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9 세이버의 호출!
중상자들만 딥데어족의 마법으로 치유하고 경상자들과 각자 기타 여러 경상은 원시적인 치료 방법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래서 오전 내내 약초, 약품 등을 정리·배급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전날 오후부터 만 하루 동안 그 일을 마치고 잠깐의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신기하단 말이야.”
새벽에 해가 뜨고 나서 약 8시간 정도 깊게 자고 일어난 지브릴이 커피를 내주고 제 옆에 앉았습니다.
“뭐가?”
“폴 말이야.”
지브릴이 컵으로 폴이 있는 곳을 가리켰습니다. 그 때 폴은 오두막 안에서 뒤늦게 자고 있었습니다.
“폴이 왜?”
“크로네스테 양과 같이 있을 때는 표정이 좋거든요.”
티가 저의와 마주보며 앉고 대화에 끼었습니다.
“내 말이.”
“네?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는데.”
“물론, 일리안 쌍둥이랑 같이 있을 때도 표정이 좋지만 너랑 있을 땐 특히 신경 쓰는 것 같단 말이야.”
“날 놀려먹는 게 낙인 녀석이야.”
“드렌필드에선 그런 얼굴을 한 적이 없어.”
폴과 같이 자랐다는 그린이, 폴은 동료들 중에 가장 말이 없고 무서울 정도의 무표정을 가졌으며, 싸울 땐 봐주는 것 없이 제일 잔혹하다는 얘길 했다 합니다. 지브릴이 알고 있는 폴도 그렇다고, 티가 알고 있는 폴 역시 그렇다고.
전 트레져 헌터로 돌아다니면서 몇 번이나 폴을 만나봤지만 그 때마다 지금이랑 똑같아서 지브릴과 티가 어떤 폴을 말하는지 쉽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날 하프 데몬의 심장을 한 번에 빼낸 장면이 잠간 눈에 어른거릴 뿐이었습니다.
“어제……. 날 많이 신경 써주긴 하더라.”
“어떻게?”
지브릴이 어깨동무를 하며 밀착 질문을 했습니다. 전 별 의심 없이 있었던 일을 그대로 얘기해 줬습니다.
“그 녀석이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제 표정을 고치는 것 자체가, 드렌필드에선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이티에게 ‘장난’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크로네스테 양은 예외라면 꽤나 의미가 크죠.”
뒤늦게 지브릴과 티의 말이 묘한 의미를 갖고 있단 걸 알고서 지브릴의 팔을 조심스럽게 어깨에서 내렸습니다.
이상한 대화에서 빠져나올 궁리를 하는 중에 아주 고맙게도 캐스트가 모두를 불렀습니다.
<세이버에 몬데비언족 10명 출현. 지원군 요청.>
텔레파시를 보내는 데도 군사 전보처럼 짧고 명료했습니다. 직접 텔레파시를 받아본 것이 처음이라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리는 느낌이 색달랐습니다.
“10명? 어젠 몇 명이었는데. 여기 와 있는 내 제자 몇 명하고 내가 가도록 하지.”
<추가로 몬데비언족 20명, 딥데어족 20명 출현.>
지브릴이 망토를 툭 털고 일어선 순간 캐스트의 긴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다시 휘감았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텔레파시를 받지 못한 티가 사색이 된 저와 지브릴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 했습니다. 캐스트는 티를 모르니 텔레파시를 받지 못한 거였습니다.
“세이버에 심판단이 나타났는데…… 녀석들, 그 동안은 플리에 뒤집어씌우더니 이젠 ‘심판단’을 홍보할 생각인가 봐요. 어제보다 수도 많아요.”
“설명은 필요 없어. 가면 알게 될 테니까. 제길, 전부 모아!”
저는 일리안 쌍둥이와 지원 소드마스터를 불러 모으고 지브릴은 아직 윌랜드의 생명의 숲에 머물고 있는 제자들과 폴을 깨워 모았습니다. 슈볼츠아웃 형제도 전날의 싸움 덕분에 자연스레 끼었습니다.
“헤이갈! 넌 후방에서 이들한테 수중보호마법을 지원해. 라그! 넌 나머지를 지원하고.”
지브릴은 제자들을 재빠르게 지휘했습니다.
“군대는 각 대장에게 맡기겠습니다. 혹시 모르니 윌-프로텍터의 루 씨, 덴데르 씨, 에이커 씨는 여기 남아주시고 나머진 모두 세이버로 이동할 겁니다. 성전파괴자 몬데비언족 30명과 딥데어족 20명이니까 각오 단단히 하십쇼.”
패시도 지브릴 못지않게 지휘력을 발휘했습니다.
