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한 달 간의 성전수호록 : D-22 합류!

★은하수★ 2009. 3. 18. 09:40

D-22 합류!

 

“으읏, 쓰려!”

도중에 식인 독성 식물, 라플레시아가 십 몇 개체 무리지어 있는 곳을 지났습니다. 성인 뉴노멀의 세 배되는 몸집에 1.5배 되는 키를 자랑해서 두, 세 개체만 있어도 버거운데 그렇게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 빠져나오는데 애먹었습니다. 옆으로 빙 돌아 지나가려고 해도 대지가 독기로 질척거려서 도무지 발을 댈 수 없었습니다.

화살촉에 대지에 스며있는 독을 찍어 묻히고 나서 불까지 붙이고 라플레시아 군락지에 아낌없이 쐈습니다. 남은 화살이 10개도 안 됐으니 라플레시아의 수보다 많이 쏜 셈입니다. 라플레시아 자체의 독이 불에 타면서 지독하게 매캐한 연기가 생겼는데, 불에 은근히 강해서 저희를 향해 뻗는 줄기와 뿌리를 겨우 제치며 달리는 중에 그 연기를 마셔버렸습니다. 눈에도 들어가서 제 의지완 상관없이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매캐한 연기나 가스가 눈에 닿았을 땐 눈을 비비면 더 따갑기 때문에 손을 억지로 허리춤에 고정시키고 패시를 따라 앞으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 측면 내리막 아래에 깨끗한 냇물이 흘러서 눈을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휴, 혼났네.”

“앞으로 더 가야 하는데 화살이 얼마 안 남아서 어떡해?”

“임시로 만들어야지. 아니면 소드마스터께서 소녀를 지켜주시던가.”

패시는 ‘풋!’ 하고 한 번 웃더니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왜, 왜?”

“같은 소녀라도 숙녀 쪽이 더 좋겠는데…….”

“실례야, 패시.”

“말괄량이를 보호하는 건 왠지 내키지 않아.”

패시의 말에 울컥했지만 입장을 바꿔보니 묘하게도 일리 있어서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말괄량이라기보다는 터프하고 활달한 아가씨 쪽이란 말입니다. 말괄량이는 저 역시 상대하기 거북하다고요.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세계수에 도착할 수 있을까?”

토트는 세계수의 방향만 알려줄 뿐 거리는 나와 있지 않는 답답한 면이 있었습니다. 벌서 태양이 머리 위를 지나 잠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폴이 있으니까 딱히 걱정은 안 하는데 그래도 사, 나흘 돼서 그런지 조금 마음에 걸리네.”

패시는 토트의 뚜껑을 닫고 다시 세계수를 향해 걸었습니다.

하염없이 걸어 나가는 중에 시니와 붉은 시니도 종종 발견하고 루-래빗과 발맞춰 행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평온한 시간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갑자기 오크가 시비를 걸었지만 1초라도 시간이 아까운 저희는 바로 전력으로 상대하고 다시 발을 재촉했습니다.

“오늘은 오크랑 연이 깊구만.”

먼저 만난 오크의 화살 통에서 화살을 챙겨 제 화살 통을 두둑히 채운 터라 양 옆에서 나타난 30마리의 오크가 걱정스럽지 않았습니다. 패시는 아무 말 없이 롱소드를 뽑아 들고 오른쪽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전 그에 맞춰 나무 위로 잽싸게 올라가 오크의 정수리를 향해 화살을 난사했습니다. 오크가 아무리 인간보다 육체가 튼튼하다지만 정수리가 약점이라는 건 모든 생물의 공통점이니 제대로 먹혔습니다.

위에서 모든 움직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패시의 몸놀림, 특히 손놀림을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요 며칠 계속 롱소드를 쓰고 손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무뎌지지 않았나 걱정했는데, 제 걱정대로 휘두르는 감이 좋지 않은지 롱소드를 왼손으로 자연스럽게 낮은 토스로 넘기고 오른손에 백색 검기를 꺼내 화려한 움직임을 구사했습니다. 폴이 이 장면을 봤다면 패시와 정식으로 검을 대고 싶은 충동이 이성과 감성을 지배했을 겁니다.

