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1 슈볼츠아웃 형제! 플리에서 온 손님!
오랜만에 편하게 자고 일어나서 세계수를 보니 기분이 상쾌하다고 생각할 무렵, 왕궁에서 보낸 군대의 훈련 소리가 다급한 현실을 다시 지각하게 도와준 덕분에 순식간에 우울한 감상에 빠졌습니다. 현실이란 역시나 잔인하더군요.
왕궁 군대의 대장들이 훈련을 주도했지만 텍스트리터 씨와 일리안 쌍둥이가 전체적으로 꼼꼼히 챙기고 지휘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어떻게 행동할 것 등의 중요한 사실을 시시각각으로 교육하기도 했습니다. 마냥 어린애 같은 치니비가 의젓하게 보이더군요.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치니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소드마스터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았습니다.
폴 나이티……. 그는 윌랜드의 대표가 아니니까 나무 위에서 빈둥거리고 있어도 이상할 거 없습니다. 하지만 세계수를 보며 주변을 경계하고 챙겨줄 거 다 챙겨주는 걸 보면 부지런하고 책임감이 상당하단 말입니다.
그런데 저희를 도와주러 왔다는 윌랜드의 소드마스터 그룹, 윌-프로텍터는 과하게 영웅감에 빠져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잡일처럼 보이는 일에는 일절 손대지 않고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소드마스터=영웅=위대한 자’라는 공식은 아무에게나 통하는 것이 아닌데 윌-프로텍터 일당(!)은 뻔뻔하게도 이 공식을 자신들에게 끼워 맞추고 있었습니다. 사기꾼, 도둑놈 심보죠. 소드마스터 계에서 이름 있는 폴이 취급하지 않는, 그야말로 ‘눈 밖, 관심 외’존재인 주제에 눈꼴시게 굴었습니다.
“엑시델, 왕궁에서 물건이 도착했어.”
치니비가 나무 아래서 가지와 잎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저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곧 갈게.”
세계수와 그나마 가까이 있는 나무에 최대한 높이 올라가서 세계수의 주변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저 역시 아래를 향해 소리 질렀습니다.
날렵함을 과시하며 고양이처럼 지상으로 내려와 치니비와 같이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제가 물품을 담당해서 오두막 근처의 어느 누구도 제가 올 때까지 운반자가 가지고 온 것들을 손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사흘치 식량과 물, 그리고 소비무기와 약품이 황제가 약속한 만큼 맞게 있는지 확인하고 품질을 살피는 중에 빠진 것을 찾아냈습니다.
“캐논. 내가 주문한 은촉화살은?”
“무슨 소리야? 특제강철화살하고 같이…… 없잖아!”
“국가 운반까지 하는 뛰어난 운반자 나으리가 물건을 빼먹었대요― 라는 노래가 체이서스 구석구석에 퍼지기 전에 찾아!”
헌터-사냥꾼, 인포머-정보사 같은 전문 직종 중에는 딜리버-운반자도 있습니다. 의뢰받은 물건은 무슨 일이 있어도 목적지로 운반·배달하는 자들이지요. 대체로 밀수품이나 뒷골목 운반이 그들의 일이라 저와 동종인 셈이죠. 그 중 국경을 넘어 밀반(몰래 운반하는 일)하는 운반자는 급을 높게 쳐줍니다.
캐논 에어버드가 그 수준인데……. 그 이름을 믿고 황제에게 추천해서 이 자리를 맡긴 건데……. 벌써 네 번째 오는 거면서 어떻게 제일 중요한-제일까지는 아니지만- 물건을 잃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이 엑시델이 쓸 은촉화살을!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있었다고. 봐!”
캐논이 제게 장부를 코 가까이까지 들이 밀었습니다.
“중간에 떨어뜨렸단 거야?”
“이건 세이버에서 만든 특수한 운반기야. 속도 보장, 안전 보장이라고.”
“누가 운반기 말했어?”
“윽. 그럼 내 실력을 의심하는 거야?”
“그래.”
제가 캐논을 밀어붙이고 있을 때 취사병이 쭈뼛쭈뼛 다가왔습니다.