왕궁에서 파견한 군대와 윌-프로텍터의 일부 소드마스터는 생명의 숲에 남고 모두 지브릴이 연 워프를 통해 세이버로 향했습니다. 깊은 바다 속 왕국에서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여러 장비를 챙기거나 특수한 약을 먹어야 하는데 딥데어족이 마법을 걸어준 덕분에 숨도 쉴 수 있었고 수압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슈욱]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하반신이 물고기 꼬리인 소울족이 물을 가르며 지나갔습니다. 다시 보니까 누군가에게 내동댕이쳐진 것이었습니다.
마법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소드마스터가 가장 적은 나라, 세이버. 하지만 마법을 슬 줄 알면서 평화종족인 것은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습니다. 드렌필드의 딥데어족은 공격 마법 위주의 강한 마법을 쓰고 자신들은 방어 마법 위주의 고요한 마법을 쓰기 때문이라는데, 성전파괴자들을 상대할 때 쓴 마법들은 그러면 뭐라고 설명해야 합니까.
“물속에서 화살을 쏘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마라.”
“장검엔 익숙하지 않을 테니까 후방 대기조로 가 있어.”
폴과 패시가 장검을 주면서 절 거대한 진주조개가 있는 쪽으로 밀었습니다. 주변이 온통 물이라 부드럽게 밀렸습니다.
“에이-. 물속에선 검이 무겁단 말이야.”
치니비가 유유히 제 옆을 지나갔습니다.
“물속에서 무거워지는 물건이 어딨어?”
“팔을 휘두를 때 힘이 많이 들어가잖아. 그게 무거워지는 거랑 똑같지 뭐.”
“확실히……. 우린 물속에서 싸우는 게 좀 무리지.”
일리안 쌍둥이는 팔을 휘저어보며 물속에 적응하고자 했습니다. 그렇지만 심판단이 그들의 여유부리는 모습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세이버의 전방 기사들을 제치고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습니다.
“너무하잖아.”
세이버에 도착한 지원자들과 심판단이 맞붙기 시작했습니다.
뉴노멀족 소드마스터들은 물의 저항 때문에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도 심판단에게 공격다운 일격을 가하지 못했습니다. 그에 비해 소울족의 피가 섞여 있는 심판단은 어떻게 해야 상대에게 공격이 먹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물속이기 때문에 몸에 상처가 생기지 않는 이상 주변에 충격을 분산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격은 제대로 하지 못해도 방어는 어느 정도 한 셈이죠.
“소울링 드롭을 안 먹은 모양이지?”
기사단장 캐스트 이피머스가 소울링 드롭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들고 제 앞으로 왔습니다. 다른 손에는 세이버 롱보우가 있었습니다.
“그 롱보우는 나 주려는 거야?”
“빌려주는 거야. 귀엽고 수수하며 활달하고…….”
“말이 길어.”
캐스트의 느끼한 찬사가 길어지기 전에 세이버 롱보우와 그 화살통을 낚아채 들고 곧바로 시험해봤습니다.
“안타깝군요.”
캐스트는 제 화살이 지난 자리를 따라 움직이며 윌랜드의 소드마스터들에게 소울링 드롭을 하나씩 나눠줬습니다. 그 다음은 드렌필드의 용병들이었습니다. 저와 소울족의 공병이 후위에서 심판단을 견제하는 동안 소울링 드롭의 배급이 완전히 끝났습니다.
“야, 확실히 다르네.”
소울족이 아닌 종족이 물속에서 저항 없이 제 힘을 낼 수 있게 해주는 특수한 약은 먹자마자 효력이 생겼습니다. 무기를 휘두르는 감이 좋아지자 지원병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화려해졌습니다. 한 번 공격할 때마다 주변의 물이 다양하게 움직여서 인상 깊은 장면까지 연출됐습니다.
패시의 백색검기가 딥데어족 모습에 헌팅소드를 들고 있는 심판단원의 얼굴에 상처를 냈습니다. 틈을 주지 않고 목을 베려는데 상대 심판단원이 사라져버렸습니다. 누군가가 워프로 불러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패시!”
[피융]
사라진 것이 아니라 패시의 뒤로 이동한 것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심판단원의 팔을 향해 화살을 쐈습니다. 물의 저항을 받기는커녕 물을 타고 빠르게 활주하는 세이버제 특수 화살이 목표에 미처 닿기 전에 몬데비언족 모습의 다른 심판단원에게 가로막혔습니다.
[퓽, 퓽]
시야를 가로막은 덩치에게 화살을 아낌없이 쐈습니다. 두 발은 덩치의 대형 도끼에 막히고 다른 한 벌은 물결에 휩쓸려 그의 머리카락을 스칠 뿐이었습니다.
“커억!”
그런데 그 자는 등에서 피를 뿜으며 해저로 떨어졌습니다.
“큭큭큭.”
요즘 잠잠해졌다… 싶었는데, 치니비가 피를 보고 흥분해서 벌서 정신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원래 성격이 비뚠 치니비가 그간 너무 어린애처럼 구는 게 심상치 않아 조금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지금 터져버렸다!’하고 생각하니 말리지 않는 이상 얼마나 날뛸지 눈에 선했습니다.
