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4 체이서스 유일! 아그네스 레베카!

★은하수★ 2009. 3. 20. 16:42

D-14 체이서스 유일! 아그네스 레베카!

 

그린이 세계수 바로 옆에 있어야만 하기 때문에 윌랜드의 대표들과 폴이 시간을 정해서 돌아가면서 그린을 보살폈습니다. 처음엔 시종 주제에 주인의 도움을 받는다며 모든 손을 거부했습니다. 속 썩이는 시종이라며 폴이 열심히 설득한 후에야 몸을 세계수에 의지했습니다. 폴에게 그린은 50년을 같이 보낸 친구고, 어머니인 성전 드렌필드에 의해 강제로 시종이 된 아이라 남에게 기울이지 않는 모든 관심을 퍼줬습니다.

성전 드렌필드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차츰 퍼져나가고 있을 때, 예상외의 또 다른 큰 일이 일어날 걸 주의하며 한층 더 긴장상태에 있었습니다. 왕궁 파견 군대가 섣불리 동요하지 않게 관리를 철저히 하고 주변 시찰도 강화했습니다.

“끼유우우-”

거대한 매 한 마리가 상공에 나타났습니다. 왕궁에서 보낸 것도 숲 밖의 다른 지인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숲에 사는 야생 매도 아니었습니다.

“저거 데스마크 아니야?”

치니비가 먼저 그 매를 알아봤습니다.

“그 여자 소드마스터가 키운다는 매?”

“어. 분명히 레베카 씨의 데스마크야.”

나무 위에서 점심을 간단하게 해치우고 둘이 거의 동시에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패시한테 갈까, 마중 나갈까?”

“손님 마중 나가야 안 혼나겠지.”

그 때 패시는 세계수 옆에서 그린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휴식 같지 않은 휴식을 하고 있던 둘이 오두막으로 레베카 씨를 반기러 갔습니다. 데스마크를 띄운 것 자체가 마중 나오라는 뜻이었으니 그에 보답해야죠.

“여, 붉은 사신 레베카를 보러 가는 건가?”

비스테스 씨도 윌-프로텍터를 이끌고 움직였습니다.

붉은 사신 레베카는 체이서스 유일 여성 소드마스터 아그네스 레베카의 별칭입니다.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 칼 같은 성격을 보란 듯이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그녀의 검을 따로 ‘데스사이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애완응(매)의 이름이 데스마크인 것도 완전 걸작입니다.

“야-. 펜트럴만 오면 윌랜드의 소드마스터 11인이 모두 모이는 셈이네.”

미모가 출중한 40대(진짜 나이 기준-외모는 20대 초반) 여성이 텍스트리터 씨와 같이 저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단단하게 입은 옷 하며 허리춤에 찬 세공이 화려한 검이며 그녀의 왼팔에 앉아 있는 데스마크며, 그녀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부각했습니다.

“어서 오게. 안 오는 줄 알았어.”

“흠……. 누구?”

소드마스터가 소수라고 해서, 서로서로 다 알고 지내는 건 아니었나 봅니다. 레베카 씨야 유일한 여성 소드마스터고 뚜렷한 특징이 많아서 다들 알아보지만 그 반대는 거의 힘들죠. 역시나 레베카 씨는 비스테스 씨를 알지 못했습니다.

“윌-프로텍터의 대장 피케스 비스테스 씨에요.”

“나의 귀여운 일리안 군!”

“그동안 안녕하셨죠?”

레베카 씨는 치니비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재미없는 헤케온 밖에 없어서 돌아가려고 했었다고.”

그리고 텍스트리터 씨의 이름을 서스름 없이 불렀습니다. 텍스트리터 씨가 레베카 씨보다 두 배 더 많이 살았는데 말입니다.

“삼촌 이름을 아주 막 부르는 구나.”

“흥, 내가 뭐라 부르든.”

