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소설(Original)/한달간의마왕보좌록(완)

한 달 간의 마왕보좌록 : D-20 사파야, 진실을 폭로하다?

★은하수★ 2009. 5. 4. 18:18

D-20 사파야, 진실을 폭로하다?

 

전날 바알님과 레플리카님이 한바탕 뒤엎은 곳은 튜리-엘더 길드의 아지트가 아니라 사파야님의 개인 저택이었다. 준 아지트처럼 길드원들이 왕래해서 그곳이 아지트인줄 착각한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여기가 진짜 그들의 아지트다. 그곳이 가볍고 편안한 분위기로 내부가 꾸며져 있다면-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여기는 요소 하나하나가 다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풍긴다.

레플리카님과 접전을 벌이던 사파야님은 마침 저택에 있던 길드원들을 데리고 아지트로 후퇴했다. 이미 죽은 자도 그 시체를 거뒀기 때문에 진짜 한 명도 빠트리지 않았다. 무능력한 나까지 챙겼으니 더 말할 거 뭐 있나 싶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바알님이 보는 앞에서, 짐짝밖에 되지 않는 인간까지 챙길 만큼 사파야님이 유능하다는 뜻이다. 한 길드를 책임지고 그들을 이끄는 우두머리로서 손색이 없다. 그가 벌이는 일이 비록 비인도적이지만-그의 목적을 정확히 모르면서 속단하기에 마음 한편이 찝찝하다만- 사파야님 개인을 보면 꽤나 괜찮은 마족이다.

아지트로 돌아온 후 사파야님이나 다른 길드원이나 담담하다. 격한 싸움 직후엔 그 때의 감정이 연장될 텐데 흥분 때문에 분해한다든지 다른 것에 화풀이 한다든지 그런 자가 없다. 그 정도야 이미 예상한 일이고 별 거 아닌 일로 여겼다. 다만, 동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엄숙한 분위기로 애도의 마음을 갖고 장례를 치렀다. 머리가 산산조각 나서 불완전한 육신으로 남은 헬하운드도 같이 붉은 불꽃 속에서 사그라들었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네, 제 일은 당연히 제가 해야죠.”

아지트에는 저택에서처럼 시녀가 있는 게 아니라서 자기 일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때문에 사파야님이 내게 심부름꾼을 붙여 주려 했지만 거절했다. 내 주제에 밑에 누군가를 둔다니 가당치 않다.

“손님께 이른 큰 폐를 끼치다니 송구스럽습니다. 어제는 너무 경황이 없었고……, 생각해 봤는데 찬필 군을 다시 인간계로 보내드려야 옳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철저히 준비하겠지만 혹시나 예측 못한 것으로 찬필 군에게 위해가 닥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날 떠맡은 자와 날 필요로 하는 자의 차이인가.

“아뇨. 전 여기 있을 거에요. 제가 어떤 일에 휘말린 건지 알아야겠어요.”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죽을 지도 모릅니다.”

“잘 알아요. 하지만 어제 내내 생각해봤어요. 내가 정말 무지한 채 있어도 되는 걸까, 이미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시점에서 정말 내가 무관계하다고 말할 수 있나, 하고요.”

바알님 덕분에 마계의 문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서류 중 내가 봐선 안 될 것도 몰래 들춰보기도 하고, 곳곳에 있는 책도 읽었다. 덕분에 과거와 이어진 현재 마계의 사정을 나름 파악할 수 있었다. 인간 세상사가 실타래보다 복잡하다는데 마계도 만만치 않다. 난 그런 곳에 와서 많이 배우고-타인의 의지이긴 했지만- 이미 많은 일에 관여됐다. 더 이상 남 일로 미룰 수 없다.

“강한 분이십니다.”

애틋하리만치 슬픈 눈. 내가 아는 마족 중에서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사파야님뿐이다. 아니, 한 명 더 있구나. 아무튼, 다들 철저하게 자기감정을 숨기려 드는데 사파야님은 이 눈만큼은 숨기지 못한다.

“강하다뇨. 전 세계에서 제일 약한 인간을 순위 매겼을 때 최상위권에 들 걸요?”

