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6 치니비! 폭주하다!
밤을 꼬박 샌 데다가 심적으로 많이 지쳐서 숲으로 돌아가자마자 완전히 뻗었습니다. 하지만 해가 밝게 뜨고 다른 사람들의 여러 소리가 들리는 통에 자주 선잠에서 깼습니다. 그래도 눈을 붙이고 누워있는 게 눈 뜨고 나무 위에 안장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습니다. 그런데 순간, 불길한 감이 들어 상체를 일으켜 세우자 주변이 유별나게 시끄러워졌습니다.
“&@#%$!”
밖에서 뭐라고 소리 지르는데 무슨 말인지 분명하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물에 불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는데 문을 여는 순간 눈앞으로 핏물이 지나갔습니다. 핏물이 아니라 ‘피’라고 해야 정확하겠습니다만 경황이 없어서 ‘피 색을 띠는 물’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피가 튀긴 곳을 돌아보니 오크 한 마리가 병사 한 명의 목에 도끼를 꽂고 코를 벌렁거리고 있었습니다. 생각이나 고민할 필요 없이 팔을 들어 올리고 그 오크의 이마 한 가운데에 화살을 쐈습니다. 그리고 목에도.
“크로네스테 님!”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오크의 피가 묻은 칼을 들고서 저를 향해 뛰어오는 한 병사의 뒤에 세 마리의 오크가 제각기 무기를 들고 씩씩거리며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병사가 제 등 뒤에 안전하게 숨기 전에 잡힐 것 같았습니다.
“엎드려.”
[퓽, 퓽, 퓽]
병사가 미처 땅에 붙기도 전에 아슬아슬하데 스쳐가도록 화살을 쐈습니다. 화살은 모두 인중에 박혔습니다. 오크들은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이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하늘을 보며 죽었습니다. 확인 사살할 필요 없었습니다. 그 병사에게 성큼성큼 다가가서 일으켜줬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서쪽에서 오크 4, 50마리가 나타나서 훈련병들을 덮치더니 다른 곳에서도 우후죽순처럼 나타나서…… 지금은…….”
“포위된 거야?”
“……네.”
시끄러워진지 얼마 안 됐으니까 소드마스터들이 어련히 하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에 느낀 불길함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넌 돌아다니면서 오크 시체에 불을 붙여.”
“그러면 병사들의 시신에도…….”
“아카데미 출신이지?”
“알겠습니다.”
‘배운 바가 있는 자들은 윤리를 운운하기 전에 실제 현실을 먼저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그들이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좀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지만 과거에 어느 대현자가 했던 이 말이 잘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동료들의 시신이 훼손되더라도 훗날의 큰 위험을 막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 여유로울 때는 시신과 시체를 구분해 논 다음에 불을 지르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까. 아마도 그 병사는 이런 생각을 하며 횃대에 불을 붙였을 겁니다.
“잠 좀 자자.”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인 폴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뭐 때문에 일어난 거야?”
“소리나 냄새나 아주 사람을 괴롭히는데 뭐 때문이라고 어떻게 집어 내냐.”
[으드득]
몸이 고단한지 어깨를 돌리니까 둔탁한 뼈 소리가 났습니다. 목도 좌우로 흔들며 우득, 우득 소리를 냈습니다.
“윌랜드는 평화 국가 아니었나?”
“여기가 생명의 숲이란 걸 고려하면 이 정돈 감수해야지. 한두 번도 아니잖아.”
“오크 냄새는 역해서 싫어.”
폴이 한 쪽을 노려보자 그쪽에 있던 오크 예닐곱 마리가 일제히 내장이 터져 나오며 죽었습니다. 마법이 편하냐 염력이 편하냐 물어보면 염력이 편하다고 대답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딱히 손을 쓸 필요가 없다나요.
“이거, 이거. 위험해.”
폴이 뭔가를 걱정했습니다.
“뭐가 위험한데?”
“치니비 일리안 군이 또 한 건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아…….”
치니비 스스로, 피만 보면 흥분하는 성격 덕분에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데, 절대 농담도 과장도 아닙니다. 폴의 예상대로 이 날 제대로 활개를 쳤거든요. 세이버에서도 말리느라 고생 좀 했는데 이 날은 패시가 ‘애 잡기’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팍, 팍]
저희 병사와 대치하고 있는 오크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자동적으로 화살을 쐈습니다.
“저런 걸 뭣 하러 일일이 챙겨?”
“쟤네가 빨리빨리 처리 못하잖아.”
