍스트리터 씨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습니다.
“지금 그에게 손대면 주변인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에요.”
텍스트리터 씨에게 두루마리를 돌려주고 바위에서 내려갔습니다.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어요. 텍스트리터 씨는 일리안 쌍둥이의 서찰을 받고 여기에 오신 분이니까 어머니의 밀서는 잠시 묻어두세요.”
“프레나 공주님.”
“여길 책임지는 대장은 패시에요. 그에게 알릴 일이 아니라면 이 정도 선에서 이 얘길 끝내죠.”
적당히 대화를 끝내고 혼자 숲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좋게 말해서 대화를 끝낸 거지 실은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헤시리스에서 반역이 일어났다는 건 제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그 일을 공주가 아닌 저에게 판단을 요구한다면 생각할 게 심하게 많아져서 머리가 터져버릴 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훈련병, 경비병의 눈을 피해 숲의 동쪽으로 계속 들어갔습니다. 늪이 많이 넓게 있는 동북쪽으로 가다가 마음이 안 내켜서 과실수와 딸기 덩굴이 많은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푹신]
“뀨-!”
덤불에 가려져서 시니의 꼬리를 밟고 말았습니다.
“아, 미안.”
“엑시델?”
누군가가 절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치니비가 청사과를 먹고 있었습니다.
“서쪽으로 가지 않았었어?”
“남이 사.”
아직 서로 감정이 풀리지 않아서 둘 다 말투가 좋지 않았습니다. 또 부딪힐까봐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누가 위에서 뭔가를 던졌습니다.
“얼굴 보기 힘드네요.”
먼 친척이자 윌-프로텍터의 단원인 키스밋이었습니다.
키스밋의 조부가 왕족 내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헤시리스에서 퇴출 돼 키스밋과는 얼굴만 몇 번 봤고 제대로 얘기해 본 것도 생명의 숲에 온 후 두 번이 고작이었습니다.
잘 웃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늘 주변인들을 기분 좋게 했습니다. 한 마디로 호인이죠. 저와는 거의 반대되는 사람이라 나름 신선했습니다.
키스밋이 나무에서 뛰어 내렸습니다. 그가 떨어뜨린 청사과를 건네주는데 제게 다시 내밀었습니다.
“선물이에요.”
그냥 먹으라고 얘기하면 될 걸 굳이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고마워요.”
“그쪽으로 가면 손바닥만 한 거미가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거에요.”
한 발짝 내민 상태에서 굳어버렸습니다. 순간적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가지 소름이 쫙 돋아서 잠간이지만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야, 효과 직방인데. 치니비군.”
제가 눈을 부릅뜨며 치니비를 홱 돌려본 건 당연하죠. 치니비는 당황해 하더니 사과 조각이 목에 걸려 기침을 했습니다.
“켁, 켁. 왜 제 얘길! 그거 패시가 가르쳐준 거잖아요.”
“쌍둥이는 동심일체니까.”
“절- 대 아니에요.”
“후후.”
아무래도 치니비와 제가 마찰이 있었다는 얘길 듣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오지랖이 넓을 수도 있지만 이건 그거하곤 좀 다르죠. 사람이 워낙 성격이 너무 좋은 것뿐이니까요. 여하튼 덕분에 치니비와의 어색한 분위기를 풀 수 있었습니다.
“뭐야, 여기 있었어?”
워프를 이용했는지 패시와 폴이 생뚱맞은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어쩌다 보니까. 근데, 폴. 너 오늘 무지 바쁘다.”
“알면서 물어보는 건 무지 얄밉다고.”
폴이 제 양 볼을 쭉 잡아당겼습니다.
“으어언 애이애아이(그러면 얘기해야지).”
“응. 하긴 할 거야.”
“그러면 불청객은 이만.”
폴의 시선을 받은 키스밋은 웃으면서 오두막 숙소 쪽으로 갔습니다.
윌-프로텍터에서 어떤 일에서든 가장 편하게 움직여주는 사람은 키스밋하고 재브 에이커 씨뿐입니다. 그 중에서도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키스밋이죠. 저 때문이라는 말도 들었지만 그건 억지고요. 성격이 좋아서입니다.
