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16.5 [외전2]폴 나이티의 고백!

★은하수★ 2009. 3. 18. 19:23

D-16.5 [외전2]폴 나이티의 고백!

 

아직 필요한 것-알아야만 하는 것-을 다 찾기 전에 폴이 절 데리러 왔습니다. 밤을 새고 새벽녘에도 구석에 박혀서 이것저것을 뒤적이고 있는데 아침에 오기로 한 폴이 너무 빨리 온 것이었습니다.

“데리러 왔다는 건 핑계지?”

전 폴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핑계라니? 정말이야. 데리러 왔어.”

이미 대략적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폴이 왜 이 시간에 데리러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분간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은 그의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했으니 당연한 반응입니다.

“역시 이런 시간에 온 건 너무 티 나는 행동인가? 중간 점검차 슬쩍 온 거야. 그래, 어디까지 알아냈어?”

[탁]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일부러 세게 내리쳤습니다.

“드렌필드의 아들까지 알아낸 거야? 여긴 무슨 체이서스 전체의 지식의 보고야?”

제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말장난도 쳐주지 않으니까 폴 혼자서 즐겁게 떠들었습니다. 제가 왜 그러는지 저 자신보다도 더 잘 알고 있으면서, 아주 얄밉게도 자발적으로 주요 문제를 꺼냈습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쭉 아무 것도 모른 척, 평범한 척 다 하고 이제 와서…… 이제 와서 타인에게 들킬 것 같으니까, 이제야 다 까놓는 겁니다. 왠지 기분 나빠서 진심으로 폴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키니랑 같이 하프 데몬을 만든 과학자였다는 거. 그것 때문에 화난 거라면 난 딱히 할 말 없어. ……네가 여기 있으면 나에 대해서도 알게 될 거란 감이 들더라고. 그래서 일리안 쌍둥이랑 지브릴에게 다 불었어. 그리고 지브릴한테 한참 훈계 듣고 나서 여기 온 거야. 솔직히 피신이지.”

하마터면 주먹으로 폴의 얼굴을 갈길 뻔했습니다. 하지만 꾹 참고 폴의 말을 들어줬습니다. 귀만 폴에게 집중하고 있었지 손과 눈 등은 그 반대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내 본명은 카슬로 나이트메어 카오시안이고 드렌필드의 아들이야. 거창하게 말하면 성전의 아들이지만 실은 성전에서 태어난 평범한 피조물이야.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수명이 길 뿐이지.”

폴의 말대로 그 때, 이미 알고 있는 거였는데도 폴에게서 직접 들으니 쓸데없이 울컥했습니다.

“아, 그래. 그린이 내 어렸을 때 얘길 했다며? 이상하지 않아? 같이 자랐다는 게?”

그것 역시 기록이 있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무슨 황당한 이야기인지, 그냥 떠도는 야설을 기록한 게 아닐까 했지만 다른 데에서 똑같은 문구를 발견하고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을 종합해보니 그 황당한 이야기가 차근차근 맞아 떨어졌습니다.

“이야. 여긴 정말 체이서스 자체를 갖고 있나 보네. 정말 알아선 안 될 것까지 있는 거 아니야? 가만히 있을 수 없겠는데.”

수상한 기척이 나서 잽싸게 돌아보니 폴의 양손에 불덩어리가 하나씩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 손모가지 부러뜨린다.”

“이제야 쳐다보는 거야?”

눈에 실컷 힘주고 있었는데 쓸쓸함이 가득한 그 눈을 보니 고개가 저절로 다른 쪽으로 돌아갔습니다. 분명히 장난기 가득하고 활달한 목소리였는데 눈은 계속 그렇게 쓸쓸하게 응시하고 있었다니…….

“계보를 봐서 알겠지. 그린 디미누엘은 현재 내 시종이야. 절대로 성전 드렌필드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키니의 시종은 성전 세이버에 역사를 기록하기만 하면 되지만 내 시종은 충성의 증표로 목숨을 드렌필드에 맡겨야 돼. 나랑 같이 있을 땐 그 자리에서 벗어나도 하루 정도는 무사하지만, 그 시간이 다 지나면 그냥 끝나는 거야.”

