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
1. 이것은 판타지입니다!
2. 커플링은 없습니다!
3. 가히리 소설은 처음 쓰는 거니까 너그럽게 봐주시고, 졸작은 싫다 하시면 '뒤로'버튼을 살포시 눌러주십쇼!
4. 마지막에 '그 녀석'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누군지 알아맞추시는 분은 소정의 선물을.... <뭔 소리야!!
das erste Spiel[제 1 연주]
언제나 그렇듯이 태양이 뜨고 새로운 아침이 찾아왔다. 빛의 성은 이른 아침부터 사용인들이 바쁘게 돌아다녀서 정신이 없었다. 성주는 시동의 도움을 받으면서 의관을 서둘러 갖추고 여섯 명의 기사가 모여 있는 알현실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너무 빨리 걸은 나머지 성주의 망토를 잡고 뒤따르던 시동이 속도를 미처 따라잡지 못하고 망토를 놓치면서 넘어졌다. 성주는 곧장 뒤로 돌아서 시종을 일으켰다.
“미안해. 내가 너무 마음이 급했나봐.”
“아닙니다, 성주님. 소생이 움직임이 굼뜬 탓이니 성주님께서 미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같은 날 마음이 급해지는 건 당연합니다.”
“바질은 역시 착하구나.”
“과, 과찬이십니다. 어서 가시죠. 기사 분들이 기다리십니다.”
“응, 가자.”
성주는 뒤따라오는 바질을 생각해서 걷는 속도를 조절했지만 역시 마음이 급하다보니까 다리가 저절로 빠르게 움직였다. 시동 바질은 성주의 무거운 양털 망토를 들고 종종 걸음으로 부지런히 성주를 따라갔다. 따라가면서, 무거운 왕관을 쓰고 묵직한 망토까지 걸쳤으면서도 걷는 속도가 자신보다 빠른 성주가 존경스러웠다. 망토 끝자락을 붙잡고 쫓아가는 주제에 성주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넘어진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성주님이 오신다!”
“Öffnt Pforten! (문을 열어라!)”
멀리서 성주가 보이자 사용인들은 더 분주하게 움직였고 알현실의 문지기는 거대한 문을 여는 주문을 외쳤다. 성주가 걷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멀찍이 보이던 수려한 풍채가 어느새 사용인들을 지나 차마 다 열리지 않은 문을 통과했다. 그래서 그 근처에 있는 사용인들은 전부 성주에게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어서 오십쇼, 성주님.”
제각기 다른 색의 실크 망토를 두른 여섯 명의 기사가 양쪽으로 갈라서서 성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성주는 그들 사이를 지나가다가 중간에서 멈춰 섰다. 뭔가 잠깐 생각하는 듯싶더니 갑자기 뒤로 돌았다. 그 덕분에 바질이 부랴부랴 성주의 뒤로 달려가서 망토를 고쳐 잡아야 했다.
“왜 그러십니까, 성주님?”
성주의 일이라면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쿠데라가 나섰다. 물론 지금 같은 상황에선 굳이 고쿠데라가 아니더라도 똑같은 질문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다만, 지금은 6명 중에서 고쿠데라가 제일 빨랐을 뿐이다.
“스승님께서 오시는데 제자 된 자가 성 안에서 기다리는 건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이미 늦었어.”
알현실의 커다란 입구에 아주 작은 꼬마가 당당하게 서있었다. 그는 뒤에 모자가 달린 검은 사제복 위에 발목까지 오는 긴 노란 벨벳 조끼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 위에 조끼와 똑같은 색을 띠고 있는 둥근 수정 구슬이 동동 떠 있었는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을 받고 생기 있게 반짝였다.
“스, 스승님! 죄송해요, 제가 마중을 나갔어야 했…….”
[퍽!]
“악!”
성주의 스승이 지팡이도 가지고 있었던가? 스승이 워낙 조그마해서 지팡이를 짚고 있었는지 몰랐다. 여하튼 그 스승은 검게 옻칠한 물푸레나무 지팡이로 자신을 향해 달려온 성주의 왼쪽 종아리를 있는 힘껏 때렸다. 성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은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성주의 계율을 읊어 봐.”
“처, 첫째, 성주는 자기 아래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 성주는 자신의 책임을 항상 기억해야한다. 셋째, 성주는 어떤 순간에라도 나약함을 보여선 안 된다. 넷째, 성주는 자신을 과시해도 안 되며 과신해도 안 된다. 다섯째, 성주는…… 성주는…….”
막힘없이 술술 계율을 읊던 성주는 마지막 계율에서 멈췄다. 스승이 없는 동안 외지 않았더니 잊어버린 것이다. ‘성주는… 성주는…’만 반복하면서 스승의 눈치도 살피고 바닥도 내려다보고 양옆을 둘러보기도 했다. 도무지 마지막 계율이 생각나지 않았다. 입 꼬리 부근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리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성주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지금, 스승의 지팡이가 성주의 머리를 가격하기 딱 좋았다. 성주는 어떻게든 매질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 계율은 생각나지 않고, 피하거나 도망가 봤자 자신만 손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기 때문에 두 눈 꼭 감고 기다렸다.