“저……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데요.”
“챙겨 가.”
캐논에게 화가 나 있던 중이라 취사병에게도 캐논에게 쓰던 말투를 그대로 써버렸습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 속으로 ‘이런…….’하고 미안해했습니다.
“엑시델, 진정해. 은촉화살이라면 네가 그동안 안 써서 아직 60발정도 있다고.”
치니비가 말리는 소리에 머리에 다시 열이 확 올랐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름 자체가 신용 있는 녀석이 중요한 시기에 중요한 걸 빼먹었는데! 정신머릴 고쳐놔야지!”
“에어버드 씨가 더 나이가 많은데 말 좀 골라가면서…….”
“나이가 밥 먹여 주냐?”
어쩌다가 불똥이 치니비에게 튀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한숨만 나오지만, 여하튼 치니비와 캐논이 제 성질머리에 쩔쩔맸습니다.
“위협적인 물건이 있기에 치운 것뿐이야.”
두 명의 몬데비언족이 머리 위에서 지상으로 날렵하게 내려왔습니다. 맙소사. ‘플리의 거물’이라는 티 슈볼츠아웃과 플리의 막내 황녀의 약혼자로 소문이 자자한 테스 슈볼츠아웃이었습니다. 혈안왕의 두 형기도 하죠. ‘크람의 깃털’을 훔치러 플리에 갔을 때, 그 때 딱 한 번 그들을 직접 봤었는데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장래의 슈볼츠아웃 백작나리께서 이 미천한 곳엔 어인 행차이신지.”
저를 포함한 주변인들이 당황스러워 입을 뻐끔거리고 있을 때 폴이 나타나 주변의 공기를 바꿨습니다.
“우리 정보원이 텔러가 여기에 왔었다는 말을 해서 직접 알아보려고 왔지. 그나저나 오랜만이군, 폴 나이티.”
“흐응. 내가 왜 여기 있는지는 안 물어보는 거야?”
“네 놈은 항상 신출귀몰하잖아.”
티 슈볼츠아웃과 폴은 상당한 구면인 듯 했습니다.
제 은촉화살은 테스 슈볼츠아웃이 들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들의 등장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당황했을 뿐, 폴이 주변 분위기를 바꾸고 나서부터는 눈앞에 있는 자들이 몬데비언족이고, 그 중에서도 슈볼츠아웃의 사람이라는 걸 싹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위축될 것 없이, 어떻게 보면 겁을 상실하고 당당했다는 겁니다. 헌터에게 그 정도 자질은 기본이지 않겠습니까.
“돌려주시죠.”
테스를 향해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넌 어딜 가?”
주변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도망가려는 캐논의 목덜미를 꽉 붙잡고 눈에 한껏 힘주며 노려봤습니다.
취사병은 필요한 식료품만 골라서 서둘러 돌아갔고, 치니비는 플리의 슈볼츠아웃 형제를 난생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습니다. 어린 아이가 신기한 걸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눈이었습니다. 그런 눈은 확실히 상대에게 실례입니다.
슈볼츠아웃 형제의 시선이 각각 다른 곳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치니비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안 그랬으면 제가 캐논을 붙잡고 있던 손으로 대신 치니비를 붙잡고 휙 돌려버려야 했을 겁니다.
“이게 어떻게 아가씨 거지?”
“은촉에 EX.C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을 텐데요?”
그래도 이름 있는 전사라고 테스는 은촉을 보는 것만으론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근처에 있다 해도 몸에 직접 닿는 정도가 아니면 견딜 만 한 모양입니다.
“일찍부터 소문을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지. 엑시델 크로네스테 양. 엄청난 소문에 비하면 봐줄만한 미모야.”
칭찬인지 놀리는 건지 애매한 말을 하며 화살을 돌려줬습니다.
“우리 아가씨가 뭐 어때서.”
“어디서 ‘우리 아가씨’야? 징그럿!”
“거기 형씨나 놔 줘.”
폴에게 성질을 확 부렸는데 캐논이 놀라서 몸을 잔뜩 움츠렸습니다.