이왕에 들어 올린 팔, 내리기 전에 제대로 숨어 있지 못하는 녀석과 다른 곳으로 옮겨 숨으려는 녀석 등 네 마리를 잡아냈습니다. 모두 몇 마리나 습격해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점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건 확실했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쓸어가야겠어. 넌 동쪽으로 가. 난 서쪽으로 갈 테니까.”
“아가씨 혼자 가면 위험할 텐데.”
“뉘 집 아가씨 얘기야?”
“쿡. 빨랑 끝내고 그쪽으로 가지.”
“그 전에 끝낼 거야.”
대놓고 덤벼오는 것들과 주변을 살피는 것들 등 성전 수호자돌과 같은 편이 아닌 녀석들을 차례차례 제거하면서 서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고 있는 곳까지 가는 데만 해도 근 30마리는 잡았을 겁니다.
조금씩 매캐한 냄새가 풍겼는데 작게 격돌한 곳을 벌써 게임이 끝나고 시체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숲에서 함부로 불을 피우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긴 하지만, 오크는 시체 위에 작은 불씨만 놓아도 자체 육질의 기름(?)으로 활활 타고 마지막엔 알아서 사그라지니까 바람만 세게 불지 않으면 됩니다. 뭐, 이 정도야 아카데미를 타왔거나 길드에 소속돼 있는 등의 사람이면 상식으로 아는 거니까 지면 낭비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꾸엑!”
[츄악!]
마침 서쪽에 일리안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텍스트리터 씨도 근처에서 대범한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슥, 서걱, 스윽, 서걱, 서걱]
일반 병사들이 오크 한 마리랑 노닥거리고 있을 때 소드마스터들은 다섯 마리 이상을 후딱 해치웠습니다. 역시 소드마스터였습니다. 검을 휘두르는 자태부터 실력까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볼 때마다 감탄사를 내놓을 수밖에 없을 정도였습니다.
“비켜, 비켜, 비켜, 비켜!”
폴이 우려했던 대로 치니비가 폭주를 이미, 벌서 시작했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우리 편까지 골로 보낼 정도로 위험천만하게 검을 휘둘렀습니다. 치니비의 검이 지나간 자리를 검푸른 핏줄기가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마치 치니비가 검푸른 피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미친 듯이 검을 놀리는 치니비는, 표정은 살육을 즐기는 악마의 것이었고 종횡무진 날뛰는 자태는 먹이를 하나씩 재빠르게 죽여 가는 타란텔라와 흡사했습니다.
“어이, 그 횃불 좀 줘 봐.”
근처에 있는 병사 한 명을 불렀습니다. 화살촉에 불을 옮겨 붙이고 치니비가 쓸고 간 길에 멋대로 내버려져 있는, 아직은 온기가 남아 있는 시체에 하나씩 쐈습니다. 가지고 있는 화살을 다 쓴 후에는 오크의 화살을 사용했습니다.
[화륵]
“꾸웩!”
살아서 덤벼드는 녀석한테도 불화살을 쏴서 한 큐에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크핫! 꺼지라니까!”
광기에 제정신이 아닌 치니비가 사고를 치고 말았습니다. 운이 아주 나쁘게도 치니비가 뛰어다니는 길목에서 오크를 상대하고 있던 부대장급 병사가 치니비의 눈에 잘못 들었습니다.
팔꿈치로 코를 정통으로 맞은 병사는 그 순간 코뼈가 주러지고 피를 흘리면서 뒤로 쓰러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바로 뒤에 있는 나무에 뒤통수를 부딪치기까지 했습니다. 그 충격으로 코에서 피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는 쓰러지듯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신음 소리가 제가 있는 곳까지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살고 싶은 녀석은 엎드려!”
치니비의 행동에 화가 넌 저는 크로스보우를 연사 모드로 두고 팔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듯이 딱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 화살 20발을 모두 1초 만에 오크에 명중시켰습니다. 그 한 번의 연사로 제 사정거리 내에 있는 것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뒤처리해.”
시체 처리는 그곳의 병사들에게 맡기고 핏빛에 미쳐있는 치니비에게 재빨리 다가갔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광기에 취했는지, 치니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오크의 시체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 상관없는 들짐승도 치니비가 지나간 길목에 있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죽어야 했습니다.
“크하하핫!”
풀숲에 숨어있는 오크를 찾아낸 치니비는 즐거워하면서 그의 심장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시체의 얼굴 위에 심장을 보란 듯이 떨어뜨렸습니다.
[피융, 챙]
일부러 칼날을 노리고 쏘긴 했지만 치니비가 잘 알아차리고 화살을 쳐냈습니다.
“꼬맹이, 너도 죽고 싶은 거구나.”
