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2 선우 찬필, 납치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다. 기절하거나 쓰러졌다가 일어나면 기분이 굉장히 안 좋다는데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겠다. 이상한 향수 냄새를 맡자마자-그게 향수 냄새가 맞는지도 모르지만- 정신을 잃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약간 어둡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것들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내가 지금 있는 여기는 평범한 방이다.
“…나 하…….”
“아직……. …찮은…….”
“…어서….”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웅성거리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밖으로 나가보…… 손과 발이 딱딱한 고리로 묶여있다. 아플 만큼 세게 조이진 않는데 움직일 틈이 없을 만큼 단단하게 고정돼 있다. 그냥 이렇게 얌전히 의자에 기대앉아서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나 보다. 그동안 겪은 일들이 워낙 별나고 격한 일이라 이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심약·취약한 선우 찬필이 조만간 7개의 딱지 중 한 두 개는 뗄 지도 모른다. 17년을 달고 산 타이틀을 요 짧은 며칠 내에 버리게 될 줄이야. 역시 인생은 살고 봐야한다.
세일마글레님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지만 쓰러지기 전에 피어싱을 바닥에 떨어트리는 바람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정말 아무것도 없다. 죽치고 기다리는 게 고작이다. 타향에서 이렇게 험한 꼴로 있고 비참- 하구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바알님의 일정을 신경 쓸 거 없이 속편하게 잠이나 더 자는 것도 괜찮을 거다. 그리고 깨 있는 것 보다 자는 게 에너지 효율 면에서도 더 낫다.
지금 느낀 건데 목도 무언가로 감겨 있다. 손목과 발목을 구속하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굳이 비유해 보면 매끄럽고 차가운 플라스틱 정도. 목까지 고리를 끼울 필요는 없는데, 혹시 내가 도망을 시도하면 그걸 제지하기 위한 도구인 걸까? 마족이 인간을 구속하는 것쯤이야 짐승 하나 다루는 것처럼 쉬운 일일 텐데 이렇게까지 하는 건 혹시나 바알님에게 대항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면 난 인질? 여하튼, 난 어디 있건 간에 남에게 도움 되는 인간은 못 되나 보다. 참 백해무익한 팔자를 타고났다.
가는 빛줄기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시야가 환해진다. 누군가 방문을 열었는데 역광이라 누군지 모르겠다. 키는 세일마글레님 만하고 머리카락은 긴 것 같다. 아니, 길다. 땋아서 몸 앞으로 가지런히 놓은 모습이 보인다. 체형은 딱 봐도 호리호리한 남성이다. 발목까지 오는 긴 코트를 입고 있는데 색은 역시 역광이라 잘 모르겠다.
“일어났습니까?”
키며 몸매뿐만 아니라 미성인 것도 세일마글레님이랑 비슷하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유감인데 혹시 얼굴까지 미청년일까? 납치당한 주제에 상대 외모나 보고-그것도 남자를- 이렇게 여유 부려도 되나 모르겠다. 딱히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여유라도 부려야지 어쩌겠는가.
“아, 제가 실례를 했습니다. 첫 만남이 이런 식이라 유감스럽습니다. 앞으론 제대로 대접할 테니 기분 푸십쇼.”
‘당신들이 말하는 대접이란 고문인가요?’하고 묻고 싶지만 혼자 무덤 파는 짓이니까 입 꾹 닫고 목구멍으로 삼키련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서 내가 무사하길 바란다면 그건 어리석은 욕심이다.
[딱]
그가 손가락을 퉁기자 방 안이 밝아졌다. 역시 내가 언뜻 본대로 평범한 방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그는 얼굴마저 아름다운 미청년이다. 엔틱풍 가구로 꾸며진 아담한 방과 곱게 딴 흑장발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미청년이라……. 여자애들이 보면 꺅 꺅 하고 호들갑 떨지도 모른다.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잡생각을 하는 남성체는 대체 누구인가? 납치된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이 내 시선과 사고를 계속 다른 쪽으로 돌리나보다. 그렇다. 이 자가 나타난 순간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차를 좀 드시겠습니까? 겁먹지 마십쇼. 순수하게 찻잎만 우려낸 겁니다. 전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긋나긋하고 사근사근한 말투가 귀를 간지럽힌다.