“이러고도 어떻게 운반자로 먹고 사는지 몰라. 가서 물건 정리해 놓고 빨리 꺼져.”
캐논은 제 손에서 풀리자마자 휘청거리면서도 부산하게 움직였습니다.
관외자를 처리하고 나서 곧바로 폴을 쳐다봤는데 일찌감치 고개를 돌리고 절 피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슈볼츠아웃 형제가 있어서 쓸데없는 일로 꼬투리잡고 말다툼을 할 순 없었습니다. 그 때 생각으로도, 유치한 짓은 하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습니다.
“한 성격하는 아가씨로군.”
“헌터질하려면 저 정도는 돼야지. 그래도 우리 델 아가씨는 귀여우니까-.”
“너-! 정말로 그 머리통을 벌집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 아가씨’도 모자라서 ‘우리 델 아가씨’라뇨. 순간 팔과 등에 소름이 확 돋고 머리가 홱 돌아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폴이 오늘 뭐 잘못 먹었나?”
“야행성인 녀석이 낮에도 움직이니까 맛이 간 걸 거야.”
차라리 어린애 같은 치니비를 상대하는 편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나이 먹은 만큼 경험이 많은 폴을 옹호하는데(어디까지나 폴과 치니비만 비교했을 때)이번만큼은 치니비가 더 말쑥하게 보였습니다.
그 때 대단한 살기가 느껴짐과 동시에 놀라운 장면이 단 몇 초 만에 눈앞에서 지나갔습니다.
비스테스 씨가 백색 검기를 들고 달려와서는 티를 향해 휘둘렀고, 티는 재빠르게 피하면서 아이언 클럽을 꺼내 비스테스 씨의 공격에 응했습니다. 비스테스 씨가 엄청난 실수를 더 크게 벌이기 전에 치니비가 비스테스 씨를 막았고 폴이 티를 보호하듯이 그의 앞에 섰습니다. 덕분에 비스테스 씨의 섬광과도 같은 공격을 멈출 수 있었습니다.
“진정하세요. 이분들은 플리에서 오신 손님이세요.”
패시가 텍스트리터 씨와 같이 있어 생긴 빈자리를 치니비가 훌륭하게 메웠습니다.
“치니비 일리안 군. 지금 플리가 모든 국가의 적이라는 걸 알고서 하는 소린가?”
“뭔가 잘못 알고 계시군요. 상대는 플리가 아니라 성전 파괴자들입니다.”
“영특한 크로네스테 양의 눈에는 배후에 플리가 있다는 것이 보이지 않은가? 유감이군.”
“지금 세상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꼬맹이는 빠져.”
한껏 냉소를 지으며 절 가볍게 쳐다보는 비스테스 씨를 향해 폴이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먼저 해버렸습니다. 그것도 폴 버전의 막말로.
“바보도 아는 뻔한 세상사인 것을.”
“네 녀석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세상이 아니야.”
“항상 잘났다는 듯이 말씀하시는 군.”
“지금 얼마나 복잡하게 돌아가는지 모르면 딴 놈들하고 나란히 누워서 낮잠이나 자.”
초면부터 서로에게 감정이 좋지 않던 둘은 점점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폴이 비스테스 씨에 대해 좀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 했습니다.
“괜히 저희끼리 시끄러워져서…….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무례하게 행동한 것, 정말 죄송합니다.”
치니비가 슈볼츠아웃 형제에게 점잖은 투로 허리 숙여 사과했습니다. 어린애처럼 굴긴 해도 할 땐 제대로 한다고 유독 다르게 보이는 날이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이기도 했지만요.
“저 분은 수호자가 아닌가 보군요.”
“소드마스터라는 과분한 칭호를 가진 지원병일 뿐입니다.”
이 대사를 치니비가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일리안 쌍둥이는 원래 윌-프로텍터와 사이도 좋고 그들을 존경했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그들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지만 치니비가 그런 표현을 서슴없이 구사할 정도인 줄은 몰랐습니다.