“아닙니다. 당신은 강합니다. 많은 이들을 책임져야할 높은 분도 자신이 불리해진다 싶으면 모르는 척 돌아서는데 당신은 다릅니다.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 강한 건 없습니다.”

사파야님이 말하는 높은 분이란 마왕을 칭하는 것일까? 헬하운드도 그랬다. 마왕은 버리는 존재라고, 바알님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레플리카님이 다른 네 명의 마왕들에게 밀리면서 버려진 아바트 길드는 그 긴 시간동안 어떻게 지냈을까? 그래, 내가 알고 싶은 건 이것에서부터 시작할 지도 모른다.

“사파야님, 제게 가르쳐주시겠어요?”

“무얼 말입니까?”

“튜리-엘더 길드, 아니 아바트 길드에 대해서요. 아바트 길드가 만들어지고, 마왕들에게 축출되고, 튜리-엘더 길드가 되기까지 모든 이야기를 알고 싶어요. 헬하운드가 그랬어요. 누가 당신들을 튜리-엘더 길드 안에 모.았.다고요. 당신들이 모.인.게 아니란 말이잖아요.”

“예리… 하십니다.”

적잖이 놀란 눈치다. 망설이는 듯싶더니 이내 각오에 찬 표정으로 날 응시한다.

“더더욱 깊게 저희와 얽히게 되고, 후회하실 지도 모릅니다.”

[두근]

나약한 심장이 날 말리고 싶은가 보다. 하지만 내 머리는 심장을 무시하란다. 심장만 따라가면 심약·빈약·취약·최약·부실·허실·비실 7대 딱지를 영원히 떼지 못하고 늘 제자리를 맴돌 거란다.

“제가 후회할 것 같나요?”

선우 찬필 주제에 결의나 각오에 찬 눈은 어울리지 않는다. 부드럽게 눈으로 웃는 것도 할 줄 모른다. 그저 사파야님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 볼 뿐이다.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겠다는 내 결심은 내가 밖으로 드러내는 법을 몰라 당당하게 보일 수 없지만 스스로 확신할 수는 있다. 그래, 인간이란 성장하는 생물이다. 언제까지 7딱지를 붙이고 도망만 다닐 것인가.

“찬필 군. 당신의 그 강인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슬픈 눈은 조심스럽게 감기고 고개부터 허리까지 천천히 나를 향해 굽어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들어 올린 머리에서 쓸쓸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괴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순응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식으로 가슴 아픈 미소를 짓고 있다.

[두근]

이 표정. 바알님이 혼자 창가에 서서 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길 때 짓는 그것과 똑같다.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은 슬프다.’ 바알님을 몰래 지켜보는 중에 파슈만이 귀띔해준 말이다.

“튜리-엘더 길드의 원형이 아바트 길드란 사실을 알고 계시다면 각 길드원이 가진 힘이 보통 마족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군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왕 다음으로 강한 마족의 집합체라서 똘똘 뭉치면 마왕을 몰아내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만한 길드다. 개개의 실력이 길드의 실력이고 길드의 실력이 개개의 실력이라는데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마왕이 심히 견제할 정도면 그것만으로도 설명 완료나 마찬가지다.

“처음엔 레플리카님이 그 분 스스로의 성장을 위해 마계 각지에 흩어져있는 저희를 모았습니다. 이미 유명한 자는 물론이거니와 레플리카님이 발굴해낸 자도 여럿입니다. 어떻게 그런 자를 찾아냈을까 싶을 정도로 겉모습도 어수룩하고 깊은 곳에 숨어있기까지 한 자도 몇 명 있습니다. 진짜 실력자였습니다. 세상에서 적으로 간주해 외롭게 살고 있는 저희에게 새 삶을 주신 겁니다.”

마왕 레플리카가 아바트 길드에게 깊은 정을 갖고 아꼈던 만큼 그들도 레플리카님에게 감사와 존경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그렇다. 적어도 사파야님은 확실히 레플리카님을 존경하고 있다. 은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던 중 마왕 벨제뷔트가 저희에게 접근했습니다. 이건 저희가 마왕들에게 숙청되기 전 일입니다.”