드렌필드의 아들의 계보에 써 있는 맹세의 서약에 그와 똑같은 말이 적혀있습니다. 키니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이버에 기록해야 하는 그녀의 시종과는 다르게 메피의 시종은 기록이 아니라 제 목숨을 담보로 온갖 충성을 다 바쳐야 합니다. 웃기지도 않는 모순입니다. 목숨을 담보로 일찍이 성전 드렌필드에 바쳤는데 맹목적인 충성까지 바치라니, 정말 재미없는 농간입니다.

“키니는 태어나고 10년 동안 성장하다가 성장도 노화도 모두 멈춘 상태로 지금까지 왔지만 난 시종이 바뀔 때마다 어려졌다가 다시 자라는 걸 반복했어. 덕분에 지루하지 않게 살았지.”

“바꿀 때마다가 아니라 바뀔 때마다?”

“키니는 자기가 시종을 고르지만 난 드렌필드가 골라줘. 드렌필드의 목소리를 듣고 그에 매혹된 어린 소년이 내 시종이 되는 거야. 난 시종만큼 어려졌다가 같이 자라고.”

메피의 시종은 성전 드렌필드가 고르는 구나…… 하고 폴의 말에 휘말려버렸습니다. 아차 하고 제 정신이 들었을 땐 폴의 손이 이미 제 머리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난 이번 일에 선발된 게 아니야. 자발적으로…… 지원한 거야. 키니의 말에 혹해서 하프 데몬을 만든 과오를 어떻게든 용서받고 싶어. 정말로… 나 자신이 구역질 날 정도로 증오스러워. ……그들을 만든 내 손을 잘라버리고 싶었어. 그들을 자랑스럽게 보던 내 눈을 도려내고 싶었어. 키니의 말을 들었던 내 귀를 찢어내고 싶었어.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가 내 몹쓸 짓을 정리하지 못하잖아. 이젠,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방치하지 않을 거라고. 끝낼 거야. 내 손으로 키니도, 하프 데몬도 모두 다…… 끝낼 거야.”

슬픔과 쓸쓸함. 지독히도 가슴 아픈 감정들이 제 화를 누그러뜨렸습니다. 뭔가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가련함과 안타까움. 위로를 해주고 싶었습니다. 긴 시간 동안 혼자 죄책감에 빠져있었을 그를 다독여주고 싶었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말했지만, 정식으로 부탁할게. 나, 카슬로 나이트메어 카오시안.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고 싶어. 나와 같은 불쌍한 아이, 성전 세이버가 너무나 사랑해서 죽이지 못하는 딸, 라나 클라이네 오리에드를 구해줘. 하프 데몬에 미쳐있는 그 아이를 구해줘.”

폴에게 비스 성녀는 남 같지 않았던 겁니다. 친남매는 아니지만 친남매처럼 느껴지는, 어떻게 보면 애증의 선에 있는, 동질감을 절실하게 느끼는 유일한 감정 공명자인 겁니다.

“부탁한다기에 ‘도와줘.’라고 할 줄 알았는데 ‘구해줘.’라고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어.”

이번엔 제가 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역시 아가씨는 달라. 지브릴은 고요하게 화내면서 훈계를 10절까지 줄줄이 늘였는데.”

확실히 재기가 빨랐습니다. 금세 평소의 포로 돌아갔습니다.

“카슬로 나이트메어 카오시안 씨, 앞으로 뭐라고 불러야 하지? 카슬로? 메피? 폴 나이티?”

“흐응.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폴 나이티라고 부르기로 했는데 아가씨가 원한다면 메피라고 불러도 괜찮아.”

“싫어. 지금 이름으로 부를 거야.”

“너무 딱 잘라서 말한다.”

“그리고, 그 ‘아가씨’! 쓰지 마.”

“그러면 공주님이라고 불러도 돼?”

“엑시델 크로네스테.”

“에이-. 정 없게 시리.”

폴의 또 다른 얼굴을 본, 조금은 가슴 아픈 때였습니다. 일부러 밝은 척하는 모습에 마음 한켠이 쓰렸습니다. 당분간은 폴의 장단에 맞춰서 그가 바라는 반응으로 치고 나가는 게 좋을 지도 모른다고, 아니, 그냥 아무 것도 모르던 때처럼 변함없이 대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