[꽉-]

레베카 씨는 치니비를 안은 팔에 잔뜩 힘을 줬습니다. 치니비는 당황스러움을 넘어 괴로워했습니다. 레베카 씨의 양 팔이 치니비의 허리를 너무 세게 옥죄서 숨쉬기 힘들었을 겁니다.

“삼촌?”

“아그네스는 나이차 많은 내 막내 동생의 딸이야. 참고로 여기에 오지 않은 마지막 소드마스터, 펜트럴 레베카는 아그네스의 동생이고. 남매가 모두 소드마스터라고 야단이었는데 일리안 쌍둥이가 그 기록을 깨버렸지.”

“동시대에 한 가문에서 소드마스터 세 명이 배출된 것도 만만치 않은 데요?”

“뭐, 성은 달라도 피는 절반 정도 같으니까 그럴듯하군.”

텍스트리터 씨에게서 간략하지만 엄청난 가족 관계를 듣고 있는 중에 치니비는 겨우겨우 레베카 씨에게서 벗어났습니다. 하지만 레베카 씨는 치니비를 가만히 두질 않았습니다. 꽃미남만 보면 흥분하는 아가씨(아줌마)처럼요. 볼을 슬슬 쓰다듬더니 다크 브라운 색의 얇은 머리칼이 밉상이 되도록 거칠게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그 다음엔 볼을 쭉 잡아당기고, 허리를 세게 한 번 치더니 팔짱을 끼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레베카 씨의 과한 애정 표현에 어이없어 하는데 비스테스 씨의 감시하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비스테스 씨가 있는 쪽으로 시선 방향이 잡혀 있는 터라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흐응-. 귀여운 아가씨는 그 유명한 엑시델 크로네스테?”

“네?”

갑자기 제게 말을 걸어서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온 신경을 치니비에게 집중하고 있어서 저에겐 눈길 하나 주지 않을 줄 알았거든요.

“그 크로스보우가 당당하게 말하고 있잖아. ‘이 분은 제 자랑스런 주인이자 윌랜드 최고의 트레져 헌터 엑시델 크로네스테님입니다.’ 크로스보우가 아주 번쩍번쩍 광이 나.”

솔직히 과장입니다. 아무리 깔끔하다지만 어떻게 번쩍번쩍 광이 나겠습니까. 칼날이면 몰라도. 점심을 먹기 전에 크로스보우를 손질했는데 아무래도 그 애정이 레베카 씨의 눈에 보였나 봅니다.

“알아봐 주셔서 영광이에요.”

잠깐이지만 ‘붉은 사신’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유명인사잖아, 유명인사.”

“윌-프로텍터는 못 알아보셨잖아요.”

“아저씨들 보단 아가씨. 일리안 군, 이건 상식이라고.”

실제 나이를 충분히 감추는, 20대 초반의 출중한 외모를 자랑하는 소드마스터에게 아저씨라고 감히 발언하는 입담에 한 번 더 놀랐습니다. 게다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텍스트리터 씨와 윌-프로텍터 중 몇 명! 자신이 아저씨라는 사실을 그렇게 순순히 인정하는 겁니까! 아니,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정확한 분도 계신데, 이건…… 상관없나?

“특이한 상식이네요.”

“뭐, 어때. 근데 일리안 군의 반쪽은?”

그 때 제 귀가 움찔 거렸습니다.

“중요한 임무 수행 중이에요. 만나려면 직접 거기로 가야하는데 가실래요?”

“아니, 됐어.”

레베카 씨는 정색을 하고 확실하게 딱 잘라 대답했습니다. 처음엔 레베카 씨가 패시를 싫어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럼 우린 이만 가보지.”

“아직도 있는 게 웃기군. 이렇게 눈치 없는데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서로 등을 보이고 있는 비스테스 씨와 레베카 씨 사이에 싸늘한 공기가 흘렀습니다. 윌-프로텍터에게 일침을 가할 때 레베카 씨의 눈은 투사(鬪士)의 눈이었습니다.