“다섯째, 성주는 언제나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게 웬걸. 스승은 그의 애장품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 다음 순간, 어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스승은 지팡이를 짚은 채 성주를 향해 고개를 숙인 것이다. 성주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스승을 빤히 쳐다봤다.
“사와다 츠나요시, 우리들의 성주. 소인의 소원이 하나 있다면 당신이 언제나 당신의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겁니다.”
“스승님. 이게 무슨…… 에…… 스승님, 고개를 드세요.”
성주는 갑작스런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고개를 들고 자신과 마주보는 스승의 눈은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건 뭔가를 굳게 결심했을 때의 눈이었다. 감이 뛰어난 성주는 스승의 이번 방문이 평범한 방문이 아님을 감지했으나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아니, 처음부터 평범하지 않은 방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게다가 뒤에 기사들도 있기 때문에 스승처럼 진지한 표정을 짓는 대신에 활짝 웃었다.
“양심에 확 찔리네요. 혹시 전에 무단 외출한 것 때문에 화나신 거에요? 에이, 화 푸세요.”
5살 체형의 스승은 성주에게 가볍게 들렸다. 성주는 스승을 가슴 높이로 안고서 기사들을 지나 자신의 옥좌로 향했다. 성주가 너무 해맑게 미소 짓고 있었기 때문에 6기사는 성주가 기분 좋은 상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흐뭇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딱!]
“내가 조금만 봐줘도 기어오르려고 해서 탈이야.”
“흐에-.”
스승은 성주가 옥좌에 앉자마자 물푸레나무 지팡이로 성주의 이마를 때리면서 아주 쉽게 성주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성주는 이마를 가리고 고개를 숙이다가 큰 왕관을 떨어뜨릴 뻔 했다. 그래서 왼손으로는 왕관을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이마를 가린 채 고개를 우측 아래로 숙였다.
“못난 녀석. 고작 계율 다섯 개도 못 외워?”
성주의 스승은 성주가 6기사를 신경 쓰고 있는 것을 알고 성주의 장단에 맞춰서 평소 모드로 성주를 대했다. 속내를 모르는 기사들은 입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리고 크득크득 웃었다. -물론, 웃지 않는 자도 있다.- 성주와 그의 스승이 같이 있으면 항상 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웃음이 나왔다. 그들에게 그것은 평화, 그 자체였다.
“치……. 잔자스도 딱 세 개 있는 계율을 못 외우던데요?”
“마몬이 만든 어이없는 계율은 외울 가치가 없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츠나 따위가 내 말에 토를 달아?”
“아, 아니에요.”
스승이 지팡이를 높게 들어 올리자 성주는 두 팔로 잽싸게 얼굴을 가렸다. 스승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팔을 내렸다. 그 때 성주의 스승과 제일 얘기가 잘 통하는 기사, 야마모토가 스승의 옆으로 가서 왼쪽 무릎은 바닥에 대고 오른쪽 무릎은 세운 자세로 꿇어앉았다.
“하하, 성주님이 리본께서 오시길 얼마나 기다리셨는데요. 그걸 봐서라도 훈계는 여기까지 하세요.”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다. 저 한심한 녀석. 언제쯤에야 성주다운 성주가 될지 원.”
스승 리본은 폴짝 뛰어서 야마모토의 왼쪽 어깨 위에 앉았다. 야마모토가 일어섰을 때 은빛이 살짝 도는 연보라색 망토의 주인이 그 뒤로 걸어 나왔다. 여럿이 같이 다니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지만 리본이 온다기에 특별히 나온 것이었다.
“이번 ‘바깥’ 여행 중에 위험한 일이 있었다면서요?”
“아, 그거? 별 거 아니야.”
“거짓말은 좋지 않습니다, 리본. 우리도 이미 대략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파스텔 톤 남색 망토를 걸치고 긴 삼지창을 든 기사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었다. 그저 순수하게, 아주 단순한 사실을 말한 것이지 그에게 악의라곤 조금도 없었으나, 워낙 애매한 인상이라 그가 웃을 때면 대개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알고 있다고? 그래, 그런 건가?”
스승은 화내는 것보다 더 무섭다는 ‘무표정’으로 성주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성주는 등을 옥좌의 등받이에 최대한 밀착시키고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때문에 자신을 쳐다보는지 모르지만 스승이 무표정일 때면 반사적으로 몸이 움츠러들고 방어태세를 갖췄다.
“왜- 그러세요?”
“네 녀석이 날 반긴 이유가, 내가 아무 탈 없이 돌아왔기 때문인가?”