“이게 누구한테 꼬맹이래?”
치니비와 마주보고 섰습니다. 그때 치니비의 눈은 살육을 갈망하고 살생에 미쳐있는 눈이었습니다. 말로는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 정도로 광기에 사로잡혀있었습니다. 아주 소름끼치는 오라를 풍겼습니다.
“클클클. 실력 차이란 걸 가르쳐주지.”
치니비는 손목을 이쪽저쪽으로 돌리면서 위협적으로 검을 다뤘습니다. 천천히 걸어오다가 도움닫기를 세게 찬 순간, 근접전은 제게 한참 불리하기 때문에 뒷걸음질을 했습니다. 치니비의 오른쪽 어깨를 겨누고 있었는데 둘 사이에 패시가 빠르게 끼어들었습니다.
[챙!]
패시가 여유롭게 광인의 검을 받아냈습니다.
“너도 내 기쁨조가 돼 주려는 거냐?”
광기에 먼눈은 패시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치니비가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대놓고 어깨를 노렸는데 패시가 크로스보우를 눌러 내렸습니다. 그 순간 패시의 분위기는 싸늘한 건 아니나 으스스한 것 같으면서도 굴복할 수밖에 없는, 심장을 얼게 만드는 절대군주적인 공포가 아니라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상관의 외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죽어버려……. 내게 심장을 바치라고!”
[챙!]
패시는 무표정한 얼굴로 치니비의 미친 검을 방어용으로 받기만 했습니다. 패시의 실력이라면 치니비의 검을 날려버릴 정도로 받아 칠 수 있을 텐데 고요하게 오라를 뿜으며 치니비의 눈을 깊게 뚫어봤습니다.
“시끄러! 꺼져!”
[챙! 챙! 챙!]
제가 봐도 무식하게 검을 내리쳤습니다. 하지만 패시는 그 자리에서 조금의 이동도 없이 모든 검을 다 받아냈습니다.
“으아악! 죽어! 죽어!”
치니비는 혼자 폭발했습니다. 꼭 약에 취한 광인처럼 침을 흘리고 눈이 벌겋게 충혈 되고 자기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뒷걸음질 치면서 허공에다가 검을 휘둘렀습니다.
“리버스. 이제 혼자 다 놀았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살 떨리도록 무섭게 들렸습니다.
“패시. 리버스가 뭐야?”
“여기 가만히 있어.”
패시는 검을 집어넣고 백색검기를 보였습니다. 피에 취한 광인이 기가 눌려 몸을 움츠렸습니다. 대단하게 설치던 그 자신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날 죽이고 싶으면 꺼내. 딱 셋만 셀 테니까. 셋…….”
“뭐, 뭘, 뭘 꺼내라는 거야!”
어린 아이가 고집부리면서 소리치는 것처럼 발악을 했습니다.
“둘…….”
“주, 죽일 거야!”
전신을 바들바들 떨던 치니비는 검을 꽉 쥐고 패시에게 달려들었습니다. 패시의 말을 못 알아들은 것도 아닐 텐데 백색검기를 꺼낼 수 없는지 평범한 검만 굳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하나……. 제로.”
[뻐억!]
백색검기는 폼이었는지 오른 다리로 치니비의 가슴팍을 시원하게 찼습니다. 피에 미친 치니비는 볼품없이 나가떨어지더니 검을 잡지 않은 손으로 가슴을-옷을- 쥐어 잡으며 괴로워했습니다. 다시 말해 검은 절대로 놓지 않았다는 겁니다.
“일어나라.”
상대를 짓밟는 투의 명령이었습니다. 분명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있는데 포스가 너무 강력해서 저까지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일 것 같았습니다.
“죽일…….”
“그러면 꺼내.”
“윽.”
치니비는 일어서다가 패시의 위압에 둘려서 심하게 몸을 움츠렸습니다.
“절대로 리버스한테 밀리지 말라고 입이 닳도록 얘기했는데도…….”
[퍽!]
패시의 오른손에서 번쩍거리던 백색검기가 사라지고, 굳게 쥔 주먹으로 치니비의 얼굴을 있는 힘껏 갈겼습니다. 치니비는 다시 한 번 쓰러졌습니다. 그래도 치니비의 손에는 검이 들려있었습니다.
“일어나라.”
이번에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쓰러진 채 몸을 움찔거렸습니다.
[꾸욱]
패시가 검을 잡고 있는 치니비의 손을 지그시 밟았습니다. 치니비는 인상만 잔뜩 찡그렸지 신음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넌 죽었다 깨어나도 날 이기지 못한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성전수호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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