넓은 아량과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윌-프로텍터는 아무런 시비 없이 돌아갔습니다.

그 날 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레베카 씨에게 이 일에 대해 물어봤더니, ‘내가 무서워서 그래.’라는 묘하게 납득되는, 진실을 포장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사적인 관계에 꼬치꼬치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서 거기서 그만 뒀지만 그 후로도 내내 윌-프로텍터를 경계하는 레베카 씨의 태도가 맘에 걸렸습니다.

“커피로 하실래요, 코코아로 하실래요?”

“우유에 탄 부드러운 코코아로 해 줘.”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서 레베카 씨의 주문을 받았습니다.

주문 대로 준비하는데 텍스트리터 씨는 왕궁 군대를 살피러 금방 나갔습니다. 당시 왕궁 군대는 다수의 괴수의 습격을 받아서 인원이 많이 줄은 상태였거든요. 치니비는 패시를 돕기 위해 예상보다 빨리 자리를 떴습니다. 차라리 레베카 씨와는 초면인 제가 나가는 게 좋을 텐데, 다들 그렇게 가버리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어색했습니다.

“크로네스테 양은 일리안 군이 좋아, 그 반쪽이 좋아?”

잔을 넘겨주는 도중에 그런 민감한 질문을 해서 하마터면 내용물을 흘릴 뻔 했습니다.

“양쪽 다 아니구나.”

“네?”

“반응이 그런 걸. 둘 다 그저 그런 친구…….”

“새로 온 손님?”

“폴!”

등 뒤에서 텔레포트로 불쑥 나타나는 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았습니다.

“흐응-. 복병이 있었군.”

“무슨 말씀이신지?”

“별 거 아니에요. 제 이름은 아그네스 레베카. 이 아인 데스마크라고 해요.”

레베카 씨는 그녀의 애완응도 친절하게 소개했습닏. 데스마크는 등을 쓰다듬어 주는 주이느이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습니다.

“전 드렌필드의 대표 중 한 명, 폴 나이티입니다.”

폴의 풀 네임이 나오자마자 레베카 씨의 두 눈이 귀엽게 동그래졌습니다.

“어머, 어머. 정말 대단한 분이 계셨구나. 일리안 군과 그 반쪽 모두 눈에 들지 않을 만해.”

지브릴도 그렇고, 나이 적당하게 잡수신 분들이 점잖지 못하게 아줌마 같은 말만!

너무 어이가 없어서 반박도 하지 못했습니다. 레베카 씨 혼자 착각 속에 있게 두고 폴에게 커피를 타줬습니다.

“벌써 일어나도 돼?”

“웅성거리는 소리에 잠깐 일어난 거야. 솔직히 숙면이 아니라 심면(深眠 : 성전과 교감하기 위핸 깊은 수면)이라 깨 있는 거 만만찮게 피곤해.”

폴은 그린을 돌볼 때 외엔 숲에서의 정찰 등 모두 제치고 심면만 하기로 했습니다. 성전 드렌필드와 교감하는 건 폴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니 당연합니다.

폴 한 명이 정찰을 안 한다고 저희에게 일이 무리할 만큼 늘어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부담이 됐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윌-프로텍터의 행동이 경박해져서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때에 레베카 씨가 와준 건 정말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자는데 방해가 된다면 이만 나가도록 하죠.”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고 편하게 계세요.”

폴은 커피 잔을 들고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나타날 때는 마법을 쓰더니 사라질 때는 평범하게 사라졌습니다.

“다른 종족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 좀 힘든데, 역시 ‘위기’는 단결력을 높이는데 최고야.”

이 때 레베카 씨는 무서울 정도로 담담한 얼굴이었습니다. 일부러 위기를 이용해서 단결력을 높이는 악행이, 만연까지는 아니지만 성행했으니까요.