의외의 인물이 의외의 시점에서 출현하자 내 귀가 쫑긋해진다. 진짜 마왕이라고 칭송 받는, 마왕 중의 마왕 벨제뷔트. 바알님과 레플리카님 그리고 루시퍼님 모두가-남은 한 명인 피브리조님은 만난 바가 없으므로 생략-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존재다. 그런 그가 레플리카님의 개인 결사대이기도 한 아바트 길드에게 접근했다는 건 위협적인 얘기로 진행될 소지가 크다.

“레플리카님 모르게 자신을 도우라 했습니다. 자신이 시키는 일을 잘 수행하면 레플리카님의 죄를 면해주겠다 협박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마계 내 강자들이 한 마왕 아래에 뭉친 것만으로도 다른 마왕들에게 위협적이고, 마계 전체적으로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니 아바트 길드 존재 자체가 죄였습니다. 그걸 모조리 레플리카님이 짊어지고 계셨는데 저희가 덜어드릴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습니다.”

월등히 강한 힘 때문에 외롭게 살아야 했던 자들이 겨우 공동체 내에서 외로움을 벗고 살게 됐는데…… 그 자체가 죄라서 해체해야만 하는 위기에 닥쳤다. 그들의 입장에선 얼마나 슬픈 일인가. 어떻게 얻은 것인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포기해야 한다니 얼마나 증오스러운 일인가. 절대 포기 못할 것이다. 그러니 아바트 길드를 유지하면서 은인의 죄를 사할 수 있다면 정말 뭐.든. 할 거다. 누가 시키는 일이든 무엇이든 다.

“마왕 벨제뷔트가 시킨 일들은 전부 위험수위가 높은 것들이었습니다. 그를 위협하는 자를 암살하고, 그에게 반항하는 도시를 소멸시키고. 심지어는 다른 마왕이 통치하는 곳에도 손을 대야 했습니다. 레플리카님은 그저 저희를 위협용으로 데리고 다녔을 뿐 그런 일을 시킨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모두 마왕 벨제뷔트의 명령이었고 겉으로 보면 저희가 레플리카님의 위세를 등지고 멋대로 설친 것 같았습니다. 당연히 모든 화살이 레플리카님께 집중됐습니다.”

레플리카님이 마왕들에게 핍박받고 아바트 길드가 최고의 위협을 받았던 것 모두 마왕 벨제뷔트 때문이라는 얘기잖아! 그러면서… 약속은 안 지키고 모두 제거하려고 했단 말이야? 쓸모없으면 버린다. 헬하운드의 외침이 이 뜻이었구나.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철저하게 버려진 한이 깊고 깊었구나.

“벨제뷔트님께 항의도 못했나요? 분명히 레플리카님의 그 말 같지 않은 죄를 사해준다고 약속했잖아요.”

“그랬다면 아무도 모르게 저희 모두와 레플리카님까지 벨제뷔트님 손에 친히 제거됐을 겁니다.”

약자의 굴복인 것인가. 강자의 권력 남용인 것인가.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레플리카님이 자신의 권세 확장을 위해 모으긴 했지만 점점 동료애, 가족애로 그 목적이 바뀌었다- 모인 자들이 강자의 한 마디에 휘둘려 한 방에 파멸로 몰린 한 편의 슬픈 동화다. 그 파멸 속에서 얼마큼의 생명이 덧없이 사라졌는가. 그걸 보면서 살아남은 자들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얼마나 괴로웠겠는가. 진실을 아는 자들은 묵언의 압력 속에서 숨죽이고 진실을 모르는 이들은 그들만 몰아붙이니 이 얼마나 잔혹한가. 살기 위해 입을 다물어야만 하는 이 현실이 이 얼마나 치사한가.

“레플리카님도 벨제뷔트님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군요.”

“차마 알려드릴 수 없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질 테니 너희는 너희대로 살라 하신 분입니다. 만약 마왕 벨제뷔트가 모든 사건의 흑막이라는 걸 알게 되시면 분명 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무리한 싸움을 하셨을 겁니다.”

“결국엔 레플리카님의 이름이 마왕의 명단에서 사라졌겠군요.”