“그, 그것도 있고……. 오랜만에, 오랜만에 오셨잖아요.”
성주는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스승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제일 중요했다. 7현자의 정기 모임에 무(無)의 성 성주가 부하들을 이끌고 난입한 일이 일어났다. 그 중에 두 명은 죽고 세 명은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리본은 무사하다는 보고를 받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었는데, 오늘 지금 리본을 반기지 않을 리 없다.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아는 놈이……. 아무튼 소심한 녀석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용하다.”
“걱정한 것도 죄에요? 그리고 절 여기 앉힌 건 스승님이잖아요.”
“츠- 나-. 또 내 말에 토를 다는 건가?”
“흐에-.”
“그만 하세요. 아하하-.”
“리본을 걱정한 사람은 성주님만이 아닙니다.”
6기사 모두 성주를 두둔했다. 성주의 스승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야마모토의 어깨에서 뛰어내렸다. 살포시 착지하고 나서 조끼의 매무새를 정리하는데 머리 위에 떠있는 수정에서 빛이 났다. 그는 지팡이로 수정을 밀어 눈앞으로 옮겼다.
“뭐냐?”
수정 위로 크게 나타난 영상에 마몬의 얼굴이 보였다. 그 뒤로 언뜻 잔자스의 얼굴이 보이는데 마몬도 밤의 성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비보다. 무의 성이 창공의 성을 접수했다는군.”
“결국 그렇게 됐나.”
“다음은 그쪽이라는군.”
“알았다.”
영상이 사라지고 수정은 다시 리본의 머리 위로 위치했다. 의미심장한 소식으로 주변이 술렁거리자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쳤다.
[탁!]
“조용히 해라.”
성주는 스승의 눈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스승이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스승이라 해도, 7현자라 해도 막기 어려운 일을 무의 성에서 저지르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창공의 성이라고 하면 아직 어린 여자 아이가 성주로 있는 곳이죠?”
“그래…….”
“백란은 왜 자꾸 성을 먹으려는 거지?”
성주의 혼잣말이 리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싸움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제자가 무의 성 성주의 다음 타깃이다. 스승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선에서 백란을 막고 제자를 지키고 싶었다.
“리본. 무의 성으로 갈 생각이라면 그만두세요.”
야마모토가 리본의 속마음을 읽었다. 히바리, 로쿠도 등 모든 기사들과 성주도 모든 기사들과 성주도 리본의 뻔한 생각을 알아챘다. 늘 때리고 곱지 못한 말로 성주의 기를 죽이지만 성주를 생각하는 그 마음은 충성 서약을 한 6기사들 보다 위였다. 성주 자리를 내버리고 도망간 선대 성주를 대신하여 양아버지로서 지금의 성주 츠나요시를 키운 장본인이니 당연하다.
“우리는 강하니까 백란 같은 녀석한테 무릎 꿇을 일은 극한으로 없을 겁니다!”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네. 성주님은 반드시 저희가 지킬 겁니다.”
사사가와하고 고쿠데라는 완전히 열혈모드였다. 성주는 ‘역시’라는 듯이 생긋 웃었다. ……다시 사사가와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겠는가. 그리고 천천히 아래로 시선을 옮겨주길 바란다. 스승 리본과 비슷한 몸집에 똑같은 검은 사제복. 그의 벨벳 조끼는 투명한 바다와 같은 푸른색이다. 대체 언제 나타난 것일까? 워낙 조그매서 알 수가 있어야지.
“당연히 그래야지, 에헴!”
“스승님!”
빛의 성의 6기사 중 사사가와를 가르친 코로네로다. 내로라하는 용병은 웬만하면 코로네로의 문하생일 정도로 키운 제자도 많고 그만큼 실력도 뛰어나다. 그 타고난 전사가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은 역시 백란의 습격 때문일 것이다.
“코로네로님? 언제 오셨어요?”
성주가 놀라는 건 당연하다. 전체를 보고 있는 나도 놀랐는데 성주가 놀라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에헴! 리본, 현자들이 이렇게 흩어져 있으면 안 된다. 백란과 ‘그 녀석’에게 대항하려면 뭉쳐야 한다, 에헴!”
“나도 알아.”
성주와 여섯 기사는 ‘그 녀석’이라는 단어에 귀가 움찔 했다. 성주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자’가 맞는지 물어보려는데 두 현자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리고 두 개의 수정 구슬이 은은한 빛을 내다가 한 순간에 꺼졌다.
“쯧!”
분노. 리본과 코로네로는 분노의 오라를 풍겼다. 성주는 자신의 스승이 그렇게까지 화내는 모습을 난생 처음 봤다.
“스승님, 무슨 일입니까?”
사사가와가 코로네로와 키를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코로네로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머리에 감은 붕대를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 채 확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베르데가…… 베르데가 지금 막 백란의 손에 죽었다. 에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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