소국에서도 더러 그러지만 황제 휘하 귀족의 영지가 제일 심합니다. 황제에게 잘 보여 제명당하지 않으려면 백성들의 지지도가 높거나 외부에 알려진 내부의 큰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는 게 최곱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일부러 위기를 조장하고 적당한 때에 그 위기를 제거하는 거죠. 백성들만 불안감 속에서 피를 보기 때문에 정치론에서 ‘악질적인 열 가지 정치법’ 중 하나로 불립니다.

“그래도 이번 위기는 ‘진짜 위기’잖아요.”

“물론. 유래 없는 대 위기지. 하지만 진짜든 가짜든 위기라는 건 유쾌하지 않아.”

전 무척이나 진지한 레베카 씨의 얼굴을 무척이나 진지하게 빤히 쳐다봤습니다.

“왜?”

레베카 씨도 제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생긋 웃었습니다.

“대체 레베카 씨의 진자 모습은 어떤 거에요?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너무 많은 모습을 봤거든요.”

“여자의 변신은 무죄잖아.”

“좀 안 맞는 비유네요. 그리고 뻔뻔하게 그런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실 줄은 몰랐어요.”

“뻔뻔하지 않으면 이 험한 세상 못 살지. 크로네스테 양도 참 뻔뻔할 정도로 말을 막 하는데?”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대답했지만 실은 속으로 뜨끔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입버릇이 험하다는 지적을 받아서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입버릇을 고쳐야겠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성했습니다.

“아까 들으니까 일리안 쌍둥이를 부르는 호칭이 좀 독특하시던데요?”

“일리안 군이랑 그 반쪽?”

제가 패시와 치니비라고 그들의 이름을 부르듯이 자연스럽게 평범하지 않은 레베카 씨만의 호칭을 언급했습니다. 그런데 되레 레베카 씨가 제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일리안 군은 내 제자고, 굉장히 친분이 두터워. 그런데 쌍둥이라는 사실은 안지 얼마 안 됐어. 그러니까 일리안 군의 반쪽과는 딱 한 번 밖에 얼굴을 본 적 없는 생소한 타인이라 제대로 뭐라 불러본 적이 없이. 그래도 구분해야겠다 싶어서 그냥 반족이라고 하는 거야. 원래 쌍둥이는 서로가 서로의 반쪽이라잖아.”

레베카 씨는 절 ‘크로네스테 양’이라 부르는 것처럼 치니비를 ‘일리안 군’이라고 해왔던 겁니다. 친하긴 하지만 사제 간 예의상 이름은 부르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리 그래도 패시를 ‘반족’이라고 너무 당연하게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보통 평범한 사람이라면, 치니비가 쌍둥이란 걸 알았을 때 이름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하거나, 그게 정 안 되면 패시를 ‘쌍둥이 형’이라고 할 텐데 말입니다.

“반쪽이라고 부르는 건 쌍둥이가 서로를 부를 때 쓰는 거잖아요.”

“부부끼리도 쓰지.”

“레베카 씨?”

“내 말은, 그렇게까지 신경쓸만한 일이 아니라는 거야. 나중에 일리안 군의 반쪽과 정식으로 인사하게 되면 그 때 새 호칭을 생각해봐야지. 뭐, 풀 네임이 제일 무난하겠지만.”

어떻게든 될 거라는 식이었습니다. 세상을 정말 그 말 그대로, 편하게 사는 모습이 눈에 그려졌습니다.

“그러면…… 아까 패시를 만나러 가지 않은 건 친하지 않아서인가요?”

“아니, 귀찮아서.”

어찌나 당당하게 대답하시던지. 대답하다 하고 싶은 말을 주저 없이 꾸밈없이 내던졌습니다. 듣는 사람 맥 빠지게 말입니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닙니다. 나쁠 수가 없죠. 그저 개인의 취향이니까요. 그런데 상대방 입장에선 난해하달까요? 약간 피곤하달까요? 아무튼 레베카 씨와 전 상성이 안 맞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