“그린이 말도 제대로 못하던데 대체 무슨 일이야?”
치니비도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저보다 먼저 폴을 공격(?)했습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데 말 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린의 목숨이 드렌필드에 달려있다고 얘기했었지? ……드렌필드가 없어졌어. 감쪽같이 없어졌어. 그래서 잠시나마 목숨을 이어보려고 데려온 거야. 윌랜드의 힘을 빌릴 수 있으면 그린을 살릴 수 있으니까.”
세계에 불가사이한 일이 간혹 일어난다지만 성전이 없어지는 일은 전대미문입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죠. 드렌필드가 사라진 사건은 체이서스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었고, 아직 그 여파가 남아서 그 복구 중이니 두 번째 사건은 절대 일어나지 않길 바랍니다. 또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습니다. 농담으로도 해선 안 될, 하고 싶지도 않은 중대사니까요.
“그래서? 지금 그린은 어때?”
“아가씨, 성격 급해. 다행인 건 당분간 윌랜드의 힘을 빌릴 수 있다는 거야. 윌랜드는 자식이 이 숲 자체거든. 그래서 그린에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빌려줄 수 있는데 오래는 안 된다고 하더군. 그 때까지 어떻게든 드렌필드를 찾아야 돼.”
각 성전마다 다 자식이 있다는 건 이 때 알았습니다.
성전 윌랜드가 있는 숲을 ‘생명의 숲’이라고 부른 건 그저 온갖 생명들이 다 살고 있기 때문에, 죽어가는 생명을 데려오면 살릴 수 있다는 전설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숲 자체가 세계수의 자식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생명의 숲의 계보를 찾았는데 알게 모르게 비화가 많은 성전의 자식입니다.
성전 플리의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플리의 자식은 플 리가 있는 거대 돌산입니다. ‘광맥의 산’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광물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유가 성전 플리 덕분이라고 합니다.
“드렌필드를 찾지 못하면 그린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건 당연하지만 더 큰 문제는 체이서스 전체의 질서야. 성전 중 하나만 문제가 있어도 질서가 어긋나게 돼. 지금 국가 드렌필드가 조금씩 변화가 생기는 모양이야.”
휴화산에서 화산재가 뿜어져 나온 사건이 그 시초였었죠. 성전이 파괴되지 않아도 성전에 무리가 되는 일이 있으면 재앙이 일어날 거란 옛이야기는 모두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속설에 불과했는데 현실이 돼버린 사건입니다. 역사에 남은,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성전이 통째로 사라질 수 있는 거지?”
“그만한 힘을 가진 자가 한 짓이지.”
뻔한 누군가가 떠오른 폴은 눈이 붉게 변했습니다. 윌랜드의 대표들도 ‘그만한 힘을 가진 자’가 누군지 집어냈습니다.
“어디로 옮겼는지 알 수 없어?”
“성전 세이버가 그 아일 단단히 보호하고 있어서 말이지. 아직 파괴하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겠는데, 위치는 감이 안 잡혀. 그 녀석…… 본격적으로 자기가 움직일 생각인 거야.”
[퍽! ……구구구궁!]
화를 주체하지 못한 폴은 주먹 한 방으로 옆에 있는 굵은 나무를 쓰러뜨렸습니다. 그 때문에 짐승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본격적으로……. 폴 나이티. 아직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게 있군.”
패시의 깊은 눈이 폴의 붉은 눈을 응시했습니다. 폴은 피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하프 데몬을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방법이라기보다는 의식에 가깝지만.”
폴은 미간을 좁히며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촉박하다는 사실을 제일 잘 아는 드렌필드의 아들이 그 날 밤, 하프 데몬을 만드는 실험에 대해 가르쳐줬습니다. 누가 관여했는지 어떤 비사가 있었는지 거의 빠짐없이 말해줬습니다.
그 때 윌-프로텍터의 대장, 피케스 비스테스가 엿들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습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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