“소드마스터에게 오크는 진짜 장난감이구나.”

“트레져 헌터가 할 소린 아니잖아.”

“트레져 헌터 입장에선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소녀 입장에선 대단한 일이잖아.”

강철 화살촉이 달린 화살만 골라서 다시 화살 통을 빵빵하게 채웠습니다. 드워프 만큼은 못하지만 오크의 화살도 꽤 위력이 좋아서 쏠 때 느낌이 괜찮았습니다.

“소녀라……. 너하고 연결하기 힘든 단어야.”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속 뒤집히는 목소리에 몸 전체가 돌처럼 굳어졌다가 풀리고 이마에 십자로가 뚜렷하게 솟아올랐습니다. 확인할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옆을 돌아봤더니 저와 상성이 맞지 않는 딥데어족이 씨익 웃고 있었습니다.

[뻑!]

“커억.”

팔꿈치가 반사적으로 폴의 복부를 가격했습니다.

“뛰어난 반사신경이야.”

상처가 완전히 다 낫고 기운을 차린-상처가 심해도 언제나 쌩쌩하지만- 치니비가 가볍게 박수를 쳤습니다.

전 성큼성큼 걸어서 패시의 뒤에 꼭 붙었습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폴이 잠깐 나가보자고 해서 따라온 건데 마중나간 게 돼 버렸어.”

치니비는 명랑한 소년처럼 웃었습니다. 그 때 웃는 낯이 화사해서 그런지 햇빛에 반사돼서 그런지 치니비의 다크브라운 머리칼이 라이트브라운으로 보였습니다. 제가 눈을 비벼 다시 확인한 건 당연하고요.

“내 감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았지? 딱 맞게 워프를 열었잖아.”

“큭. 칭찬해달라는 거야?”

“이 꼬맹이가 갈수록 나랑 맞먹으려 하는군.”

“하하.”

패시와 제가 없는 사이에 치니비와 폴의 사이가 많이 친해진 듯 했습니다. 적어도 폴은 살아온 시간이 기니까 정신적으로 성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치니비와 장난칠 땐 영락없이 치니비만큼 정신연령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딱히 나쁘진 않습니다만 왠지 그 모습이 더 거북스러운 건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동안 별 일 없었어?”

패시가 툭 던진 한 마디에 폴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무표정으로 굳었고 치니비는 어색하게 웃었습니다.

“형식적으로 한 질문에 열렬한 반응을 보이네.”

폴의 헤드락에서 풀린 치니비의 양 볼을 쭉 잡아당겼습니다.

“세이버에 성전파괴자들이 나타나서 폴이 갔다 왔어. 그동안 나는 텍스트리터 씨와 비스테스 씨의 사투를 말렸고.”

치니비는 붉어진 양 볼을 문지르며 며칠 새에 있었던 굵직한 사건을 가르쳐줬습니다. 말솜씨가 좋은 폴의 자세한 이야기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비스 성녀에게서 텔레파시를 받은 폴은 치니비에게 세계수의 수호를 맡기고 세이버에 갔다고 합니다. 지브릴과 그린도 비슷한 시각에 도착했는데 이미 캐스트를 필두로 한 왕궁기사단과 근위대가 성전파괴자에 의해 차례로 죽어나가고 있었고, 비스 성녀는 거대한 진주조개에 두꺼운 결계를 치고 성전파괴자의 무자비한 공격을 버티고 있었다는 이야기. 성전파괴자들이 사라지고 나서 비스 성녀가 표정이 묘하게 이상했다고 덧붙였는데 지브릴이 굉장히 무서운 표정을 짓는 바람에 비스 성녀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지브릴은 하프 데몬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

지브릴이 얼마나 날카로운 눈을 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이. 엑시델 아가씨. 방금 하프 데몬이라고 했어?”