[서걱]
근처에 있던 성전파괴자가 치니비에게 달려들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팔 한쪽이 몸통에서 분리됐습니다. 치니비가 한 번 더 검을 휘두르는데 당하기 직전에 사라졌습니다.
“큭큭, 큭큭큭…….”
“세상에 신이 있다면 부디 치니비를 굽어 살피소서.”
피를 갈구하는 치니비에게서 다시 패시에게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왼팔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지금 상대는 아까완 다른 녀석이었습니다. 공격 한 번, 한 번이 모두 그림 같았습니다. 소드마스터의 백색검기가 물속에서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패시의 몸사위 자체가, 주변의 물의 움직임과 같이 춤처럼 보여서 잠시 넋을 잃고 황홀하게 쳐다봤습니다.
패시가 적을 해저로 내동댕이치는 순간 어디선가 살기와 함께 불안감이 엄습했습니다. 당시 제 직감에 의하면 진주조개, 성전 세이버 쪽이었습니다.
“서, 성녀님께서 쓰러지셨다!”
어떤 바보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캐스트가 잽싸게 가지 않았더라면 ‘보호막이 뚫렸다!’까지 외쳤을 겁니다. 바보도 그런 바보가 어디 더 있을까요. 적이 깔린 판에. 개념을 수심 8000km 되는 곳에 내버리고 온 게 분명했습니다.
“미친 놈.”
[팍!]
시선을 다른 데에 두고 있는 사이, 제게 접근하던 중인 성전파괴자에게 화살 하나를 선사했습니다.
“이 년이!”
분명히 심장 위에 맞았는데 피부도 두껍고 체력도 남아나서 저를 향해 망치를 던졌습니다. 패시가 준 검으로 망치를 막으며 그 반동을 이용해 쭉 뒤로 물러났습니다. 덕분에 성전 세이버에 본의 아니게 가까워졌습니다.
[퓽, 퓽]
무기를 스스로 내던진 심판단원에게 서, 너 발의 화살을 친절하게 보냈는데 급소에 닿기 전에 녀석이 사라졌습니다.
“엑시델, 피해!”
“앗.”
지브릴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폴이 절 끌어당겼습니다. 그리고 폴이 만든 보호막 속에서 엄청난 물살을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소울족 특수 마법이야. 너만 노린 것 같은데? 든든한 후위 아가씨.”
또 다시 저에게만 강한 물살이 몰아쳤습니다. 보호막 안에 있었는데도 폴은 제 허리를 꽉 잡았습니다. 떨어지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그 이상한 마법에 휩쓸릴까봐 그러지 못했습니다.
“똑같은 마법이 두 번이나 있었는데 시전자가 누군지 모르겠군.”
폴은 물살을 타고 가까이 온 성전파괴자를 맨손으로 상대했습니다. 보호막을 제거하자마자 상대의 복부를 발로 밀듯이 차면서 왼팔을 붙잡고 어깨가 끊어지도록 잡아당겼습니다. 물속에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이용해서 상대의 머리를 쉽게 내려찍을 수 있었습니다.
폴의 역동적인 액션을 감상하는 도중에 나타난 심판단원은 제 화살을 맞고 잠시 비틀거렸습니다. 급소 세 군데를 노리고 다시 화살을 쐈는데 두 번째 화살에 맞기 직전에 사라졌습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빼돌리면 어떻게 언제 끝장을 내겠다는 거야?”
“조금씩 우리 힘을 빼면서 결정적인 때를 노리겠다는 거겠지. …거의 다 끝나가는 모양이야.”
전 분이 풀리지 않아서 패시와 치니비 등과 맞붙고 있는 성전파괴자들에게 있는 힘껏 화살을 난사했습니다.
“이러니까 녀석들이 아가씨를 집중적으로 노리는 거야.”
폴이 활을 들고 있는 제 왼팔을 내렸습니다.
분함이 가지 않은 얼굴로 폴을 쳐다봤는데 폴이 어디를 가리켜서 자동으로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거대 진주조개, 성전 세이버가 있는 쪽이었습니다.
“저거 자살행위잖아.”
쓰러졌다는 비스 성녀가 정신을 차리고 캐스트의 부축을 받으며 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호위병 하나도 없이 성전이 보호막을 잃은 채 있었습니다. 성전의 보호막을 맡은 비스 성녀가 최소한의 보호막을 만들 힘조차 없는 걸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기습당하면 끝장이지. 캐스트 이피머스의 실력으론 저거 못 지켜.”
“기습이 없을 거라 확신한다면 말 되는 거 아니야?”
“아가씨, 그 말에 엄청난 가시가 있는 것 같은데.”
“순수한 감이야.”
조금씩 비스 성녀에 대한 의심이 늘었습니다. 대체로 소울족의 피가 섞인 성전파괴자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자. 의심이 저질적인 짓이지만 자꾸만 비스 성녀가 그런 쪽으로 눈에 밟혔습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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