“제 소개부터 해야겠군요. 사파야-렛사. 편하게 사파야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그의 이름을 듣자마자 심장이 매우 빠르게 뛴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황인지 바로 직감했다. 그리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헬하운드가 내 얘기를 이 자에게 한 건가? 내게서 바알님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려는 건가? 인간은 처음 보는 거라 단순 호기심 때문인가? 날 미끼로 쓰려는 건가? 아니면 실험체? 아니면 헬하운드가 말한 애완동물? 심장과 뇌가 진정을 못한다.
“당신의 이름은 뭐죠?”
향이 은은한 차가 내 앞에 놓이는데 사약을 받는 느낌이다. 마시면 즉사할까, 진짜 사약처럼 고통스럽게 죽을까. 이런 생각만 계속 맴돈다. 살기 위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은 할 틈이 없다. 아니, 하면서도 내 불안감에 금방 가려져 버린다. 아니, 가면 갈수록 머리가 텅 비어간다. 눈앞은 까매지는데 머릿속은 하얘진 달까? 눈은 빛이 곧장 들어오는 것처럼 허옇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머릿속은 모든 게 뒤죽박죽인 것 마냥 검은 카오스 같달까? 지금 내가 어디서 누구랑 뭘 하고 있는지 파악이 안 된다.
“아, 너무 긴장해버렸군요. 그냥 얘기만 하자는 건데 말입니다. 전 당신을 해코지할 생각이 없습니다. 있었다면 헬하운드에게 벌써 넘겼겠죠.”
낯익은 이름이 들리자마자 정신이 퍼뜩 든다. 헬하운드에 넘긴다니, 난 지금처럼 생각할 틈도 없이 그 자 손에 죽을 거다.
“헬하운드가 여기 있나요?”
“이제야 입을 여는 겁니까?”
뭔가 낚인 것 같다. 이게 아닌데 싶다.
“걱정 마십쇼. 그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 자체를 모릅니다. 제가 멋대로 당신을 데려온 거라 아는 이가 저 말고 제 하녀 한 명 밖에 없으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러니까 이 마족은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인간이니까 무턱대고 데려왔다는 건가? 죽이지도 않고 괴롭히지도 않을 거라면 얘기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에……. 이미 정신적으로 충분히 괴로웠지만 이 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니까.
“이제 그만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겠습니까? 마냥 ‘당신’이라고 부르자니 어색합니다.”
“선우 찬필……. 성은 선우, 이름은 찬필이에요.”
“인간은 이름이 여러 부분으로 나뉜다더니 당신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 군요. 재밌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아는 마족들은 모두 이름이 한 덩어리다. 이름만 있으니까 인간의 ‘성’이 신기할 지도 모른다. 여러 부분이라는 건 아마도 서양의 미들 네임 때문일 거다. 과거에 인간과 마족이 교류하던 시절에 주고 받은 이름을 덩어리로 기억하고 있다면 나올 법한 반응이다.
“제가 사파야라고 부를 수 있게 허락 받았으니까 사파야님도 그냥 찬필이라고 부르셔도 되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앞뒤가 맞는지 모르겠다. 그냥 사파야님이 알아서 걸러들었으면 한다. 걸러 들을 거라 믿는다.
“발음이 좀 어렵습니다만 상관없습니다. ……. 찬필 군. 일단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겠습니다.”
저렇게까지 허리를 숙이고, 고개도 숙이고 사가활 건 없지 않나 싶다. 모르는 이에게서 이렇게까지 사과받자니 민망하다.
“아뇨, 아까도 사과하셨잖아요.”
“그건 이렇게 모신 거에 대한 사과였고, 지금은 다른 겁니다.”
“예?”