폴의 붉은 눈이 번뜩였습니다. 이제 패시도 알게 됐으니 숨길 것 없다고 생각했는데 폴의 눈이 곧바로 온화하게 바뀌었습니다.

“그저 뜬 소문인 줄 알았는데 그 유랑 용병단 이야기가 사실이었잖아.”

“나름 트레져 헌터라고 얇게나마 아는 게 있었군.”

“보아하니 왕궁이 아니라 정보 수집하러 딴 데 갔었군. 패시 일리안. 밖에서 가져온 정보를 풀어놔 주실까?”

“원한다면.”

페카도나드에서 알아낸 ‘심판단’의 자잘한 정보를 폴과 치니비에게 들려줬습니다. 패시가 주로 이야기했고 전 부족한 걸 보충하는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폴은 혈안의 야수왕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담담하게 들었는데 치니비는 다양한 표정 변화를 보여줬습니다.

“이 이야긴 당분간 우리끼리만 알고 있자. 다른 사람들이 알아봤자 쓸데없이 시끄러워질 뿐이야.”

“특히 덜 떨어진 윌-프로텍터에겐 더더욱 가르쳐주면 안 되지.”

폴은 윌-프로텍터에 확실하게 불신을 갖고 있었습니다. 일리안 쌍둥이도 납득한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실망했던 예전 일 때문이었습니다.

“치니비. 텍스트리터 씨가 비스테스 씨하고 싸웠다니, 무슨 얘기야?”

“그게…… 비스테스 씨가…… 휴. 네가 가출한 공주 주제에 헌터질하면서… 음…… 이런 험담을 좀 했어. 텍스트리터 씨랑 둘이 있을 때. 난 우연히 그걸 들었고. 네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잖아. 그리고 뒷담은 나도 싫고. 그만 두라고 했는데 갑자기 ‘동족학살’이라고 아냐고 하더라고.”

순간 얼굴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머릿속도 같이 새하얘졌습니다. 전 비스테스 씨를 모르지만 그는 저를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했습니다.

“그 순간 텍스트리터 씨가 비스테스 씨의 목에 검을 들이댔어.”

처음에 저와 텍스트리터 씨는 서로 모른 척 했습니다만 실은 구면입니다. 제가 왜 공주의 신분을 버리고 헤시리스에서 도망치듯이 빠져나왔는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관계자 중 한 명입니다. 그 날 일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고,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텍스트리터 씨는 그걸 지키기 위해 비스테스 씨와 싸운 게 분명합니다.

“애물단지치곤 쓸모 많은 아가씨. 전에도 경고했지만 파케스 비스테스 녀석 조심해. 은근히 널 노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

폴의 붉은 눈에는 진지함이 가득했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 그들은 뭐하고 있지?”

“대장다운 질문이야. 윌-프로텍터가 멋대로 생명의 숲을 돌아다니고 있을 때 텍스트리터는 왕궁에서 보낸 군대를 시시각각으로 점검하고 빈 시간에는 세계수 근처에서 밀착 보초를 서 왔다고나 할까?”

지브릴이 윌랜드의 대표로 텍스트리터 씨가 선발되지 않은 걸 의아하게 생각할 만 했습니다.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모습은 저희 대표들에게도 귀감이었습니다.

하지만 윌-프로텍터는 소드마스터로의 품위나 여유를 지킬 뿐 명성 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속된 말로 이름값도 못하는 주제에 제 잘난 것만 챙긴 겁니다.

“눈엣가시로 보여도 적이 나타날 땐 훌륭한 전력이라 우리가 참아야지.”

치니비가 웃으면서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눈엣가시라……. 폴의 입장에선 아주 적절한 표현일겁니다.

“왕궁에서 보낸 무더기 나무방패들 보다야 낫긴 하지.”