“그런 잔인한 결과가 일어나지 않았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마왕 벨제뷔트가 관여하면 모든 일은 벨제뷔트의 승리로 끝난다. 마계의 절대 공식이다. 불쌍하고 운 없게 그 공식의 미지수에 대입되면 마왕 벨제뷔트의 명성만 드높이고 자신은 오점을 남긴 채 사라져야 한다. 다섯 마왕 체제? 아니, 이건 독재다. 명백한 독재다.

“레플리카님을 정말 존경하시나 봐요.”

“물론입니다. 한 차례 피바람이 불고 레플리카님이 마지막 정리를 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된 덕분에 살아남은 저희들은 그분의 은총을 받고 다시 평화롭게 살 수 있었습니다.”

마왕 벨제뷔트를 중심으로 마왕들이 손을 쓰기 시작하자 레플리카님이 자존심 다 버리고 굴욕적인 맹세를 했던 일을 말하는 거다. 겉으로는 마왕 레플리카가 아바트 길드의 잔당을 처리했다고 되어 있다. 처리는 처리다. 다만, 마왕들이 원하는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그들에게 줬다. 레플리카님과 아바트 길드의 연대감이 더욱 제고했을 것이다. 인간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마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자비’와 ‘애정’이 그 속에 존재하는 거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그러면 사파야님들이 튜리-엘더 길드를 만들 이유가 없잖아… 요……. 아……!”

다시 한 번 순간 스쳐지나가는 헬하운드의 말. ‘누가 다시 우리를 튜리-엘더 안에 넣었는지!’ 내 예상이 맞는다면 이건 다시 한 번 잔혹한 환상동화로 전개될 지도 모른다.

“짐작 가는 게 있으십니까?”

사파야님의 눈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는 눈이다. 계속되는 불향의 이야기에서 환멸을 느끼고 지칠 대로 지친 눈이기도 하다. 더 긴 이야기는 필요 없을 것 같다. 얘기하면 더 슬퍼질 뿐이고 이미 닥친 현실을 순응하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신이시여, 당신은 대체 누구에게 자비를 베푸는 겁니까. 그대도 강자만을 굽어보고 약자는 그저 강자를 위해 준비한 장난감입니까? 당신의 눈에 미천해 보이는 자들도 서로에게 크고 작은 자비와 유한, 무한한 애정을 쏟는데 어찌하여 당신은 바라보기만 하는 겁니까? 신이시여, 이 불공평한 세상에서 당신이 바라는 건 진정 무엇입니까? 제 눈앞에 있는 자와 그의 동료들은 잔혹한 동화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마왕에게 손대지 않는다 해도, 마족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 해도 이건 아닙니다. 이런 생지옥은 환상동화의 소재가 될 수 없습니다. 신이시여, 신도 차별할 줄 몰랐습니다.

“찬필 군. 마계는 말입니다. 마왕 벨제뷔트라는 소년이 가지고 노는 체스 판입니다. 마족 전부 그의 말입니다. 그의 비서들마저 그의 유희를 위한 ‘폰’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인간인 당신은 굳이 체스 판 위에 서서 말이 사라지는 모습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뇨. 제가 체스의 트릭이 되겠어요.”

“네?”

“선우 찬필이라는 인간이 마왕 벨제뷔트라는 플레이어가 정성스럽게 배열한 말을 바꿀 거에요. 인간이니까, 마계에서 여러 연에 얽힌 인간이니까 마왕 벨제뷔트가 저라는 불순물을 파악하기 전에 그의 체스 판을 바꿀 거에요. 체스의 혁명전법… 이라고 하죠.”

사파야님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마왕 벨제뷔트에 대한 대항. 마족이라면 감히 생각할 수 없다. 내가 인간이기에 가능한 거다. 어쩌면……. 내가 마계에 온 건 신의 장난에 의한 필연일지도 모른다. 마왕 벨제뷔트의 유희를 방해하고픈 신의 농간에 내가 사용된 거다. 그렇다면 거절하지 않고 응하겠다. 이런 억지스런 독재를 내가 혁명으로 부숴버리겠다.