언제 만난 적이 있다고 다른 게 있다고 하는 거지? 심장박동수가 90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다시 130, 140을 기록하게 하십니까. 앞뒤 아무 설명도 없으니까 괜히 초조해진다. 또 무슨 황당한 일이, 혹시 내가 감당 못할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긴장된다. 초식동물보다 더 잘, 더 자주 놀라는 이 몹쓸 인간은 마른 침을 삼키며 걱정 먼저 하고 안장 있다. 절대 유쾌한 이야기가 나올 리 없다는 사실이 날 이렇게 작아지게 한다.
“실은 당신을 이쪽 세계로 끌어들인 건 접니다. 인간과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어서 디멘션 워프를 열었는데 세일마글레가 중간에 가로채갈 줄이야. 그동안 좋지 않은 일들을 겪으셨다 알고 있습니다. 제 부주의를 탓해주십쇼.”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란 이런 기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원래는 배신을 당했다거나 생각도 못한 기습을 당했을 때 많이 쓰는 말인데 지금 같은 경우는 굳이 따지자면 후자에 가깝다. 내가 마계로 오게 된 건 순전히 사파야님의 고의구나. 그렇구나. 아니, 지금 납득하면 어쩌자는 거냐고. 여하튼 난 지금 무지무지 허탈하다. 그저 내가 재수가 없어서 흔치 않은 디멘션 워프를 밟은 줄 알았더니만 그게 타인의 고의였다니 마냥 허무하다.
“혹시…… 저를 겨누신 건가요? 그냥 아무나 걸려도 상관없는 거였죠?”
설마 진자 일부러 날 지목했을까. 이미 마계에 있는 마당에 이건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 궁금하다.
“아닙니다. 아까 막연히 ‘인간’이라고 했지만 당신을 지목한 겁니다. 제가 갑자기 인간에 흥미가 생겨서 인간계를 살펴보고 있었는데 마침 당신이 혼자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본 인간이 바로 당신입니다.”
신이시여, 이거 참 기막힌 우연입니다. 그건 둘째 치고, 마계에서 잘 살고 있다가 갑자기 인간에게 흥미가 생기다니 이건 또 무슨 경우람. 하긴, 가끔씩 불현 듯 뭔가에 강하게 끌릴 때가 있다. 이유 없이 하나에 푹 빠졌다가 또 갑자기 그만두고 다른 것에 빠져들고. 이것을 살멸서 계속 반복한다. 그런데 다른 종족에게 흥미가 생겨서 직접 불러들일 생각을 한 데에 이어 실천까지 하는 추진력은 가히 기립박수 감이다.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인간은 마법 대신에 과학 기술이란 걸 쓴다고 들었습니다.”
“뭐, 그렇죠.”
정확하게는 과학 기술이 발달한 거지요. 지금까지 봐온 바에 의하면, 마족은 마법을 쓸 수 있으니까 인간에 비해 비교적 편하면서 격한 긴장감이 감도는 삶을 사는 것 같다. 인간이 마법을 쓰지 못한다고 해서 불편하면서 조용한 삶을 사는 건 또 아니다. 과학 기술이라는 득일지 해일지 모르는 것이 발달하면서 여튼 긴박감이 흐르는 삶을 산다. 그러고 보면 마법은 마족의 특징이고 과학 기술은 인간의 특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삶을 편하게 해 주지만 동시에 삶을 위협하는 제일 큰 천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진 그것들. 위험 요소가 크지만 없으면 아쉬워서 그 편의의 매력 때문에 포기하지 못하는 필수불가결한 것들. ……어쩌다가 내가 철학적인 생각을 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내 감상은 일단 이렇다.
“거대한 철 덩어리가 스스로 하늘을 날고 물 위에 뜰 수 있다는데 정말 그렇습니까?”
마법으로 옮기고 띄우는 마족에게 비행기나 배는 신기한 물건인가 보다. 상식적으로 철은 스스로 공중에 뜰 수 없고 물에 뜰 수도 없으니까 당연할지도 모른다.
“따, 따지고 보면 그것들이 하늘을 날고 물 위에 떠있는 건 상식을 거스른 일이고 자연 법칙을 깬 것이죠.”
“그래서 흥미롭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저도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마, 만들어요?”