평범한 군대도 아니고 최소한 아카데미를 나온 자들을 골라 모은 군대인데 나무방패라고 하는 건 실례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어차피 그들은 맡은 구역에 대표와 소드마스터가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역할이라 죽을 각오로 뛰어드는 건 굳이 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맥없이 목숨을 잃어나가는 건 어쩔 수 없지요.

[부슥]

좀 떨어진 곳에서 저흴 몰래 보고 있던 오크의 움직임이 제 예민한 귀에 딱 걸렸습니다.

“오늘은 진짜로 오크랑 연이 깊어.”

[피융]

제 귀에 걸린 녀석이 아니라 벌써 두 팔 거리까지 접근한 녀석에게 자비 베풀 시간 없이 화살을 쐈습니다.

“호오, 아가씨. 명중-.”

이마의 정중앙에 화살이 박힌 오크는 뒤에 바싹 붙어 있던 동료에게 쓰러졌습니다.

이 날만 벌서 세 번째. 이번에도 3~40마리 됐는데 제가 거리를 두고 숨어 있는 몇 마리를 쏴 죽이는 동안 세 명의 소드마스터가 근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녀석들을 순식간에 쓸어버렸습니다.

특히 눈에 들어오는 건 폴의 붉은 눈에 쫄아 제자리에 박혀 서있는 오크들이었습니다.

딥데어족과 몬데비언족은 전투 종족이긴 하지만 그 월등한 전투능력을 선보이기 전에 신체의 위협적인 특징 때문에 이래저래 득 보는 게 많습니다. 그러니 오크나 드워프가 상대적으로 약해보이는(객관적으로 약하죠…….) 뉴노멀족은 콧방귀 뀌며 무시하는 겁니다.

“여어, 다들 내 가까이로 와. 불꽃놀이를 보여드리지.”

시체나, 시체가 돼 가는 오크를 내버려두고 폴에게 갔습니다.

“플레임 샤워.”

폴이 오른손에 마력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높게 들어 올리는 순간 하늘에서 오크가 깔려있는 지상을 향해 불꽃 비가 빠른 속도로 쏟아져 내렸습니다. 가뜩이나 오크의 역겨운 냄새 때문에 코가 괴로웠는데 불 때문에 생긴 연기가 눈과 코 모두 마비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가자.”

사방이 온통 불밭이었는데 폴이 다른 마법으로 한 쪽에 길을 열어서 무사히 빠져나왔습니다.

“대체……. 왜 불을 일으킨 거야?”

“그러지 않으면 다른 녀석들이 냄새 맡고 쫓아온다고.”

폴의 대답에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제 동포의 냄새는 귀신같이 잘 맡는 오크를 견제하기 위해서는 싸움터를 불로 태우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그래도 무턱대고 불꽃을 온 둘레에 퍼부을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대화재로 넓게 퍼질까봐 걱정했단 말입니다.

“얼른 돌아가자. 성전파괴자들이 올 것도 걱정이지만 텍스트리터 씨와 비스테스 씨가 또 싸울까봐 걱정이야.”

“두 사람이 어린애도 아니고 같은 일로 쉽게 싸우겠어?”

“그래도……. 그때부터 계속 무서운 공기가 흐른단 말야.”

한 번 틀어진 둘의 사이는 모든 일이 끝나고 제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가지도 험한 분위기로 남아있습니다. 어린애들 싸움은 순진한 마음 덕분에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돌아가지만 이미 세상 겪을 거 다 겪은 어른 사움은 싸우기 전 상태로 되돌리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저와 폴의 싸움은 어린애 싸움일까요? 패시 말로는 저희 둘이 싸울 때, 5살짜리 꼬마 두 명이 다투는 것 같다는데, 그것 덕분에라도 저희끼리 싸워도 텍스트리터 씨와 비스테스 씨처럼 오랫동안 적대심을 가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