비스테스 씨가 치니비의 말을 들었으려나 했는데, 폴과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며 기싸움을 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나이티가 저렇게 적대심을 드러내는 상대도 드문데 말입니다.”
조만간 슈볼츠아웃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을 티는 치니비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줬습니다. 작위 계승자로서의 품위일진 모르겠습니다만 확실하게 귀족의 분위기를 풍겼습니다.
“저 둘은 그냥 놔두세요. 그보다는 혈안의 야수왕 때문에 왔다고 하셨죠?”
“가급적이면 우리 앞에서는 텔러라고 말했으면 하는군.”
테스는 정색까지는 아니지만 불쾌감을 나타냈습니다. 혈안왕 본인이 본명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해서 일부러 별칭을 말한 건데 그의 형제는 본명을 원하니, 이거 참.
“네. 그러죠. 당신의 형제, 텔러 슈볼츠아웃이 여기에 두 번 나타난 적이 있어요. 자칭 심.판.단.이라는 무리와 같이 말이죠.”
정보원을 풀었다니 이 정도야 당연히 알고 있겠지라고 생각하면서 일부러 ‘심판단’을 강조했습니다. 슈볼츠아웃 가의 사람이고 혈안왕의 형이기까지 하니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소문 값을 하시는 군요. 최고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헌터라더니 ‘심판단’까지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프 데몬에 대해서 그쪽에 캐물을 생각은 없습니다.”
이날따라 주변 파악이 잘 되고 말발이 제대로 선 치니비는 티의 심중을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윌-프로텍터 등에게는 하프 데몬과 관련된 것들을 당분간 알려주지 않기로 했는데 이 대화로 비스테스 씨가 눈치를 챌까봐 잠시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폴과 기싸움, 말싸움 중이라 이쪽엔 신경 쓸 겨를이 없었습니다.
폴도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적당히 보내면 될 걸 답지 않게 열을 내더군요.
둘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듣지 못해서 누가 누구의 화를 키웠는진 모르겠지만 손님 앞에서 추태인 것만큼은 분명했습니다. 그래도 손님들이 예민한 폴의 모습을 신기하게 여길 뿐 다툼 자체엔 딱히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사람들이…… 이건 좀 아니다 싶었습니다.
“세계수에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텔러의 흔적이 있을 지도 모르니.”
“아닙니다. 그건 핑계고 실은 플리의 대표로서 인사드리러 온 겁니다.”
“상대가 심판단이니 플리에서도 움직이지 않으면 곤란하겠죠.”
정치적인 얘기가 시작되려는 중에 언쟁이 끝나고 비스테스 씨가 윌-프로텍터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시면 저희 대표도 같이 만나서 얘기하세요. 치니비, 먼저 두 분을 안내해 줘. 난 폴을 데리고 갈게.”
“응. …따라오시죠.”
치니비가 슈볼츠아웃 형제를 패시가 있는 곳으로 데려가고, 전 폴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냉정이 트레이드마크인 녀석이 이게 뭐야?”
전투 상태처럼 붉은 눈이 선명하게 번뜩여서 처음 본 순간 심장이 콩닥 뛰었지만 그런 눈을 많이 봐 온 덕분에 제 페이스대로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꼬맹이가 그런 말투 쓰면 못 써.”
폴은 눈동자의 빛을 진정시키더니 제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습니다.
“갑자기 뭐야.”
“피케스 비스테스. 그 놈, 입만 열면 항상 네 얘기로 끝내. 아주 불쾌해.”
폴이 비스테스 씨를 오래 상대한 것이 제 얘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구체적인 얘기를 해주지 않았지만 대충 짐작이 갑니다. 제 인생에 있어 지울 수 없는 오점을 거들먹거렸겠지요.
매일 절 놀리는 것 같으면서도 챙겨줄 땐 확실하게 챙겨주니까…… 이럴 때만 고마운 거죠.
“그 사람들, 치니비랑 같이 패시가 있는 데로 갔어.”
“아, 우리도 가자.”
“그러려고 기다린 거야.”
폴은 다시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폴이 오빠 노릇을 한 걸지도 모릅니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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