전문적인 과학 지식을 요구할 줄이야. 신이시여, 이건 너무 생뚱맞지 않습니까. 좀 평범하게 인생을 꾸밀 생각은 없으시나이까.
“아, 만들고 싶은데 염두가 안 납니다. 인간의 물건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제가 그런 매력적인 걸 어떻게 만듭니까?”
“비행기랑 배는 워낙 복잡하고 어려우니까…….”
“그것이 그것들의 이름입니까?”
“에… 네. 하늘을 나는 쇳덩어리가 비행기, 물 위에 떠 있는 것이 배에요.”
“그렇군요.”
새로운 것을 배웠다는 기쁨에 표정이 환하다. 환희의 미소가 얼굴 한가득이다. 정말로 인간에게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눈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자신의 욕구를 충족할 때까지 날 놓아주지 않을 듯싶다.
“그것들 말고도 또 뭐가 있습니까? 마족은 만들어봤자 이런 간단한 공작물이나 집이 고작입니다.”
“그것들도 충분히 대단해요.”
수공업과 건축업을 ‘고작’이라고 절대 할 수 없다. 기계공업이나 조선업도 규모면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오지만 수공업이랑 건축업은 생활필수공업니까 만만찮게 중요하고 대단하다고 본다.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것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마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흥분이 마구 샘솟습니다.”
꼭 외국 문화를 멋있게 생각하고 심하면 숭배까지 하는 심리랑 닮았다. 자신이 마족이니까 마족에게는 없는 것을 갖고 있는 인간이 신비스럽게 보일 거다. 내가 처음에 마계에 와서 마족의 마법을 부러워했던 것처럼 사파야님도 그런 거다.
“글쎄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잔뜩 듣고 싶습니다. 뭐든 좋습니다.”
“음…….”
막연하게 얘기를 해달라고 하면 뭘 말해야 할지 난감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뭔지 모르겠다. 뭐가 이렇게 허전하지?
“인간들은 수명이 짧은데도 한 명이 평생 들어 해내는 일은 마족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빛나던 표정은 부러움이 서린 부드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 비슷한 말을 누구한테서 들은 적이 있다. 왜 그렇게 부지런하냐고, 왜 일부러 일을 늘리냐고 했다. 바알님의 스케쥴을 전부 외우고, 서루며 개인 필기류를 손에서 놓지 않고, 일에 살고 일에 죽는 자가 성 안에서 나밖에 없었다. ……신이시여……. 어떻게 바알님 일을 까맣게 잊어먹었을 수가 있지? 그렇다. 나보고 일벌레라고 불렀던 이도 바알님이다.
“왜 그러십니까?”
내 표정이 암울하다는 건 나도 느끼고 있다.
“아뇨. 별 거 아니에요. 그냥 뭐가 생각나서요.”
“피곤하면 말씀하십쇼. 원래 제가 부른 분. 제가 당신을 편하게 접대하는 건 당연한 이칩니다.”
그렇구나. 사파야님이 날 부르기 위해 만든 디멘션 워프를 밟고 마계에 왔으니까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걸지도 모른다. 세일마글레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사파야님과 인간에 대해 얘기하면서 험한 꼴 보지 않고 지냈을 지도 모른다. 잘 하면 금방 집에 돌아갔을 수도 있다. 이거 급 우울해지네.
“피곤하진 않아요. 배가 좀 고프긴 하지만요.”
“그렇습니까? 이런, 그러시겠군요. 잠시만 기다리십쇼.”
사파야님은 호리호리한 몸을 이끌고 방 밖으로 나갔다.
여기에 있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사파야님이 날 해칠 리 만무하고, 내가 여기서 할 일은 그의 말상대가 돼 주는 게 고작이니까 마음도 가벼워졌다. 일이 꼬이지 않았더라면 솔직히 여기가 내가 있었어야 할 곳이자 날 필요로 하는 이가 있는 곳이다. 어쨌든 바알님의 성에 돌아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다. 어쨌든 난 여기서 사파야님과 같이 있어도 손해볼 게 없다. 어쨌든 난 여기에 남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은하수의 소설(Original) > 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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